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반기의 끝, 여름의 시작 >
[완벽한 리빌딩의 예시가 신시내티 레즈라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그냥저냥 평범한데 살짝 아쉬운 수준, 그러니까 쉽게 말해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리빌딩을 진행 중입니다. 좋은 유망주가 몇 명 나오긴 했지만, 팀의 미래를 걸어볼 수준이냐고 물으면 좀 애매한 그런 흔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카디널스는 그래도 인기도 많고 돈도 많은 팀이죠. 굳이 따지자면 빅마켓이라고 하기엔 조금 아쉬울 수 있어도 빅마켓에 가까운 팀이고요. 하지만... 시간이 많이 남아있진 않습니다.]
[전통의 선수 육성 명가인 카디널스인데 최근 3, 4시즌 정도는 유독 눈에 띄는 루키가 보이지 않습니다. 팀의 핵심인 아놀드 그레고리도 이제 31세 시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죠. 하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잖아요? 늦어도 2, 3시즌 안에 다시 한 번 대권에 도전할 전력을 마련하겠죠. 언제나 그래 왔듯이.]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13회의 월드시리즈 우승 기록을 가진, 내셔널리그 월드 시리즈 최다 우승팀.
내셔널리그 3대 명문으로 꼽히는 다저스의 3할대, 자이언츠의 4할대 월드시리즈 승률에 비해 월드시리즈 승률이 거의 6할에 육박하는 ‘이길 줄 아는 팀’.
가을 야구만 가면 의문의 각성을 반복하는 가을 좀비.
메이저리거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야구 잘하는 팀.
카디널스는 워낙 명문 구단이다 보니 광역권 인구 300만 명으로 중하위권에 불과함에도 항상 평균 관중 순위 TOP 5에 드는 인기를 자랑했다.
필리스, 자이언츠, 컵스, 다저스 등과 함께 내셔널리그 최고 인기팀 중 하나이자 메이저리그에서 몇 안 되는 전국구 인기 구단, 그 어떤 팀보다 팜에서 자체적으로 육성한 MVP를 많이 배출하는 구단,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양질의 유망주가 등장하는 구단이기도 했다.
강력한 팀 전력, 미래가 보장되는 탄탄한 팜 시스템, 이를 받쳐주는 안정적인 재정.
이 세 가지 요소가 안정적으로, 유기적으로 돌아가 항상 영업이익 최상위권에 위치하는, 메이저리그 구단 운영의 롤모델.
절대 돈이 없는 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은 팀도 아닌데 양키스, 레드삭스, 다저스, 컵스 등의 메가마켓처럼 리빌딩보다 리툴링을 선호하는, 그리고 결과도 좋은 팀.
이 팀의 진정한 힘은 전통 강호답게 수많은 슈퍼스타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이 특정 시기에 몰려있지 않은, 압도적인 육성 능력에 있었다.
23회의 내셔널리그 MVP 배출 횟수 역시 내셔널리그 1위.
하지만 메이저리그 구단 운영의 롤모델로 꼽히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도 부침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간혹 어려운 시기가 찾아오긴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였다.
리툴링 돌입 후 3, 4시즌이 지났지만, 아직도 2, 3시즌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상황.
MVP 출신인 현재 카디널스의 핵심, 아놀드 그레고리는 과거 팀 선배들과 비교해 불운한 커리어를 보내고 있었다.
‘나도 아직 한창 전성기를 보낼 타이밍인데...’
아직 쌩쌩한 신체 능력과 그동안 쌓인 경험, 노련미가 융화되어 전성기를 달릴 31세의 나이.
20대 후반에 돌입함과 동시에 팀이 리툴링에 들어가면서 한창 전성기를 달릴 나이에 6, 7년 정도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는 현역 메이저리거 NO.1 3루수라는 타이틀을 위안 삼아 버텼다.
하지만 지난 시즌 전반기에 부상으로 25경기 정도 결장했다가 돌아오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잊혀진 줄 알았던 괴물이 부활해 돌아왔고, 단번에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 간 것.
‘그래, 나도 알아. Y-DO는... 나와 다른 차원에 있는 선수지. 현역 메이저리거 NO.1이 아니라 역대 메이저리거 NO.1을, NO.1 3루수가 아니라 그냥 NO.1을 노릴 수 있는 선수니까.’
상대 팀, 상대 선수라 할지라도 축하할 일이 있으면 쿨하게 격려하고 축하해주는 팬덤을 보유한 거의 유일한 팀의 핵심 선수답게 그레고리는 인성 좋기로 유명한 선수였다.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친 선수에게 수여하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을 정도로 사회 공헌에도 힘쓰는 선수였고.
이런 선수가 영도와 자신의 격차를 부정할 리 없었다.
그가 정말로 아쉬워하는 건 영도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게 아니었다.
‘왜 하필이면 지난 시즌에 다쳐서... 지난 시즌만 건강하게 치렀어도 Y-DO와 진지하게, 진심을 다해 붙어볼 수 있었을 텐데. 한 번 어떻게든 이겨보겠다고...’
영도라는 존재가 규격 외의 괴물이어서 그렇지, 그레고리 역시 괴물 수준에 들어가는 엄청난 재능의 선수였다.
20대 중후반에 이미 MVP를 수상하고 메이저리그 NO.1 3루수로 꼽힐 정도였으니 괴물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넌센스일 수밖에.
그리고 너무 일찍 정점에 오른 그는 항상 새로운 자극과 깨달음을 원했다.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하게끔 자극해줄 누군가를 기다려왔다.
‘결국에는 졌겠지. 당연히 졌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질 거라 생각했을 리 없고, 진지하게 도전하면서 내 한계와 마주해볼 기회였는데...’
결국에는 패배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자리, 현역 NO.1 3루수라는 허울뿐인 명예를 위안 삼는 것보다 나의 성장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까진 신경 쓰지 못하는 상태가 더 좋았다.
25경기 결장은 진지하게 붙어보기도 전에 패배를 인정하기 충분한 공백이었고, 그레고리는 그게 너무나 아쉬웠다.
[자,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 44호 홈런에 도전하는 Y-DO가 첫 타석에 들어섭니다. 80번째 경기에서 40호 홈런을 때리고 이후 16경기에서 3홈런에 그치지 않았습니까? 어느새 2001시즌 배리 본즈의 홈런 페이스보다 늦어졌는데 다시 페이스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레즈의 리빌딩은 완벽하다고 했고, 카디널스의 리빌딩은 아쉬웠다고 말했지만... 사실, 모든 건 Y-DO의 힘이죠. 물론, 칸터-리코-포터 40시즌 루키 3인방의 등장만으로도 훌륭한 리빌딩이었지만, Y-DO가 없었다면 레즈도 디비전 시리즈나 챔피언십 시리즈 정도에서 좌절했을 확률이 높아요.]
[그렇습니다. 레즈가 팀의 운명을 걸고, 모든 걸 걸고 올인해 영입한 Y-DO, 일단 현재까진 너무나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심이 많아서 그래요. 배리 본즈의 기록이, 그 누구도 깰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그 기록이 눈에 보이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만 더 힘내줬으면 좋겠거든요?]
‘이젠 이길 생각은 안 해. 최선을 다해 따라가 주지. 너라는 규격 외의 괴물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조금씩 성장할 테니까. 그나저나 내가 누군가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니...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네.’
NO.1 3루수 자리를 잠깐 한눈판 사이 빼앗겼지만, 의외로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따라가려 노력한다는 것, 따라갈 선수가 있다는 것...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야구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어릴 때 생각나네.’
이쪽으로 타구를 날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주마.
뭐... 전반기 90여 개의 안타 중 홈런만 43개고 단타는 고작 30개 정도에 불과하지만, 타율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니까.
이번 시즌 수차례 만나는 동안 3루 땅볼도 꽤 많이 치던데 오늘도 실수 없이 잡아줄...
[이겁니다! 우린 이걸 기다렸습니다! 잡아당겨서 부시 스타디움의 2층 관중석, 그중에서도 상단에 꽂아버리는 Y-DO의 대형 홈런!! 다시 홈런포를 가동하며 이번 시즌 44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자, 산술적 계산으로 이제 다시 73.5홈런 페이스까지 끌어올렸거든요? 이대로만, 이대로만 하면 되는 거예요!]
[어느새 7월 중반에 접어들었고,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예!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름은 Y-DO의 계절이죠!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73.5홈런 페이스다? 이거 굉장히 좋은 신호입니다!]
‘허... 괴물 자식...’
그레고리는 허탈하게 웃으며 베이스를 도는 영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속마음을 들은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들었다면 지금 자신을 보며 웃고 있을 테니까.
‘그래, 먼저 가라. 나도 아직 31살밖에 안 먹었어. 아직 충분히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시대를 지배하는 압도적인 재능마저 자존심을 접고 아래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활약.
영도의 압도적인 페이스는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도 여전했다.
***
“Y-DO! Y-DO!”
“그래, 리코. 또 뭔데?”
3번 타순을 맡은 영도의 바로 다음 타순, 4번 자리에서 활약 중인 센시오 리코는 세 번 중에 한 번은 본인 타석이 끝나자마자 영도에게 달려왔다.
처음에는 계속 찾아오는 리코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
이젠 그냥 자연스러웠다.
“여름이에요, 여름이 왔습니다. 몸이 내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데요?”
“... 그걸 네가 몰랐을 리는 없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Y-DO는 어떻게 여름에도 이제 막 시즌 시작한 것처럼 쌩쌩한 겁니까? 사람이 그게 가능한 겁니까?”
“아... 그거...”
신시내티 레즈의 2042시즌 전반기는 더없이 완벽했다.
승률은 물론이고 젊은 선수들이 다들 한 단계씩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번 시즌은 물론 다음 시즌, 나아가 리빌딩 선언 후 유망주 수급에도 파란 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지난 시즌의 로키스처럼 레즈 역시 아주 젊은 팀이었고, 분위기에 지나치게 휩쓸린다는 단점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 팀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시작된 최악의 계절, 여름.
아직 노하우와 경험이 부족한 젊은 선수들이 하나둘 체력적인 부담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여름에도 멀쩡할 수 있느냐...”
“예. 노하우가 있으면 좀 가르쳐줘요. 베테랑 좋다는 게 뭡니까?”
“일단, 하나는 말해주지. 난 베테랑이 아냐. 너랑 풀타임 2시즌밖에 차이 안 난다. 나이도 두 살 차이밖에 안 나고.”
“아... 그런데 왜 이렇게 선배 같지? 2035시즌에 메이저리그 데뷔한 거 아니었습니까?”
“맞아. 그때 19살이었고.”
“와... 진짜 재능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역시 Y-DO는 대단합니다!”
그래, 말을 말자.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찬양이니 길게 설명해봤자 영도만 피곤했다.
“나도! 나도 궁금한데? 체력 관리하는 비법이라도 있어요?”
“그러니까. YG도 궁금하다는데요? 살짝이라도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됩니까?”
“음... 들어도 실망할 텐데. 너희한테 도움될 방법도 아니고.”
영도는 민망하게 뺨을 긁적였다.
제아무리 무신경한 성격이라 해도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나라도 가르쳐 달라 달라붙는 후배들을 보면, 특히 그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라면.
민망함이라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타고난 거다. 난 비시즌에도, 시즌 중에도 다른 선수들보다 하드하게 트레이닝하는데 체력이 부족하단 느낌은 받은 적 없으니까.”
“아... 타고난 거...”
“와! 역시... 역시 Y-DO는 타고난 것부터 달랐던 거군요!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따라잡을 수가 없지... 대단합니다!”
“센시오... 적당히 좀 하자. 형, 형도 고생이 많아.”
“그래. 너라도 알고 있어라.”
이번에도 그냥 쓰게 웃고 말았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대처법은 적응되는 데 저런 행동 자체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걸...
“그냥 버텨. 비싸게 왔는데 이럴 때라도 앞장서야지. 어떻게든 버티면 그때까진 내가 알아서 해볼 테니까.”
“그래, 형이 좀 고생해줘. 형 정도 몸값이면 그래야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혼자 두진 않겠습니다. 어떻게든 컨디션 회복할 테니 조금만 부탁할게요.”
여름이 시작되었다.
팀의 운명을 걸었고, 그 선택이 신의 한 수였다 평가받던 신시내티 레즈가 첫 번째 시험대에 올랐다.
그리고 영도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 전반기의 끝, 여름의 시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