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행복한 야구선수 > (177/200)

< 행복한 야구선수 >

“저는 지금 쿠어스 필드로 가는 차 안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놀랍게도 주차장은 열려있고, 이미 차도 많이 도착해 있답니다.”

- 크으... 부럽다, 로키베놈... 오늘 티켓 암표로는 5천 달러까지 치솟았던데...

- 다른 구장 암표값도 겁나 비싸긴 한데, 우리 암표가 X발, X나 비쌈. 평균 티켓값은 중하위권인데 왜 암표 값은 제일 비싸냐?

- 몰라 묻냐? 우리가 Y-DO를 X나게 사랑하니까 그렇지!!

- 그럼 오늘 중계 없음? 로키스 경기는 로키베놈이랑 봐야 하는데...

- 오늘은 꼭 Y-DO가 74호 홈런 쳐줬으면 좋겠는데...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3연전 중 1, 2차전.

영도의 74호 홈런은 나오지 않았다.

타격감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냥 운도 조금 따르지 않았고, 무엇보다 2경기 침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오늘 3차전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렸다.

왠지 Y-DO라면 두 번째 고향, 콜로라도와 덴버 팬들 앞에서 이대로 조용히 돌아갈 것 같지 않았으니까.

영도는 이제 그런 이미지였다.

중요한 순간, 관심이 집중된 순간, 의미가 있는 순간에는 무조건 무언가를 해내는 선수.

그런 선수가 쿠어스 필드에서 조용히 물러날 리 없다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다.

“내가 지난 시즌으로 로키스 중계 10년 차를 보냈고, 올해 11년 차거든요? 10년 차를 맞이해 로키스의 프랜차이즈 최초 우승까지 겪으면서 더없이 완벽한 1년을 보냈는데 그건 다른 이야기고. 10년 동안 로키스의 모든 경기를 중계했지만, 딱 세 경기 쉬었죠? 그게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 홈 경기 3경기였죠. 그래서? 월드시리즈 우승했죠?”

- 그때 우리 기세랑 흐름 제일 좋을 때였는데 어쩌다가 홈에서 두 번 졌나 했더니... 이 새끼가 범인이었네

- 잡았다, 이 새끼... 3연전에서 1승 2패... 범인...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때 로키베놈 존X 웃겼지. 3경기 딱 중계 쉬다가 돌아왔는데 개쫄아 있었음. 당연히 로키베놈 잘못은 아니었지만, 인기가 많은 만큼 안티도 많으니...

- 7차전 이겼을 때 기뻐하던 건 로키스의 우승 때문만은 아니었지. 죽다 살아난 사람 보는 줄.

- ... 너 그러고 보니까 이번 3연전도 중계 쉬고 경기보러 가지 않았냐?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겁니다. 11년 동안 딱 두 번 중계를 쉬었는데 한 번은 월드시리즈 홈 3경기, 그리고 74호 홈런이 걸린 이번 시리즈 3경기. 그리고 월드시리즈 3연전이 1승 2패였죠? 그럼 1, 2차전에서 74호 홈런이 안 나왔다? 그럼 3차전은?”

- 이 새끼... 또 약 파네? 10년 팔다가 작년에 겨우 팔았다고 이제 다른 거 파는 거냐?

- 약 파는 거라도 좋으니까 팔렸으면 좋겠다. 나도 사고 싶다고.

- Y-DO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면 그 시작은 무조건 쿠어스 필드여야지! 쿠어스 필드 말고 다른 곳에서 Y-DO가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말도 안 돼. 

- 기회가 없었다면 모를까 기회가 있으면 꼭 쿠어스 필드에서 해줘야지.

- 그렇다고 버나드한테 대충 던져달라고 할 수도 없고... 물론, 버나드가 5인 선발 중엔 제일 아쉽긴 하지만.

***

콜로라도 로키스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로 상위권의 5인 선발 로테이션을 보유한 시즌.

중소구단이면서 쿠어스 필드 때문에 선발 투수 영입이 매우 어려운 팀이라 한껏 끌어모은 불펜투수들, 그리고 오프너 용도의 3, 4이닝용 투수들이 애매해졌지만, 그들이 애매해져도 선발 로테이션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히 좋았다.

로키스의 선발 로테이션 중 제러드 홉슨을 빼면 브랜든 에레라가 4년 차, 커트 페니가 2년 차, 체사레 몬도와 버나드 케플러는 아직 루키 자격을 유지한 젊은 선수들.

에레라는 이제 3선발급에서 성장을 끝내고 전성기에 접어든 느낌이었고, 커트 페니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무시하고 ROY급 활약을 선보인 지난 시즌의 활약을 이어가며 완벽하게 빅리그에 정착하는 모습이었다.

체사레 몬도는 유망주 시절의 평가답게 풀타임 데뷔 첫 시즌부터 3점대 중반 FIP를 찍으며 브랜든 에레라를 4선발로 밀어내고 커트 페니에 이어 3선발로 자리 잡았다.

마지막으로 버나드 케플러.

케플러는 원래부터 미드라인 스타터 포텐셜로 평가받던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의 유망주였고, 유망주 시절의 평가부터 로키스 영건 4인방 중 가장 낮았다.

그 결과, 케플러의 이번 시즌 성적은 쿠어스 필드 치고는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좋다고도 볼 수 없는 5점대 초반의 FIP와 1.0의 WAR.

풀타임 첫 시즌치고도 조금 아쉬운 성적, 쿠어스 필드를 감안하고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생각보다는 성장하지 못한 느낌인데.’

영도도 지난 시즌 케플러와 함께 뛰었고, 루키인 버나드 케플러를 가장 잘 아는 타자 중 한 명이었다.

루키가 갖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낯섦이라는 걸 생각하면 또 한 번 영도에게 웃어주는 부분.

‘쿠어스 필드에서 홈런 없이 지나가는 건 말이 안 되지. 구장의 문제도, 팬들의 문제도...’

모두가 기대하듯 영도 역시 쿠어스 필드에서 74호 홈런을 때려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이번 시즌을 74호 홈런으로 끝내진 않겠지만, 74호 홈런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인 건 부정할 수 없었고, 가능하면 꼭 쿠어스 필드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체사레 몬도와 브랜든 에레라도 영도에게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는 아니었다.

실제로 타석에서의 결과도 나쁘지 않았고.

다만, 홈런이 없을 뿐이었고, 이번 시즌의 영도에겐 홈런이 아니면 성공이라 할 수 없을 뿐이었다.

[케플러는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는 선수예요. 분명히 재능이 있고 3, 4선발급까지, WAR 기준 2.0 이상은 분명 찍어줄 재능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체인지업은 지금도 좋은데 써드 피치인 슬라이더나 커브를 조금 더 끌어올릴 필요가 있죠.]

[두 구종 모두 평균 수준은 되기 때문에 괜찮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케플러는 아무래도 평균 구속이 떨어지는 편이고 그래서 좋은 무브먼트를 가지고도 스터프가 좀 약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구종 완성도를 높여야 해요. 느린 구속에 비해 커맨드, 컨트롤이 아주 좋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Y-DO에겐 절호의 찬스입니다. 1, 2차전에 등판한 몬도, 에레라도 Y-DO와 비교하긴 어려운 선수입니다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기회가 바로 오늘이라는 거죠.]

‘버니에겐 미안하지만, 이번엔 널 응원할게. 1, 2차전도 다 가져갔고, 스윕과 74호 홈런 중에 선택하는 건데... 그중에선 74호 홈런을 선택하고 싶네.’

로키스의 팬들만 영도의 74홈런을 응원하는 게 아니었다.

경기 전 힐끔힐끔 주변 눈치를 보면서 다가온 게일 해니건도 조심스럽게 영도를 응원했다.

‘본인만 온 줄 알겠지만...’

그리고 해니건이 눈치 보는 동안 그보다 먼저 선수 생활을 1년 연장한 앤서니 모리스를 시작으로 프레드릭 더햄, 커트 페니, 브랜든 에레라, 로날드 매그니, 심지어는 그 조용하고 과묵한 키스 가드너까지 찾아와 조심스럽게 응원을 남겼다.

심지어 쿠어스 필드를 관리하는 구단 직원들까지도 조심스레 응원을 건넸다.

프로 선수의 승부욕과 해니건을 중심으로 한 로키스의 결집력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그런 만큼 영도는 로키스의 팬들에게뿐 아니라 구단 직원들, 선수들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가진 선수였다.

‘팬, 선수, 직원들... 다들 이렇게 원하는데 내가 이들 앞에서 그냥 물러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영도가 로키스에 정말 많은 것들을, 결정적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영도가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팀의 핵심이자 간판이었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겨줄 최고의 선수였던 만큼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지난 시즌 로키스 선수들과 직원들은 영도에게 많은 걸 맞춰주었다.

많은 걸 맞춰주고 배려해준 직원들.

클럽에서 정한 가이드라인에 따른다는 느낌보다는 인간적인 따뜻함과 기대감 등 감정이 더해진 따뜻한 배려였다.

클럽의 한계로 인해 본인들끼리 더욱 똘똘 뭉치는, 끈끈하고 따뜻한 로키스의 팀컬러는 영도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고, 서울 제츠에 이어 또 한 번의 인간적인 성장, 인간성의 회복을 유도했다.

다른 것 다 떠나서 어차피 74호 홈런은 쳐낼 거고, 새로운 역사는 무조건 시작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좋은 기억만을 남겨준 쿠어스 필드, 콜로라도 로키스와 현재 소속팀 신시내티 레즈, 두 팀이 함께 있는 곳에서 하고 싶었다.

[케플러의 불안한 표정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신시내티 레즈의 ‘레드 머신즈’를 상대하면서 여유가 없어 보이는 버나드 케플러.]

[4이닝 3실점의 기록도 기록이고 이번 시즌 성적 자체도 아쉽죠. 그래서 표정이 저렇게 나오는 것일 테고. 하지만 투수는 이럴 때 저렇게 약한 표정을 짓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돼요. 투수는 감정표현을 숨겨야 한다는 말까진 하고 싶지 않지만, 적어도 약한 표정은 숨겨야죠.]

[12초 룰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소모하면서 Y-DO를 상대하는 케플러, 긴 고민 끝에 와인드업! ... 악!! 아앍!! 큽니다! 크게 날아갑니다! 2001시즌을 향해 날아가는 듯한, 크게, 멀리 쭉쭉 뻗으면서 지난 40년을 플레이백 시키는 듯한 엄청난 타구!]

[74!! 74!! 74!! 74호 홈런!!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시작! 불명예스러웠던, 메이저리그 최악의 스캔들이었던 스테로이드 시대와 완전한 이별을 고하는 역사적인 홈런이에요!!]

결국, 부담감과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버나드 케플러의 행잉 슬라이더.

장타가 나오기 딱 좋은 행잉 슬라이더를 절대 놓치지 않는 영도의 호쾌한 스윙.

언제나처럼 엄청난 비거리를 자랑하는 홈런이었고, 펜스를 넘어가 2층 관중석을 넘어 경기장의 마지막 벽을 때릴 때까지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비행시간.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각자의 야구를 떠올렸다.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98시즌 맥과이어-소사의 경쟁, 01시즌 배리 본즈의 질주를 떠올렸다. 

당시의 분위기와 이들이 모두 약쟁이였음을 알았을 때의 좌절까지도.

젊은 팬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했던 역사가 함께 숨 쉬고 두 눈으로 지켜본 역사로 바뀌었음에 환호했다.

그만큼 모두에게 깊은 인상과 저마다의 의미를 안겨주는 역사적인 홈런이었다.

[평소에는 건조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오연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큰 세리머니 없이, 감정표현도 없이 무덤덤하게 베이스를 도는 Y-DO의 모습이 너무나도 고고하고 오연하게 느껴집니다.]

[시대의 지배자에게서만 보이는 강력한 포스 같은 것도 느껴지고요. 아무 액션 없이 그냥 베이스를 도는 게 이렇게 멋있을 일인가요?]

[기량과 기록이 주는 임팩트를 절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홈을 밟고 동료들의 축하 속에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Y-DO의 모습! 그리고 여기서 경기가 중단됩니다.]

[지금부터 16분 동안 Y-DO의 74호 홈런 축하 행사가 이어집니다. 마크 맥과이어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70호 홈런을 기록한 그 시즌, 이전까지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이었던 로저 매리스의 기록을 넘어섰을 때 15분 동안 축하 행사를 가졌거든요? 그래서 16분입니다.]

덕아웃으로 복귀했던 영도는 헬멧과 보호장구들을 벗고 모자를 쓴 채 다시 그라운드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카디널스와의 3연전부터 팔로우하기 시작한 레즈의 레전드, 조이 보토와 레즈의 단장이 모습을 드러냈고, 로키스의 제프리 에녹, 중견수 수비를 보던 게일 해니건도 내야로 이동했다.

[Y-DO에게 엄청난 환호와 함성, 그리고 기립박수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Y-DO에겐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도 잠깐 일어나서 Y-DO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 좋은 생각이네요. 야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야구를 사랑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저도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었어요.]

이 순간, 이 경기장뿐 아니라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영도의 신기록 달성을 축하하며 기립박수를 보내주고 있었다.

홈런 신기록 도전이 하나의 신드롬이자 사회현상이 되어 있었기에 야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영도에게 박수를 보냈다.

지금 이 순간 영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야구선수였다.

< 행복한 야구선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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