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풍이 태풍으로 >
하루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돈 라이스의 손끝 부상은 로테이션 한 번은 무조건 거를 정도의 수준이라는 게 밝혀졌고, 6, 7차전까지 가면 모르겠지만, 쿠어스 필드에서의 등판은 사실상 날아갔다.
안 그래도 포스트시즌이 시작되자마자 거짓말처럼 시작된 다저스의 멘탈 붕괴가 본격적으로 가속화된 건 돈 라이스의 이탈 이후.
비록 언제나처럼 가벼운 잔부상이지만, 해프닝이 아닌 진짜 부상이라는 게 밝혀진 이상 다저스의 멘탈이 정상화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불운은 언제나 동시에 덮친다고 하던가.
돈 라이스가 부상으로 이탈했다지만, 다저스에는 최상위권 전력의 몇몇 팀을 제외하면 충분히 믿고 에이스 역할을 맡길 수 있다 평가받는 버질 후에르타가 있었다.
돈 라이스가 없어도 이 선수가 있으면 다저스의 선발 무게감이 로키스를 압도했고.
그러나 항상 돈 라이스를 향해 경쟁심과 질투심을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의지하고 있었던 걸까.
2차전의 후에르타는 안 좋을 때의 후에르타였다.
그도 에이스급이라 평가받는 만큼 안 좋은 경기가 많지 않지만, 오늘은 딱 그랬다.
90마일대 중반의 패스트볼은 나름 잘 들어가지만, 주 무기인 커브가 말을 듣지 않았고, 후에르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떤 투수든 주 무기가 고장 나면 답이 없었다.
특히 지금의 로키스처럼 타선이 완전 물이 올라 있는 팀을 만났다면 더더욱.
“너무 스무스하게 흘러가니까 오히려 불안해질 정도인데, 이거...”
“분위기가 안 좋으면 안 좋으니까 불안하고, 분위기가 좋으면 좋아서 불안하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사람이 기분이 너무 좋으면 좀 그런 거 있잖아?”
“그런가. 우리 리더가 담이 작다는 건 알겠군.”
“실제로는 큰 볼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지.”
“거짓말은 그래도 잘하는 것 같고.”
당연히 로키스가 패배할 거라 예상되던 시리즈.
로키스 선수들마저도 이 시리즈에서 혹시나 승리한다 해도 어렵게 어렵게 달려들고 또 달려들어서, 마지막까지 물고 늘어져서 이기는 그림만을 상상했다.
비교적 스무스하게 이기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해니건이 불안함을 느끼는 것도 그런 느낌이었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일이 벌어지니 불안해진 것.
그만큼 다저스와 로키스의 전력 차는 컸고, 그 전력 차와 정반대로 로키스가 당연하다는 듯 승기를 잡았다.
[완전히 고장 난 후에르타의 커브! 후에르타도 오래 버텨주지 못할 것 같은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다저스의 모든 플랜이 망가집니다.]
[전력 차가 아무리 많이 나도 쿠어스 필드는 원정팀에게 부담스러운 경기장이거든요. 그런 경우들이 있잖아요? 다른 종목에서도 그렇고 고도가 높은 경기장은 언제나 원정팀의 무덤처럼 되거든요?]
[한 시즌을 전체적으로 보고, 그 이상 장기적으로 보면 쿠어스 필드는 홈팀의 무덤이라는 게 최근 평가죠. 하지만 단기전으로 보면 분명 홈팀이 유리합니다.]
[사실, 1, 2차전은 무조건 잡고 간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돈 라이스와 버질 후에르타가 등판하는데 한 경기라도 놓친다? 그것만으로도 최악의 흐름인데 두 경기를 다 놓치면...]
돈 라이스의 부상으로 심각해진 팀 분위기.
나아가 주 무기가 시즌 중 평범하게 컨디션 안 좋은 날처럼 망가진 것도 아니고 그냥 완전히 망가져 버린 커리어 최악의 컨디션.
커브가 고장나면서 드러난 4번째 구종, 체인지업의 다소 아쉬운 위력.
커브가 멀쩡할 땐 패스트볼-커브와 이를 받쳐주는 슬라이더-체인지업이 완벽하게 돌아가면서 약점이 없는 에이스급 투수라는 평가였다.
그러나 커브가 망가지자, 비교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체인지업이 민낯을 드러냈고,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만 남았다.
[이거 큰일인데요? 또다시 해니건 쪽에서 적시타가 나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다섯 번째 득점. 3회 만에 5점을 따냈습니다.]
[이건 이제 안 돼요... 정규시즌이라면 한 경기 버려도 좋다는 심정으로 선발투수에게 조금 더 긴 이닝을 맡겨도 되겠지만, 지금 포스트시즌이거든요? 사실, 이미 늦었어요. 물론, 결과적인 말이고, 후에르타라면 2회까지 3점을 내줬어도 3회부터 다시 안정감을 찾을 거라 기대하는 게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무너졌죠. 이럴 때 다저스가 일단 꺼내놓고 보는 투수가 올리베이라인데, 그런 올리베이라가 어제 꽤 많은 공을 던졌다는 것도 망설인 이유일 거예요.]
[뭐 어쨌든... 망했습니다. 아직 3회 초고 다저스에게도 7번의 공격 기회가 남아있습니다만. 믿었던 선발투수가 무너지고 흐름도 완전히 넘겨줬는데, 최근 로키스가 한 번 잡은 흐름을 놓칠 것 같지도 않고... 다저스, 진짜 큰일났는데요?]
완전히 물이 오른 로키스 타선을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만으로 상대한다? 그것도 주 무기도 아닌데?
당연히 불가능했고, 당연히 탈탈 털렸다.
이번 시리즈 들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동안 꾸준히 한 발 느리거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결정만을 내렸던 다저스 벤치는 이번에도 그랬다.
에이스급 투수는 보통 초반에 조금 흔들려도 결국 안정을 찾는 경우가 많았기에 정규시즌처럼 3회에도 후에르타를 올렸고... 멸망했다.
[자, 후안 올리베이라가 두 경기 연속 등판하는데, 이런 경우가 또 있었나 싶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올려보내는 투수를 두 경기 연속으로 올리다니... 다저스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겁니다.]
[포스트시즌이니까 5선발 토리 페터슨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페터슨이 불펜에서 나와도 잘 던져줄 수 있을지는 검증되지 않았죠.]
[이것도 몇 시즌째 이어지는 포스트시즌에서의 지나치게 보수적인 결정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이건 좀 애매하네요. 사실, 이런 분위기에 올라와서 제대로 던져주는 투수는 진짜 많지 않아요. 여기서 괜히 모험 같은 걸 했다간 거기서 바로 경기가 끝나버릴 수도 있으니 올리베이라를 선택한 게 이해는 돼요. 다만, 오늘은 올리베이라가 잘 던져줘야 할 텐...]
해니건의 적시타로 3회 2아웃에 주자는 1루, 스코어는 5-0.
그리고 타석에는 2번 타자 유영도.
“대체 무슨 일이냐, 이게 진짜...”
“그러니까. 진짜 무슨 일이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인데, 이거...”
다저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수만 명의 다저스 홈팬들.
그런 홈팬들이 무슨 동상처럼 가만히 굳어 있었다.
너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다 보니 수용 가능한 용량을 초과해서 뇌가 멈춰버린 듯한 느낌.
다저스 정도의 전력, 기대치, 팬덤을 가진 팀의 팬들이라면 일찌감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데 그럴 정신도 없는 듯했다.
“근데 지금 그냥 이렇게 미쳐버려도 되는 건가...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오늘도 지면 쿠어스 필드야. 어쩔 거야?”
“X발, 월드시리즈 또 못 가? 월드시리즈가서 지는 것도 아니고 이제 월드시리즈도 못 간다고?”
“쿠어스 필드 가면 진짜 X되는 거야. 솔직히 스윕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X발, 홈에서도 발리면 X발, 쿠어스 필드에서 어떻게 이기냐고!!”
“로키스 새끼들... 무섭네 X발...”
영도의 타구가 또 한 번 다저스타디움의 외야 펜스를 크게 넘어갔고 다저스 홈팬들은 가만히 앉은 채 고개만 움직여 타구의 궤적을 쫓았다.
말도 없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탄사도 없고, 심지어는 표정도 없었다.
그 정도로 지금 다저스 팬들은 인지부조화가 강하게 일어난 상태였다.
[Y-DO는... 뭐...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겁니까? Y-DO한테 홈런 한 개 포함 한 3, 4타점 내준다고 생각하고 경기를 해야 하는 건지...]
[3, 4점은 그냥 준다고 생각하는 게 낫겠어요. 투수도 Y-DO 앞에서는 절대 바꾸지 말고 Y-DO 이후 타자들을 잡겠다는 생각으로 바꾸는 게 낫겠고.]
[그나저나 다저스 큰일입니다. 이제 쿠어스 필드로 가야 하는데... 와...]
[솔직히 말하면 챔피언십 시리즈 시작 전까지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진출 확률이 70%였다면 이제 로키스 쪽이 70% 정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잘하면 스윕도 나올 것 같은데 이거 괜찮을까요? 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데...]
인지부조화고 뭐고 사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월드시리즈 준우승도 실패가 되는 팀에서 월드시리즈 준우승은커녕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스윕으로 처참히 박살날 위기였으니...
심지어 챔피언십시리즈 상대는 같은 서부지구의 콜로라도 로키스.
단 한 번도 라이벌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같은 선상에 끼워준 적조차 없는 로키스 따위에게 접전도 아니고 스윕으로 쳐발린다?
중계진이 폭동을 이야기하는 게 과장도 아니었다.
정말로 스윕과 동시에 폭동을 걱정해야만 했다.
“음... 경찰에 연락해보세요. 진지하게 협조가 필요할 것 같다고.”
“안 그래도 경찰에서 먼저 연락왔습니다. 경찰 병력을 늘려준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3, 4차전이 쿠어스 필드에서 펼쳐지다 보니 폭동이 LA만의 일이 아니었다.
LA와 동시에 쿠어스 필드 근처에서도 충분히 소요 사태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제프리 에녹 단장을 비롯한 로키스 프런트도 슬슬 경찰에도 연락해보고 하면서 대처를 준비했다.
물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준비하는 게 프런트의 일이긴 했다.
하지만 아예 일어날 확률이 희박한 일까지 전부 준비하진 않는 법.
로키스 프런트는 ‘폭동’, ‘소요사태’ 등 좀 무섭고 어려운 일을 대비하는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입이 찢어져서 거의 입꼬리가 귀에 걸려있는데 대체 누가 이 얼굴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누가 들으면 안 되겠지만... 건물 몇 개 부서져도 좋으니 월드시리즈 갔으면 좋겠네요. 40대 후반에 팀을 맡은지 3년 만에 월드시리즈 진출이라... 마음 같아선 내 돈으로 다 고쳐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예. 누가 들으면 정말 안 될 것 같습니다.”
로키스가 이러고 있으니 직접적 당사자인 다저스 프런트 역시 점점 더 진지하게 챔피언십시리즈 이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로키스 프런트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 있고, 다저스 프런트의 입꼬리는 한없이 처져있다는 것뿐.
안 그래도 야구팬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던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점점 더 거대한 관심이 몰려들고 있었다.
스포츠 팬, 나아가 사람들은 모두 이변을 좋아하는 법이었다.
[이제 7-0입니다, 7-0. 올리베이라가 올라오자마자 투런 홈런을 맞았는데, 아직 최소 두 타자를 더 상대해야 하고, 막상 올리베이라를 내린다면 누구다! 누굴 올려야 한다! 하는 선수가 없습니다.]
[뭐... 이러면 제퍼슨 올리는 수밖에 없죠. 3회, 4회부터 긴 이닝을 맡아줄 투수가 필요한데, 어제 너무 많은 투수를 소모해서 이제 무조건 3, 4이닝은 맡아줘야 하거든요?]
[절대 패배해서는 안 되는 경기지만, 절대 많은 투수를 소모해서도 안 되는 경기. 다저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내몰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망한 거죠, 뭐.]
< 돌풍이 태풍으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