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테랑의 가치 >
“으아아아아아!!!!! 으아악!!!!!”
흔히 볼 수 없는, 아니, 잠깐이나마 반짝였던 풀타임 2, 3년 차 이후 10년 가까이 볼 수 없었던 앤서니 모리스의 포효.
항상 표정 변화 없이 과묵하게 자신의 일에만, 야구에만 집중하던 모리스의 낯선 모습에 모두가 놀랐다.
모리스는 팬들에게도 이미지가 좋은 선수였다.
비록 화려하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고, 성적도 특별하지 않은, 심지어 경기에 오래 나오지도 않는 선수였지만, 한 팀의 팬이라면 그런 것 없이 그저 묵묵히, 성실하게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줘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팬 커뮤니티에선 모리스를 주제로 한 대화가 종종 나오곤 했다.
그가 어떤 캐릭터인지, 어떤 성격인지, 평소 모습이 어떤지 정도는 팬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상황.
“아니, 저게 뭐야...?”
“앤서니가 저렇게 포효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훨씬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동료들마저도 이렇게 놀라는데 팬들은 더욱 놀랄 수밖에.
팬들은 놀랐다면 동료들은 충격을 받았다.
모리스가 대체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길래 그 성격에 저렇게까지 할까.
[앤서니 모리스의 시즌 4호 홈런. 일단 콕스 감독의 과감한 도전은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로키스 선수단이 쿠어스 필드의 피로와 19연승의 피로가 겹쳐 휴식이 필요한 건 맞지만, 이런 상황에서 더햄 같은 선수들에게 휴식을 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과감한 결단을 내렸고, 이는 성공으로 돌아왔습니다. 감독으로서 이만큼 짜릿한 일은 없죠.]
충격받은 선수들 모두 답답해서 내가 친다를 시전하고 포효하는 모리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런 선수가 주전 자리를 내어주고 작은 역할을 맡아 묵묵하게 뒤에서 받쳐줬는데 8연패로 보답하다니...
뭔가 미안하기도, 부끄럽기도 해서 다시 한 번 선전을 다짐했다.
모리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절규하는 듯한 포효 한 번으로 선수단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물론, 선수들은 8연패 기간 내내 이번에는 연패를 끊어내겠다, 연패를 끊고 다시 포스트시즌을 향해 달려가겠다, 다짐했지만, 지금과 같은 충격은 없었다.
충격요법은 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아주 입이 찢어지려고 하네.’
모리스를 히든카드로 뽑아든 것, 영도에게 대화를 부탁한 것,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게 어떻겠냐고 콕스 감독에게 건의한 것.
이 모든 일을 계획한 해니건은 자신의 결정이 홈런으로, 그리고 선수단 분위기 반전으로 돌아오자 주체할 수 없는 보람과 기쁨에 찢어지는 입을 억지로 다물려 노력 중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모리스의 모습과 그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에 신경 쓰지 못했지만, 영도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하여튼 저 인간도 대단한 인간이야.’
그러나 해니건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계획한 그대로 완벽하게 일이 진행된 건 사실이었으니까.
아직 확실하게 이뤄진 건 없지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뤄내지 못한다면 그때야말로 선수들 개개인의 문제였다.
해니건과 모리스는 본인의 맡은 바 역할을 150% 해냈다.
아니, 해니건은 타석에서도 뭔가 보여줘야하겠지만, 리더로서는 그랬다.
‘하긴, 나도 지금 누굴 평가하고 이럴 때가 아니지. 견제가 심해서 어려웠다, 출루율 5할 5푼이면 할 만큼 한 거 아니냐, 이런 말들은 결국 핑계니까.’
본인은 아니라는 듯 한 발 떨어졌던 영도 역시 자신의 활약을 돌아보았다.
객관적인 지표는 절대 나쁘다고 볼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장타가 멈춘 건 사실이었으니까.
로키스에서 영도의 역할은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같은 스탯이 아니라 결국 승리였다.
물론, 스탯이 더 중요하고, 스탯을 뽑아줬는데도 승리하지 못하면 나머지 팀원들이 문제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핑계라고는 했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장타가 멈춘 것도 팀원들의 문제였고.
하지만 오늘만큼은 모리스의 기분이 되어보기로 했다.
그라면 분명 진정한 에이스는 어떤 어려움이든 극복하고 이겨내서 팀에 승리를 안겨주는 존재라 생각할 테니까.
‘그래도 메이저리거면, 인간이면 이제 좀 도와주겠지.’
그렇다고 해서 동료들의 도움까지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지금처럼 제대로 된 배팅 찬스 자체가 거의 없고 볼넷은 내줘도 장타는 못 주겠다는 투수들을 상대로 뭔가 보여준다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
모리스의 모습에 충격받은 지금이라면 뭔가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주겠지.
인간이라면 이런 분위기에서 저런 표정들을 하고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너무 양심이 없는 거니까.
“모리스는 해냈고. 이제 당신이랑 와그너 차례인 것 같은데.”
“아... 30대가 우리 둘밖에 없나?”
“타선에는. 마운드에선 30대 에이스가 자기 몫은 해주고 있고.”
“... 젠장. 좋아할 때가 아니었어...”
1, 2번 테이블세터, 해니건과 와그너의 도움이 가장 시급했다.
영도의 앞에 밥상 좀 차려달라고 와그너의 포수 장비까지 벗긴 채 테이블세터로 배치한 것이니까.
둘만 조금이라도 도와준다면... 영도는 언제라도 다시 홈런포를 재가동할 자신이 있었다.
[일단 존경받는 베테랑 앤서니 모리스의 홈런으로 로키스의 분위기가 최근 8경기보단 훨씬 좋아 보이긴 합니다. 원정만 가면 투수친화구장이든 타자친화구장이든 날아다니는 에이스 제러드 홉슨 역시 3이닝을 1실점으로 훌륭하게 막아주고 있습니다.]
[모리스는 홈런 외에도 안타 한 개를 추가하며 2타수 2안타 3타점으로 오늘 경기 로키스의 모든 점수를 책임졌어요. 이외에도 해니건과 반스가 안타 한 개씩을 쳐냈고, 와그너와 Y-DO는 볼넷으로 힘을 보탰고... 3회까지 3득점. 많은 득점은 아니지만, 확실히 다르긴 달라요.]
[Y-DO야 그렇다 치고, 출루에 성공한 나머지 네 선수 중 세 명이 30대 선수들입니다. 로키스 타선에 30대는 세 명인데, 세 명 모두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여요.]
[어려울 땐 베테랑들이 해주는 거죠. 베테랑이 먼저 해주면서 젊은 선수들도 부담을 덜고 따라서 살아나는 게 이상적인 부진 탈출 과정이거든요?]
확실히 뭔가가 다르긴 달랐다.
모리스의 홈런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연속 범타로 물러났던 로키스 타선은 홈런이 나온 바로 그 이닝에 나온 반스의 안타를 시작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3회에는 해니건의 안타와 와그너, 영도의 연속 볼넷으로 무사 만루 찬스까지 만들어냈고.
물론, 무사 만루에서 매그니의 삼진 이후 모리스의 안타로 2점을 뽑아냈지만, 이후 가드너가 더블 플레이로 물러나 아쉬움을 남기긴 했다.
하지만 단번에 살아나긴 어려웠고, 이렇게라도 계속 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희망적인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모리스가 제대로 미치다 보니 선수들이 알아서 들썩거리며 살아나려고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애커슬리의 눈까지 살아납니다! 8연패 기간 동안 28번의 타석에서 1개의 안타와 4개의 볼넷에 그쳤던 고든 애커슬리가 드디어 선구안을 증명합니다.]
[음... 분명 지금 로키스 쪽으로 기회가 왔어요. 선수들 한 명 한 명이 살아나기 위해 꿈틀대는데, 여기서 확실한 한 방만 나오면 8연패를 딛고 다시 19연승 기간의 로키스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직 화끈하게 살아난 선수는 없었다.
반스의 안타도 그의 장타력을 생각하면 만족스럽지 않은, 빗맞았으나 코스가 좋았던 안타였고, 와그너와 애커슬리는 살아나도 어차피 볼넷 셔틀이었다.
출루율 3할 7푼과 3할 2푼이 아주 대단한 수준도 아니고, 그냥 까다로운 하위 타선 정도.
하지만 해설자의 말대로 어쨌든 꿈틀대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언젠가 빵! 하고 터지는 선수가 나왔을 때 이에 부응해 다 같이 우르르 부활하려면 적어도 자리에서 일어나기라도 해야 했으니까.
[해니건도 오늘 확실히 괜찮아요. 하긴, 모리스가 저렇게 해주는데 클럽하우스 리더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이러다가 리더십이 이동할 수 있거든요? 깔끔한 중전 안타로 2아웃에 1, 3루를 만듭니다.]
[세 타자 연속 출루에 성공하는 로키스! 자이언츠의 짐 코너, 흔들립니다! 애커슬리에게 볼넷, 해니건에게 안타, 다시 와그너에게 볼넷을 허용하면서 2아웃 이후 세 타자 연속 출루로 만루 위기를 자초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자리에서 일어난 정도는 넘은 게 아닐까.
적어도 다들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로 뛰쳐나갈 준비까진 끝내놓은 듯했다.
애커슬리, 와그너에게 안타를 뻥뻥 날려달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들의 가치는 출루에 있었고, 오늘 경기에서 맡은 역할을 120% 해냈다는 게 중요했다.
안타는 해니건이, 홈런은 영도가 쳐주면 되니까.
가드너, 매그니, 반스 같은 선수들도 있으니까.
[2아웃 만루에서 드디어 이 선수가! 드디어 타점 기회에서 타석에 들어섭니다. Y-DO, 오늘 3번 타순에 배치된 보람을 톡톡히 느끼고 있을 겁니다.]
[짐 코너도 억울하겠어요. 9월 확장 로스터 때 올라와서 이번에야말로 자기 가치를 증명하겠다고, 유망주 딱지를 떼고 빅리그에 자리 잡겠다고 벼르면서 마운드에 섰을 텐데, 하필이면 로키스 타선이 19연승 시절로 조금씩 돌아가려는 게 보이거든요?]
베이스 3군데가 모두 매진이라 피할 수도 없는 상황.
무조건 정면 승부를 펼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영도가 타석에 들어섰다.
8연패 기간에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기회.
드디어 반찬이 가득 차려진 밥상을 받았다.
‘나만 잘났다고 떠들긴 했지만, 모리스도, 해니건도, 다른 선수들도 다들 살아나기 시작한 이 순간 해내지 못하면 역적이 되겠지.’
8연패 기간 내내 혼자서 고군분투했으나, 어쨌든 팀의 연패를 끊어내진 못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고, 그동안 받아보지도 못했던 진수성찬이 차려졌는데 여기서 이걸 걷어찬다?
그동안 해온 게 있으니 대놓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꽤나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이었다.
사실, 자존심 같은 건 진작에 엿 바꿔먹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수십 년을 기다려 드디어 찾아온 전성기인데, 아주 조금, 아주 미세하게라도 후퇴하긴 싫었다.
계속 앞으로만 전진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건 결정적인 한 방이라는 거잖아. 조금씩 꿈틀대는 선수들을 한 번에 깨울 수 있는 한 방.’
정말로 원하는 게 그런 한 방이라면.
자신만큼 잘 어울리는 선수가 또 있을까.
말로는 다들 결정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말하겠지만, 결국,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기대한다는 뜻일 것이다.
일단, 영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서 해낼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마침 마운드 위의 투수도 이미 사실상의 시즌을 끝낸 자이언츠가 올려보낸 나이 꽉 찬 유망주 선발투수.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정말로 영도 본인만 잘하면 되는 상황.
[그렇습니다! 이겁니다! 이게 Y-DO의 모습이죠! Y-DO가 이럴 때 실패하는 것 보셨습니까!? Y-DO는 중요한 순간 무조건 해내는 선수입니다! 해주는 선수예요! GET-YA!! 8경기 만에 홈런포 재가동! 58호 홈런을 그랜드 슬램으로 장식합니다!]
[이건 큰데요? 해줘야 하는 선수들이 어렵게 어렵게, 하지만 착실하게 풀 베이스 기회를 만들어줬고, Y-DO가 깔끔하게 삼키는 그랜드 슬램으로 마무리. 이런 경험 하나하나가 슬럼프 탈출에 아주 큰 역할을 해요. 단순한 그랜드 슬램도 대단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그랜드 슬램은 단순한 4타점, 나아가 1승, 그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습니다!]
2041시즌의, 아니, 2040시즌부터의 유영도란 선수는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는 선수가 아니었다.
상다리 부려지도록 차려진 진수성찬을 남김없이 먹어치운 영도는...
“으아아아아악!!!!!!!!”
“됐어! 됐다고!!”
“가자!! 다시 가!! 아직 안 늦었어!!!”
그동안의 울분을 토해내는 동료들에게 파묻혔다.
마치 속에 있는 울분과 함께 8연패 기간의 안 좋은 기운까지 모조리 털어내는 듯한 느낌.
영도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기에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받아줄 뿐이었다.
“모리스. 이 정도면 나도 주동이 나불댄 값은 한 거겠죠?”
“충분하다.”
그리고 오늘 경기의 영웅, 어쩌면 연패 탈출의 영웅이 될 모리스와 함께 주먹을 맞부딪혔다.
이제 고작 4회지만...
로키스의 그 누구도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19연승 기간 내내 유지되었던 덕아웃 분위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 베테랑의 가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