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선의 힘 >
단기전은 투수놀음.
투수는 비교적 컨디션의 UP&DOWN이 심하지 않으니 단기전에선 팀의 계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발투수들이 잘해줘야 유리하다는 이야기였다.
타선은 필연적으로 사이클이라는 게 존재하고, 그 사이클이 언제 올라와도, 언제 내려가도 이상할 게 없기에 일반적으로는 투수진이 강한 팀이 단기전에서 유리하다고 평가받았다.
경기당 WAR의 차이도 하나의 이유였다.
30경기 전후로 등판하는 선발투수는 WAR 10위권 기록이 5.0 정도에서 형성되는데, 최소 150경기 정도 출전하는 야수는 6.0에서 6.5 정도였다.
정규시즌 전체로 따지면 야수의 영향력이 크지만, 단기전에서는 투수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타선의 힘으로 우승을 차지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1975, 76시즌 2연패를 차지한 신시내티 레즈가 있었다.
1976시즌의 신시내티 레즈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2위의 WAR을 기록한 최강 타선, ‘빅 레드 머신’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투수진 WAR은 24개 팀 중 13위에 불과했다.
75시즌은 이보다도 심각해서 야수진 WAR은 당연히 1위였으나 투수진이 24개 팀 중 20위.
하지만 75시즌에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7위에 올라 있는 43.2의 야수진 WAR이 2위보다 11.2나 높았고, 76시즌에는 7.7의 격차를 보였다.
이렇듯 압도적인 공격력을 자랑했기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마운드에도 불구하고 월드시리즈 2연패라는 위업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역대 투수진 WAR TOP 10중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은 2018시즌의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유일한데, 야수진 WAR TOP 10중에는 5팀의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나왔다.
양키스와 레즈가 2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 시즌인 1948시즌까지 5회.
[모든 단기전 토너먼트의 1차전은 중요합니다! 왜냐, 시리즈를 치르는 양 팀의 기세 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지면서 시리즈의 승기를 누가 붙잡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종목을 막론하고 다전제 포스트시즌에서 1차전을 잡은 팀의 최종 승리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거죠.]
[그리고 어제, 신시내티 레즈는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에이스이자 양키스 마운드의 핵심, 에디 카날레스에게 4이닝 6실점의 굴욕을 안기며 완벽하게 분위기를 가져갔습니다. 양키스의 마운드와 레즈 타선의 대결이라고 점쳐지던 시리즈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에이스가 무너졌으니 양키스가 입은 타격은 생각보다 클 수밖에 없습니다.]
뉴욕 양키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신시내티 레즈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그렇게까지 우승을 자주 하는 팀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역사상 최강의 선발진을 보유했던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는 물론, 양키스와 컵스, 다저스와 역사상 최강의 선발진 ‘판타스틱 4’를 보유했던 2011시즌의 필리스도 실패한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것일까.
메이저리그의 오랜 역사에서 TOP 10만 떼서 보는 건 사실 불합리한 측면도 있었고, 조금 더 범위를 넓게 잡으면 강한 투수진을 보유한 팀들이 더 많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상위권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가설 정도는 세워볼 수 있지 않을까.
[마운드와 타선의 대결이라지만, 마운드는 4명의 선발이 번갈아 등판하는 것에 비해 타선은 매일 나오거든요? 사이클이라는 것 때문에 불안해서 그렇지, 사이클을 무시할 정도로 압도적인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뉴욕 양키스의 선발진이 이번 시즌 리그 4위를 기록한 강력한 선발진이라고는 하지만,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TOP 10에 들어간 레즈 타선과 비교하긴 힘든 게 사실입니다. 에디 카날레스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WAR 1위를 찍었지만, 오늘 등판한 그레고리 풀츠는 10위, 내일 등판할 버논 산타나가 18위, 4선발 산드로 케이번은 아예 한참 아래에 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마운드, 최강의 선발진을 보유했다 하더라도 포스트시즌에 등판하는 선발투수 4명, 무리해서 3인 로테이션을 가동해도 3명이 전부 에이스급일 순 없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판타스틱 4’도 로이 오스왈트의 부상으로 4선발이 애매했으며,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3인방도 스티브 에이버리, 케빈 밀우드, 데니 니글 등의 훌륭한 4선발을 데리고 있었지만, 에이스급이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포스트시즌쯤 되면 상대도 총력전을 펼치기에 에이스 한 명에 대항해 3, 4명 정도 되는 투수들을 쏟아부을 수 있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 정도 되면 상대 역시 에이스급 투수가 없을 리 없었다.
1, 2선발이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강력한 투수들을 보유했다 해도 2경기는 운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 나오는 것.
반면, 타선은 모든 경기에 가동할 수 있었다.
비슷한 성적을 찍으면 ‘5일 중 하루’ 플레이어인 선발투수보다 ‘에브리데이’ 플레이어인 야수의 가치가 높은 것도 이 때문.
사이클의 공포를 견뎌내야 하지만,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 포스트시즌 내내, 최소 월드시리즈 우승에 필요한 경기 수 만큼이라도 좋은 타격감을 유지할 수 있다면 최대 기대치는 타선이 높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레즈의 창에 대항하는 양키스의 방패라고 하지만, 양키스의 방패는 위에 언급한 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빈약했다.
처음부터 체급이 달랐다.
[당연히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선 투수진 WAR 1위, 타선 15위, 이런 극단적인 전력보다 둘 다 나란히 5위 안에 들어가는 균형 잡힌 전력이 훨씬 중요하죠. 사실, 레즈도 우리가 항상 공격력의 팀이라고 하지만, 선발진 WAR은 6위거든요?]
[불펜이 13위로 살짝 약하긴 합니다만, 영향력에서 선발, 타선에 비해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타선이 그냥 이번 시즌 1위, 이런 게 아니라 메이저리그의 전체 역사에서도 TOP 10에 들어갈 만큼 강력하다는 게 문제죠. 지금도 보세요. 어제 Y-DO와 리코가 날뛰니까 “나도 있다!!!”면서 파체코가 홈런을 때려버리잖아요.]
[타선이 이 정도 해줄 수 있으면 단기전은 투수놀음이고 뭐고 그런 말도 쏙 들어갈 것 같습니다.]
‘같이 ‘레드 머신즈’라는 이름으로 묶이지만, 민망할 만큼 내가 떨어진다는 것, 나도 안다. 그래도... 내가 이들과 함께 트리오를 구성했다는 증거 하나쯤은 남겨야지.’
레즈의 창에 대항하는 양키스의 방패는 에디 카날레스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될 수 있었다.
카날레스가 2승 정도를 거둬주고 나머지 2승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그림이 나와야만 월드시리즈 우승을 꿈꿔볼 수 있었던 것.
그런 상황이기에 1차전에서 카날레스가 무너진 순간 월드시리즈의 무게 추가 크게 기울었다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었다.
카날레스를 빼면 당장 2선발 그레고리 풀츠부터 레즈 타선과의 체급 차이가 확연했고, 이는 영도도, 리코도 아닌 파체코가 홈런을 때려내며 현실로 드러났다.
[오늘도 경기 초반부터 승패가 갈리는 겁니까!? Y-DO, 이번에는 비록 홈런은 아니지만, 2루타를 때려내면서 연속 장타를 이어갑니다.]
[어제도 1회에 Y-DO와 리코의 백투백 홈런이 나오면서 경기가 이상해졌거든요? 오늘은 한 칸 당겨서 파체코부터 시작했어요. 37홈런을 때려낸 좌타자 파체코의 홈런, Y-DO의 2루타, 다시 좌타 빅뱃 리코... 양키스, 홈에서 한 경기 내줬으면 한 경기는 잡아야죠!]
신시내티 레즈의 ‘레드 머신즈’에게 사이클이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심한 견제에 시달리는 영도가 사이클 없이 내달리니 역대급 우산효과의 수혜자인 나머지 둘도 사이클은 겪었지만, 심각한 슬럼프는 피하면서 시즌을 치렀다.
이는 포스트시즌까지 이어졌다.
‘레드 머신즈’ 중에서도 영도와 리코의 활약은 팀 타선 전체의 사이클을 결정했다.
둘이 잘하면 레즈 타선 전체가 달아오르고, 못하면... 못한 시기가 없어서 확인할 수 없었다.
1927시즌의 베이브 루스-루 게릭 듀오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위대한 시즌을 보낸 2042시즌 유영도-센시오 리코 듀오는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대체 이 듀오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대체 이번 시즌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번갈아 상대 마운드를 박살내는 겁니까!? 센시오 리코의 이번 포스트시즌 5호 홈런! 9경기 동안 Y-DO가 홈런 7개, 리코가 홈런 5개! 둘이서만 12개의 홈런을 때려냈는데 대체 무슨 수로 지겠습니까?]
[레즈는 지금 패배하고 싶어도 패배할 수가 없어요. 이 완벽한 시즌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즐기고 싶어서 한두 경기 정도 패배를 바라는 팬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 바람을 들어주려고 해도 Y-DO와 리코 둘이서 억지로 이겨줍니다.]
‘나 참... Y-DO야 처음부터 차원이 다른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센시오가 저렇게 클 줄이야...’
지난 시즌 리코와 파체코는 비슷한 타율, 출루율을 기록했고, 38개와 29개라는 홈런 개수의 차이, 이로 인한 장타율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난 시즌에도 리코는 한창 성장하던 2년 차의 선수였고, 파체코는 성장이 끝난 29세의 선수였다.
그게 제대로 드러나면서 아직 채 터지지 못했던 리코의 잠재력이 폭발, 이번 시즌의 리코는 파체코보다 두 배는 생산적인 선수가 되었다.
1루수와 지명타자, 수비 WAR의 차이도 있다지만, 공격 생산력만 따져도 엄청난 차이.
파체코는 영도보다 리코에게 더 놀라고 있었다.
영도는 처음부터 사는 세계가 다른 선수라고 인정했지만, 리코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본인보다 뛰어난 재능이고 슈퍼스타가 될 재능이라고 생각했지만, 시대를 지배할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저 둘 덕분에 나도 한 단계 위의 세상을 겪어봤으니 앞으로는 더 나은 커리어를 쌓을 수 있겠지.’
영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리코를 보면서 질투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감사함이 더 컸다.
영도와 리코의 존재 덕분에 파체코도 우산효과를 크게 받았고, 그 덕분에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한 단계 올라섰으니까.
아직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진 못했지만, 이번 시즌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노력해서 완전히 습득하면 앞으로는 이전까지보다 더 좋은 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고마울 수밖에.
“적당히 좀 쳐라, 적당히. ‘레드 머신즈’의 이름이 예전에는 그냥 자랑스러웠는데 이젠 부끄러워지려고 해.”
“하하하, 그게 마음대로 되나? 그리고 월드시리즈 우승해야지. 그때까지 적당히는 없다고! 그러니 유리, 당신도 조금 더 힘내. 충분히 할 수 있어.”
24세의 창창한 나이에 이미 리그를 지배한 기량, 언제나 넘치는 자신감까지. 아, Y-DO 앞에서는 빼고.
어쨌든 질투가 나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영도 덕분에 지난 시즌에 비하면 모난 성격도 완전히 둥글둥글해졌고, 인간적인 매력까지 뿜어내기 시작했다.
‘다음 시즌 Y-DO가 떠나더라도 리코랑 같이 활약할 남은 두 시즌도 재미있겠네. 리빌딩한다고 하면 그 전에 떠날 수도 있겠지만.’
영도는 처음부터 1년짜리 용병이었다.
합류할 때부터 이미 팀의 리더가 될 수 없다고 정해진 선수였고, 이 팀의 리더는 영도가 영입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센시오 리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데뷔하자마자 팀의 리더가 되어서 그런지 인간적인 매력은 많이 부족한 선수였지만, 이번 시즌 그보다 확실히 뛰어난 데다가 워크에씩, 평소 생활까지 훌륭한 모범적인 선수, 영도와 함께하며 인간적으로도 많이 성숙했고.
영도가 떠난다 할지라도 리코가 중심을 잡아줄 이후의 레즈 역시 매력적인 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케이, 알았어! 나도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홈런 한 개 정도는 더 쳐주지! 오늘 경기까지 세 경기 남은 것 맞지?”
“당연하지! 4차전에서 끝내버릴 거니까! 뉴욕 양키스? 언제적 뉴욕 양키스야!!”
< 타선의 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