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의 클라이막스 >
“후우... 나 지금 떨고 있냐? 진짜로 우리가 한 번만 더 이기면 월드시리즈 우승하는 거 맞아?”
“... 나도 못 믿겠는데? 그런데 내가 이 타이밍에 오클랜드에 있는 거 보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 그치? 우리가 지금 오클랜드에 있을 이유가 없지? 그것도 며칠만 있으면 11월인 이 늦은 시기에...”
어느 정도 마음을 비웠던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팀이 5차전, 6차전에서 연승을 달리며 다시 한 번 희망을 가졌다.
마음을 비웠다기보다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욕하면서도 억지로 자신의 마음을 속인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렇게 억지로 기대감을 억눌렀던 반동으로 1승 3패에서 3승 3패로 균형이 맞춰진 이후 로키스 팬들은 이미 우승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1승 3패에서 2연승으로 7차전에, 그것도 벼랑 끝 매치에선 프랜차이즈 역사상 28경기 동안 27번이나 패배한 오클랜드 에이스가 상대.
월드시리즈 내내 미친 폭주로 팀의 111점 중 61타점을 올린 Y-DO에 대한 깊은 신뢰.
팬들의 기대감엔 분명 근거가 있었다.
승리를 믿어보고 싶어서 찾다 찾다 겨우 찾은 근거와는 달랐다.
승리하리라 믿고 싶었고, 어떻게든 없는 근거라도 찾아 매달리고 싶은 건 맞지만, 영도에 대한 신뢰는 억지로 찾은 게 아니었다.
영도는 단 한 번도 팬들의 기대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정규시즌에도 그랬고, 포스트시즌 돌입 이후엔 더더욱 그랬다.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매달릴 곳이 있었다.
자신들의 거대한 기대감, 신뢰감을 온전히 실어도 충분히 버텨줄 수 있을 거란 믿음.
영도를 신뢰하는 건 그저 성적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X발, 우리 이번에 진짜 우승 못 하는 거냐? 콜로라도 로키스를 만났는데, 이걸 못 이긴다고!?”
“월드시리즈에서 로키스를 만났는데 7차전이라니!! 또 7차전이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이게? 월드시리즈에서 로키스가 상대인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어!!”
“X발, 빌어먹을!! X신, 병X, 이런 상병X이 어디 있어? 이딴 팀이 월드시리즈를 먹는다고? 로키스를 만나도 기회를 못 살리는 팀이 무슨 월드시리즈... 한심한 새X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팬들의 불안함은 로키스 팬들의 신뢰감이 커진 만큼 같이 커져갔다.
객관적으로 봐도 에이스가 더 강팀이었고, 에이스가 우승하는 그림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투자한 것들도 에이스 쪽이 훨씬 많았고, 그만큼 우승하지 못했을 때의 손해도 에이스 쪽이 훨씬 컸다.
로키스 팬들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상하는 것조차 과분했던 기적적인 선물 같은 것이라면, 에이스 팬들에겐 숙원 같은 것이었다.
로키스 팬들은 그냥 선물처럼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고, 만약 7차전에서 패배하더라도 아쉬움 때문에 잠깐은 격하게 반응할 수 있지만, 실제로 분노하거나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에이스 팬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월드시리즈 우승은 숙제, 숙원, 갈증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엔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몇 시즌에 걸쳐 중소마켓으로선 무리다, 싶을 정도의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고, 매 시즌 처절하게 달렸다.
비록 중소마켓의 한계로 레드삭스나 양키스, 다저스 같은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항상 아메리칸리그 정상을 위협하는 팀이 되었다.
신구장 개장 이후 첫 번째 투자가 실패하고 잠시 쉬다가 두 번째 투자를 단행하고도 수년.
월드시리즈까지 올라간 적은 없지만, 딱 한 번만이라도 힘을 받으면 월드시리즈 제패를 노려볼 수 있는 강력한 전력을 갖췄다.
그리고 이번 시즌, 월드시리즈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를 만났다.
로키스는 이번 시즌을 자신들의 시즌으로 만들어버린 돌풍의 팀이었고, 신시내티 레즈, 시카고 컵스, LA 다저스와 같은 내셔널리그 최강팀들을 상대로 한 경기도 내주지 않은 채 월드시리즈까지 파죽지세로 올라왔다.
하지만 사람은 직접 당하기 전까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
컵스가 그랬던 것처럼, 다저스가 그랬던 것처럼.
에이스 역시 자신들만은 다를 거라 생각했고, 그토록 바라던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한 적기라고 판단했다.
다른 팀도 아니고 로키스를 월드시리즈에서 만났으니 이번에는 무조건 우승할 수 있겠다, 딱 한 번 힘을 받은 시즌이 바로 이번 시즌이다,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지금, 에이스와 팬들은 딱 한 번 힘을 받은 시즌, 이번 시즌 하늘의 선택을 받은 팀이 자신들이 아닌 로키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은 로키스의 제물, Y-DO를 더욱 빛내주기 위한 극적인 제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게 그들을 괴롭게 했고, 집중까지 방해했다.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 상황까지 그들을 또 불안하게 했다.
“내가 어제 말한 것 잊지 않았지!? 우린 무조건 Y-DO를 도와서 기쁘고 행복하게 시즌을 끝내는 거야! 다들 알아듣지!?”
“당연하지! Y-DO에게만 이 멋있는 역할을 전부 맡길 순 없지! 우리도 빅리거다, 이거야!!”
“그럼! 커트! 커트, 너도 한마디 해! 덴버의 미래이자 신성, 그리고 미래의 에이스이자 월드시리즈 7차전 선발투수!! 로키스의 첫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네 손으로 이룰 수 있는데 한마디 안 하면 안 되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모두의 염원을 짊어지...”
“됐고. 모두의 염원을 짊어질 짬이 되면 말해. 어딜 루키 주제에... 그냥 네 몸값 올릴 생각으로 던져라. 키스! 너도 한마디 좀 해라.”
“이번 월드시리즈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당신과 Y-DO에게 미안하니 오늘은 경기에만 집중하죠.”
“좋아, 그럼 앤서니! 앤서니도 한마디 하세요. 우리 모두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데는 당신의 역할도 분명 작지 않았으니까.”
“뭘 나한테까지. 그냥 열심히 하면 돼. 특별히 뭘 하려고 생각하지 마. 듣기만 좋은 이야기겠지만, 평범한 한 경기처럼 하자고.”
“게일! 게일! 저기 Y-DO 온다!”
“오케이, 어제부터 우리가 한 이야기는 다 비밀로! 알지? 생각만 해, 생각만!”
정규시즌에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내셔널리그 챔피언십까지도 그래도 괜찮았지만.
월드시리즈를 치르며 영도에게 부채의식이 쌓였다.
비록 한 경기로는 모든 걸 변제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경기만큼은 영도가 힘들지 않게, 스트레스받지 않게 알아서 잘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창피하니까 영도에겐 들키지 않고.
“다들 쪽팔리게 이대로 끝낼 거 아니지? 로키스야, 로키스! 우리가 여기서 지면 로키스의 동화를 완성시키는 악역이 되는 거라고! 왜 우리가 동화의 악역이냐? 주인공이 절대 이길 수 없는 강한 존재가 쳐발리는 거니까!!”
“쪽이 팔려? 쪽이 팔리면 네가 5차전에서 끝냈어야지. 로키스가 왜 살아났는데? 5차전에서 에이스가 무너진 게 컸지.”
“그게 간판타자라는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간판타자는 간판타자 역할 정도는 한 것 같은데. Y-DO가 너무 잘해서 기준이 바뀌었나? 그렇게 쉽게 기준이 바뀌어? 요앙은 할 만큼 했어. 다른 시즌 다른 타자들과 비교해도 충분히.”
“호오, 그래, 척. 말 잘했다. 요앙 페르난데즈는 Y-DO와 관계없이 평가하는데 왜 내 평가는 그딴 식이지? 나도 Y-DO 아니었으면 할 만큼 했는데?”
“지금 그럴 때 아니야. 다들 뭐하는 거야?”
에이스 노엘 베다드, 핵심타자 요앙 페르난데즈와 척 스노우의 갈등.
또 한 명의 핵심타자, 알버트 노리스와 2선발 타일러 젭슨이 노력했지만, 핵심선수들의 흔한 자존심 싸움이 그렇게 쉽게 봉합될 리 없었다.
로키스의 클럽하우스 리더 게일 해니건, 모두의 존중을 받는 베테랑 앤서니 모리스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했다.
자존심 강한 핵심 전력들의 갈등은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고, 에이스 역시 팜 출신 요앙 페르난데즈에게 같은 역할을 기대했다.
하지만 빌리 빈이 물러난 이후 어설퍼진 에이스 프런트는 전력 보강을 이뤄내는 동안 놓쳐선 안 될 것을 놓쳐버렸다.
좋은 선수들을 모은다는 가장 기본적인 방향에만 지나치게 충실해서 팀의 뼈대가 될 팜 출신 선수들을 너무 쉽게 보내버렸고, 서로의 자존심이 끊임없이 부딪히고 갈려 절묘하게 맞춰지는 시간을, 팀워크와 팀컬러가 만들어질 시간을 만들지 못했다.
서로 접점이 많지 않은 투수진과 야수진의 사이가 서먹한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에이스의 문제는 스노우와 베다드의 연차, 경력, 등급 등이 지나치게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굳이 팀 내 무게감을 따지자면 베다드 쪽이 조금 더 무거웠지만, 팜 출신 페르난데즈가 스노우 편을 들어준 게 문제의 시작.
그렇게 야수진과 투수진이 편을 갈랐고, 노리스와 젭슨은 각각 스노우, 페르난데즈와 베다드로부터 야수진, 투수진의 리더 자리를 빼앗지 못했다.
그런 팀이 한둘도 아니고 이렇게 분열되고도 우승한 팀이 적지도 않았다.
하지만 역대 월드시리즈 진출팀 중 가장 전력이 약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로키스는 모두의 무시를 받은 언더독답게 자기들끼리 지나치게 똘똘 뭉쳐 있었다.
흔히 있는 일이 하늘 아래 절대 있어선 안 되는 단점처럼 느껴질 정도로.
***
한쪽 팬들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기도하며 이 경기를 지켜봤다.
다른 쪽 팬들은 팀의 계속된 실패에 지쳐 이번만큼은 제발 성공하길 기도하며 이 경기를 지켜봤다.
한쪽 팀 선수들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가 되기 위해, 새로운 역사를 쓰고 팬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그리고 여기까지 데려와 준 동료, 다음 시즌에는 함께할 수 없을 동료에게 보답하기 위해 각오를 다졌다.
다른 쪽 선수들은 계속된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팬들에게 비난받는 게 싫어서, 한참 떨어지는 팀에게 패배해 자존심을 다치기 싫어서 이를 갈았다.
메이저리그 역사를 새로 쓴 괴물 타자, Y-DO가 메이저리그 하위권 전력의 콜로라도 로키스를 이끌고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뤄낼 것 같아 모든 언론이 이 경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마무리된다면 Y-DO의 2041시즌은 진짜 신화가 될 테니까.
진짜 신화를 쓰는 최고의 선수를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아 팬들도 이 경기에 집중했다.
모든 야구팬들은 과거의 역사를 찬란하게 기억하면서도 그 역사를 깨는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기대하기 마련.
지금 기대받는 선수는 ‘A-Zero’, Absolute-Zero, Y-DO, 절대영도, 유영도였다.
언론과 팬이 집중하면 전문가들 역시 집중할 수밖에.
언론에 글을 실어야 했고, 팬들에게 흥미로운 글과 분석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전문가들은 베이브 루스, 배리 본즈, 마이크 트라웃 등 시대를 지배했던 대스타들과 영도를 비교하고 분석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베이브 루스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Y-DO만큼의 임팩트가 없었음을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배리 본즈는 논외일 수밖에 없는 위인이고, 마이크 트라웃을 비롯한 다른 시대의 슈퍼스타들은 야구라는 종목이 태생적으로 가진 벽에 막혀 팀의 한계를 혼자 부숴버리지 못했으니까.
만약 정말로 콜로라도 로키스가 우승한다면 그건 역사를 넘어 신화였다.
그 정도로 영도 없인 절대, 하늘이 무너져도, 죽었다 깨어나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던 팀이었다.
[6차전까지 역전과 재역전,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며 치열한 시리즈를 이어왔던 양 팀. 그렇게 어렵게 7차전을 맞이했습니다만, 7차전이 이렇게 쉽게 한쪽으로 기울어버릴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여기서 역사에 남을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고 명경기가 펼쳐지고, 나아가 역사에 남을 최고의 월드시리즈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게 현실인 거죠. 현실은 원래 이래요. 정작 중요할 때 맥이 빠지죠. 그래야 심장이 멎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거든요.]
영화였다면 서로 역전과 재역전을 주고받는 경기 끝에 정규 이닝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고 포스트시즌에만 남아있는 연장전까지 경기가 이어졌겠지만.
포스트시즌에서라도 야구의 전통과 역사를 지키기 위해 유지 중인 끝장 승부, 19회, 20회를 넘어 해가 지고 다시 뜰 때까지 승부를 이어갔겠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렇게 명경기로 남았어야 할 2041시즌 월드시리즈 7차전은 너무 일찌감치 승부가 갈려버렸다.
어느 한쪽 팀, 선수들, 팬들은 기다렸던 시간, 마음 졸였던 시간에 비해 너무 일찍 모든 걸 접고 포기해야만 했다.
[오늘 유일하게 잠잠했던 로키스 타선의 핵심! Y-DO가 단일 포스트시즌 13호 홈런을, 그리고 10경기째 홈런을 터뜨립니다! 그것도 그랜드 슬램으로! 그리고 개인 최초의 포스트시즌 그랜드 슬램까지입니다!]
[이야... 5회에 15-1까지 벌어지네요? 한 번만 더 패배하면 모든 게 끝나는 경기의 오클랜드 에이스가 이 정도였나요?]
2041시즌 월드시리즈 7차전.
로키스 미래의 에이스 후보이자 이번 시즌 ROY 투표 3위, 내셔널리그 차기 에이스 후보 커트 페니와 영도의 몇 없는 친구 믹 고든의 맞대결로 펼쳐진 경기는...
5회에만 벌써 5번째 타석에 들어선 영도가 그랜드 슬램을 때려내며 15-1까지 점수 차가 벌어져 있었다.
< 현실의 클라이막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