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이 좋은 이유 >
44번째 홈런을 끝으로 메이저리그의 전반기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올스타 브레이크에 돌입했는데, 영도는 브레이크를 브레이크답게 보내지 못했다.
물론, 모두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불멸의 기록일 것 같았던 배리 본즈의 73홈런 기록에 도전 중인 영도였기에 올스타전 투표에서도 압도적인 격차로, 양대 리그 통틀어 득표수 2위와 거의 1.5배의 격차로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이번에도 올스타 홈런더비는 영도의 것이었고, 홈런더비에 참가한 선수들도 진지하게 이길 생각은 없었다.
전체 득표 2위와 1.5배의 격차,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이야기할 때 항상 언급되는 홈런더비 참가자들도 시작 전부터 우승을 포기할 만큼의 압도적인 포스.
그게 지금 영도가 차지하는 위치였고, 위상이었다.
비록 대부분의 선수가 휴식을 취하는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무시무시한 체력을 자랑하는 영도에게 이 정도는 딱히 부담도 아니었고, 움직인 만큼의 대가를 가져오기도 했고.
미국 스포츠에서는 한국과 달리 선수의 클래스를 평가할 때 항상 올스타전 출전 횟수를 포함하는데, 영도는 복귀 이후 두 시즌 연속 올스타전 진출을 이뤄냈다.
[자, 레즈도 이제 빨리 팀 컨디션을 찾아야 합니다. 전반기에 쌓아둔 게 많아서 웬만하면 포스트시즌 진출까지 문제없겠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최대한 빨리 부진에서 빠져나와야죠.]
[그럴 수 있어요. 레즈는 젊은 팀이고 여름은 베테랑과 루키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잔인한 계절이니까요. 하지만 베테랑은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페이스를 유지할 노하우가 있는데, 루키에게 그런 걸 기대하긴 어려워요.]
[레즈로선 다시 분위기에 올라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난 시즌 로키스가 보여줬듯 홈런 군단은 분위기를 띄우는 게 비교적 수월하다는 걸.]
[그렇죠. 레즈는 지난 시즌 로키스와 비교했을 때 20홈런 타자 숫자는 부족하지만, Y-DO의 뒤를 받쳐주는 2옵션, 3옵션의 홈런 생산력은 로키스와 비교할 수 없는 정도거든요. 전체적인 팀 홈런 숫자는 큰 차이 없을 거예요.]
[Y-DO도 지난 시즌보다 페이스가 더 빠르고 센시오 리코도 38홈런 타자에서 50홈런 타자로 성장 중입니다. 25+홈런 타자였던 유리 파체코도 35+홈런 페이스. 그런데 이렇게 동시에 터지는 걸 보면 Y-DO 이야기를 안 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Y-DO가 3번, 파체코와 리코가 2번과 4번 타순을 주로 맡는데 이러면 이건 우산 효과죠. 우산 효과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고 대부분은 Y-DO의 지분이지만, Y-DO 역시 리코와 파체코의 덕을 안 보는 건 아니거든요? 70홈런 타자, 50홈런 타자, 35홈런 타자가 주루룩 붙어 나오는데 투수들이 어떻게 제 기량을 보여주겠습니까.]
어떤 팀이든 이 시기엔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몇몇 팀들도 있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이 팀을 가렸으면 이처럼 악명을 떨칠 이유가 없었다.
여름은 어떤 팀에게든 잔인한 계절이었고, 노하우가 없는 젊은 선수들에겐 더더욱 잔인했다.
이 시기를 잘 넘기는 노하우가 생겨야만 유망주 딱지를 뗄 수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누구에게나 힘든 계절.
유형근은 해외 진출 첫 시즌이자 급격하게 늘어난 이동 거리, 급격하게 높아진 상대 수준 때문에.
토드 칸터, 센시오 리코는 아직 적은 경험으로 인한 노하우의 부재, 심지어 2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체구까지 겹치며 여름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는 선수들.
34세로 더 이상 젊지 않은 나이가 된 카를로스 사뇰은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체력적인 부담으로.
어떤 팀이든 여름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레즈는 유독 핵심 선수들이 여름을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 팀이었다.
후반기 개막 이후 펼쳐진 5경기에서 2승 3패.
성적 자체는 그럴 수도 있는 수준이지만, 상대한 팀이 같은 지구 최하위인 피츠버그 파이리츠, 1, 2위와 격차가 꽤 나는 3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라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아쉬운 성적.
‘다 같이 힘들어할 때 나 혼자 뛰쳐나갈 수 있다는 건... 어려움이 아니라 행운이지.’
그래서 영도의 장점이 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남들 다 잘할 때 같이 잘하는 선수도 물론 대단하지만, 그건 임팩트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영도는 남들 다 빌빌대는 여름에 강력한 선수였고, 최소 1, 2개월 정도를 혼자 내달리며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할 수 있는 선수였다.
성적 자체도 대단하지만, 매 시즌 1개월 이상 모든 관심을 혼자 받는 선수가 슈퍼스타가 되지 못한다?
그건 콧방귀도 안 나올 만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동료들 컨디션이 다 떨어져서 혼자 힘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팀 승리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지.’
그리고 영도는 혼자 스포트라이트 받는 걸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물론, 지난 시즌을 기점으로 과거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승부욕이 살아났지만, 그렇다고 본인 성적, 본인 입지와 위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야구관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번 시즌의 레즈는 이미 승리를 많이 벌어놔서 여전히 포스트시즌 진출이 낙관적인 팀이었고, 포스트시즌 진출 이후에는 와일드카드를 제외하면 어차피 동등한 조건으로 돌아갔다.
승부욕이 살아났어도 팀의 승리보다는 자신의 활약을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절박하게 승리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다?
그러면 나 혼자 빛난다고 억울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확실히 좋은 투수네. 구종도 다양하고 맞춰 잡는 투수인데도 굳이 따지자면 공격적인 편이고.’
유럽 지역 공략을 위해 중요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이스, 마르셀 융.
90마일 초반대에 불과하지만, 매우 정교하게 제구되는 패스트볼과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의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투심 등의 다양한 구종.
정교한 커맨드를 활용하는 영리한 피칭으로 유리한 카운트를 잡아낸 뒤, 타자를 유혹해 맞춰 잡는 피칭.
그런데 비교적 공격적인 피칭을 즐기기 때문에 타자를 조급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좋은 투수.
‘그래도...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의 명문 구단에서 에이스 역할을 맡을 급은 아니야.’
또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는 걸 전적으로 보여주는 선수이기도 했다.
신시내티 레즈야 홈구장의 문제와 재정적인 한계로 제대로 된 에이스를 보유하기 어려운 팀이라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투수가 에이스로 있어야 하는 팀이었다.
마르셀 융은 정말 좋은 투수고, 순수 유럽 출신 선수 중 NO.1을 다툴 만한 뛰어난 선수였지만.
어디까지나 준수한 2선발 정도가 어울렸지, 명문 구단의 에이스급 투수는 아니었다.
‘이런 맞춰잡는 투수한테는 자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를 가지고 놀면서 타자를 유혹하는 스타일의 투수들은 영도의 밥이었다.
히팅 포인트가 아주 어긋나면 물론 어렵지만, 조금 어긋난 정도는 힘으로 그냥 이겨버릴 수 있으니까.
어차피 정교한 컨택 능력을 앞세운 스타일도 아니기에 히팅 포인트는 자주 어긋나는데, 어차피 어긋날 히팅 포인트면 파워 피처보다는 피네스 피처가 편했다.
그렇다고 파워 피처에게 약한 건 또 아니었지만.
정직하지만, 강력한 파워로 찍어누르는 공은 또 파워로 맞상대해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니까.
그냥 이번 시즌의 영도는 말도 안 되는 기록, 73홈런에 도전 중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는 상정 외의 괴물이었다.
[높이! 높이 뜨는 문 샷!! 원래 이렇게 높이 뜨면 아쉬움을 표현하겠습니다만... 그렇죠! 이겁니다! 넘어갑니다!]
[Y-DO의 타구는 일단 배트에 맞는 순간 기대해도 돼요.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타구에 기대해? 완전히 빗맞았는데? 아뇨, 기대해도 돼요! 그게 Y-DO의 타구예요!]
[후반기 개막 이후 6번째 경기에서 3번째 홈런! 역시 Y-DO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162경기 73홈런에 도전하려면 시즌 내내 이 정도 페이스를 유지하긴 해야 해요. 하지만 확실히 컨디션이 더 좋아 보이긴 하네요.]
[전반기 성적도 0.290/0.459/0.771에 44홈런, 말도 안 되는 성적이고, 역사에 남을 만한 페이스였지만, 배리 본즈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그래도 조금 더 끌어올릴 필요가 있지 않았습니까? 일단 여름의 시작은 아주 좋습니다.]
[전반기 90개의 안타 중에 61개가 장타, 44개가 홈런... 이러면 후반기에 타율을 조금만 더 끌어올린다 쳤을 때 충분히 73홈런 기록에 도전해볼 수 있겠죠.]
지난 시즌의 엄청난 임팩트와 그보다 더 강력한 임팩트를 보여준 포스트시즌에서의 모습.
이번 시즌 들어 장타력을 보다 끌어올리기 위해 스트라이크 존을 넓혔고, 토 탭과 백스윙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기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배트를 휘두르는데 상대 투수들은 지난 시즌보다도 더 어렵게 승부해오는 상황.
아무래도 타율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만큼 출루율은 말도 안 되게 뻥튀기되었고, 장타율 역시 지난 시즌과 비교해도 눈에 띄게 상승했다.
하지만 목표가 배리 본즈의 기록이라면 조금 더 페이스를 끌어올리긴 해야 했다.
2001시즌부터 2004시즌까지, 약빨을 제대로 받은 4시즌 동안의 본즈는 0.349/0.559/0.809의 말도 안 되는 비율 스탯을 찍으며 209홈런, WAR 47.3을 기록한 진정한 괴물이었으니까.
2001년에 이미 36세였던 본즈에 비해 젊은 데다가 내구력까지 괴물인 영도는 훨씬 더 많은 타석에 들어서겠지만, 01시즌 본즈의 타율도 0.328로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타율을 끌어올리긴 해야 했다.
“와... 진짜 말하는 대로 다 하네요? 이럴 거면 100홈런쯤 치겠다고 약속하세요. 그러면 진짜 100홈런도 때릴 것 같으니까.”
“... 대체 넌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음... 괴물? 처음으로 만난, 이 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보다 더 뛰어난 재능?”
“그래. 한 문장으로 너랑 내 얼굴을 동시에 뜨겁게 만드는 능력 하난 알겠다.”
여름은 내가 맡을 테니 컨디션 회복에 집중하라고 슬쩍 건넸던 한 마디가 안 그래도 부담스러웠던 리코의 존경심을 키운 듯했다.
‘그냥 내가 이 팀의 간판인 건 사실이니 간판으로서 할 말을 가볍게 던진 것뿐이었는데... 여름에 자신 있기도 하고.’
전생에도 첫 번째 인생에서, 100% 처음부터 타고난 재능만 가지고 40홈런 타자가 된 센시오 리코.
까놓고 보면 훨씬 대단한 선수일 리코가 이럴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조금 낯뜨겁기도 하고, 많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혹시 모르지. 무의식 속에서 리코 같은 대단한 재능들이 보내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열심히 하는 것일 수도.’
그래도 자신 덕분에 리코 역시 전생보다 더 빨리, 더 대단한 선수가 되어가는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원래 리코는 거대한 체구 때문이었는지 은퇴할 때까지 여름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해 충분한 파워를 가지고도 50홈런 고지를 한 번도 밟지 못했으니까.
‘이대로라면 여름의 약점은 몰라도 조금 더 나은 선수는 될 수 있겠지.’
한 번 해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컸다.
한 번 해본 일은 두 번째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선수 본인의 마음가짐 변화는 그만큼 큰 차이를 불러일으켰다.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팀 동료들의 발전을 도와주는 선수라... 좋네.’
전생을 포함해 정말 오랫동안 프로 바닥에 있었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동료를 도와주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런 걸 신경 쓸 수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기 때문에.
존재만으로도 팀 동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심 조금은 불편하고 미안했던 마음이 덜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마음이 편해지면... 성적도 더 잘 찍히겠지.’
그래도 모든 건 결국 자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20년 동안 한결같이 유지한 스탠스가 그리 쉽게 바뀔 리 없었다.
마음먹는다고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다면 꼰대라는 단어가 왜 있겠나.
지금은 그저 동료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었다는 것, 팀과 동료들에게 우승이란 큰 선물을 안겨줄 수 있는 선수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누가 또 아는가.
살다 보면 지금보다도 더 큰 도움을 주는 선수가 되어있을지.
< 여름이 좋은 이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