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다시 한 번 > (148/200)

< 다시 한 번 >

[다시 에이스의 등판 경기가 돌아왔습니다. 각자 4일간의 휴식을 취한 노엘 베다드와 제러드 홉슨이 마운드에 올라 각자 팀의 운명을 짊어졌습니다.]

[두 선수 모두 긴장될 거예요.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죠. 베다드는 오늘만 이기면 팀과 본인 모두 꿈에서도 바라던 월드시리즈 우승을 자기 손으로 결정지을 수 있고, 홉슨은 일단 홈에서 패배하는 것만큼은 막아야죠. 대반전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거고.]

월드시리즈 5차전은 시작부터 분위기가 무거웠다.

우승까지 1승만을 남겨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도 사실 월드시리즈 우승에 몇 번이나 도전한 팀이고, 몇 번이나 팀의 명운을 건 투자를 단행했던 팀이었다.

1989시즌을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 우승 경험이 없기 때문에 LA 다저스와 마찬가지로 1993년 창단해 아직까지 월드시리즈 우승 기록이 없는 콜로라도 로키스보다 기간으로만 따지면 더 길게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팀이기도 했다.

사실, 콜로라도 로키스는 그 누구도, 본인들마저도 이번 시즌 대권에 도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은 팀이었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애초부터 어떻게든 1, 2년 안에 결과를 내야만 했던 팀.

당연히 로키스보다 에이스가 더욱 간절했고, 1승만을 남겨둔 지금 느끼는 감정 또한 남달랐다.

로키스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두 번째 월드시리즈 경험이자 최초의 우승에 도전하는 상황이니 한 번만 패배하면 다시 한 번 실패하는 상황에서 배수진을 친, 딱 그런 분위기였고.

적어도 홈에서 끝내는 건 피하겠다는 집념으로 경기에 나섰다.

‘당신들 급한 것도 알고, 이번에도 실패하면 타격이 크다는 것도 알지만... 그런 것까지 내가 고려해줄 상황이 아니야.’

나이는 속일 수 없기에 34세의 노엘 베다드도 분명 많이 지쳐있을 것이었다.

로테이션을 거의 거르지 않으면서 180이닝 이상 소화했고, 디비전 시리즈, 챔피언십 시리즈를 거쳐 월드시리즈까지 올라왔으니 아무리 젊은 선수여도 지칠 수밖에 없는데, 34세의 베테랑이면 전성기 체력은 아닐 테니까.

[깔끔하게 첫 타자 게일 해니건을 잡아내며 시작하는 노엘 베다드! 명품 체인지업으로 해니건의 헛스윙을 끌어냅니다.]

[크으... 해니건도 참 삼진 없기로 유명한 타자인데, 베다드의 체인지업이 그만큼 대단했어요. 지치기도 했을 테고, 너무 오래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순간이라 떨리기도 할 텐데,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하지만 베다드의 집념도 보통은 아니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비전을 믿고 자신의 전성기를 걸었는데, 예상과 다른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 역시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생각이 없었다.

지치긴 지쳤을 테지만, 베다드에겐 3승 1패, 마지막 1승만을 남겨둔 지금 상황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역시 쉬울 리 없지. 모든 게 에이스 쪽으로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인데.’

이 정도는 영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즌 막판부터 월드시리즈 1차전까지의 로키스 정도는 아니겠지만,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딱 1승만을 남겨둔 에이스도 분위기에 올라탄 상황이었으니까.

아마 본인들이 문제점을 인식은 하고 있지만, 체감은 하지 못하는 중일 테지.

[Y-DO가 일단 해줘야 합니다. Y-DO의 홈런은 언제나 모든 분위기와 기세, 흐름을 뒤바꾸는 한 방이었고,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그겁니다.]

[1차전 이후 홈런이 없죠? 물론, 홈런만 없을 뿐, 2루타를 많이 치면서 타점, 득점 뭐 하나 크게 부족함 없이 말도 안 되는 활약을 이어가고 있지만... 홈런이 꼭 숫자 때문에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숫자 이상의 의미와 힘을 가진 게 홈런이고, 지금은 그 부분이 필요한 거죠.]

영도는 2, 3, 4차전에서도 최선을 다했고, 팀에 승리를 안겨주는 데 실패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1승이라도 챙겨야 했고, 그렇다면 당연히 지난 세 경기보다 더 강렬한 활약이 요구되었다.

영도도 이를 잘 알았고, 오늘의 영도는 지난 세 경기, 아니, 지난 174경기보다 결과에 크게 욕심내고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영도 본인이 오늘만큼은 홈런을 꼭 쳐내겠다고 다짐한 상태.

정규시즌부터 72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동안에도 지금처럼 홈런을 갈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간절했고, 간절한 만큼 강하게 몰두했다.

‘날카롭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까진 아니고.’

물론, 지금처럼 몸이 지쳐있는 상황에서 한창 컨디션 좋던 5, 6월 못지않은 공을 던진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만.

어쨌든 영도의 허를 찌를 만큼의 대단한 공은 아니었다.

당연히 예상은 할 수 있는 수준이란 거지, 별로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별로였다면 오늘과 비슷했던 1차전의 베다드한테 탈탈 털리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1차전의 복수도 해야 하는구나.

1차전에 나름 홈런도 쳤다지만, 그건 베다드가 내려간 이후 클로저에게 때려낸 홈런이었으니까.

[초구를 노리고 들어왔습니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으려고 들어오는 아주 약간이나마 고민이 부족했던 패스트볼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돌려버린 Y-DO! 단일 포스트시즌 9호 홈런으로 2001년 배리 본즈의 기록을 깨고 역대 단일 포스트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합니다!]

[아니, 카운트를 잡으려고 던진 공이고 살짝 고민이 부족해 보이는 건 맞아요. 맞는데, 원래 다 그런 거거든요? 어떻게 모든 공을 신중하게 고민하고 철저하게 계산해서 던지나요? 이 정도면 다른 타자들을 상대할 때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신경 쓴 공이에요! Y-DO가 상대니까!]

[맞습니다. 사실 노림수가 적중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거지, 베다드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그냥 Y-DO가 잘 때린 겁니다.]

[Y-DO가 너무 홈런을 쉽게 치니까 우리가 작은 이유라도 붙이자고 시작했던 게 습관이 된 것 같네요. 그냥 Y-DO가 대단해요. 말도 안 되는 타자고요. 한 타자밖에 상대하지 않았지만, 다른 타자도 아니고 해니건이었거든요? 그 타석만 봐도 베다드의 컨디션은 아주 좋아 보였어요. 그러니 베다드가 Y-DO를 넘지 못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기에 초구 스트라이크를 예감하고 과감하게 배트를 휘두른 유영도.

공을 오래 지켜보면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공을 보고 휘두르는 스타일의 타격을 하지만, 당연히 그걸로만 모든 타석을 소화하진 않았다.

가끔은 정반대 개념의 게스 히팅을 시도하기도 했고,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

게스 히팅은 어쩔 수 없이 헛스윙 빈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영도 역시 게스 히팅을 시도할 땐 헛스윙이 많아졌지만,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는 법이었다.

[쿠어스 필드에서 패스트볼을 노리고 과감하게 휘둘렀는데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지금 Y-DO의 타구가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비거리 513피트. 시즌 초반 본인이 기록했던 스탯캐스트 도입 이후 최다 비거리 홈런 기록, 515피트에 이어 2위 기록까지 본인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역시... 역시 Y-DO가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맞는 순간 바로 홈런이란 확신이 들어서 대단한 비거리가 나올 거라고 직감은 했지만, 513피트... 하하...]

게스 히팅은 제대로 맞기만 하면 무조건 장타였다.

빗맞은 타구도 홈런으로 연결하는 영도가 게스 히팅으로 제대로 후려치기까지 했으니 513피트를 날아가도 놀랄 게 없었다.

[로키스 덕아웃 분위기가 예전 같진 않은 모습입니다. 돌아온 Y-DO를 반겨주긴 하지만, 역시 한창 좋을 때의 분위기는 아닙니다.]

[어쩔 수 없죠. 흐름과 기세, 분위기까지 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겠어요?]

“역시 믿을 건 너밖에 없다! 이럴 땐 항상, 꼭 네가 시작이구나.”

“뭐, 그랬지.”

항상 유쾌하고 가벼운 태도를 의도적으로 유지하며 팀 분위기를 위해 노력하는 게일 해니건.

그런 해니건조차 영도 옆에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고 믿음직스러우면서도 너무 많은 걸 맡긴 것 같아 미안한, 그래서 대놓고 웃을 수만은 없는 그런 어정쩡한 표정.

“... 미안하다. 맨날 리더랍시고 말이나 하지 말걸, X나 쪽팔린다. 리더랍시고 그렇게 나대도 다녔으면서 이럴 땐 결국 또 너한테 의지하기나 하고.”

“그래서 필요한 게 뭔데. 위로?”

“... 하여튼 자식이 말을 해도... 그냥 그렇다는 거지. 미안하다고.”

“그럼 이제부턴 미안할 일 없게 해. 아직 세 경기나 남았고, 기회는 많으니까.”

“세 경기라... 세 경기나 더 할 수 있을까?”

“해봐야지. 난 어떻게든 세 경기 다 할 거다. 하고 싶으면 따라와. 미안할 일 없게, 혼자 쪽팔릴 일도 없게.”

영도는 진지했고, 1년 만에 다시 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울 제츠 소속이던 지난 시즌에도 정말 수십 년 만에 팀의 승리를 의식하며 경기를 치렀지만, 그땐 팀의 승리나 우승보단 손성호가 신경 쓰여서였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팬들을 위한 마음이, 본인의 만족과 욕심이 커졌다.

점점 평범하게 진지하고 워크에씩 좋은 야구선수처럼, 원래의 승부욕을 회복해가는 중이었다.

잃어버린 유쾌함과 통통 튀는 당돌함, 스타성 등은 회복하지 못했지만.

“그래. 최선을 다해야지. 네 말 때문이 아니라 내가 쪽팔려서.”

“어떤 이유에서든 결과만 좋다면야.”

비록 날 대신해서 누군가 나타날 거라는 기대감은 정규시즌부터 포스트시즌, 월드시리즈를 치르는 지금까지도 계속 배신당했지만.

내가 먼저 확 치고 나갔을 때 따라와줄 거란 기대감은 언제나 보답 받았다.

이번에도 영도는 기대했다.

동료들이, 특히 해니건만큼은 이번에도 따라와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타자들이 타격감을 끌어올리기 가장 좋은 쿠어스 필드에서의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고, 오늘 지면 모든 게 끝나는 상황이었으니까.

기대에 배신당하면 그냥 끝인데 뭘.

[역시 쿠어스 필드는 쿠어스 필드입니다. 홈에서 항상 고전하는 불운의 선발투수, 제러드 홉슨. 오늘도 고전하면서 2회에 2점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3회는 무실점으로 끝낸 게 다행인 수준이었죠.]

[에이스가 경기 초반 바로 역전에 성공했는데, 여긴 쿠어스 필드예요. 로키스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3, 4차전에도 로키스 타선이 못한 건 아니었거든요? 점수도 충분히 뽑아냈지만, 쿠어스 필드에서, 로키스 마운드의 힘을 감안해서 승리하기에 충분한 점수가 아니었을 뿐이에요.]

베다드의 칭찬을 많이 했지만, 베다드도 쿠어스 필드에선 고전하는 게 당연했다.

엄청나게 대단한 에이스에게도 쿠어스 필드는 지옥이었다.

투수라면 예외는 없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밥상 차려줄게. 1루라도 나가줄게. 너라면 내가 1루에 있어도 홈으로 들여보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나가. 일단 나가면 뭐라도 되겠지.”

로키스도 1회에는 영도의 홈런이, 2회에는 매그니의 2루타가 나오면서 꿈틀대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어제와 그제도 보여줬던 모습.

이틀 연속으로 실패했기에 오늘은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했고, 영도는 바로 ‘그 이상의 뭔가’를 해내겠다고 다짐한 것이었다.

다행히 동료들이 아예 밥상을 차려주지 못하는 건 아니기에 자신만 잘하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었다.

[우익수 앞 안타로 출루에 성공하는 게일 해니건! 선두 타자로서 출루에 성공하며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선두 타자의 출루라서 중요한 것도 있지만, Y-DO의 앞에서 출루한 게 무엇보다 중요하죠. 오늘 Y-DO는 뭔가 느낌이 다르거든요? 2, 3, 4차전보다는 1차전, 챔피언십 시리즈 때와 비슷한 느낌이에요.]

역시나 해니건은 먼저 치고 나갈 때 무조건 따라와줄 수 있는 선수였다.

그 정도의 능력이 있으니 그동안 콜로라도 로키스라는 약팀을 이끌었을 테고, 이 팀의 리더로서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겠지.

사실, 혼자서도 대단한 선수이기는 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NO.1을 위협하는 NO.2로는 충분한, 적어도 1.5인자로는 인정해줘야 하는.

영도처럼 혼자서 팀 전체의 분위기와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선수는 5명에서 많아야 10명 내외였고, 해니건도 가끔은 그런 역할은 해내지만, 아쉽게도 그 10명에는 속하지 못했다.

[역시 칼의 말대로 오늘의 Y-DO는 다릅니다! 아니, 지난 2, 3, 4차전과 다릅니다! 정규시즌 막판과 월드시리즈 이전 포스트시즌에 보여줬던 모습! 그 모습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Y-DO를 대표하는 건 당연히 홈런이고, 아무리 스탯은 떨어지지 않아도 홈런이 없으면 진정한 Y-DO라 할 수 없죠! 연타석 홈런! 그리고 단일 포스트시즌 최다 홈런! 최다 경기 홈런 타이 기록! 다시 흐름을 바꿔갑니다!]

그래, 이게 맞지.

내가 먼저 뛰쳐나갔고, 동료들은 따라왔다.

말로 한 적은 없지만, 내가 먼저 뛸 테니 따라오면 높이 올려주겠다 생각했고, 동료들은 따라왔다.

그랬는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역할을 미루면 안 되는 거였다.

‘그건 너무 경우가 없는 거지. 내가 무뚝뚝하지, 싸가지가 없는 건 아니니까.’

사실, 마음먹었다고 바로 결과로 이어져서 가끔 놀랄 때도 있었다.

다만, 몇 번 있었던 일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 경기에 강하고, 담도 강하고, 정신력도 강하고.

돌아오고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게 했던 과거의 일, 과거의 사람이 새삼 원망스럽다가도 새삼 행복해졌다.

인정하긴 싫지만... 과거의 울분과 응어리는 이제 거의 다 사라졌다.

나의 성적을 넘어 팀과 팬, 동료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런 나의 모습...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 다시 한 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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