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동화 > (154/200)

< 동화 >

“어제 경기 끝나고 네가 인터뷰하러 갔을 때. 게일이 다 모아놓고 한마디 했지. 너 보기 쪽팔려서 7차전엔 제발 좀 잘들 하자고. 그래서 그런가? 다들 미쳤어.”

“... 왜 당신은 아닌 것처럼 말합니까? 당신도 오늘 좋아 보이는데.”

“후후... 부끄러우니까. 내가 이 나이에 그런 오글거리는 말 듣고 열심히 뛰었다고 하는 건 너무 부끄러운 일 아닌가.”

“하하, 당신이 쑥스러워하는 모습이라니. 혼자 보기 아깝네요.”

“Y-DO가 환하게 웃는 것도 나 혼자 보기 아까운데.”

15-1까지 점수 차가 벌어지는 동안 영도의 타점은 5타점, 그랜드 슬램을 제외하면 1타점이 전부였다.

물론, 그랜드 슬램 덕분에 타점 지분은 오늘도 굉장히 높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경기 흐름을 완벽하게 휘어잡은 순간의 주인공이 영도가 아니었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로키스가 거둔 지난 세 번의 승리, 그때마다 경기 흐름을 가져온 건 영도였다.

그게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고, 속이 시원했다.

자신을 위해 굳이 신경 써준 것, 그걸 결과로 만들어준 것도 만족스러웠다.

말랑말랑해졌든 아니든 어쨌거나 사이코패스 같은 게 아닌 이상 나를 위해 신경 써주는 건 언제나 고마운 일이니까.

“그나저나 이제 마지막 목표도 이뤘는데, 내년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고민해봐야지. 한 시즌 더 해볼지, 아니면 이대로 기분 좋게 끝낼지.”

“천천히 생각해보면 되겠죠. 한 시즌 더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하는 거고 못할 것 같으면 마는 거고.”

“그래야지. 다음 시즌이면 38인데, 애들이랑 와이프 생각도 해야 하고.”

어쩐지 표정이 편해 보이더니 실시간으로 미련이 사라지는 표정이었나.

갑자기 발데마르 피자로의 얼굴이 생각나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겠지.

별생각 없었는데, 동료들이 전부 그를 언급하며 고소하다, 쌤통이다, 하다 보니 조금 안쓰럽긴 했다.

물론, 그 조금을 제외하면 영도 역시 뿌린 대로 거뒀다는 생각이었지만.

“너나 잘해. 넌 다음 시즌에 어쩔 건데?”

“내가 선택하는 겁니까? 내 선택은 다음 시즌 끝난 다음에야 영향이 있는 걸로 아는데.”

“아... 그런가. 하긴, 다음 시즌에 팀을 옮긴다면 네 선택이 아니라 팀의 선택이겠군.”

“팀이 유망주 패키지 얻어서 다시 몇 년 뒤를 노릴 거면 팔겠죠. 딱히 신경 안 씁니다. 트레이드되면 거기서 또 열심히 하면 되니까.”

조금 말랑말랑 인간다워진 것과 물렁물렁 호구 같아진 건 엄연히 다른 것.

동료들 덕분에 감동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팀에서 그들과 계속 뛰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고.

감동은 감동, 커리어는 커리어.

여전히 영도의 목적은 어떤 팀에서든 주전으로 뛰면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성적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젠 좀 더 이기고 싶으려나.’

메이저리그 복귀 첫 시즌부터 MVP를 넘어 역사에 남을 성적으로 역대급 시즌을 만들어내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누군가는 한 번이라도 손에 껴보기 위해 모든 걸 다 내던지기까지 하는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까지 끼기 직전.

아직 경기가 끝나진 않았지만, 모리스와 대화하다 보니 다음 시즌, 나아가 앞으로의 커리어를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뭔가 허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목표 하나는 확실했는데. 그걸 이뤄내지 못해서 괴로웠을 뿐.’

누구보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왔던 유영도라는 야구선수.

첫 시즌을 너무 완벽하게 보내서일까.

당장은 다음 시즌부터 어떤 목표를 가지고 달려야 하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 마지막 하나!!”

“이제 끝이야! 우리가 역사를 쓰는 거라고!!”

“아웃 카운트 한 개! 마지막 아웃! 2041시즌의 마지막 아웃 카운트!!”

[요앙 페르난데즈가 오늘 경기 마지막 타석에 들어섭니다. 물론,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마 마지막이 될 확률이 높죠. 너무 일찍 점수 차가 크게 벌어져서 로키스도 승리를 확신했는지 너무 일찍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지만... 에이스도 너무 일찍 포기해서 17-3, 5회까지의 득점 페이스에 비해 생각보다 적은 점수로 9회 말 2아웃까지 이어졌어요.]

[에이스 타선이 전반적으로 무기력합니다. 로키스 타선도 5회 이후에는 그랬지만, 이미 17점을 냈는데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번 타석이 마지막이 될 확률이 높다고 말하는 거죠. 타순 한 바퀴 도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할 시간이 아니었다.

아웃 카운트 하나면 다 끝나는데, 그것도 완전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데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고.

덕아웃은 이미 한참 전부터 난리였다.

다들 너무 일찍 들떠서 샴페인도 터뜨렸는데, 점수 차이가 워낙 심하게 나다 보니 그걸 지적하기도 뭐한 상황이 경기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계속 이어진 이 분위기.

그러고도 에이스가 먼저 나가떨어진 덕분에 아무 문제 없이 순탄하게 9회 말 2아웃을 맞이했다.

요기 베라의 말을 대충 짜 맞춰 누군가가 만든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라는 이야기도 오늘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9회 말 2아웃부터 다시 시작하려 해도 아웃 카운트 한 개를 남겨두고 최소 14점을 더 뽑아야 하는데 그게 말이 쉽지...

점수 차이가 너무 벌어져서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 7회 즈음부터 주전 선수들을 차근차근 교체했고, 영도는 가장 먼저 교체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몸이 편해서 자꾸 잡생각이 나나.’

[높게 뜹니다!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타구! 3루수 에르쿨레스가 파울 라인 밖까지 쫓아가서... 잡아냅니다!! 9회 말 마지막 아웃 카운트! 경기 끝납니다!! 2041시즌 월드시리즈 챔피언!! 최고의 자리에서 시즌을 끝낸 건 콜로라도 로키스입니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드디어! 드디어 48년 만에 이뤄냅니다!!]

[말도 안 되는 우승이죠. 로키스도 분명 강했던 시절이 있어요. 포스트시즌 후보로 꼽힌 적도 좀 있고, 실제로 올라간 적도 있고. 하지만 지구 우승을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고 월드시리즈 진출도 이번이 두 번째예요.]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두 번의 시즌 모두 시즌이 시작할 땐 포스트시즌에 절대 진출하지 못할 전력이라고 평가받았던 불가사의한 팀입니다. 시즌 막판 말도 안 되는 질주로 ‘록토버’, ‘록템버’라는 멋진 별명도 얻은 팀이고. 멋진 팀입니다. 오늘의 결과를 누릴 자격이 충분한 멋진 팀.]

[아이고... 해니건은 당연히 울 것 같았는데, 모리스도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흘리네요. 하긴, 이제 은퇴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이고, 화려하지 못한 선수생활에서 우승 반지 하나 끼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는 선수니까 우는 것도 이상할 게 없죠.]

월드시리즈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백업 3루수 에르쿨레스 길의 손에 잡혔고, 동시에 로키스 덕아웃에서 무슨 좀비 떼처럼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낸 주인공들이었다.

언제나 감정에 솔직하고 그만큼 풍부한 게일 해니건은 가장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시리즈 내내 리더랍시고 멋진 척했지만, 로키스 선수단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해니건은 무조건 울 거고, 그것도 1번일 것이라고.

“하하, 앤서니! 앤서니, 축하합니다!”

“너무 기뻐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다음 시즌에 같이 뛸 거죠? 반지 하나는 좀 아쉽잖아?”

“앤서니는 커리어가 좀 아쉽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반지 두 개 정도는 껴야 태가 좀 산다니까요?”

울고 있는 해니건과 모리스를 가운데 두고 마음껏 기쁨을 표출하는 로키스 선수단.

해니건은 그렇다 치고 모리스가 이번 시즌 막판부터 완전히 로키스 선수단의 중심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다음 시즌에 은퇴는 못 하겠네. 원래 계획대로 다음 시즌도 WIN-NOW 시즌일 텐데.’

로키스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음 시즌부터가 본격적인 WIN-NOW 시즌이었다.

강팀이라면 꼭 필요한 신뢰받는 베테랑.

안 그래도 많이 젊은 로키스 같은 팀에는 앤서니 모리스 같은 선수가 꼭 필요했다.

본인의 의지가 강하면 은퇴할 수 있겠지만, 아까 대화해보니까 그 정도로 강한 의지는 아닌 것 같고.

제프리 에녹 단장은 능력 있는 단장인 것 같으니 어지간하면 잡지 않을까, 싶었다.

‘그나저나... 나 이렇게 내 일 아닌 것처럼 건조하게 보고 있어도 되는 건가. 좀 말랑말랑해졌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건가.’

이런 모습들을 마치 당사자가 아닌 것처럼 한 발자국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이상한 그런 기분?

원래 감정이 많지 않고 잘 표현하지 않는 편이라지만, 속으로도 이렇게 건조해서야.

‘음... 지금 가서 수고했다고 말하면 놀리는 것 같겠지.’

몇 안 되는 에이스 시절 친한 동료지만, 너무나도 중요했던 월드시리즈 7차전 선발로 나와 1.1이닝 6실점으로 크게 무너진 믹 고든이 저기 보였다.

무슨 믹 고든까지 눈에 들어올까. 이 중요한 순간에.

월드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누리기에도 부족하디 부족한 시간인데.

요즘 승부욕이 좀 살아났나, 했는데 딱 경기에서 이기는 것까지인가 싶었다.

경기에서 이기고 나면 이후에 벌어지는 일이나 보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건가, 싶기도 하고.

“으하하하, 됐어! 됐다고!! 리빌딩을 왜 해? 리빌딩의 목적이 뭔데!? 월드시리즈 우승 아냐? 월드시리즈 우승하려고 리빌딩하는 건데, 리빌딩이 끝나기도 전에 우승했어? 으하하하, 그럼 이제 스트레스 안 받고 리빌딩 끝내면 되겠네? 어차피 다음 시즌부터 출발이었잖아!! 으하하하!! 내가! 이 내가 로키스의 첫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단장이라니까!? 내가 주인공이야, 주인공!!”

“다, 단장님!! 그러다가 넘어집니다! 단장님도 이제 곧 50이에요!”

“그냥 둬!! 지금은 그냥 덮어놓고 신나야 하는 타이밍인데 말린다고 안 끝난다!! 단장님! 단장님! 오늘은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죠!? 비싼 걸로다가!!”

어차피 대신 기뻐해 줄 사람은 많으니 상관없을 수도.

프랜차이즈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이니 로키스의 우승을 원했던 모든 사람이 한계치 이상으로 몰려드는 기쁨에 기쁘면서도 당황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영도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니 사고는 안 나겠다, 싶었다.

[울어도 됩니다! 미쳐 날뛰어도 좋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수들, 코칭스태프, 구단 직원들 모두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정작 이 순간을 만든 주인공인 Y-DO가 가장 무덤덤해 보이네요. 타석에서도 항상 침착하고 흔들림 없고 감정 기복도 없어 성적도 기복 없이 완벽한 선수였는데, 이런 순간에도 저렇게 덤덤합니다. 신기한 선수예요, 정말로.]

[콜로라도 로키스의 동화는 마지막까지 동화였습니다. 역시 동화는 해피엔딩이 어울리는 장르 아니겠습니까?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완벽하게 동화다운 동화를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로키스도 이제 시작이에요. 주축 선수들 대부분이 아직 계약 기간이 많이 남았거나, 이제 막 연봉 조정 자격을 얻거나 얻은 선수들이거나, 아니면 아예 연봉 조정 자격조차 없는 어린 선수들이거든요? 아직 마이너에서 대기하는 유망주들도 많고요.]

[Y-DO와의 계약이 어떻게 될지, 월드시리즈 우승이란 최종 목표까지 달성했으니 대형 유망주들을 갈퀴로 긁어모을 기회를 포기하고 굳이 FA를 감수하고 내년 시즌까지 함께 가는 걸 선택할지가 변수이긴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지금의 로키스에겐 아쉬울 게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로키스가 당장 월드시리즈 2연패를 위해 미래를 포기할 만한 팀은 아니니까요.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해요. 앞으로 콜로라도 로키스에선, 덴버, 나아가 콜로라도 주 전체에서 Y-DO는 전설로 인정받을 겁니다. 고작 한 시즌의 활약이었지만, 이번 시즌 보여준 Y-DO의 모습은 영원불멸의 전설로 남기에 충분했으니까요. 이번 시즌 한 시즌 활약하고 팀을 떠나도 이 사실은 변하지도, 부정되지도 않을 겁니다.]

< 동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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