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작은 성공 > (136/200)

< 작은 성공 >

가드너는 크게 보면 영도와 비슷한 성격의 선수였다.

남들의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야구에만 집중하는 성격의 선수.

영도처럼 그 역시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았고, 쉽게 달아오르지도, 쉽게 처지지도 않았다.

제퍼슨의 공이 머리를 향해 날아왔을 때, 그도 인간인지라 순간적으로 발끈했지만, 구심이 몸으로 저지하고 제퍼슨에게 퇴장을 지시한 뒤에는 묵묵히 1루로 걸어나갔다.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할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당사자인 제퍼슨과 가드너가 다른 이유로 자리를 떠나면서 흐지부지.

하지만 이후의 경기 흐름까지 흐지부지되진 않았다.

[브루어스도 Y-DO의 연타석 홈런 이후 제퍼슨이 흔들린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에 불펜 투수들을 준비하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이스가 그렇게 내려가면... 몸이 풀렸든 안 풀렸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번 시즌 와일드카드 경쟁팀들 정도 되면 승률이 거의 6할 가까이 되니 어디든 큰 구멍은 없다고 봐야겠죠. 하지만 로키스나 브루어스는 안정감이 좀 떨어지는 편이에요. 로키스는 젊어서, 브루어스는... 에이스 제퍼슨의 멘탈은 이미 확인했죠?]

[에이스 제퍼슨, 타선의 핵 에르난데즈. 두 선수 모두 항상 멘탈이 불안한 선수들입니다. 중심을 잡아줘야 할 선수 두 명이 전부 그러니까 팀 전체가 자칫하면 흔들립니다.]

[결국... 오늘도 제퍼슨의 실패가 팀 전체의 실패로 이어지는 흐름이죠? 이래서 제퍼슨이 그 대단한 기량을 가지고도 S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겁니다. 이유가 너무 뻔하고 어설프잖아요. 본인 잘못으로 퇴장당했는데, 거기서 그라운드에 글러브를 패대기치고 나가기까지... 이제 머리가 점점 하얘지는 제이든 코치가 달려와서 그걸 주워갈 나이입니까, 지금? 그런 거 하려고 코치하는 게 아니거든요.]

5회 말 1아웃 이후 퇴장으로 그라운드를 떠난 테오 제퍼슨.

제퍼슨에서부터 시작된 흔들림이 브루어스 팀 전체를 망가뜨렸다.

로키스 타선은 영도의 연타석 홈런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이후에도 제퍼슨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나 머리로 향하는 위협구에 이은 퇴장으로 분을 풀 곳이 없었던 선수들이 뒤이어 등판한 불펜 투수들에게 분풀이를 시작한 것.

안 그래도 제퍼슨이 저지른 대형 사고 때문에 분위기가 처져 있었던 브루어스 불펜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로키스 타선을 제어하지 못했다.

콜로라도 로키스라는 팀 자체가 워낙 특수한 팀이고, 특수한 환경에서 항상 고전하는 팀이다 보니 로스터가 바뀌어도 항상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키스 가드너처럼 팀 내 입지와 위상이 확고한 선수를 건드렸으니...

객관적인 전력 차이고 뭐고 순위도 비슷하고 경기 내용도 팽팽하던 상황에서 한 팀의 분위기는 떡락, 한 팀의 분위기는 떡상했다면 뒤는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이고, 여기서 또 적시타! 로키스 선수들, 너무한 것 아닙니까? 그래도 오늘 경기 전까지 역대급 와일드카드 티켓 경쟁을 치열하게 펼쳤던 팀인데...]

[브루어스 투수들 표정 좀 보세요. 대체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기억도 안 난다는 표정이잖아요. 어쩌면... 기억을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팽팽하게 이어지던 게임이 5회 말 이후 너무 처참해져서...]

8회 말, 로키스의 공격이 이어지는 시점에서 스코어는 15-5.

와일드카드 티켓을 놓고 치열하게 맞붙었던 지난 한 달여와 5회 말까지의 접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점수 차이였다.

이미 로키스가 와일드카드 티켓을 따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역대급 와일드카드 경쟁의 마지막은 생각보단 허무했다.

“13년! 13년 걸렸어, 13년!!”

“개 같은 다저 놈들!! 포스트시즌도 못 나간다고 지랄했던 새끼들 다 기억해놨다!! 딱 기다려!! NLCS에서 밟아줄 거니까!!”

“말이 13년이지, X발!!!!! 우리 애가 중학교 들어갈 때 포스트시즌 봤는데, 지금 우리 애가 애가 있어!!”

“미친 우리 새끼들!! X나게 사랑한다!! 너희가 최고야!!”

“내가 뭐랬어!? 덴버는 절대 쉽게 꺾이지 않는다고!! 우리가 이 고도 높은 지역에서도 살아남은 인간들이야!!”

하지만 결과가 허무하면 어떠랴.

허무하게 패배한 것도 아니고 일찌감치 승기를 이쪽으로 가져와서 허무해진 것도 로키스 팬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일찌감치 승리를 만끽했고, 7회 이후부터는 마치 여흥처럼, 13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자축하는 뒷풀이처럼 경기를 관람하는 중이었다.

“으어어어... 13년... 13년!!! 개 같은 다저 새끼들은 그렇다 쳐도 자이언츠 새끼들이나 D백스, 심지어 파드리스 새끼들한테도 무시 받던 세월은 이제 끝이야!! 파드리스 마지막 포스트시즌 진출이 언제야!! 언제냐고!!”

- 11년 전이지, 브로. 우리보다 고작 2년 짧은 주제에 거들먹대는 꼴이라니! 이젠 안 봐도 돼!!

- 걔들은 그거 하나로 먹고사는 놈들이니까! 파드리스 X신들이 그거 말고 자랑할 게 있기나 해? 으하하하!!

ㄴ 냉정하게 말해서... 우린 다른가? 그나마 파드리스는 지구 우승 5번에 내셔널리그 우승 2번, 데이브 윈필드, 토니 그윈, 트레버 호프먼 같은 레전드라도 있지, 우린... 지구 우승 없고 내셔널리그 우승 1번..

ㄴㄴ 너 X발, 파드리스 새끼냐? 어딜 기어들어 와! 여긴 로키베놈과 로키들만의 공간이라고!!

ㄴㄴ 우리보다 24년이나 먼저 창단한 주제에 고작 그거 가지고 자위하는 거냐? 우리가 24년 안에 지구 우승 5번, 내셔널리그 우승 1번 추가하면 되냐고!!

ㄴㄴ 우리도 X발, 래리 워커 있어!! ‘미스터 옥토버’ 모르냐? 로키스 유일의 HOFer시다!!

- 우리 다음 HOFer는 누굴까? 놀란이 지금 6수 중이긴 한데, 2, 3년 안에 들어갈 수 있으려나.

- 몰라, X발!!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을 즐기자고!! 13년 만의 포스트시즌이야!! 우리도 가을에 야구한다, X발!!

쿠어스 필드의 홈 관중은 물론, 인터넷으로 시청하는 팬들, 그냥 로키스 팬들이 둘 이상 모인 장소는 난장판이었다.

모인 사람 전부 반은 미쳐서 포스트시즌 진출의 기쁨을 만끽하는 상황.

그만큼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포스트시즌 진출이 갖는 의미는 각별했다.

서울 제츠는 포스트시즌이라도 꾸준히 나간 강팀이기라도 했지... 로키스는 지구 우승이 아예 없고 와일드카드 티켓만 7번 따낸 게 전부.

아무리 젊은 팀이라지만, 어느새 창단 50주년을 앞두고 있는 팀.

50여 년 동안 지구 우승조차 한 번 없다는 것은...

물론, 월드시리즈 준우승은 있으니 1977년 창단해 월드시리즈 무대조차 밟아본 적 없는 시애틀 매리너스보단 낫지만, 그걸로 위안 삼기엔 한 번이라도 월드시리즈를 제패해본 팀이 무려 24개 구단이었다.

그러니 포스트시즌 진출만으로도 세상 전부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로키스 팬들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포스트시즌에 나가면 2007년의 ‘록토버’처럼 기적을 일으킬 가능성이라도 생기니까.

포스트시즌은 단기전이었고, 단기전은 이변의 온상이었다.

로키스 팬들은 그런 기적을 또 한 번 기대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 로키스는 이미 기적을 한 차례 보여주기도 했고.

“자, 갔다 와. 가서 경험치 쑥쑥 먹고 많이 커서 와라.”

“옙! 멋지게 끝내고 오겠습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로키스는 외인구단 같은 팀이었다.

해니건, 가드너, 와그너 같은 선수들처럼 리그에서 인정받는 정상급 선수들도 있지만, 에이스부터 ‘에이스를 꿈꾸는 2선발로 에이스 자리를 주겠다는 팀이 없어’ 로키스를 선택한 선수였다.

매그니와 케플러의 영입으로 그나마 나아진 편이지만, 트레이드 이전까지는 유망한 신인들 + 오라는 팀이 없었던 베테랑이 27인 로스터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던 팀이었다.

이번 시즌 대박을 냈지만, 아마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을 터였다.

영도는 아마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팔아야만 최소한의 이득이라도 볼 테고, 다음 시즌까지 무리해서 함께한다고 해도 얻는 건 보상 픽 정도일 테니.

월드시리즈 우승이 급한 만큼 영도를 남겨서 월드시리즈 우승후보로 꼽힐 만큼의 전력을 갖출 수 있다면 무리해서 1년 더 함께할 수 있겠지만, 욕심과 현실은 달랐다.

[9회 초, 아마도 브루어스의 이번 시즌 마지막 공격이 될 공격에서 로키스는 유망주 자야 로페즈를 마운드에 올렸습니다.]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 경기를 마무리하는 순간 마운드에 선다는 건 유망주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어요. 자야 로페즈 정도면 신경 써서 경험치를 먹여줄 가치가 있는 선수죠.]

템파베이 레이스, 캔자스시티 로얄스 등 소규모 마켓의 성공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들에겐 유망주 육성이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노쇠화로 팀을 찾지 못했던 35세 노장을 선발로 데려왔으나 결국 오프너 후 3, 4이닝용 투수로 내려간 라미로 볼퀘즈 같은 선수들로 최대한 버티고 유망주에게 경험을 전수해주면서 이들이 터질 시기만을 재고 있는 상황.

절반의 실패로 5인 로테이션 중 3인이 오프너가 될 뻔했던 위기는 커트 페니의 등장으로 겨우 메웠고, 볼퀘즈의 튜터 덕분인지 유망주들이 빠르게 성장해 절반의 성공은 거둔 2041시즌.

아마 다음 시즌이 되면 이들을 핵심으로 다시 대권을 노려볼 테고...

영도는 그 과정에서 특급 유망주 중 즉전감에 가까운 선수들을 패키지로 우르르 묶어 트레이드될 가능성이 컸다.

로키스 같은 팀은 빅마켓과 운영 방식부터 달랐다.

이번 시즌 기적 같은 대성공을 거뒀지만, 마지막 경기마저도 즐겁게만 치를 수 없었다.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고 대비하고 걱정해야 했다.

[99마일의 강속구로 경기를 끝내는 유망주, 자야 로페즈! 미래를 책임질 유망주의 인상적인 모습과 함께 콜로라도 로키스가 13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었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시즌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콜로라도 로키스! 이제 엔딩 이후의 에필로그까지 행복하고 즐겁게 마무리하기 위해 가을의 야구를 준비합니다!]

[정말 멋진 시즌이었어요. 멋진 모습을 보여줬고요. 로키스 선수들은 충분히 이 순간을 만끽할 자격이 있습니다. 팬들 역시 마찬가지. 충분히 기뻐해도 좋고, 여러분들에겐 그럴 자격이 있어요. 축하합니다, 로키스.]

하지만 그런 걱정과 준비는 프런트와 코칭스태프의 몫이었다.

그들이 알아서 긴 안목을 가지고 팀을 운영할 테고, 그런 와중에도 팀 전력의 대부분은 포스트시즌을 위해 할당해놨을 것이었다.

선수들은 그저 한 경기, 한 경기에 집중하면 그뿐.

모두에겐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의 역할이 있는 법이었고, 굳이 그 이상을 하려 할 필요는 없었다.

“으아아아!!!!! 아아... 아앍...”

“여기! 여기 게일 울어요! 여러분!! 게일 웁니다!!”

“시끄러어어얽... 하지맑...”

“끄하하하, 게일 좀 보라고!! 우리 리더 꼴이 말이 아닌데!?”

“원래 위엄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던 리더지만, 이건 뭐... 흑역사를 자기가 알아서 만들잖아!? 놀라운데? 이 정도일 줄이야...”

커리어 첫 포스트시즌 진출의 염원을 이룬 해니건은 감정이 북받쳤는지 폭풍 눈물을 쏟았다.

에레라와 반스, 순식간에 팀에 녹아든 매그니 등 분위기 메이커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고, 순식간에 해니건을 둘러싼 채 관중석을 돌았다.

텐션이 하늘을 뚫은 로키스 홈팬들도 그런 선수들의 장난에 발맞춰 해니건에게 카메라 초점을 맞췄고.

“훗.”

“너도 웃을 줄 아는군.”

“그러는 모리스도 웃고 있습니다만.”

“아... 알고 있다. 기쁜 걸 숨길 필욘 없지.”

로키스 공식 돌부처들, 가드너와 모리스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희미한 미소로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기쁜 표정은 아니었지만, 어쩌겠는가.

본인이 기쁘다는데 믿을 수밖에.

‘이 정도면... 완벽한 시즌이었나.’

영도 역시 기뻤다.

시즌 후반부터는 제츠 시절과 마찬가지로 팀을, 동료들을 포스트시즌에 올려주고 싶어졌고, 성공했으니까.

어쩌면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에 변했던 거지, 원래 본성은 팀과 동료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쪽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2년 연속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그래도 가장 기쁜 건 ‘팀에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선수’임을 증명했다는 것이었다.

이번 시즌 로키스의 성공에서 영도의 지분은 절대적이었으니까.

‘팀에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선수’라면 비슷한 성적의 다른 선수들보다 몸값도, 인기도, 임팩트도 강할 수밖에 없는데, 비슷한 성적의 선수마저 없는 압도적인 성적을 찍어냈으니...

2040시즌이 영도를 다시 주류로 이끌었다면 2041시즌은 영도를 주류 중의 주류로, 메이저리그 생태계의 정상으로 이끈 시즌이었다.

‘그럼... 쐐기를 박으러 한 번 가볼까.’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팀, 콜로라도 로키스.

포스트시즌의 로키스를 이끄는 일에는 부담도 없었다.

부담 없이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하다 보면... 누가 또 아는가?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또 한 번 일으킬 수 있을지.

로키스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결정되고 10여 분.

순식간에 감정을 정리한 영도의 시선은 이미 포스트시즌을 향해 있었다.

< 작은 성공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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