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성 >
- 솔직히 컵스가 털리고 로키스 올라온 거 개꿀 아니냐?
- 미국 애들도 똑같은 반응이더라. 운 좋아서 여기까지 올라온 건 알겠는데, 다저스는 운으로 못 잡지.
- 개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컵스는 그래도 좀 무서운데 로키스는 아니지. 로키스 새끼들은 개허접임.
- 두 번 정도 스윕당하긴 했지만,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많이 스윕했으니까. 컵스 아닌게 어디냐? 유일하게 긴장해야 할 상대가 컵스였는데... 로키스 애들 사실 알고 보니 다저스 팬들이었음. 다저스 월드시리즈 우승 시켜주려고 고생했다.
- 유영도만 시리즈 내내 홈런 한 세 개 정도 때리고 다저스가 스윕하면 될 듯
ㄴ ㄴㄴ. 스윕하면 경기 감각 떨어져서 월드시리즈에서 힘듦. 4승 1패 정도가 딱 좋은 듯.
- 니네 뭔데 로키스 이렇게 무시하냐? 로키스는 긴장해서 상대해야 함. 제일 무서운 새X들은 전력 강한 놈들이 아니라 분위기 좋은 놈들임.
ㄴ 분위기 좋은 놈들이 아무리 무서워도 로키스는 아니지. 로키스 전력으론 분위기 아무리 좋아도 우리 못 이김
- 로키스가 여기까지 올라온 건 천운. 검색해보니까 원조 ‘록토버’ 때도 월드시리즈 우승 못 했던데, 이번에도 똑같을 것. 1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거든!
ㄴ ... 너 취소해라. 원조 ‘록토버’는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스윕이었어, 병X아.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내전으로 완성된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대진.
일단 다저스 팬덤은 컵스 대신 로키스가 올라와서 다행이라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물론, 시즌 막판부터 이어진 로키스의 분위기가 워낙 대단해서 폭주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다 보니 긴장하는 사람들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돌풍의 팀을 상대하는 우승후보들이 항상 그렇듯 다저스 역시 ‘설마 우리까지 당하진 않겠지’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전력의 격차가 지나칠 정도로 벌어진 상태라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다저스의 전력은 로키스보다 눈에 띄게 강력했고, 오마르 킵니스의 삽질 덕분에 몇 차례 스윕을 내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시즌 상대 전적에선 앞섰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다저스가 지난 50여 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에 실패한 이유 중 한 부분을 이런 자만과 오만이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월드시리즈 우승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다저스이기에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윈-나우’를 반복, 페이롤 5위권을 벗어난 적 없었고, 최근 20년 정도는 거의 매 시즌 우승 후보 0순위에서 1순위를 오갔다.
그리고 정규시즌 성적은 언제나 완벽했다.
완벽한 정규시즌과 아쉬운 포스트시즌, 그리고 월드시리즈에서의 실패.
30년 동안 이런 실패가 거의 10여 차례 반복되었다.
최근 30년 중 17회의 지구 우승과 21회의 포스트시즌 진출, 8회에 걸친 월드시리즈 진출, 그리고 준우승.
30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LA 다저스가 내셔널리그 최강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성과를 올렸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제외하면 모든 걸 해낸 팀이었다.
그러나 월드시리즈 우승이 없는데 내셔널리그 최강을 자부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다저스는 그때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 정도 실패가 반복되면 변하는 게 있어야 했지만...
다저스의 변화는 항상 2%씩 아쉬웠고, 언제나 조연을 벗어나지 못했다.
[돈 라이스와 제러드 홉슨의 에이스 맞대결은 정규시즌이었다면 무조건 돈 라이스의 우세를 점쳤을 겁니다. 그러나 포스트시즌은 다르지 않습니까?]
[참... 이런 전통은 이어질 필요가 없는 전통인데 말이죠. 클레이튼 커쇼 이후 다저스 에이스의 포스트시즌 잔혹사가 끊이질 않아요. 조금씩 발전하긴 하는데, 커쇼 이후 훌리오 유리아스는 커쇼보단 훨씬 나았지만, 그래도 정규시즌에 비하면 아쉬웠고, 댄 셔크는 디비전 시리즈까진 괜찮았으나 챔피언십 시리즈 이후 무너졌고...]
[돈 라이스는 챔피언십 시리즈까진 괜찮지만, 월드시리즈만 되면 자기 기량을 못 보여줍니다. 잔부상이 많고 5일 이상 휴식 후 등판한 경기에 비해 그렇지 못한 경기, 4일도 쉬지 못한 경기의 차이가 큰 것도 포스트시즌에선 종종 문제가 되기도 했죠?]
[그리고 전체적으로 선수들이 월드시리즈 우승을 강하게 원하다 보니 이게 투지를 넘어서 지나치게 무겁게 느끼는 것 같아요. 부담감이 크고 욕심이 크다 보니 포스트시즌만 되면 몸이 무거워 보입니다.]
[이번 디비전 시리즈도 마찬가지였죠. 전력 차를 앞세워 브레이브스를 3승 1패로 꺾어내긴 했습니다만, 불안한 모습이 없진 않았습니다.]
[심지어 로키스가 폭주하는 중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이변이 일어날 확률을 높게 볼 수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다저스 팬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나 팀 훈련장을 보면 자신감이 넘쳐요. 자신감이 넘치면 긴장감과 부담감에 짓눌리지나 말든지, 긴장감, 부담감이 크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투지를 불태우거나 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이 약한 게 LA 다저스의 문제점 중 또 한 부분이죠.]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20대와 30대 초중반에 대부분 걸치는 운동선수들은 시대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받아들이는 연령층이었다.
종목을 막론하고 예전처럼 운동에만 매진하는 선수들은 거의 사라졌고,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서면 적당히 운동하면서 그 위치에서의 삶을 즐기는 경우가 늘었다.
특히 LA 다저스처럼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를 연고로 하는 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은 수많은 유명인, 수많은 파티와 언론, 팬덤의 유혹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아니, 적극적으로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들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중요한 순간 약해지거나 부상에 시달리는 에이스, 포스트시즌만 되면 팀 전체를 짓누르는 부담감과 긴장감, 이를 잊어버리게 해주는 것 같은 수많은 유혹들...
이 환장의 조합들은 매년 가을 다저스를 찾아와 괴롭혔다.
[그냥 가져다 맞추는 것에만 집중한 해니건의 타격! 3루 방향으로 힘없이 굴러... 아! 놓쳤습니다! 잭 헤링의 아쉬운 수비! 1루... 던지지 못합니다! 당연하죠! 한 번이라도 더듬으면 해니건은 잡을 수 없습니다!]
[아이고... 이거 시작부터 불안해지는데요? 다저스는 포스트시즌에서 이런 힘 빠지는 플레이를 절대 보여주면 안 되는 팀이고, 지금의 로키스는 아주 사소한 약점이라도 보이면 바로 무섭게 기세를 끌어올릴 수 있는 팀이에요.]
[상대의 기세는 올려주고 우리 분위기는 뚝 떨어뜨리는 플레이였습니다. 그것도 다저스와 로키스, 이 두 팀의 최근 분위기를 생각하면 더더욱 피해야 했던 상황인데 일단 최악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LA 다저스는 2041시즌 개막 시리즈와 19연승을 시작하는 시리즈에서 로키스에 스윕을 헌납했다.
즉, 중요한 순간마다 로키스의 제물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자, 아직 챔피언십 시리즈입니다. 절대적인 에이스 돈 라이스를 믿고 분위기를 추스를 필요가 있습니다.]
[해니건을 내보내긴 했지만, 지난 5회까지 고작 두 번의 출루만을 허용했던 에이스죠. 돈 라이스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어요. 홉슨도 다저스 상대로 5이닝 3실점이면 자기 몫은 해줬다고 볼 수 있지만, 자기 몫의 기준이 다르죠.]
‘이쯤에서 최소한 1점이라도 만회해야 할 텐데.’
영도의 앞에 주자가 있는 건 이번 타석이 처음이었다.
6회 초가 되어서야 겨우 세 번째 주자가 나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다저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원정 경기에 돈 라이스와 제러드 홉슨의 맞대결.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패배를 각오하고 시작한 경기였으나 그렇다고 질 생각은 아니었다.
이 경기에서 희망을 이어가려면 최소한 자신의 앞에 주자가 한 명이라도 있는 이 순간, 직접 타점을 올리든 1아웃에 주자를 3루까지라도 보내든 득점과 직접적으로 이어질 타격을 해내야만 했다.
이 팀에서 돈 라이스를 상대로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낼 타자는 분명 극소수였으니까.
‘음? 갑자기?’
[하하하, 공이 손에서 빠진 것 같습니다. 변화구를 던지려고 했던 게 빠진 건지 포수 미트는커녕 아예 포수 근처에도 못 가고 백네트를 때렸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확률이 가장 크죠. 그런데... 돈 라이스라면 이거 한 번쯤 의심해볼 필요는 있어요. 손톱과 손가락 끝이 약하기로 유명한 선수거든요? 손톱이 깨지거나 손가락 끝에 물집이 잡혀서 강판되고 한두 차례 로테이션을 거르는 일이 한 시즌에 한 번은 꼭 있는 선수라...]
‘이거... 깨졌다.’
손톱이 직접적으로 공에 닿는 구종은 거의 없고, 손톱이 깨지는 건 자기 관리 소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립과 공을 던지는 방법은 선수마다 다르기 마련이었고, 돈 라이스는 비교적 손톱을 많이 쓰는 성향의 투수였다.
절대 손톱깎이도 쓰지 않고, 전문적인 서비스를 받았으며, 투명 매니큐어 등을 활용하면서까지 철저하게 손톱을 관리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타고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월드시리즈와 함께 돈 라이스의 유이한 단점이 지나치게 허약한 손끝이었다.
손톱, 그리고 공을 잡아채는 손가락의 마지막 마디.
잔부상이 잦다고 평가되는 것도 대부분 손끝의 문제였고.
‘뭐야? 안 내려가려고?’
돈 라이스가 포스트시즌마다 성적이 안 좋은 이유 중 한 가지.
양파처럼 깔 때마다 이유들이 나오는데, 이 정도로 복합적인 이유가 있어야 LA 다저스처럼 수십 년을 실패할 수 있다는 방증이었다.
어쨌든 또 한 가지 이유는 본인의 지나친 책임감이었다.
아직 명확한 결과가 나온 건 아니었지만, 영도는 돈 라이스의 손톱이 또 깨졌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정말 손톱이 깨졌다면 제대로 된 피칭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마운드를 내려가는 게 맞았다.
그러나 돈 라이스의 월드시리즈 성적을 살펴보면 강판되기 직전 이닝까지만 계산했을 때 2점대 초반의 FIP를 찍다가 강판된 이닝 성적이 더해지면 3점대 중후반까지 치솟았다.
이 정도 에이스의 강판 타이밍을 결정할 땐 본인의 의견이 강하게 들어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본인의 책임감과 욕심, 의욕이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지금도 그런 타이밍인 듯했다.
‘확실해. 깨졌다.’
어쨌거나 돈 라이스 본인에겐 모르겠지만, 영도에겐 이만한 찬스가 없었다.
폭투 이후 던진 이번 공은 분명 폭투 이전의 위력이 아니었고, 돈 라이스라는 투수의 기본 기량이 있기에 배팅볼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었지만, 이 정도는 패전조 투수들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
이럴 때일수록 신중하고 또 신중해서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려야 했다.
상태를 보아하니 이 정도면 본인이 아무리 더 던지고 싶어도 불펜 준비를 위해 최대한 시간을 끌거나 길어야 한두 타자 정도 더 상대하고 끌려 내려갈 듯하니 무조건 좋은 결과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음... 갑자기 볼이 조금 높게 뜨는 듯한 느낌입니다.]
[볼이 높아지기만 한 거면 괜찮은데, 잡아채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스윽 밀다가 놓는 느낌이거든요? 이렇게 던지면 이거 스터프에 문제가 크게 생겨요!]
시간이 많이 없었다.
이 정도로 눈에 띄게 안 좋아지면 다저스 덕아웃도 계속 보고만 있진 않을 터.
이미 에이스의 허약한 손끝을 다저스도 잘 알기 때문에 폭투 이후 투수코치가 바로 올라왔고, 이번 이닝에서 한 번 더 올라오면 바로 교체였다.
‘좀 높지만... 더 고를 시간이...’
돈 라이스의 공은 계속 높았지만, 이젠 승부를 걸어볼 때였다.
여기서 볼넷으로 출루해서 투수가 바뀐다고 해도 끝이 아니었다.
돈 라이스가 빠진다고 해도 여전히 LA 다저스의 전력은 로키스보다 훨씬 더 강력했으며, 에이스 한 명의 강판으로 바뀌는 건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정말로 분위기를 바꾸려면 돈 라이스가 있을 때부터 어떤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야 했다.
그게 바로 높은 공에 배트를 휘두르는 이유였다.
[높은 공을 그대로 찍어내는 Y-DO의 스윙! 역시 약해진 돈 라이스를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높은 공을 때렸지만, 그냥 라인 드라이브로 넘겨버렸습니다! 포스트시즌 돌입 이후 4호 홈런! 문 샷과 라인 드라이브를 가리지 않는 홈런 공장장, Y-DO가 다시 생산라인을 가동합니다!]
[아이고... 그래요. 지금 컨디션이 안 좋은 건 확인했고, 다저스도 투수코치가 직접 올라와서 확인했으니 불펜 투수들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리 그래도 돈 라이스니까 조금만 버텨주길 기대했던 것 같은데...]
[다저스는 간단합니다.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원한다면 여기서 한 번만 더 참자, 한 번만 더 돈 라이스를 믿자, 이런 생각이 들 때 바로 투수를 교체하면 됩니다.]
[어유, 그랬으면 월드시리즈 우승을 해도 몇 번은 했겠죠. 그게 안 돼서 이렇게 된 건데...]
살짝 높은 공이긴 했지만, 그래도 돈 라이스의 클래스가 있어서 그런지 스트라이크 존에서 아주 크게 벗어난 높은 공은 아니었다.
구위가 조금만 떨어지면 때렸을 때 딱 내일까지 날아갈 만한 치기 좋은 공.
“아... 내려가는 건가.”
“호오... 많이 아쉽나 본데. 네가 타석에 들어서기 직전에 감정을 내비치는 걸 보니.”
다저스의 투수코치가 이번 이닝에만 두 번째로 마운드를 방문했고, 감정 표현 없기로 유명한 키스 가드너가 한탄을 내뱉었다.
결국, 이번에도 다저스의 에이스는 중요한 순간 팀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도 강판 전까지 잘 던져줬기에 아직 다저스의 3-2 리드는 이어지고 있었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불펜 투수들이 한 점 차 리드를 얼마나 지켜줄 수 있을지.
그리고 무엇보다 로키스가 다저스의 틈을 발견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의 로키스는... 아주 자그마한 틈을 시작으로 미친 듯이 폭주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었으니까.
< 관성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