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구되는 변화 >
[하필이면 이럴 때 원정 경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중립 구장이라 불리긴 하지만, 투수친화구장에 가까운 오라클 파크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원정 시리즈를 치르게 된 콜로라도 로키스. 이번에는 진짜 연패를 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패 팀들은 언제나 연패를 끊어야 하죠. 그게 고작 2연패라 해도 마찬가지고, 이번 시즌의 다저스처럼 압도적인 1위 자리를 팀이어도 마찬가지예요. 다만, 특별히 급한 팀은 있기 마련이고, 로키스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제 로키스도 정말로 여유가 없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여유가 없어요. 6경기 남았고, 2위와 1.5경기 차. 여기서 더 벌어지면 심각해집니다.]
[일단 에이스 제러드 홉슨이 출격했죠? 첫 번째 출격에선 에이스의 역할에 실패했지만, 오늘은 끊어줘야 해요.]
오라클 파크는 투수친화구장에 가깝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중립 구장에 속하는 구장이었다.
이 정도 중립 구장이면 큰 문제는 없었는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펫코 파크의 기억이 문제였다.
투수친화구장에 한 번 크게 당한 뒤라 조금만 투수친화구장 같아도 불안함을 느끼는 것.
안 그래도 쿠어스 필드 때문에 원정만 가면 헤매는 일이 반복되는데, 투수친화구장이라고 불안함까지 감돌았으니...
결국, 콕스 감독은 타선에 파격적인 변화를 주었다.
전형적인 중소마켓답게 주전과 백업의 전력 차가 심한지라 주전 라입업을 바꾸는 건 어려웠지만, 그래도 타순 변경은 가능했다.
[1번 타자 해니건과 7번 반스, 9번 애커슬리를 제외하면 모든 타순이 바뀌었습니다. 와그너가 2번 지명타자 자리에서 타격과 출루에만 집중하는 것도 큰 변화 중 하나입니다.]
[발베르데의 공격력은 믿기 힘들지만, 그래도 수비 하나는 와그너보다도 훨씬 낫다고 평가받으니까요. 대신 와그너는 그가 자랑하는 선구안으로 출루에만 집중하라는 거죠. 출루만 해주면 바로 뒤에 어떻게든 쓸어담아 줄 선수가 있다고 믿는 겁니다.]
[타선의 부진이 길어지면서 Y-DO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까 아예 Y-DO를 제외하고 로키스에서 출루율이 가장 높은 두 선수가 1, 2번에서 대놓고 기회를 만들겠다는 의도입니다, 이건. 실제로 8연패 중에도 Y-DO의 타격감은 나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매그니가 4번에 나오고 앤서니 모리스가 5번 타순까지 올라왔어요. 확실히 나이가 있는 선수라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역할 정도는 해줬죠. 확실히 아예 다들 헤매는 지금은 모리스가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앤서니 모리스의 롤은 어디까지나 좌타 대타 요원이었다.
원래도 심각한 공갈포였는데, 어느덧 37세가 된 지금은 배트 스피드와 반응속도 등 피지컬이 더욱 떨어졌으니 주전 자리는 언감생심 노리기도 어려웠다.
공갈포에서 컨택 능력이 더 떨어지면 정말 심각해지기에 파워를 다소 포기하고 컨택에 집중했지만...
안 그래도 낮았던 2할 초중반의 타율은 유지되었지만, 홈런 개수도 2/3, 1/2 수준까지 떨어졌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콜로라도 로키스가 아니었다면 스플릿 계약을 따내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을 선수였다.
아직 한 방이 남아있는 만큼 마이너 계약 후 몇 차례 콜업 기회는 얻었을지 모르지만, 안 그래도 없는 돈을 불펜에다 쏟아부었던 로키스가 아니라면 딱 그 정도였을 선수.
지난 시즌에도 프레드릭 더햄과 이아고 피게로아가 준비될 때까지 버텨줄 징검다리로 그냥 숫자만 채워달라고 영입된 것이었고, 300여 타석에서 2할 초중반의 타율, 7개의 홈런으로 딱 그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Y-DO! Y-DO!!”
가라앉은 분위기로 오라클 파크에 들어서던 영도는 자신을 부르는 어린이 팬의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애초에 가라앉았다기보다는 차분하다는 단어가 어울리는 분위기였고, 이는 언제나의 유영도였다.
평소에도 철저히 챙기던 어린이 팬을 지나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Y-DO... 오늘은 우리 꼭 이길 수 있겠죠? 이기게 해줄 거죠?”
그런데 오늘의 어린이 팬은 조금 달랐다.
유니폼이나 모자, 글러브, 배트 등을 내밀며 사인을 요청하는 것보다 영도의 손을 부여잡고 승리를 약속해달라는 말이 먼저 나왔으니까.
‘쯧... 아이의 이런 표정은 반칙이지...’
아이가 이런 표정까지 지을 정도로 시즌 막판 로키스의 행보가 다이나믹하긴 했다.
그냥 후반기 중후반까지 그랬던 것처럼 꾸준히 좋은 성적을 이어왔다면 무난하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해도 예상보다 10승 이상을 더 수확한 시즌에 박수를 보내줬겠지만...
19연승이라는 기적으로 팬들에게 기대감을 안겨주자마자 8연패.
세상에서 가장 짜릿하고 무서운, 상상도 하기 싫은 롤러코스터를 태워버렸으니...
“그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저기 저 아저씨가 아마 한 건 해줄 것 같거든.”
그때, 영도의 눈에 오늘도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몸을 풀며 준비하는 모리스가 들어왔다.
사실, 안 좋은 흐름을 끊고 선수들에게 자극도 줄 겸 모리스에게 기회를 준다고 들었을 때 왠지 모를 든든함을 느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봐도 오늘 벤치로 빠진 프레드릭 더햄이나 카이옌 모타보다 많이 부족하고 불안한 선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배수의 진을 친 지금, 그들보다 모리스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뭐지. 왜 불렀나.”
“이 아이가 사인 좀 해달라고 해서요.”
“내 사인을?”
드물게도 모리스가 감정을 표정에 드러낸 순간이었다.
아주 대단한 유망주 출신은 아니지만, 어쨌든 풀타임 2년 차에 커리어 하이 24홈런도 기록해봤던 어린 시절엔 그도 꽤 많은 아이들에게 사인을 해주곤 했지만...
곧바로 약점이 드러나 풀타임 4년 차 이후 제대로 된 주전으로 한 시즌도 활약하지 못했던 그이기에 오랜만의 사인 요청이 낯선 듯했다.
그것도 나름 이름을 알렸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도 못할만큼 어린아이였기에 더더욱.
물론, 영도가 오늘 사인을 받아두면 좋을 거라며 넌지시 권유하긴 했지만, 아이에겐 모리스도 한 명의 메이저리거였다.
모리스를 불러주겠다 했을 때 단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로.
“고맙다. 네 덕분에 오랜만에 아이한테 사인도 해주고... 기분이 아주 좋아.”
“기분이 좋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기분만 좋고 끝나면 안 되는 건 아실 거라 믿습니다.”
“그래. 오늘은 날 믿어보라고 말했다면서. 성인 팬도 아니고 아이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어떻게 감당하려고.”
“거짓말 아닙니다. 난 진지하게 믿고 있으니까.”
“...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지금 너 정도면 네가 하는 말이 아이에겐 곧 법일 텐데. 경기 끝나고 아이가 실망하면 어쩌려고.”
“실망 안 하게 모리스가 잘하면 되죠.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하기도 어렵다는 걸 깨달은 나이겠지만, 지금은 모두가 할 수 없는 것까지 해내겠다고 달려들어야 겨우 될까 말까 하는 시기니까.”
더햄과 피게로아, 이어서 모타와 매그니까지 영입되며 이번 시즌 모리스가 소화한 타석은 고작 100타석을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경기 감각을 유지하는 게 몇 배는 더 어려워졌음에도 2할 중반의 타율과 3홈런을 기록, 동 타석 대비 성적은 지난 시즌보다 나았다.
이것만 봐도 그의 노련미와 노력의 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따라주는 평균치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달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전성기를 달리는 선수들도 매 시즌 부침이 심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1년, 1년이 다른 은퇴 직전의 노장이 꾸준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로키스는 이제 그것만으론 부족한 영역에 들어섰다.
“그렇게 열심히, 치열하게 지금까지 버텨왔겠죠. 하지만 가능성이 보일 땐 과감하게 모든 걸 걸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그래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나? 이 팀에서? 이 정도 전력에?”
“모리스가 만족할 만한 전력은 아니겠죠. 하지만 대안은 있습니까? 당장 다음 시즌을 장담할 수 있어요? 잔인하지만, 다음 시즌에도 25인 로스터에서 버틸 수 있냐는 겁니다.”
“... 확실히 잔인하군.”
“비록 부족할 수 있지만, 포스트시즌까지 가면 결국 하늘의 뜻을 받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되지 말란 법은 없겠죠. 결국, 단기전이니까.”
평소에는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했던 것들까지 해내기 위해 다들 하나가 되어 질주해도 모자란 시기.
젊은 선수들은 사실 그런 걸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신체를, 혈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상관없지만, 베테랑들은 달랐다.
베테랑 중에서도 여전히 뜨거운 선수들이 있고, 타고나길 뜨겁게 태어난 선수들이 있지만, 모리스는 아니었다.
모리스의 모습은 마치 살아남기 위해 다른 것 다 포기한 채 야구에만 몰두하던, 그러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칼 같이 정해두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고...
그래서 답지 않게 그에게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당신을 존경합니다. 어린 선수들에겐 당신의 모습이 꽤 인상 깊었던 건지... 그래서 다들 지금 난리입니다. 당신을 최대한 높은 곳까지 올려주겠다고. 아마도 발데마르가 보여준 약삭빠른 모습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서 그런가. 다들 나한테 친절하긴 하더군. 발디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 당신도 당신 나름대로 대답해야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로키스는 젊고 뜨거운 팀이었고, 소수의 선수들을 제외하면 이미 다들 달아올라 있었다.
달아오르지 않은 몇몇 선수들은 홉슨이나 와그너, 영도처럼 달아오르지 않아도 에이스급 활약을 보여주거나 맡은 롤의 특성상 달아오르지 않는 게 유리한 선수들이 대부분.
경기에 거의 나서지 않음에도 동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모리스가 평소와 다른 뜨거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영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 노력은 해보지.”
“좋습니다. 당신이 모든 걸 걸고 나서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당신 자신도 잘 모르고 있을 겁니다. 혹시 또 압니까. 갑자기 당신도 모르던 힘이 나올지.”
모리스의 진가는 19연승의 시작이었던 LA 다저스전에서 이미 드러났다.
타석 수가 고작 100여 타석이고 타율과 OPS, 홈런까지 전부 평범한 백업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선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빛나본 적 없는, 커리어 대부분을 백업으로 보낸 선수가 선수들의 존경을 받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공에 한 번 맞았다고 팀 전체가 흥분해 날뛸 만큼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인급 선수와 베테랑의 기량이 비슷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앞으로 성장할 일만 남은 젊은 선수에게 기회를 주는 게 정답처럼 보이곤 했다.
하지만 현장의 감독들은 의외로 베테랑을 선호하는 경우가 꽤 많았는데, 베테랑은 실력 외적으로 팀에 기여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게 지나쳐서 비난받는 경우도 많았지만...
모리스는 실력 외적으로 팀에 기여하는 전형적인 선수였다.
마이너의 팀 내 유망주 7위 모 보핸이 컨택 원툴이라고는 해도 모리스의 자리에선 그보다 더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겠지만, 25세가 되도록 확장 로스터가 아니면 빅리그에 콜업조차 안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 번만 더 부탁합니다, 모리스. 19연승도 해봤는데, 6경기 못 이기겠습니까.”
“그래도 이번엔 피한다.”
“예? 아, 아, 예. 그럼요. 이제 몸조심해야죠.”
영도는 모리스에게 19연승을 시작할 때 보여줬던 그 역할을 다시 한 번 기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내성이라는 게 있다지만, 같은 처방이라도 두 번까지는 통하겠지.
‘훌륭해. 아주 잘했어.’
‘... 에휴, 내가 어쩌다가.’
물론, 성격상 정말 마음이 없었다면 나서지 않았겠지만.
영도에게 모리스와 한 번만 대화 좀 해보라고 등 떠민 사람은 따로 있었다.
당연히 해니건이었다.
해니건이라는 사람이 영도에게만 맡겨두고 빠져있을 린 없고, 이미 먼저 모리스와 진지한 대화를 나눈 후였다.
하지만 로키스에서 모리스와 가장 성향이 비슷하면서 현재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도에게 한 번 대화를 나눠달라고 부탁했다.
영도 역시 그럴듯하다 생각해 받아들였지만...
‘제츠 시절부터 느꼈는데, 역시 난 이런 역할에 어울리지 않아. 으으, 간지러워라.’
아마 다음은 없지 않을까.
일단 이번 시즌 로키스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미완성된 팀에서 다시 뛸 일은 가까운 시일 내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팀으로 여기까지 올라와서 마지막까지 경쟁하는 상황이 또 오는 건 정말 말 그대로 기적의 영역이었고.
‘작년부터 왜 자꾸 나한테 경기장 바깥의 일까지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야.’
그냥 야구만 열심히 잘하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야구를 잘하면 당연히 에이스로서 팀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건 생각해본 적 없었다.
본인이 원하던 위치까지, 아니, 그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온 지금.
영도는 처음으로 에이스라는 자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하나하나 새로운 것들, 새로운 역할들에 적응하고 있었다.
< 요구되는 변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