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려졌던 이들 >
“으하하하, 형! 어제 봤죠? 내가 이 정도라니까요? 메이저리그 첫 시즌 펏 포스트시즌 등판이었는데... 역시 나도 빅게임 플레이어였어!!”
로키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2차전을 앞두고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에 도착한 영도의 앞에 기다렸다는 듯 유형근이 나타나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영도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린 게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반응속도였다.
“그래, 잘했다. 네 덕분에 살짝 꼬일 수도 있었던 게 잘 풀렸어.”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를 타박할 수 없었다.
전반기 중후반부터 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은 유형근은 18승 8패, 193이닝 211K, ERA 3.21, FIP 3.46의 호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디비전 시리즈 1차전 선발로 나와 7.1이닝을 5피안타 1실점 9K로 틀어막으며 제러드 홉슨을 위시한 로키스 투수들의 법력에 타선이 꾸역꾸역 막혀 애매해질 뻔했던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국 기사들 봤어요? 크으, 어제는 형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이었다고 막 난리더라고요. 어휴, 로키스 투수들이 형을 계속 피해 다녀서 그렇지, 제대로 했으면 형이 훨씬 잘했을 텐데 말이에요. 이것 참 민망해서... 하하하하하핫!!”
“... 정말 민망해 보이네. 내가 다 어색할 정도로 민망해 보여.”
빌어먹을 선발투수 놈들.
왜 정상적인 성격의 인간들이 하나도 없는 걸까.
물론, 선발투수 중에서도 수더분하고 무딘, 둥글둥글한 성격의 선수들이 있긴 있지만, 유독 까다롭고 독특한 인간들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함부로 건드리기도 어렵고. 심지어 형근이 정도면 굉장히 다루기 쉬운 스타일인데도.’
그런 의미에서 유형근은 선발투수치고 굉장히 성격이 좋은 선수였다.
하지만 ‘선발투수’였다.
5경기 동안 한 번밖에 출전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에브리데이 플레이어인 야수보다 WAR에서도, 인기와 인지도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지만, 선발투수는 어쨌든 한 경기로 한정하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포지션이었다.
야구라는 스포츠는 투수만 능동적으로 경기를 이끌고 타자와 수비수는 투수가 공을 던져야 플레이할 수 있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선발투수의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즉, 유형근이 신나서 날뛰는 게 정신 사나워도 어느 정도는 맞춰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포스트시즌 같은 단기전에서는 더더욱 그래야 했고.
‘심지어 이 자식이 에이스이기까지 하니...’
영도는 신나서 떠드는 유형근의 재잘거림을 BGM 삼아 몸을 풀었다.
솔직히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도 있었다.
신시내티 레즈에 합류한 순간부터 옆에 딱 달라붙어 떠들어대곤 했으니까.
어쨌든 유형근의 호투로 중요한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을 승리로 장식한 신시내티 레즈는 가벼운 마음으로 2차전을 준비했다.
단 한 명의 사이 영 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한 건 레즈나 로키스나 마찬가지였고, 로키스가 프랜차이즈 역사상 거의 최초로 탄탄한 5인 선발 로테이션을 꾸린 것도 사실이었지만.
팀의 운명을 걸고 로스터를 꾸린 신시내티 레즈 역시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5인 선발 로테이션을 꾸린 시즌이었다.
오히려 로키스의 로테이션보다 반 단계는 업그레이드된 로테이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양 팀 모두 언제나처럼 공격력을 앞세워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선발 야구도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낯선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차전은 극단적인 타자친화구장에서 투수전을 펼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고.
양 팀의 디비전 시리즈는 낯선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
‘오늘도 역시나인가.’
콜로라도 로키스는 제러드 홉슨-브랜든 에레라-커트 페니-체사레 몬도-버나드 케플러로 시즌을 시작해 홉슨-페니-몬도-에레라-케플러로 시즌을 마쳤다.
에레라는 구속과 스터프에서 한계가 뚜렷한 선수였고, 페니와 몬도의 성장세가 놀라웠기에 지난 시즌과 비슷한 수준의 성적을 거두고도 4선발까지 밀려난 것.
이번 포스트시즌에서는 페니가 와일드카드 결정전으로 빠지고 3차전부터 쿠어스 필드로 돌아가기 때문에 쿠어스 필드에 가장 강한 에레라가 3차전에 배치되었다.
메이슨 콕스 로키스 감독은 그나마 경험 많은 에레라를 2차전에 활용하는 것도 고려해봤지만, 정규시즌 성적과 쿠어스 필드 성적 등 모든 걸 고려했을 때 이게 맞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2차전에 몬도가 등판하든 에레라가 등판하든 영도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이게 제러드 홉슨의 개인적인 결정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Y-DO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가 팀적인 차원에서 전략을 이렇게 짠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스코어링 포지션을 허락하는 게 아닌 이상, 노아웃 상황이 아닌 이상 거의 무조건 볼넷으로 거르는 느낌이에요. 2아웃이 아니더라도 1루가 비어 있으면 그냥 1루를 내주고 말겠다는 거죠.]
철저하게 영도의 타격 기회를 빼앗아 한 베이스 출루로 막아내겠다는 로키스의 전략.
거의 매 타석 출루하지만, 영도를 베이스 하나로 막아내기만 한다면 매 타석 출루시켜도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
실제 확률로 따져도 타석마다 0.461의 확률로 0.813개의 베이스를 빼앗아내는 영도이기에 직접 상대하는 것과 큰 차이도 없었다.
볼넷을 내줘도 괜찮다고 판단되는 시기에만 거르는 것이기도 했고.
[Y-DO 트레이드는 완벽한 윈-윈 트레이드였습니다. 물론, 레즈의 출혈이 심했던 만큼 월드시리즈 우승이 아니면 실패라고 말하는 의견도 틀린 건 아닙니다만, 레즈의 유니폼을 입고 77홈런 기록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한 유, 무형적 이득을 생각하면 이미 레즈에게도 성공적인 트레이드로 보입니다.]
[그렇죠. 로키스는 앞으로 최소 5, 6년은 컨트롤할 수 있는 1, 2선발과 3, 4선발, 최소 2시즌 더 활용할 수 있는 리그 상위권의 3루수를 얻었으니 당연히 성공이고요.]
[Y-DO의 유산인 체사레 몬도는 오늘도 좋은 피칭을 보여주면서 레즈를 상대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중입니다.]
[정말 좋은 투수예요. 저만큼 좋은 투수니까 Y-DO 트레이드의 메인 칩이 될 수 있었던 거든요?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Y-DO 트레이드에 포함될 수조차 없었어요. 분위기가 그랬죠. 세 번째 카드로도 전체 유망주 랭킹 TOP 50은 최소한 포함시켜야 하는 분위기였는데요.]
비록 영도와의 승부는 철저하게 피해갔지만, 체사레 몬도는 평균 95마일 이상의 포심 패스트볼과 20-80 스케일에서 70점을 받은 체인지업, 60점을 받은 커브를 앞세워 레즈의 강력한 공격력을 억제했다.
괜히 전체 유망주 랭킹 1위, 올해의 마이너리거를 수상한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피칭.
자신을 트레이드 카드로 소모한 이전 소속팀을 향해 복수라고까지 하긴 뭐하지만, 자신의 진짜 가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 앞으로 몇 경기는 더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겠지. 이걸 못하게 하려면 리코가 해줘야 해.’
영도의 뒷 타석, 4번 타순에서 받쳐주는 센시오 리코에게 모든 게 달려 있었다.
리코가 포스트시즌에서 맹타를 휘둘러준다면 아무리 영도가 부담스러워도 쉽게 거를 수 없게 될 테니.
영도에게 가려진 게 억울할 정도로 이번 시즌 리코의 활약은 발군이었다.
WAR 8.0으로 전체 3위, 홈런 전체 2위, wRC+ 전체 3위로 영도를 제외하면 이번 시즌 최고의 타자라 해도 무방한 선수.
포스트시즌 반짝이 아니라 정규시즌부터 잘해준 선수이기에 몇 타석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줘도 바로 경계할 수밖에 없는 타자가 터져준다면.
이게 영도가 가장 쉽게 상대의 노골적인 견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
‘Y-DO가 참 대단하긴 하지만...’
이번 시즌 들어 영도를 신을 모시는 종교의 대주교가 된듯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센시오 리코 역시 메이저리거, 그것도 그냥 메이저리거가 아니라 이번 시즌 홀로 신이 된 영도에 이어 인간계 최강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최고의 메이저리거였다.
야구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어디 가서 2등으로 밀려나 본 적도 없었고, 마이너리거 시절부터 이번 시즌까지 단 한 번의 후퇴도 없이, 실패도 없이 매 시즌 성장해 정상을 노리게 된 특급 재능.
영도가 워낙 유망주 시절부터 독보적이었고, 일찌감치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바람에 나이 차이는 고작 1년 반 정도였지만, 그건 영도가 대단한 거지, 리코가 부족한 게 아니었다.
‘Y-DO를 찬양하고 Y-DO보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영역이지. 나 말고 다른 놈들도 날 Y-DO 밑에 깔아둬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어제 제러드 홉슨도 그러더니 오늘 체사레 몬도도 자꾸 리코의 심기를 건드렸다.
몬도와 사적으로 절친한 관계라는 건 지금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친분과 자존심은 별개의 이야기였으니까.
[공을 쪼개버릴 듯한 분노의 스윙! 센시오 리코가 분노를 담아 커다란 타구를 만들어냅니다!! 펜스를 훌쩍 넘어가는 투런 홈런!]
[Y-DO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날 무시하진 말라는 거죠! 실제로 Y-DO가 무서운 건 이해하지만, 리코도 52홈런 타자거든요!!]
***
‘아주 날 잡아먹으려 달려드는데? 허... 스트라이크를 이렇게 꽂아넣는다고? 나한테?’
영도를 거르고 자신과의 승부를 선택한다는 것에 리코가 분노했다면, 파체코는 영도를 거르기 위해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붙어오는 것에 분노했다.
타율 0.260 근처, OPS 0.800 근처에서 30홈런에 약간 부족하게 때려주던, 1루 수비조차 안 되는 반쪽짜리 타자였던 유리 파체코.
하지만 이번 시즌 파체코는 0.923의 OPS로 37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4년 70M도 오버페이라고 평가받았지만, 남은 두 시즌 중 한 번만 더 이 정도 성적을 찍어주면 나머지 한 시즌을 날려 먹어도 성공한 계약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그런 만큼 파체코 역시 자신감을 찾은 상태였다.
아무리 영도가 대단하다지만, 자신을 잡아먹겠다고 처절하게 달려드는 게 자신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져 불쾌했고.
‘물론... 내가 만만한 게 아니라 Y-DO를 무서워한다는 건 알지. 하지만 Y-DO에게 타격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도 난 나간다.’
선두타자 게릿 에머슨이 안타로 출루하고 카시오 롬바르도, 아즈라엘 알파로가 나란히 범타로 물러난 2아웃 1루의 상황.
파체코는 장타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영도에게 한 번이라도 찬스를 만들어주려면 여기서 1루를 채우면서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를 보내야 했으니까.
[오! 파체코가 이런 가벼운 스윙을! 콤팩트한 스윙으로 깔끔하게 그라운드 정중앙을 가릅니다.]
[가장 깔끔한 안타, 중견수 앞 안타죠? 이러면 2아웃 주자 1, 2루인데... 드디어 Y-DO에게 기회가 주어지나요?]
‘허... Y-DO도 힘들겠어. 2아웃 주자 1, 2루인데...’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2아웃 주자 1, 2루에서도 Y-DO를 거르는 콜로라도 로키스! 선발투수부터 불펜투수까지 그 누구도 Y-DO와 상대해주지 않습니다.]
[허허... 5-3, 1, 2점차에서 승패가 갈리는 경기이기에 아주 빡빡하게 마운드를 운용하는 거죠. 여기서 Y-DO에게 얻어맞든 리코에게 얻어맞든 내줄 점수는 비슷하다는 거예요.]
‘이 자식들이... 내가 분명히 아까 보여줬는데도!!’
[다시 한 번 분노의 스윙을 보여주는 센시오 리코의 강한 타구! 라인드라이브로 쭉 뻗어 나가 펜스를 때립니다!]
[아이고, 망했어요! 오늘 Y-DO를 철저히 거르고 파체코, 리코와의 대결을 선택한 로키스의 전략은 완전한 실패예요, 이건!]
[어제는 YG, 오늘은 파체코와 리코! 신시내티 레즈의 핵심이자 간판이지만, 정규시즌 내내 Y-DO의 그늘에 가려졌던 선수들이 Y-DO가 노골적인 견제에 시달린 디비전 시리즈 1, 2차전을 지배합니다!]
[Y-DO까지 3루를 돌아서 홈으로! 홈에서 접전, 그리고... 세이프!! 풀 베이스를 완전히 비우는 3타점 2루타! 경기 분위기가 급격히 기우는데요!?]
< 가려졌던 이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