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한 명만 있으면 > (151/200)

< 한 명만 있으면 >

[1회 초, 타일러 젭슨이 게일 해니건에게 안타를 맞았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습니다. 이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타일러 젭슨이나 브랜든 에레라나 사실 비슷한 유형의 2선발이거든요? 물론, 젭슨이 훨씬 성적도 좋고 기량도 뛰어난 2선발이죠. 젭슨은 2선발 중에서도 상위권이고 에레라는 로키스의 다른 투수들이 그런 것처럼 실제 성적보다 한 계단 위에서 활약하는 선수니까.]

[하지만 비슷한 유형이라는 건 특별히 대단한 피칭을 보여주는 경우도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도 거의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미지가 비슷한 느낌이 분명 있습니다.]

[물론, 젭슨은 전성기에도 그런 스타일의 투수였기에 지금까지도 임팩트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에레라는 아직 젊은 신인급 투수이기에 미래가 기대된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리그의 주목을 받죠. 하지만 그런 것 빼고 퍼포먼스만 놓고 보자면 정말 웬만해선 크게 무너지지 않는 투수들이거든요?]

그래, 경기 시작부터 분위기가 너무 좋다, 싶었다.

2, 3, 4차전을 연달아 내주고 5차전도 온몸을 불살라서, 겨우겨우 잡았는데 에이스가 훨씬 더 각 잡고 달려들 6차전이 이렇게 쉽다고?

그럴 리가 없지. 그래, 이런 분위기가 맞지.

어쩐지 경기 시작부터 운수가 좋더라니.

[결국, 척 스노우의 2타점 2루타를 마지막으로 브랜든 에레라마저 마운드를 내려갑니다. 2.2이닝 6실점의 기록을 남기고 떠난 젭슨에 이어 에레라는 3.1이닝 5실점의 기록을 끝으로 월드시리즈 등판을 마무리합니다.]

[두 선수 모두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월드시리즈 등판이라는 게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가 아닌데. 특히 젭슨은 더욱 심하겠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월드시리즈 등판을 이렇게 끝내다니...]

[세 경기 연속 타격전이 벌어진 덕분에 이동일이 하루 끼어있었음에도 불펜 운용이 널널한 상황은 아닙니다. 양 팀의 2선발로서 팀에 대한 미안함도 분명 있을 겁니다.]

[어쩌겠어요. 개인적으로도 너무 아쉽고, 팀에게도 미안하겠지만... 그게 싫으면 잘 던졌어야죠.]

아직 4회 말도 제대로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7:5

에이스 선발 젭슨이 내려가고 뒤이어 등판한 불펜 투수마저 1점을 실점하며 7:5가 된, 선발투수의 붕괴뿐 아니라 마운드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듯한 분위기.

로키스도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이어 등판할 투수의 퍼포먼스가 매우 중요해진 그런 분위기.

타선이 4이닝 동안 7점을 뽑아줬는데, 오늘도 영도는 혼자 3점을 뽑아줬는데.

그러고도 점수 차이는 고작 2점.

“... 우리가 상대 분석만 하고 우리 분석을 못 했네. 이런... 브랜든이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 하하...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네요.”

“기분이 이렇게 좋아졌다가 이렇게 훅 떨어질 수가 있나. 진짜 7차전은 무조건 갈 줄 알았더니.”

로키스 코칭스태프도 너무 일찍 보람을 느꼈음을 깨달았다.

보람이고 나발이고 절대 패배하면 안 되는 경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보람 같은 사치스런 감정이 들어올 틈은 없었다.

그럴 정신이 있으면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고민이라도 한 번 더 해야지.

하지만 크게 말할 순 없었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갑자기 묘해졌는데 선수들에게 코칭스태프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그리고 그것도 그건데, 특.별.히 들키면 안 되는 선수가 있었다.

“FXXX!!!!! 씨X!!! 빌어먹을!!!”

브랜든 에레라.

덴버에서 태어나 덴버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전부 나오고 대학교도 콜로라도 주에서 나온 진성 홈보이.

그냥 지역에서 태어나 자라고 성장한 유망주가 아닌 진짜배기 골수 로키스 팬.

프로가 되기 전, 에레라의 꿈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이었다.

프로가 된 이후, 에레라의 꿈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가 되는 것이었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

에레라는 로키스의 유니폼을 입은 순간부터 그 장면을 상상했고, 그 장면에서 자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걸 선수 생활의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잘 던지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강했다.

의욕이 너무 앞섰고, 그래서 힘이 들어갔고, 한 번만 패배하면 모든 꿈이 무너지니 당연히 부담도 컸다.

그 모든 게 에레라를 무너뜨렸고,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간절하게 바랐던 만큼 상처도 컸고, 반작용도 컸다.

“에휴... 불쌍한 새끼. 그렇게 잘 던지고 싶어하더니...”

“어제부터 불안했다. 너무 간절하더라고.”

무너진 선발투수가 덕아웃에서 깽판을 친다? 어지간해선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특히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선 선수단 분위기를 한 번에 바닥까지 추락시킬 수 있으니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

그러나 이 상황에서의 에레라는 예외였다.

모리스와 같은 성실하고 인망 있는 베테랑 정도만 용납받을 수 있는 행동.

해니건은 리더라서, 영도는 에이스라서 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

그러나 에레라는 골수 로키스 팬에 누구보다 로키스를 사랑하는 젊은 신인급 선수.

신인이라 관대한 대접을 받았고, 누구보다 로키스를 사랑하는 골수팬이기에, 그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던 마음을 알기에 다들 안쓰럽게 여기는 동료들.

“그래, 그럴 수 있겠지. 그래도 알잖아? 브랜든이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우리가 알아줘야지 누가 알아줘? 팬들이 알아줘? 3.1이닝 5실점인데?”

“누가 뭐랬나. 그냥 불안했었다는 거지.”

“알겠지만, 우리 진짜 지면 안 돼. 브랜든이 불쌍하든 불쌍하지 않든, 저 자식을 위해서든 아니든 우린 무조건 이겨야 된다니까?”

“당신만 아는 거 아냐. 나도 알아.”

다른 선수들처럼 에레라가 불쌍하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에레라가 불쌍하든 한심하든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든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늘 경기에서 패배하면 모든 게 끝이라는 것, 그것뿐.

에레라 따위는 신경 쓸 정신도,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

“내가 부탁받아야 할 정도로 이번 시리즈에서 못하고 그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 그나저나... 요즘 농담이 좀 잦다? 긍정적인 변화라고 봐도 되나? 유쾌해졌어.”

“난 원래 유쾌해. 아무에게나 유쾌하지 않을 뿐이지.”

“그럼... 이제 난 아무나가 아니라는 뜻?”

“피식, 하고 웃으면 되나. 그리고 요즘 농담 좀 하는 건 맞지만, 방금 한 말은 농담 아니다.”

“... 부탁받아야 할 정도로 못하지 않았다는 말?”

“그렇지.”

어차피 이겨야 하는 경기, 초반부터 분위기 장악하고 쉽게 가서 이기든 후반까지 살 떨리는 승부 끝에 이기든 이겨야 하는 건 똑같고.

그 과정에서 에레라를 향한 동점심과 안쓰러움이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지금 상황에서는 말이 되든 안 되든 어떠한 것으로부터 동기부여가 된다면 그걸 붙잡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에레라의 부진과 좌절은 다른 선수들의 동기부여가 될 수도.

미안하긴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에레라도 최소한의 자기 몫은 했다고 인정해줄 수 있었다.

그게 영도의 진심.

[선두 타자 반스는 잡아냈지만, 애커슬리의 눈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어려울 때 등판해 그래도 1.1이닝 동안 1실점으로 막아준 세자르의 두 번째 위기. 1아웃 1루에서 1번 타자 해니건으로 이어집니다.]

[해니건도 해니건이고, Y-DO에게 무조건 다시 이어진다는 것도 크죠. 오늘도 2타수 2안타, 장타 두 개로 3타점이거든요?]

“항상 생각하는 건데, 고든이 저렇게 걸어나가면서 시작된 빅이닝이 많은 것 같은데. 고든의 출루가 항상 빅이닝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빅이닝으로 연결될 땐 항상 고든이 출루했던 것 같은 느낌.”

“볼넷이 많은 친구니까 그런 경우도 많았던 거겠지. 그렇게 따지면 내 홈런이 빅이닝으로 연결된 경우가 훨씬 많지 않나.”

“네 홈런은 빅이닝으로 연결된 게 아니라 빅이닝을 완성한 거지. 어쨌거나 나 간다. 내 타석인데 시간 너무 끌었어. 째려본다, 심판이.”

“내 앞에 주자 쌓아.”

바로 직전 이닝에 2점을 내줬으니 여기서 바로 갚아줘야 넘어왔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가져갈 수 있었다.

다행히 애커슬리의 출루로 일단 상황은 만들어졌다.

해니건도 어제부터 컨디션이 바짝 올라왔으니 뭔가 될 것 같...

[기습 번트! 에이스 내야수들,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해니건이 어제부터 계속 좋았거든요! 내야수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죠. 빠른 발에 비해 기습 번트를 자주 시도하는 선수도 아니고요.]

[몸값이 높고 30세가 넘으면서 도루 개수가 많진 않지만, 리그 내에서 손꼽히는 스피드 스타입니다. 자주는 아니어도 중요할 때 기습 번트로 재미도 많이 봤고요.]

[하지만 해니건의 지난 경기, 이번 경기 컨디션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었죠. 이건 해니건이 영리했어요.]

‘예상 못 했네. 내가 속으로 투덜댄 걸 들었나. 1승 3패부터 갑자기 날아다니는데.’

7점 중 4점을 다른 선수들이 맡아준 것만 해도 만족.

해니건은 5차전부터 본격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으니 그것만 해도 만족.

아쉬운 대로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 어려움이야 특별할 것도 없었다.

지난 시즌에도 그랬고, 이번 시즌에도 그랬고.

지난 시즌에는 손성호가, 이번 시즌에는 해니건이 도와줬고, 이 정도 도움만 받아도 우승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지난 시즌에 확인했고.

[에이스는 세자르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갑니다. 확실히 세자르가 가장 좋은 공을 던질 타이밍이긴 합니다. 이닝 소화 능력도 있는 선수고.]

[Y-DO 앞에서 투수를 바꾸는 게 딱히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건 수차례 증명됐죠. 이번 포스트시즌에만 해도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고. 확실히 주자가 있고 타자가 Y-DO인데 그런 상황에서 등판 후 첫 공을 던진다? 어유, 상상하기도 싫네요. 거기서 글러브 벗어 던지고 유니폼 벗어 던지고 은퇴해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도를 상대하는 팀들도 수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어떻게 상대해야 10점 줄 거 9점만 줄 수 있을까.

이후 두 타자를 어렵게 상대하더라도 영도가 그나마 꺼려하는 스타일의 투수를 영도 앞에서 무조건 올려보기도 하고, 그렇게까진 아니어도 영도 앞에서 투수를 교체해보기도 하고.

그러나 그렇게 올라온 불펜투수는 터프 세이브 상황에서 올라온 클로저보다 훨씬 심각한 부담감에 시달렸다.

그런 걸 보고도 같은 전략을 계속 활용할 순 없었고.

그래서 에이스가 선택한 건 일단 몸과 정신이 준비된 기존 투수를 계속 마운드에 올려 상대하게 하는 것.

물론, 어차피 둘 다 최악과 차악인데 어떻게든 차악을 선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뿐.

그리고 어느 쪽이 최악이고 어느 쪽이 차악인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2041 포스트시즌 11호 홈런! 배리 본즈의 기록을 무려 세 개 차이로 뒤집는 단일 포스트시즌 최다 홈런 기록! 그리고 최다 경기 홈런 기록까지! 포스트시즌 14경기를 치르는 동안 9경기에서 홈런을 때려냅니다!]

[말이 안 되는 거죠. 그게 말이 돼요? 14경기에서 9경기 홈런, 11개의 홈런. 8경기 8홈런, 두 개 모두 배리 본즈가 기록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다 홈런은 뭐 그냥 박살났고, 최다 경기 홈런도 밀리고. 이러다가 진짜 항상 찝찝했던 이름이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뒤로 밀려나는 거 아닙니까? Y-DO 덕분에?]

[역사도 역사고, 오늘 경기도 경기입니다. 쓰리런 홈런. 10-5로 다시 크게 앞서나가는 콜로라도 로키스! 이러다가 정말 7차전 갈 수도 있겠습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포스트시즌 최종전에 약한 건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이러다가 진짜... 여기까지만 해야겠죠? 더 말하면 로키스 팬들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 이쪽이 최악이었나...”

영도에게만은 절대 얻어맞으면 안 되는데...

에이스 덕아웃은 5차전부터 계속 초상집 분위기였다.

영도의 폭주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고, 이젠 침묵하던 나머지 로키스 선수들조차 자꾸 제 몫을 하려 들었다.

월드시리즈만으로도 심각한 스트레스인데, 역대급 괴물이 되어 돌아온 방출 선수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에이스 코칭스태프들의 무언가가 자꾸 빠져나가려 했다.

보통 머리에 있다고 표현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이 모두 함께.

< 한 명만 있으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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