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다시 신드롬 >
“그런데 진짜 팀에서 형 겁나 챙겨준다. 오늘 경기 끝나고 봤어? 안전요원이 대체 몇 명이 붙는 거야? 우리 회사에서도 평소보다 두 배 이상 고용했는데, 레즈에서 보내준 분들 보니까 초라해지더라.”
“감사하지. 꼭 구단 직원들만 고마운 게 아니라 감독님, 코치, 동료들... 누구 하나 안 고마운 사람이 없어.”
시카고 컵스와의 시즌 마지막 4연전이 끝나고, 영도는 안전요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영도 주변을 둘러싼 안전요원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했다.
영도의 에이전시인 TPK와 신시내티 레즈가 동시에, 그것도 각자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조금 과한 편이다, 싶을 만큼 안전요원들을 고용했기에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어마어마한 대군단이 된 것.
“하여튼 한국이든 미국이든 기자들은 다 극성이야. 그나마 여기가 소도시라서 다행이지, 대도시에서 이런 기록 세웠으면 얼마나 괴롭혔을지 상상도 안 되네.”
“그러게. 먼저 소도시에서 찍고 가서 다행이다, 야. 그래도 완충 작용은 되겠어. 어느 정도 적응도 했고.”
“하긴... 형 몸값 감당하려면 이제 대도시 메가마켓 팀 아니면 불가능하지. 다음 시즌부터는 어쩔 수 없이 대도시에서 뛸 테니 감당 가능한 선에서 미리 적응해두는 건 나쁘지 않아.”
“그리고 이런 성적을 또 한 번 찍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힘들고. 솔직히 되겠냐? 안 그래도 어려운 기록 내가 한 번 더 깰 텐데.”
“크으... 만약 형이 뉴욕 양키스에서 이번 시즌 같은 기록 찍었으면 진짜 어마어마했을 텐데. 물론, 기본적으로 말도 안 되는 기록이라 지금도 어마어마하지만.”
“카디널스도 인기 구단이긴 하지만, 빅맥도 카디널스에서 70홈런 한 번 찍었다가 메이저리그의 상징, 미국의 상징으로 뛰어올랐는데, 뭐. 나는 그보다 훨씬 대단한 기록이니 아무리 스몰마켓에서 뛰어도 최소한 그때만큼은 되겠지.”
승도가 아쉽다는 듯 뉴욕 양키스를 언급하긴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영도 쪽의 말이 맞았다.
그냥 시대를 지배한 정도면 뉴욕 양키스 소속과 신시내티 레즈 소속의 격차가 어마어마하게 날 수밖에 없지만, 양키스에서 뛰었으면 데릭 지터가 될 게 레즈에서 뛰면 조이 보토나 라이언 짐머맨 수준에서 그치겠지만.
영도는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썼고, 흑역사를 치워주었다.
이 정도까지 오면 선수가 팀의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팀이 선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도 한 명의 활약 때문에 이번 시즌 신시내티 레즈는 어지간한 전국구 인기팀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전국 중계 일정을 받을 수 있었다.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가 철저하게 지역구 위주의 스포츠고, 그래서 아무리 최고의 팀, 최고의 선수라 해도 전국 중계 비율이 15-20%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도와 레즈는 이번 시즌 거의 35% 이상의 전국 중계 일정을 받았고, 본격적으로 배리 본즈의 기록이 언급되기 시작한 6월 중순 이후로는 50% 이상이었다.
레즈라는 팀이 워낙 스몰마켓이고 당연히 원래 잡혀있던 전국 중계 비율은 10%에도 훨씬 못 미쳤기 때문에 영도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여튼... 선수한테는 이미지라는 게 이렇게 중요해. 그거 알아? 벌써 145차전 이후의 모든 경기는 매진이고 암표 가격도 50배 이상 뛰었다더라. 원래 레즈 경기는 암표 가격이 거의 원가의 1.2배 정도밖에 안 되는데...”
“와... 그 정도인가. 신경을 안 써서 몰랐네.”
“70호 홈런 근처까지 가서 하루 터지면 바로 73호 기록 도전까지 가능한 시기가 되면 주차장도 한 시간씩 일찍 개방한다더라. 아주 리그 전체, 나라 전체가 형한테 집중한다니까? 마크 맥과이어는 이런 대접을 받았고, 배리 본즈는 이런 대접을 못 받았지.”
“왜지? 빅맥은 새미 소사랑 치열하게 경쟁하느라 훨씬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서 그랬나?”
“아니. 본즈는 존X 재수 없는 새X니까. 어려울 것도 없는 이야기지. 오만하고 찌질한 데다가... 흑인이었지. 인기가 없으니 자이언츠 팬들이나 열광했지, 전체적으로 보면 빅맥과는 차원이 다르더라.”
“하긴... 40년 전이니 지금보다도 인종차별 같은 게 훨씬 심했겠지.”
서양권에서는 흑인보다도 아래에 있는 게 아시안이라지만.
그래도 2020년의 시작과 동시에 터진 역대급 전염병과 그에 대한 대처, 이로 인한 인종차별 반대 시위 등의 사회적 혼란, 그리고 동시에 넷플릭스와 빌보드, 아이튠즈 차트 등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도약 등으로 지난 20년 동안 많이 개선된 편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21세기라고는 하지만 구시대적인 풍조가 많이 남아 있었다.
결정적으로 본즈 본인이 절대 인간적으로 호감이 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물론, 본즈 본인이 항상 언론을 통해 투덜대고 공격적으로 나왔던 것처럼 흑인이라서 당해야 했던 피해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흑백혼혈인 데릭 지터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손꼽히는 슈퍼스타로 성장한 걸 보면 본즈의 인간적인 매력이 바닥을 찍었던 것도 분명 큰 지분을 차지했을 것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고작 3년 전 최초의 70홈런 고지에 올랐던 마크 맥과이어와 역사상 가장 위력적인 전성기를 보낸 배리 본즈의 취급 차이였다.
지금이야 둘 다 몰락했고, 과거의 영광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당대에는 둘의 취급이 완전히 달랐다.
마크 맥과이어는 이전까지 메이저리그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켄 그리피 주니어를 2인자로 밀어내며 명실상부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슈퍼스타이자 미국 스포츠계 전체에서도 최상위권을 다투는 선수가 되었지만, 본즈는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은 압도적인 괴물일 뿐이었다.
“그런데 나도 막 딱히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편은 아니지 않나.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쇼맨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언론 노출을 즐기는 편도 아닌 데다가 남들 다 하는 SNS도 회사에만 맡기고 딱히 안 하는데...”
“대신 야구에만 매진하는 더없이 성실한 선수 이미지가 있지. 마이크 트라웃 같은. 스포츠 팬들은 또 그런 걸 좋아하거든. 미친 듯이 열광하진 않지만, 모두가 좋아하지.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가... 내가 그런 이미지였나.”
“그렇지. 형이 그래서 인기가 많은 거야. 그리고 성적이 워낙 압도적이니까 미친 듯이 열광하지 않을 캐릭터로도 미친 듯이 열광하는 팬들이 이렇게 많이 생긴 거고.”
역시 자신 없으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정답이었나.
영도는 자신이 없다기보다 관심이 없어서 조용히 있었던 것이지만, 그러는 사이 팬들이 알아서, 언론과 전문가들이 알아서 영도에게 ‘야구 바보’의 캐릭터를 만들어주었다.
실제로 한국에 있을 때도 ‘절대영도’라는 캐릭터 이전에 ‘야구 수도사’란 캐릭터가 있었으니 사람 보는 눈은 다 거기서 거기구나, 싶으면서도 실제로 그런 게 보이는구나,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형은 지금처럼 야구만 잘해. 내가 말했지? 캐릭터고 나발이고 결국 스포츠는 성적이라고. SNS? 브랜딩? 다 쓸데없어. 압도적인 성적만 있으면. 스포츠는 결국 그게 전부지, 아니야?”
“그게... 전부지... 야구 잘하는 선수가 당연히 슈퍼스타가 되어야지.”
“라이벌이 있을 만큼 어정쩡하게 잘하는 수준이면 당연히 필요하겠지. 그리고 아무리 대단한 NO.1이어도 라이벌마저 없을 정도로 대단하긴 쉽지 않고. 형은 그 대단한 일을 해낸 거야. 그러니까 다른 건 신경 쓰지 마.”
“원래 신경 안 쓰고 사는데 자꾸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내가 대체 얼마나 신경 안 쓰고 살아야 하는 거냐?”
모든 게 완벽했다.
회사와 팀, 팬과 전문가, 언론까지 모두 기록 달성에 방해될까 봐 조심조심, 신줏단지 모시듯 최선을 다해 영도를 모셔주었다.
덕분에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들뜰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능한 한 야구에만 최선을 다할 수 있었고, 지금의 엄청난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영도가 쇠심줄을 자랑하는 선수라 하더라도,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멘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선 평소와 같을 수 없었다.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쓰는 상황이고 모든 팬들, 야구인들, 나아가 미국과 전 세계가 영도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는 상황인데 열반의 경지에 들어선 성인이라 해도 이럴 땐 흔들리는 게 당연했다.
영도도 조금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의 무시무시한 기세마저 무너뜨릴 정도로 심하진 않았다.
지금의 강력한 기세와 바람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할 정도의 흔들림이었고, 영도는 자신의 멘탈을 아주 훌륭하게 관리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배리 본즈의 홈런 신기록을 향해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꾸준히 달려가는 중이었다.
***
[‘청정 타자 홈런 신기록 2위’ 로저 매리스 유가족, “로저의 기록을 깬 선수 중 유일하게 영광스러운 선수. 그가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으면 한다. 응원하겠다.”]
[‘커리어 통산 홈런 2위’ 행크 아론 유가족, “로저의 가족들이 부럽다. Y-DO가 이대로 쭉쭉 페이스를 유지해 행크의 기록을 깨는 첫 번째 영광스러운 선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의 3시즌 60홈런 기록 보유자’ 새미 소사 아들, “이렇게 또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영광”]
[‘메이저리그 최초의 70홈런’ 마크 맥과이어, “훌륭한 후배가 등장했다. 40년이 지났고, 이젠 새로운 이름이 등장해야만 하는 시기.”]
[‘묵묵부답’ 배리 본즈, 본인 기록을 깨주길 바라는 분위기가 또 그의 마음에 안 들었을까]
미국 전체가 영도의 홈런 레이스에 모든 관심을 쏟았다.
워낙 많은 관심이 쏟아지다 보니 메이저리그에서 ‘홈런’ 하면 언제나 언급되는 과거 선수들과 그 가족들까지 심심찮게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갑내기의 두 레전드, 로저 매리스와 행크 아론은 약쟁이들에게 영광을 빼앗긴 선수들로, 이들의 유가족들은 명예롭지 않은 선수들이 아닌 명예로운 선수, 결격사유가 없는 선수에게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명예로운 선수에게 자리를 내어준 과거의 레전드로 기억되길 원했다.
반면, 약물의 후유증으로 고생 중인 새미 소사와 마크 맥과이어, 배리 본즈는 각각의 스타일대로 대응했다.
세 명의 도핑 괴물 중 가장 평가도 떨어지고 이미지도 바닥을 뚫고 추락한 새미 소사는 이번에도 언론에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나마 아들이 대신 나서서 수습했지만, 아버지를 향한 조롱을 막을 순 없었다.
마크 맥과이어는 그래도 이미지 재고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법정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홈런타자의 강인한 이미지와 달리 본성은 여린 편이었고, 신인 최다 홈런인 49홈런을 때리고 50홈런을 노릴 수 있는 마지막 경기에 결장하고 아들의 출산을 지켜보기 위해 아내의 곁을 지킨 일화처럼 미국인이 환장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유명한 아들 바보 중 한 명이었고, 소사, 본즈와는 달리 약물, 그리고 법정에서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제외하면 사생활은 훌륭한 선수였다.
이번에도 역시 맥과이어의 언론 대응은 흠잡을 곳 없이 모범적인 편이었다.
배리 본즈는 현역 시절에도 그러했듯 본인이 피해자다, 언론은 자신을 공격하려고만 한다, 는 반응을 보이며 언제나처럼 오만하게 무시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떨어질 이미지도 없고, 언제나와 같은, 일관성 있는 모습이었기에 이미지가 더 떨어지진 않았다.
[Y-DO는 꾸준히 달린다. 9월의 첫 경기부터 홈런포 터뜨리며 66호 홈런 고지 정복! 98시즌 새미 소사의 기록과 동률 이루며 역대 최다 홈런 공동 3위 등극!!]
[역시 Y-DO는 영화의 주인공이었나... 절묘한 위치 선정으로 시카고 컵스와의 리글리 필드 원정 경기에서 67호 홈런 폭발!! 새미 소사를 제치고 단일 시즌 최다 홈런 단독 3위 올라...]
[예상대로 무덤덤한 시카고 컵스 팬들. “새미 소사의 기록? 컵스의 이름이 한 칸 아래로 떨어진 건 아쉽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아쉬울 것 없어...”]
정말로 영화의 주인공이었다면, 2042시즌이 영화였다면 영도의 페이스는 각본의 실수였을 것이었다.
영도는 이렇다 할 위기 없이 자신의 페이스를 꾸준히 유지하며 홈런을 쌓아나갔고, 배리 본즈와의 격차는 생각보다 컸다.
결장 경기 수도 9:1인데 그걸 무시하고 출장 경기 수로만 비교해도 6, 7경기씩 앞서니 긴장감은 살짝 부족했다.
하지만 긴장감과 불안감은 부족해도 기대감은 훨씬 컸다.
이제 본즈의 기록까지 6개 차이까지 접근했으니 같은 페이스라 할지라도 느낌 자체가 이전과 달랐다.
이제는 특별한 사고가 없으면 73홈런 기록을 깨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과연 영도가 73홈런, 그리고 73홈런을 넘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상황.
야구 팬은 물론이고 야구에 관심 없는 일반인에게마저 유영도라는 이름 석 자가 깊게 침투하고 있었다.
< 또다시 신드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