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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은 결국 > (195/200)

< 마지막은 결국 >

‘하긴... 전승 우승이라는 게 쉽게 생각할 건 아니긴 하지.’

젊은 팀, 경험이 적은 팀, 승리가 익숙하지 않은 팀의 대표적인 단점.

정말 중요한 순간, 정말 중요한 경기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는 것.

지난 시즌 콜로라도 로키스 역시 와일드카드 결정전,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를 8연승으로 마무리해놓고 정작 월드시리즈에선 패배 직전까지 몰려야 했다.

로키스도 젊은 팀이었고, 지구 우승 경험조차 없었으며, 프랜차이즈 역사상 고작 두 번째 월드시리즈 결승, 최초의 우승을 노리는 팀이었다.

영도가 없었다면 월드시리즈에서 주체할 수 없이 우르르 무너졌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나마 난 좀 괜찮은데... 다른 선수들 상태가 메롱이네요. 형은 어때요?”

“나야 멀쩡하지. 그래도 두 시즌 연속인데.”

신시내티 레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콜로라도 로키스보다는 훨씬 찬란한 역사를 가진 팀이고 전체적인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최근 20여 년 동안 월드시리즈는커녕 챔피언십 시리즈와도 내외하던 팀이었다.

워낙 강력한 전력을 갖췄고, 영도와 리코를 필두로 압도적인 기세와 함께 달리다 보니 월드시리즈까지 3연승.

전승 우승까지 단 1승만을 남겨두었지만, 막상 월드시리즈 우승 직전, 전승 우승 직전까지 도달하자 선수단 분위기가 묘해졌다.

원래 성격 자체가 무던한 데다가 2년 전 한국시리즈,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를 제패하며 2년 연속 챔피언을 경험한.

심지어 지난 시즌에는 모두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던 팀을 이끌고 두 번째, 하지만 원조보다 훨씬 인상적인 ‘록토버’와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언더독 신화를 세우는 동안 이 정도 압박감은 수도 없이 넘어온 영도.

그리고 매 시즌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수원 매지션즈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큰 경기 경험을 쌓은 유형근 정도만 냉정을 유지할 뿐, 나머지는 크든 작든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저 인간은... 아주 가관이네. 월드시리즈 우승 하나만 보고 욕심만 그득그득해서 팀, 동료 다 무시하더니 정작 월드시리즈에서 3승하니까 도움 1도 안 되겠어. 그쵸?”

“뭐, 기대도 안 했으니까. 그래서 킨을 데려온 거고.”

“하긴... 저 인간이 백업 포수 역할이라도 해줄 거라 확신했으면 아델은 월드시리즈 로스터에 없었겠지. 그냥 공을 받아줄 수 있다는 것 빼곤 포수로도, 1루수로도 경쟁력이 없는 선수니까... 와... 그렇게 월드시리즈 우승 하나에 목숨 걸었는데 정작 아무도 기대를 안 하네. 불쌍한데요?”

“본인 업보지.”

특히 이 순간 가장 덜덜 떨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발데마르 피자로였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모든 걸 포기, 얍삽하고 약삭빠르게, 치졸하게 버텨왔던 피자로.

신시내티 레즈는 이번 시즌 최고의 팀이었고, 월드시리즈까지도 3승 무패로 월드시리즈 우승 직전

그토록 기다려온 순간이, 이제 슬슬 포기를 떠올리던 37세의 나이에 사실상 마지막 기회가 다가오자, 발데마르 피자로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3승 이후 흔들리는 건 선수들의 머릿속에 슬슬 우승 이후 따라올 전리품들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건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저 흔들림 속에서 중심을 잡느냐, 못 잡느냐의 차이일 뿐.

경험이 적은 루키들이나 멘탈 관리에 서툰 선수들은 크게 흔들렸고, 베테랑이나 멘탈 관리를 잘하는 선수들은 작게 흔들렸다.

이 순간을 최소 10년 넘게 고대해온 37세의 퇴물, 피자로는 아직 마지막 1승이 남았음에도 20여 년의 커리어를 돌아보고 지난 설움들을 곱씹는 등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다.

“... 말론은 절대 다치면 안 되겠네. 말론이 다치면 그냥 앉아만 있을 수 있는 아델이 주전 포수잖아...”

“그런 일이 없길 바랄 수밖에. 그런 일이 생길 수조차 없게 오늘 끝내버리는 게 최고고.”

피자로가 이렇게 되리라는 건 레즈의 코칭스태프들도 일찌감치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100% 확신했다기보단 그럴 수도 있다는 우려 정도였다.

만약 확신이었다면 애초에 백업의 백업 포수를 로스터에 등록하는 게 아니라 아예 로스터에서 빼버렸을 테니까.

어쨌든 지극히 이기적인 피자로의 성격상 팀과 동료에 대한 책임감보다 본인의 감정을 우선시해 무너질 확률이 높으니 컨택, 스피드 바닥, 파워, 수비, 어깨 모두 평균 이하인 유틸리티 플레이어 아델 킨이 로스터에 포함되었다.

메이저리그급은커녕 AAA에서도 중하위권에 불과한 선수지만, 적어도 1루와 코너 외야, 포수까지 소화하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였으니 구멍은 메울 수 있을 거란 판단이었다.

“월드시리즈 우승권 팀에서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더니, 지랄도 풍년이다.”

영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자로를 한심하게 쳐다보곤 이럴 가치마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백업 포수로서 최선을 다해 적어도 마지막 팀과 팬들을 위해선 최선을 다하겠다더니... 그렇게 조금의 속죄라도 하겠다더니...

이기적인 인간들의 말은 역시 믿을 수 없었다.

믿은 적도 없었지만.

***

[4회 초, 뉴욕 양키스의 상징이자 정신적 지주라 볼 수 있는 제리 페이지가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2-0, 양키스가 2점 차 리드를 잡았습니다. 1회에 터진 마이클 키니의 솔로 홈런까지 타선을 이끄는 두 선수가 나란히 홈런을 터뜨립니다.]

[오늘은 다르다는 거겠죠. 월드시리즈 진출만으로도 분명 훌륭한 성과지만, 마지막을 스윕 패배로 장식하는 건 굴욕이거든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역스윕도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마운드의 에디 카날레스와 타선의 마이클 키니, 제리 페이지. 양키스에서 해줘야 하는 선수들이 전부 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윕은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네요. 신시내티 레즈가 여기까지 단 한 번의 고비도 없이, 거침없이 달려왔던 건 해줘야 하는 선수들인 Y-DO와 리코, YG 등이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 팀을 쭈욱 이끌어왔기 때문이거든요? 카날레스, 키니, 페이지 세 선수가 달려주면 양키스도 할 수 있어요!]

경기가 시작되었고, 영도와 전문가들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1차전에서 1회부터 영도와 리코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졌던 에디 카날레스는 3회까지 퍼펙트 행진.

괜찮은 활약을 보여줬지만, 입지와 위상, 역할에 비해 아쉬운 건 사실이었던 키니와 페이지는 2번의 타석에서 각각 홈런 한 개씩.

반대로 제이미 리는 돈 라이스를 잡았던 것처럼 4이닝을 4피안타로 막아내며 기대만큼의 피칭은 보여줬지만, 하필 홈런을 2개 허용하며 4이닝 2실점.

레즈의 타선은 한 바퀴를 퍼펙트로 막혔고, 성적은 그렇다 치더라도 몸놀림 자체가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알파로는 그렇다 치고 파체코도 사실 나나 리코에 비하면 아쉬운 게 사실이고.’

카날레스의 3이닝 퍼펙트 정도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아메리칸리그의 슈퍼 에이스 정도면 이 정도는 특별하지 않았다.

아무리 신시내티 레즈의 타선이 메이저리그 역사상 TOP 10에 들어가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갖췄다고 하지만, 카날레스라면 한 경기 정도는 틀어막는 게 충분히 가능했다.

문제는 결과가 아닌 과정.

카날레스가 평소보다 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맞지만, 레즈 타선도 평소와는 달리 많이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이번 월드시리즈는 좀 쉬웠는데... 결국, 4차전은 내가 해내야 하는 건가.’

그래도 지난 시즌에 비하면 훨씬 간단했다.

시리즈 전체를 홀로 캐리해야 했던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와 달리 이번 월드시리즈는 딱 4차전, 한 경기만 이겨주면 되는 상황이니까.

게다가 아직 4경기나 남았으니 7차전까지 이어졌던 지난 시즌과는 영도가 느끼는 부담감의 크기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였을까.

‘좋은 공, 강력한 공이지만... 잘 던지겠다는 마음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데.’

뉴욕 양키스 선수들은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 7차전의 영도보다도 훨씬 강한 부담감과 중압감 속에 오늘 경기를 치러야 했다.

신시내티 레즈 선수들은 52년 만의 우승을 노리는 팀의, 도시의 기대감과 팀의 모든 걸 걸고 맞이한 시즌이라는 것, 부족한 경험까지 더해져 양키스 선수들 못지않은 부담감, 중압감을 맞이했다.

즉, 오늘의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에서 비교적 여유로운 태도로 힘을 빼고 있는 건 영도가 유일했다.

[에디 카날레스, 3.2이닝 동안 퍼펙트 행진을 이어가고... 아! 마치 벼락처럼 내리친 Y-DO의 스윙! 볼 것도 없습니다. 작은 구장,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가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이런 타구는 홈런입니다. GET YA! 예상대로 펜스를 넘어가는 타구! 2-1, 드디어 추격하는 점수를 뽑아내는 Y-DO의 솔로 홈런!]

[역시 Y-DO가 해주네요. 일단 카날레스의 퍼펙트 행진을 끝내는 게 중요했는데, 퍼펙트 행진을 그냥 깬 게 아니라 추격점까지 뽑아냈어요.]

[Y-DO 말고는 해줄 수 있는 선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런 말을 중계진이 했을 때 Y-DO가 그 기대를 배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또 분위기가 달라지죠. 이번 시즌의 신시내티 레즈는 항상 Y-DO가 치고 나가면 리코가 따라가고, 리코까지 따라가면 다들 함께 뒤를 쫓는 팀이었거든요? 꼭 두 번째로 따라가는 선수가 리코가 아니어도 돼요. 사실, Y-DO는 리코 같은 선수가 없어도 혼자서도 팀을 이끌 수 있는 선수잖아요? 그 정도로 대단한 선수예요.]

11타자 연속 범타로 무기력하게 끌려가던 신시내티 레즈.

그리고 터진 영도의 벼락같은 홈런.

카날레스, 키니, 페이지가 이끌던 뉴욕 양키스에 지금까지 눌리고 있었지만, 카날레스를 무너뜨리고 키니, 페이지가 해낸 일을 그대로 해낸 영도.

그리고 영도는 단 두 시즌으로 키니, 페이지보다 훨씬 강력한 무게감과 위상을 쌓아올린 선수였다.

드디어 신시내티 레즈에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4회 말이면... 절대 늦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자,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4이닝 내내 뉴욕 양키스가 분위기를 잡고 경기를 끌고 가는 느낌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점수 차이는 2점 차에 불과하지 않았습니까?]

[양키스가 꽤나 유리한 느낌이었지만, 딱 그 느낌 하나였어요. 분위기가 좋은 정도였지, 어쨌든 점수를 많이 낸 팀이 승리하는 게 야구거든요? 그 점수는 2점 차였고, 이제 1점 차로 좁혀진 거예요.]

[그리고 Y-DO의 홈런은 언제나 신시내티 레즈의 분위기를 확 끌어올리곤 했습니다. 그게 이번 시즌 레즈의 무서움이었고, 정규시즌 승률 2위, 포스트시즌 10연승을 이끈 힘이었거든요? 지금 그런 Y-DO의 홈런이 나온 겁니다. 양키스가 4이닝 동안 기세를 잡아왔던 것?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죠!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에요. 양키스는 1점을 앞섰고, 레즈는 아마 이제 분위기를 잡아갈 거거든요? 이 정도면 원점에서 다시 시작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 마지막은 결국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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