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모두의 염원 > (173/200)

< 모두의 염원 >

“Y-DO! 여기, 여기 사인해주세요!”

“... 스포츠카드네. 여기에 사인하면 되니?”

“넵! 혹시 가능하면 좌우 대칭으로 깔끔하게 해주실 수 있나요? 보기 좋게...”

“그럼. 가능하지.”

요즘은 특별히 안전요원들을 대동하고 다니거나 하지 않으면 어딜 가든 일을 보기 전 30분, 1시간씩 팬들에게 사인해주는 게 일이었다.

어딜 가도 영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성격상 다가오는 팬들을 거절하거나 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것.

물론, 과거보다 성숙해진 팬들 역시 사생활에서는 일정 선을 넘지 않기에 그 정도였지, 옛날이었으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오토카드를 못 뽑은 거니?”

“네... 오토카드 뽑고 싶어서 엄마한테 용돈 달라고 했는데 더는 안 된다고...”

“하하하, 많이 샀나 보구나.”

“... 조금? 헤헤... 그래도 저지 카드는 뽑았어요!”

스포츠카드는 트레이딩 카드 중 스포츠를 주제로, 특히 선수를 주제로 만든 것들을 뜻했다.

19세기 후반부터 담배에 야구선수의 카드를 넣어서 발매한 게 시초였는데, 당시 선수생활을 했던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격수’ 호너스 와그너의 카드는 선수 요청으로 생산이 중단되어 100장도 채 되지 않았기에 최근 경매 사이트를 통해 330만 달러에 거래되었을 정도.

이렇듯 카드사가 스포츠카드의 가치를 깨닫고, 수집가들 역시 투자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미국 스포츠계의 주요 상품이 되었다.

특히 스포츠 카드의 시작을 알렸던 야구계에서는 메이저 중에서도 메이저일 정도.

누구나 다 아는 스타 선수라 할지라도 루키 시절 카드는 생산량이 많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카드들은 보관 상태만 괜찮은 편이라면 기본 1만 달러에서 시작이었다.

루키 카드의 가치는 희소성에서 나오는 것.

당연히 수집가가 아닌 일반 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카드는 최전성기 카드 혹은 특정 마일스톤을 달성한 시즌의 카드였다.

이런 것들은 카드의 희소성만 따지면 그리 가치가 높지 않았지만, 미국이 어떤 나라이던가.

자본주의의 종주국은 방법을 찾기 마련이었다.

이 부족한 희소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등장한 게 바로 ‘저지 카드’와 ‘오토 카드’였다.

실제 경기에서 입었던 유니폼 조각을 잘라 만든 것이 ‘저지 카드’, 선수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것이 Auto-graph, ‘오토 카드’.

실제로 가장 가치가 높은 카드는 ‘오토 카드’였고, 이런 카드들은 처음부터 많이 발매하지 않아서 고유 시리얼 넘버가 적혀있는 경우도 많았다.

아직 영도는 26세에 불과했기에 아직 최전성기가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2042시즌은 중요 마일스톤, 73+홈런을 기록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즌이었고, 이미 수집가들은 물론 일반 팬들까지도 영도의 ‘오토 카드’, ‘저지 카드’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쓸 거라 기대받던, 마크 프라이어,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등 루키 시절부터 유명했던 선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 영도의 루키 시즌이었다.

덕분에 영도의 루키 카드는 생각보다 발행량이 많았는데, 지금은 이런 카드들도 경매 사이트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등록되는 족족 수만 달러에 팔려 나갔으니 당연히 찾아보기 어려울 수밖에.

“저도 사인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체 이 배트는 어쩌다 쓰게 되신 겁니까? 구하느라 힘들었습니다.”

“2년 전 한국에서 뛸 때 알게 된 배트인데... 이걸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미국에서 구하긴 꽤 어려웠을 텐데.”

“하하하, 그래도 이번 시즌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Y-DO가 쓰는 배트잖아요? Y-DO가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들여올 이유는 충분하죠. 그리고 몇 달 전부터 공식 수출도 하는 것 같던데요. 저 같은 사람이 많으니까.”

“하하... 과분하네요. 감사하기도 하고.”

영도가 쓰는 배트는 한국의 한 중소기업에서 생산하는 제품이었다.

다음 시즌부터는 어쩔 수 없이 배트도 스폰서 계약을 통해 제공받겠지만, 어쨌든 73+홈런을 때려낸 배트는 한국의 중소기업 생산 배트였다.

이번 시즌 영도의 활약이 활약이니만큼 영도가 사용하는 야구 장비들 역시 인기를 끌었다.

N사는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자마자 야구 관련 사업들의 지표가 쭉쭉 상승하는 걸 지켜보며 행복한 비명을 지를 정도.

타 종목에 비해 분명 아쉬운 감이 있었던 N사의 야구 관련 사업은 이번 시즌을 기점으로 급격히 성장해 전통의 R사, W사, U사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니 한국의 중소기업산 배트 정도 수입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었다.

제품만 제공받고 판매는 전부 수입사에서 알아서 하겠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쉽게 끌어낼 수 있었으니까.

아무리 현재 상황에선 생산업체가 갑이라고는 하지만 갑질도 체급이 맞아야 하는 거지, 체급 자체가 달랐으니...

“... 미안해서 어쩌죠? 우리가 너무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건 아니겠죠?”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만, 팬들에게 쓰는 시간인데요. 프로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젊은 여성 팬이 미안한 얼굴로 다가왔다.

영도의 시간을 뺏는 게 너무 미안하지만, 사인을 받고 사진도 함께 찍고 싶다는 욕구를 도저히 이기지 못했다는 복잡한 표정.

하지만 영도는 진심으로 이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딱히 사생활에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한국 팬들의 생각과 달리 메이저리거라고 해서 다들 팬 서비스가 훌륭한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저리거쯤 되면 못해도 선수 한 명 당 수십 개의 루틴을 지키면서 살았다.

팬 서비스는 생각보다 심력과 체력 소모가 컸고, 컨디션과 루틴 유지를 위해 이를 꺼리는 선수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선수의 기본은 성적이었기에 구단들도 철저하게 팬 서비스를 교육하고 강조하긴 하지만, 그라운드를 벗어나 주차장으로만 나가도 이후의 행동까진 건드리지 않았다.

‘발전이 없는 그분’ 알버트 푸홀스처럼 팬 서비스가 개판인 메이저리그 슈퍼스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라운드뿐 아니라 주차장, 심지어 사생활에서조차 뛰어난 팬 서비스를 보여주는 영도이기에 이미지와 인기가 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영도는 특별한 요청이 없다면 항상 판매 가치가 높은 스윗 스팟에만 사인해주기로 유명했다.

일반 팬들도, 수집가들도, 심지어는 리셀러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팬 페이보릿.

그게 바로 유영도라는 선수의 가치였고, 재미도 없고 브랜딩에도 관심이 없는 선수임에도 스타성이 높다고 평가받는 이유였다.

“꼭 74홈런 치세요!! 응원할게요!”

“74개만 치지 말고 이 기회에 확 치고 나가십시오! 응원하겠습니다!!”

“80호! 80호는 어때요!?!?”

한 시간여에 걸친 팬 서비스를 마치고 돌아가는 영도의 뒤에서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는 팬들의 모습.

팬들에게 이런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도의 힘이었고, 가치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적과 함께 팬들이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밖에 없는 팬 서비스, 그리고 흠잡을 곳이 전혀 없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생활까지.

영도의 가치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영도를 원하고 바라는 마음은 이러한 팬들의 마음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

[마지막 카운트다운 돌입!! Y-DO,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시리즈 3차전에서 71호 홈런 폭발!! 타이기록까지 -2]

[부시 스타디움에 도착한 Y-DO. 역사적인 73호 홈런은 부시 스타디움에서?]

[신시내티 레즈, 지옥의 원정 10연전 일정 시작. 남은 과제는 둘, 포스트시즌 대비 체력 안배와... Y-DO의 74호 홈런]

[콜로라도 로키스, “비록 한 시즌만에 팀을 떠났지만, Y-DO는 덴버와 콜로라도, 로키 산맥의 영웅이자 레전드. 만약 74호 홈런이 쿠어스 필드에서 나온다면 우린 우리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축하해줄 것.”]

모든 것이 완벽한 지금의 흐름에서 굳이 아쉬운 점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이 원정 10연전이었다.

현재 71홈런을 기록 중인 영도가 홈런 2개만 더 추가하면 배리 본즈와 타이기록을 달성하고, 3개를 추가하면 새로운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을 수립하는 상황.

최근 영도의 홈런 페이스를 감안했을 때 원정에서 대기록이 작성될 확률이 높았다.

홈팬들 앞에서 성대한 기념행사와 함께 대기록을 자축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3연전이 끝나면 쿠어스 필드로 날아가 콜로라도 로키스와 3연전을 치른다는 것.

쿠어스 필드는 지난 시즌 영도의 홈런 페이스를 크게 지원해줬던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친화구장이었고, 콜로라도 로키스는 영도를 영웅이자 레전드로 대접해주는 구단이었다.

모두의 기대대로 로키스는 영도의 74호 홈런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에서의 행사와 비교하면 조금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쿠어스 필드에서라면 홈구장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성대한 행사와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크으, 하여튼 Y-DO가 걸물은 걸물이야. 홈이고 원정이고 이렇게 일찍 주차장을 열어주다니...”

“우리 같은 홈팬들 말고 Y-DO의 홈런볼을 잡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 넘어온 친구들한테는 이보다 필요한 게 없겠지. 좋은 선택이야.”

홈팬과 원정팬을 제외하고도 뚜렷한 응원팀이 없음에도 그저 영도의 홈런을 보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도 새까맣게 팬들이 몰려들었다.

주차장의 이른 개방은 바로 이런 팬들 때문이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3연전도 영도와 레즈에겐 다행이었다.

보통 원정팀 선수에게 축하할 일이 생겨도 홈팬들은 딱히 축하를 해주지 않고 넘어가는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팬들은 유일하게 원정팀과 원정팀 선수에게도 진심 어린 박수와 축하를 보내주는 유일한 팬덤이었다.

놀랍게도 세인트루이스란 도시 자체는 백인 비율이 압도적이라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었고, 빈부 격차와 흑백 격리가 가장 심한 도시, 심지어 디트로이트, 오클랜드, 볼티모어 등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상위권을 다투는 도시인데도 유독 카디널스 팬들만 이렇게 훈훈했다.

“배리 본즈, 그 개X끼의 기록이 이제 드디어 사라진다는 거지? 그 개 같은 도둑놈의 새끼...”

“이제야 밤에 발 뻗고 잘 수 있겠어. 그 새끼 때문에 우리 알버트가 손해 본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카디널스 팬들은 배리 본즈를 치가 떨리도록 미워하고 싫어했다.

바로 알버트 푸홀스 때문이었는데, 푸홀스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을 ‘아름다운 10년’을 보내며 3회의 MVP를 수상했지만, 약쟁이들만 없었다면, 대놓고 말해 본즈만 없었다면 최소 6회 이상 MVP를 수상했어야 하는 선수이기 때문.

2001시즌 혜성처럼 등장해 ROY를 차지한 푸홀스는 MVP 투표에서도 4위를 차지했는데, MVP는 본즈였으며 2위는 소사, 3위는 루이스 곤잘레스였다.

세 명 모두 약쟁이로 드러났다.

그리고 02시즌과 03시즌은 2위였는데, 두 시즌 모두 MVP는 배리 본즈였다.

이외에도 04시즌 ‘FA로이드의 정석’을 보여주고도 배리 본즈에게 밀린 아드리안 벨트레를 제외하면 라이언 하워드, 지미 롤린스, 조이 보토의 MVP도 푸홀스였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만큼 ‘아름다운 10년’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로는 결과가 아쉬운 기간이었다.

그러니 카디널스 팬들이 본즈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본즈 그 개자식의 기록이 깨지는 순간 기립박수다. 일어나서 73분 동안 박수 치라고 해도 쳐줄 수 있어.”

“당연한 거 아냐!? 난 73일 동안 새벽기도도 나갈 수 있다고! 배리 본즈, 그 새끼의 이름만 메이저리그에서 지워준다면 말이지!!”

원정 경기지만, 홈팬들이 본즈를 혐오한다는 건 영도에겐 좋은 소식이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도 일찌감치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된 팀이라 딱히 적대적일 이유도 없었고, 본즈를 싫어하기 때문에 영도의 기록 도전을 응원하기까지 했으니까.

얼마 전부터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된 팀의 정규시즌 잔여 경기인데도 티켓은 한참, 아주 한참 전에 매진이었다.

원정 경기지만, 만원 관중이 몰려들었고,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영도의 기록 도전을 응원하는 상황.

지금의 영도에겐 원정 경기가 없었다.

홈 경기는 말할 것도 없고, 원정 경기 역시 모든 경기가 평소의 홈 경기 이상의 분위기였다.

< 모두의 염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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