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다시 한 번, 도전 > (158/200)

< 다시 한 번, 도전 >

“... 한 번 만나자고 해서 나오긴 했는데... 뭐 이렇게 많습니까?”

“어쩌다 보니? 난 FA 1년 보장으로 장기계약을 맺어서 이번에 나왔고, 형근이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포스팅 신청했고, 성훈이 형이랑 정규 선배는 딱 FA. 타이밍이 잘 맞았지.”

영도는 지금 한국 선수들과의 약속 자리에 나와 있었다.

이들 모두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새로운 팀을 구하는 타이밍이었는데, 그 새로운 팀을 메이저리그에서 구하고 있었다.

인원은 영도를 제외하고 총 4명.

KBO에서 영도의 유일한 라이벌로 거론되다가 부담감에 그 시즌을 망쳐버린 서울 타이탄스 소속 3루수 김진형.

마찬가지로 영도의 유일한 대항마로 거론되었으나 KBO와 MLB의 격차를 보여줬다며 조롱당한 수원 매지션즈 소속 선발투수 유형근.

클로저로는 어렵겠지만, 불펜으로는 메이저리그 진출이 가능하다고 평가받은 수원 매지션즈 소속 클로저 반성훈.

그리고 FA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4년 계약을 마치고 두 번째 FA를 맞이한 시카고 컵스 소속 3선발 안정규.

지난 시즌 직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1+1년 6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으나 부진과 부상, 노쇠화가 겹치며 한국 리턴을 선언한 만 37세의 노장 조유성이 빅리그를 떠났으나, 새롭게 세 명이 빅리그 문을 두드렸다.

“형은 메이저리그 올 것 같았습니다. 지난 시즌 대단하던데요.”

“욕심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성장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

“욕심을 버리셨던 겁니까?”

“너 때문에. 너 하는 거 보니까 우린 급이 다르다는 걸 알겠더라.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보다 조금만 더 잘하자, 했더니 갑자기 눈이 뜨이더라.”

2040시즌, 영도에게 라이벌 의식과 열등감을 불태우다가 막판에 겨우 정신 차리고 시즌을 완전히 말아먹을 뻔했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난 김진형.

그래도 그렇게 정신 차린 뒤 보여준 시즌 막판의 포스는 무시무시했고, 2041시즌에도 유지되었다.

2040시즌의 영도와 비교할 순 없지만, 어쨌든 2040시즌의 주인공이 영도였다면 2041시즌의 주인공은 그였다.

0.325/0.401/0.628 43홈런에 WAR 7.2

리그를 지배했다고 말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성적이었고, 메이저리그의 관심을 당연히 받을 수밖에 없는 성적이었다.

포스팅 금액과 이적료도 필요 없는 완전한 FA.

김진형은 이번 FA 시장에서 꽤 상위에 위치한 A급 매물로 평가받았다.

“영도 형! 형 완전히 미쳤던데요?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성적인지...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닙니까?”

“아... 형... 우리가 형, 동생이었나?”

“하하하, 뭐 어때요? 이역만리 미국 땅에 말 통하는 동료가 얼마나 된다고... 이제 형, 동생 하는 거죠, 뭐.”

“그래. 호칭이야 뭐 무슨 상관일까.”

유형근도 마찬가지였다.

21승 3패 EAR2.45 FIP2.29 185.2IP 201K WAR 6.0

2038시즌, 만 21세에 데뷔해 그해 신인왕을 따내며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2039시즌부터 각성,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 에이스로 등극했다.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부진한 적 없었고, 루키 시즌을 빼면 3년 내내 KBO를 지배한 슈퍼 에이스.

포스팅 금액은 상한선 1,500만 달러 이하를 생각할 수 없었고, 실제 계약 규모도 연평균 1,000만 달러 근처에서 이뤄질 거라 평가되었다.

유형근 역시 FA 시장에 나온 선발투수 중 못해도 A급은 된다는 평가.

심지어 2042시즌에도 고작 만 25세, 조금 늦게 데뷔하는 대졸 신인 정도 나이의 젊은 투수라 즉전감이면서 동시에 미래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기량 + 나이 + 아시아 출신 투수와 야수의 성공 확률 등을 봤을 때 김진형보다 꽤 좋은 조건을 받아들 수 있을 것이란 평가가 많았다.

“성훈 선배는 한국에 남는 게 금액적으로는 훨씬 이득이었을 텐데.”

“우리가 또 같은 팀이라 그 이유는 내가 잘 알죠. 어차피 지금까지 번 돈도 십수 억인데 앞으로 벌 돈까지 더하면 작은 상가나 건물 사서 먹고살 수 있대요. 돈은 그거면 됐으니 메이저리그 마운드 한번 밟아보고 싶다던데요? 세계에서 야구 제일 잘한다는 놈들이랑 붙어보고도 싶다고 했고.”

“메이저리그에서 1, 2년 실패해도 한국 돌아가면 또 수십억대 계약 할 수 있고?”

“그런 말도 넌지시 했죠. 솔직히 메이저리그 진출 노리는 선수치고 그거 모르는 사람 있나요? 다 그런 보험이 있으니까 멋있는 척 도전도 해보고 그러는 거지.”

안정규는 대권을 노리던 강팀, 시카고 컵스에서 4년간 선발 로테이션의 허리를 든든히 지켜주며 3번이나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견실한 투수로 만 33세라 그래도 2, 3년은 기량을 유지할 수 있는 준척급 선발.

반성훈은 약팀 클로저에서 강팀 프라이머리 셋업맨까지도 노려볼 수 있다고 평가받는 만 30세, 한창 전성기의 위력적인 불펜 투수.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실패한 선수들도 KBO로 돌아가면 바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괴물이 된다는 건 이미 검증이 끝난 사실이었다.

이들 역시 당장은 금전적인 손해가 있겠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면 하는 대로, 실패하면 또 하는 대로 큰 걸 얻을 수 있었기에 과감하게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

“물론, 다들 그렇게 도전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죠. 병헌이 형이나 찬우 형, 익훈이 형은 생각 없나 봐요. 성흠이 형은 고민 중인 것 같고.”

“그런가. 다들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 꼭 전해줄게요. 형이 그렇게 평가했다고 하면 생각 바뀔 걸요?”

“내 책임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난 그냥 잘할 수도 있을 거라 했지. 다 본인 하기 나름이다.”

“아, 맞다... 박희성 선배님이 찬우 형이나 병헌이 형보다 성적도 더 좋았지... 그럼 그 형들도 오면 20개씩 치던 홈런 5개 정도까지 줄어들겠네...”

“모르지. 와봐야 알지. 같은 성적이어도 성공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정말 도전하고 싶은 사람만 도전하는 게 맞다.”

어차피 1년의 2/3를 홈 경기와 원정 경기에 시달리는데 한국 선수 늘어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본인들이 알아서 오고 싶은 사람은 오고 꺼려지는 사람은 안 오면 되는 것.

결정은 본인이 하는 거니까 조언을 해달라 해도 별로 해주고 싶지 않았다.

도움이 되겠다고 직설적으로 말해봤자 나만 나쁜 놈 되는 거지.

솔직히 안성흠은 KBO에선 투수에게 필요한 모든 걸 갖춘 무결점의 선발투수, 빅리그에선 모든 요소가 애매한 투수가 될 거라 생각하지만...

박병헌과 최찬우도 최대로 잘 풀려야 박희성 정도고 그보다 살짝 아쉬운 성적이 찍힐 거라 생각하지만.

‘굳이 솔직할 필요는 없겠지. 그것도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살짝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땐 더더욱.’

직접 찾아와서 조언을 구한다면...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짧은 시간이라도 진지하게 조언해줄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소리를 냉정하게 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무조건 본인이 있는 곳에서 해야만 했다.

그게 예의였고, 오해를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형. 내셔널리그에 있을 거예요? 아니면 아메리칸리그?”

“그건 왜 물어봐? 영도가 내셔널리그에 있으면 어쩌려고?”

“그럼 당연히 아메리칸리그로 가야죠! 형은 같은 야수라 상관없겠지만, 난 40년 만의 뭐, 80년 만의 뭐, 막 이런 괴물 타자랑 별로 붙고 싶지 않아요.”

“... 너 한국에서 만났을 땐 오히려 더 달려들지 않았었나. 그때도 KBO 기록은 다 깨고 다니던 시절인데.”

“에이... 내가 한국 사람으로서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KBO 기록이랑 빅리그 기록이 같나... KBO 65홈런 때리던 시절엔 그래도 이겨보겠다고 달려들 수 있었는데, 어휴, 지금은...”

“나랑은 뭔가 포스가 다르고 그런가?”

“음... 형은 한 번 붙어서 잡아보고 싶은 포스고, 영도 형은 웬만하면 같은 팀이고 싶은 포스죠. 만화 같은 데 보면 진짜 대단한 선수랑은 같은 팀은 싫고 붙어보고 싶다, 뭐 이딴 개소리들 하던데... 진짜 대단한 선수는 같은 팀이어야지. 그래야 우승도 하고 막 그런 거 아닌가?”

영도도 그렇지만, 유형근과 김진형은 아예 팀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진형은 어차피 영도와 만날 일도 없고, 포지션도 같아 같은 팀이 되기도 어렵지만, 유형근은 살짝 다른 입장.

KBO에선 메이저리그에서 건너온 타자 한 번 잡아보겠다, 어차피 메이저리그에서 쫓겨난 타자, 나도 언젠가 메이저리그 갈 테니 예행 연습으로 한 번 잡아보겠다... 는 식으로 용감하게 달려들었지만.

1년 사이 영도의 위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고, 또, 영도의 홈그라운드로 넘어오다 보니 잡아야 하는 적수라기보다 함께 가고 싶은 믿음직한 형처럼 보였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이제 풀타임 4년 차다. 어쩌다 일이 잘 풀려서 내년 시즌 끝나면 FA지만, 지금은 팀에서 가라는 대로 가야 하는 입장이거든.”

“아.. 맞다... 형 마이너 거부권이나 트레이드 거부권이나 아무것도 없지...”

“너도 그렇고 진형 선배도 그렇고 넣을 수 있다면 무조건 넣어. 난 지난 시즌 계약할 때도 서비스 타임 3년 채웠으니 마이너 거부권이 굳이 필요 없었던 거고.”

“당연히 한국에서 넘어오는 모든 선수가 보장받고 싶은 게 마이너 거부권이지. 하지만 그게 우리가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거였나.”

“그렇긴 하죠. 나도 받고는 싶은데, 그걸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경쟁이 붙어야 하는 거라. 심지어 전 포스팅 진출이라 막상 계약할 땐 우리 쪽 발언권이 그렇게 센 것도 아니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KBO의 슈퍼스타들.

비록 연차는 짧지만, 이미 독보적인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서비스 타임 5년 차 메이저리거 유영도, 마찬가지로 믿을 수 있는 베테랑으로 인정받는 5년 차 메이저리거 안정규.

이 둘을 뺀 나머지 세 선수는 모두 불안함을 안고 있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말 통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새로운 팀을 구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하루라도 다 잊고 재미있게 놀아보자, 해서 만들어진 자리였지만.

결국, 영도와 안정규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구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하고, 서로의 불안감을 털어놓으며, 하지만 자기 말 외에는 그렇게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며 나름의 방법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자리가 되어갔다.

‘박희성 선배가 바쁘다고 안 온 이유가 있었구나.’

의도는 알겠지만, 딱히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영도로선 그렇게까지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다.

KBO에서 같이 뛰던 선수들을 오랜만에 만난 건 좋지만...

시즌 시작하고 경기하면서 만났어도 좋았을걸.

***

[협상 끝났습니다. 아마 빠르면 내일, 늦어도 이틀 안에는 기사가 나갈 겁니다.]

“예, 승도에게 들었습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연락해주셨다고요.”

[비록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Y-DO를 보내지만, 우리에겐 영웅이니까요. 단장인 제가 직접 나서서라도 이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다 느끼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스토브리그가 가장 바쁘실 텐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제가 못 견뎌서 그런 거죠. Y-DO가 우리에게 해준 게 얼만데...]

12월 중순, 영도의 다음 행선지가 결정되었다.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영도를 원하는 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로키스도, 영도도 최대한 빨리 협상을 끝내고 준비하길 원했다.

다행히 협상 테이블 반대편의 팀들도 어떻게든 영도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일부러 빨리 처리하려 하지 않아도 역제안을 건네면 거의 동시에 수정안이 날아왔다.

그리고 영도는 승도를 통해 그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로키스는 영도의 아주 자그마한 불안감이나 답답함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협상 진행과정을 일일이 전했고, 덕분에 끊임없이 언론을 통해 트레이드 루머가 떠도는 상황에서도 마음 편히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

어쩔 수 없이 영도를 보내지만, 이미 콜로라도의 영웅이 된 영도를 대우하는 로키스의 방식이었다.

[다음 팀에서도, 아니, 다음 시즌부터도 이번 시즌 이상의 화려한 커리어를 쌓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Y-DO의 미래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할 겁니다.]

“저 역시 어디서든 로키스의 성공을 응원하겠습니다. 비록 한 시즌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고, 인상 깊은 시즌이었습니다.”

[그럼 다음 기회가 찾아올 때까지... 멀리서 응원하고 기도하고 있겠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또 한 번 함께 달려봤으면 좋겠네요.”

2041시즌의 화려한, 그리고 모든 걸 손에 쥔 완벽한 시즌을 뒤로 하고.

영도는 또 한 번의 도전을 시작했다.

***

[Y-DO 사가의 승자는 신시내티 레즈!! 체사레 몬도에 데미안 포터까지 내놓은 승부수로 콜로라도 로키스 사로잡아...]

['망해도 2선발' 유망주 통합 랭킹 1위, 2040시즌 ROY 3위의 3년 차 3루수, 미드라이너 포텐셜의 유망주 랭킹 83위... 그리고 2명 더. 신시내티 레즈, 이번엔 정말 운명을 걸었다]

[Y-DO와 센시오 리코, 두 선수의 홈런 개수 합계만 102개... 신시내티 레즈, 공격력에 올인한다!]

< 다시 한 번, 도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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