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시험 >
[당사자들은 피가 말리는 경기! 하지만 보는 입장에선 너무나도 재미있는 경기! 팝콘을 뜯고 싶은 경기! 드디어 2041시즌의 빅리그를 마무리하는 축제가, 월드시리즈가 시작되었습니다!]
[딱 그 말이 맞네요. 당사자들은 피가 말리고 보는 사람은 너무 재미있는. 다만, 피가 마르는 수준은 에이스 쪽이 몇 배는 더 심하겠죠?]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로키스는 이번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억울할 게 없습니다. 분위기, 기세, 흐름 등을 봤을 때 절호의 찬스인 건 맞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해두자면 로키스는 만약 월드시리즈 우승에 실패한다고 해도 화를 내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는 팀입니다.]
[어유, 절대 안 되죠. 컵스, 다저스, 에이스와 로키스는 다르니까요. 앞의 세 팀은 이제는 정말 월드시리즈 우승이 시급한 팀들이고, 로키스는 이제 시작이거든요? 이번에 설사 우승하지 못한다 해도 팬들은 행복할 거예요. 아니, 이미 행복의 최대치를 찍었죠.]
사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라는 팀이 인기가 애매해서 그렇지, 팬들의 성향은 상당히 거친 편이었다.
도시 자체가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TOP 3에 드는 우범지대이자 인외마경, 헬게이트였기 때문에 지역색이 강한 미국 프로스포츠의 특성상 어쩔 수 없었다.
소속 선수가 조금만 부진하면 경기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무서워하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그런 환경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정도.
애슬레틱스는 포스트시즌 최종전, 디비전 시리즈 5차전이나 챔피언십 시리즈 7차전 등에서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는 팀이었는데, 이런 분위기가 한몫했다는 말도 나왔다.
포스트시즌에 약하진 않지만, 벼랑 끝 승부에 약한 팀.
애슬레틱스도 항상 팬들의 반응에 민감하며 부담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팀이었다.
“조심해. 오늘 컨디션 발딱 선 것 같으니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에이스는 노엘 베다드였다.
34세의 베테랑으로 95마일을 오가던 포심 패스트볼 구속은 92마일 근처까지 떨어졌지만, 점점 날카로워지는 고속 체인지업, 그리고 커브와 슬라이더를 앞세운 노련한 경기 운용으로 올해도 FIP 3점대 초반을 기록한 에이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전성기 기량은 아니었지만, 컨디션이 좋을 땐 화려했던 과거의 편린을 보이곤 했다.
해니건과의 대결을 봤을 때, 오늘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다.
[에이스가 간절하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노엘 베다드와 타일러 젭슨의 나이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34세와 36세. 최근 5시즌 동안 에이스의 원투 펀치로 팀을 이끌었지만, 이제 그 시대가 끝나가고 있어요. 이번 세대가 끝나고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하는 타이밍인데, 그러면 또 언제 이 정도 전력을 갖출지 확신할 수 없거든요?]
[에이스는 레드삭스, 양키스, 컵스, 다저스 같은 팀과 다르게 매 시즌 월드시리즈 우승후보급 전력을 유지할 수 있는 팀이 아닙니다. 그런데 원투 펀치는 물론 핵심 타선의 노쇠화도 심각한 상태라 길어야 다음 시즌까지가 기회일 겁니다.]
[다음 시즌까지 기회가 이어질지도 확신할 수 없어요. Y-DO의 방출로 이어졌던 FA 영입, 1루수 척 스노우와 좌익수 알버트 노리스도 각각 35세, 34세가 되었거든요? 아직 훌륭한 성적이지만, 예년보다는 조금 부족한데, 이젠 가장 먼저 노쇠화가 떠오르는 나이예요.]
영도의 방출은 신구장 개장 이후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한 첫 번째 드라이브가 실패로 돌아가고 두 번째 드라이브를 걸면서, 그렇게 시작된 흐름에서 이어진 결과였다.
에이스의 두 번째 드라이브는 사실 영도의 등장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새로 쓸 초특급 재능이 등장하면서 영도의 성장에 맞춰 팀을 만들어가다가 영도가 터지는 순간 월드시리즈에 도전하려 했던 것.
그러나 영도는 기대만큼 성장해주지 못했고, 이미 시작된 드라이브를 멈출 수가 없었던 에이스는 무리해가면서 FA를 대거 영입해 대권을 노렸다.
그래서 팀의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었고, 신구조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너만 믿고 왔다가 내 전성기만 날렸어, X발.’
에이스가 전력 보강을 시작하던 시기, 선수를 설득한 주요 레퍼토리가 몇 개 있었는데, 영도의 존재도 그중 하나였다.
아무리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한 선수의 지분에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아직 검증된 게 없는 유망주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당시 영도의 가치와 무게감이면 그 모든 걸 뛰어넘었다.
노엘 베다드 역시 그렇게 설득되어 합류한 선수였다.
영도의 성장과 에이스의 과감한 투자가 더해지면 우승 반지 하나는 무조건 따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고, 자신의 전성기를 에이스에 바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영도는 망했고, 에이스도 이를 만회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대권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 하지만 네가 아니면 내가 또 누구한테 분을 풀까.’
어쨌든 베다드는 그토록 바라던 우승 반지를 아직도 끼지 못한 채 전성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성장이 정체된 유망주는 다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괴롭다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이 팀을 선택한 이유가 영도였고, 영도의 실패가 본인의 실패로 이어진 베다드로선 감정이 남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오랜만에 1회부터 94마일대 패스트볼을 보여주는 노엘 베다드! 우승 반지를 향한 집착을 숨기지 않고 보여줬던 만큼 드디어 올라온 월드시리즈 마운드에서 그동안의 울분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컨디션 정말 좋아 보이네요. 월드시리즈의 마운드를 얼마나 염원해왔는지 던지는 것만 봐도 알겠어요.]
비록 전성기는 끝났고, 전성기보다 노쇠화가 가까운 상황이 되었지만.
노엘 베다드는 여전히 에이스였다.
분노와 부담감, 압박감과 긴장감 속에서 커리어 대부분을 보낸 선수였고, 이 모든 것들을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진짜배기 에이스.
[헛스윙! 환상적인 체인지업으로 Y-DO의 헛스윙을 끌어냈습니다. 이번 포스트시즌 들어 Y-DO의 배트가 거의 헛돌질 않았는데, 베다드가 그걸 해냅니다.]
[베다드는 포심 구속이 줄어든 게 오히려 이득이 된 것 같아요. 이상하게 체인지업 구속은 거의 그대로라 포심과 체인지업의 구속 차이가 3, 4마일 정도거든요?]
‘이게 무슨 체인지업이야. 이 정도면 거의 싱커지.’
구종이라는 게 같은 그립을 잡고 던져도 선수마다 무브먼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포심 패스트볼을 제외한 모든 구종은 항상 다른 구종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고, 투심, 싱커, 벌칸 체인지업 역시 경계가 모호한 구종이었다.
베다드는 리그 최고 수준의 체인지업을 던지기로 유명한 투수였지만, 일반적인 체인지업과 달리 패스트볼과 구속 차이가 크지 않고 낙차에 집중하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타이밍 장난으로 범타를 끌어내는 게 일반적인 체인지업 사용법인데, 베다드는 용도도 달라서 헛스윙을 끌어내 삼진을 잡아내는 용도로 활용했다.
‘체인지업 잘 들어가는 날의 베다드는 무서운데.’
영도도 베다드와 두 시즌 정도 함께 뛴 적이 있었다.
FA 계약도 끝나가기 때문에 우승 반지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금전적으로도 이번 포스트시즌이 중요한 상황.
중요한 순간의 베다드, 체인지업이 잘 들어가는 날의 베다드가 무섭다는 건 영도 역시 몇 번이나 확인한 바였다.
[허를 찌르는 절묘한 커브로 Y-DO를 돌려보내는 노엘 베다드! 체인지업이 아닌 커브로 Y-DO를 돌려세웠습니다!]
[이번 포스트시즌 Y-DO의 모습을 봤을 때 주 무기가 아닌 공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삼진만 따져도 포스트시즌 8경기를 통틀어 겨우 세 번째인데, 이렇게 편안하게 잡아낸 건 처음인 것 같네요.]
[Y-DO가 정규시즌에는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거든요? 볼넷이 많아서 BB/K 비율은 굉장히 좋지만, 그래도 홈런타자입니다. 절대적인 삼진 개수가 적은 타자는 아니었는데 포스트시즌 돌입 이후에는 삼진 잡기 세상 어려운 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타자를 잡아낸 게 오늘의 베다드고요. 드디어 폭주하던 로키스가 임자를 만난 걸까요?]
“긴장해야겠어. 쉽지 않겠는데.”
“오케이. 접수.”
이번에는 완전히 허를 찔렸다.
영도는 고개를 저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갔고, 다음 타석에 들어서는 가드너에게도 경고를 남겼다.
“어때? 확실히 컨디션 좋은 것 같지?”
“그러네. 2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보다도 좋아 보여.”
로키스의 폭주는 모든 선수가 제 몫을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폭주를 이끈 건 분명 두세 명의 핵심 선수였다.
선봉장은 당연히 영도였고, 그런 영도를 보조한 선수는 해니건과 가드너였다.
지금까지 포스트시즌 8연승을 달리면서 이 세 선수가 무기력하게 연달아 물러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1회부터 최소한 한 명은 출루라도 성공했고, 삼자범퇴로 물러난다 해도 정말 최소한 상대 투수를 괴롭히기라도 해줬던 선수들이 바로 이 세 명.
[체인지업에 크게 헛도는 스윙! 키스 가드너마저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해니건-Y-DO-가드너의 무시무시한 상위타순을 고작 공 12개로, 삼진 2개와 2루수 땅볼로 요리하는 노엘 베다드! 오늘의 노엘 베다드는 전성기 못지않습니다!]
[로키스의 1, 2, 3번 타순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진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나네요. 진짜 임자 만난 것 같은데요?]
[포스트시즌 돌입 후 파죽의 8연승을 달렸던 콜로라도 로키스, 드디어 제대로 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컵스가 잠깐 위협하는 듯했으나 실패했고, 다저스는 돈 라이스를 앞세워 3점 차의 리드까지 잡았지만, 돈 라이스가 부상으로 이탈하며 무너졌죠. 과연 에이스는 해낼 수 있을까요? 사실, 흐름을 한 번만 끊어낼 수 있다면 전력에선 무조건 에이스가 앞서거든요?]
로키스도 불안한 부분이 없는 게 절대 아니었다.
분위기, 흐름, 기세에 모든 게 가려져서 그렇지, 에이스와 달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와일드카드 경쟁을 하느라 선수들 모두 시즌 개막부터 지금까지 올스타 브레이크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젊은 팀이라지만, 체력적인 부담이 없을 수가 없는 상황.
자기 몫의 거의 두 배가량을 해내면서 전력부족을 메워준 영도의 기세가 끊기기라도 한다면 로키스는 끝이었다.
제대로 된 월드시리즈 우승후보 전력이라면 장점 한두 개가 무뎌져도 다른 장점으로 이를 메울 수 있겠지만, 정상을 노릴 만한 로키스의 무기는 영도밖에 없었다.
다저스가 돈 라이스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로키스가 영도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훨씬 거대했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의 주춤거림도 없이 앞장서서 팀을 이끌었기에 괜찮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영도가 주춤거렸을 때, 그때도 로키스가 지금의 기세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많았다.
어쨌든 영도에겐 단 한 번의 주춤거림도 허용되지 않았다.
로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선 영도는 절대 멈춰설 수 없었고, 반대로 에이스는 일단 영도를 막는 게 첫 번째이자 유일한 목표였다.
일단 막아보고 안 되면 다음 전략을 시도해도 되니까.
[자, 처음으로 로키스의 상위 타순이 무기력하게 꺾였습니다. 특히 Y-DO가 삼진으로 물러난 게 중요한데, 로키스가 첫 번째 시험대에 올랐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험대라고 할 게 있을까요? 로키스는 아마 Y-DO의 활약 없인 에이스를 이기기 어려울 거예요. 로키스의 시험대가 아니라 Y-DO의 시험대라는 표현이 맞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다시 힘을 내서 팀을 이끌 수 있을 것인가. Y-DO가 시험대에 오른 거죠.]
< 마지막 시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