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 > (127/200)

< 19 >

제러드 홉슨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에이스였다.

적어도 전통적인 선발 로테이션의 보직 분류에 따르면 그랬고, 팀도,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러드 홉슨은 그래도 어려운 상황에서 로키스의 에이스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이번 시즌까지 3시즌 동안 3점대 후반에서 4점대 초반의 FIP를 유지하며 WAR도 3.0 근처를 찍어주었다.

WAR 순위로 따지면 대략 30위권 중반 정도.

한 팀의 에이스로선 분명 아쉬운 성적이지만, 콜로라도 로키스 선발진의 역사와 로키스 합류 이전 홉슨의 성적을 생각하면 나름대로 성공적인 FA 영입이라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내가... 이 팀의 에이스라고!! 에이스 대접을 해!!’

하지만 어떻게 따져봐도 에이스로서 성적이 아쉬운 건 사실.

WAR, FIP 모두 파크 팩터를 반영하는 지표였기에 아무리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사용하는 부담감과 싸워야 한다 쳐도 열 손가락은커녕 서른 손가락도 넘어가는 순위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쿠어스 필드를 꺼리는 에이스급 투수들 때문에 준수한 2선발급 투수였던 홉슨도 오버페이까지 해가며 겨우 잡았고, 에이스급이 아닌 선수에게 에이스 자리를 안겨준 것이지만...

이적 이후의 성적과 이적 이전의 성적 때문에 홉슨은 로키스의 에이스가 아니라 그냥 가장 먼저 나오는 투수라 말하는 팬들도 많았다.

타 팀 팬들은 물론이고, 로키스 팬들마저도.

‘여기서 이만큼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르는 것들이...’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대체 로키스가 언제부터 에이스라는 걸 가져봤던 팀이라고...

잠깐 반짝했던 우발도 히메네즈나 카일 프리랜드, 존 그레이 등이 있었으나 우발도는 부상과 구속 저하로, 프리랜드와 그레이는 하필이면 쿠어스 필드와 상성이 최악인 ‘플라이볼 혁명’의 시작으로 그 ‘반짝’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홉슨은 최선을 다했고, 계약 기간 5년 중 3년 차인 이번 시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했다.

비록 비슷한 연봉의 다른 투수들과 비교하면 조금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로키스는 쿠어스 필드 때문에 투수에게 당연히 오버페이해야만 하는 팀.

그런 것까지 감안했을 때 자신은 할 만큼 했다.

최고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로키스 역대 선발투수 중 TOP 10 안에는 충분히 들어가는 WAR을 쌓았고, 활약한 기간까지 따지면 TOP 5도 노려볼 수 있는 훌륭한 투수였다.

FA로 영입된 선발투수로 제한하면 NO.1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내가 바로 그런 투수인데...’

감히 그런 나를, 이 무덤 같은 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최선의 성적을 거둔 나를 무시해? 비난해?

Y-DO가 대단한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내가 못했다는 뜻은 아니잖아?

‘이 빌어먹을 놈의 쿠어스 필드, 빌어먹을 로키스, 빌어먹을 덴버 놈들!!’

[제러드 홉슨의 무시무시한 탈삼진 퍼레이드!! 탈삼진이 많은 투수가 절대 아닌데, 오늘은 7이닝 동안 무려 11개의 탈삼진을 잡아냅니다!!]

[아무리 파드리스가 심각한 상태라고 해도 오늘의 홉슨은 정말 대단하네요! 원정의 힘인지, 펫코 파크의 힘인지, 콜로라도 로키스 상승세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이로써 7회 말이 끝난 현재, Y-DO의 그랜드 슬램을 앞세운 로키스가 7-0, 큰 점수 차로 앞서갑니다.]

[무시무시한 선발투수와 무시무시한 간판타자... 로키스가 정말 심상치 않아요.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했어. 이번 시즌 끝나고, 늦어도 다음 시즌 중에는 여길 뜬다. 돈도 충분히 챙겼고... 할 수 있어.’

빌어먹을 곳이었고, 빌어먹을 시간이었지만, 5년 110M의 연봉은 달콤했다.

오버페이라는 평가가 정설이라 트레이드 때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정 그게 문제면 시즌 중에 떠나면 되지.

시즌 중 트레이드는 전력보강이 시급한 팀이 유망주를 내주고 즉전감을 데려가는 거라 그런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

‘이번 시즌은 미쳤지만... 다음 시즌에 Y-DO도 못 지킬 테고, 분명 기회가 있을 거야. 로키스는 만년 셀러니까.’

홉슨은 로키스에 전혀 애정이 없었다.

아니, 애정이 없는 걸 떠나 싫어했다.

그래도 본인의 안위와 영달을 지나칠 정도로 신경 쓰는 선수라 성적까지 떨구며 태업하진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FA 영입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아름답게 이별할 무대도 마련되었고...

어쨌거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줄 선수이기에 감정적인 문제는 사소한 일일 뿐이었다.

***

‘포스트시즌!! 포스트시즌!!’

브랜든 에레라는 덴버에서 태어나 덴버에서 쭈욱 자랐고, 고등학교까지 덴버에서 졸업한 뒤 드래프트로 합류한 진짜배기 홈 보이, 한국식 표현으로 성골 중의 성골이었다.

지역색과 고향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미국인답게 어려서부터 덴버 브롱코스, 덴버 너키츠, 콜로라도 애벌랜치를 응원했고, 당연히 콜로라도 로키스도 응원했다.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로키스를 선택한 건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어!’

다만, 아무리 로키스를 사랑해도 프로로서 커리어를 생각 안 할 순 없었다.

쿠어스 필드는 로키스 골수팬인 에레라가 보기에도 투수에겐 최악 중의 최악.

그래서 처음 로키스에 지명되었을 때, 너무나도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지명을 거부하고 대학을 갈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10대의 혈기는 미래를 생각하고 걱정하기엔 너무 뜨거웠다.

그토록 꿈꾸던 로키스에 합류할 기회 아닌가! 쿠어스 필드? 창단 이후 지구 우승조차 없는 약팀?

그게 뭐! 내가 입단해서 에이스로서 지구 우승은 물론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안겨주면 되잖아!

결국, 그는 팬심을 이기지 못하고 로키스 입단을 선택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20세 때 처음으로 스프링캠프에 합류했고, 22세에 확장 로스터를 통해 빅리그에 데뷔했으며, 23세에 드디어 염원하던 로키스 소속 풀타임 선발투수로 올라섰다.

‘역시 싱커가 신이 주신 선물이었어!!’

로키스 골수팬답게 야구선수 커리어를 시작할 때부터 어떻게 하면 로키스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쿠어스 필드에서 버틸 수 있을까 고민했다.

로키스도 빅리그 팀답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가끔은 감에 의존도 해가면서 연구했으니 에레라가 떠올린 방법들을 이미 다 시도해보았고, 전부 실패했지만...

에레라는 과감하게 이미 실패했던 땅볼 위주 피칭을 자신의 색깔로 삼았다.

그렇게 싱커와 투심, 두 개의 대표적인 땅볼 유도 구종을 플러스급으로 끌어올린 지금.

두 구종 모두 밥값을 충분히 해주고 있었다.

[90마일 근처에서 구사되는 느린 공인데 파드리스 타자들이 전혀 대처하질 못합니다! 땅볼이 우수수 떨어지는 하루! 브랜든 에레라, 7회 말까지 무실점 행진을 이어갑니다.]

[어제는 제러드 홉슨, 오늘은 브랜든 에레라... 이게 무슨 일이죠? 아니, 로키스 1, 2, 3선발은 아쉬운 대로 어쨌든 자기 몫을 해주던 선수들이지만, 이렇게 시즌 하이급 호투를 연속으로 보여준 적은 거의 없었거든요?]

[이게 팀이 잘 나가니까 아무리 공격력 위주의 팀이라고 해도 투수진까지 영향을 받는 듯합니다.]

[선발투수들이 이렇게만 해주면 로키스의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죠. 타선은 이미 쿠어스 필드 효과까지 더하면 포스트시즌 진출권 팀 전체에서도 최상위권이에요. 마운드가 조금만 더 힘내주면 사고 치지 말라는 법 없습니다?]

“예아!! Y-DO, 나이스 필딩! 진짜 수비까지 이렇게 잘하면 어떡해!?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로키스의 골수팬이자 덴버 홈보이인데 이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을 수가.

안 그래도 항상 유쾌한 성격의 에레라인데, 너무너무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로키스의 무시무시한 연승 행진에 최근에는 거의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특히 영도. 영도에겐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려고 했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로키스가 13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바라보게 된 건 영도 덕분이었으니까.

이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홉슨마저도 영도가 주인공이 되는 것에 불만은 없었고, 그저 자신의 공을 조금만 더 알아달라고 투정부리는 것이었으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생각만 하는 투정이라 아무도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Y-DO!! 갈 땐 가더라도 우리 좀 높은 곳에 올려다 주고 가! 손이 허전한데 뭐 하나 낄 거라도 주면 좀 더 고맙고!”

에레라는 로키스의 13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포스트시즌에서의 선전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칠 준비가 끝났다.

몸에 영구적인 손상이 오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어느 정도의 통증과 부상까지 감수할 생각도 있었다.

에레라에게 2041시즌은 다신 만나기 힘들 절대적인 간판타자와 다신 없을 역대급 유망주 대폭발이 겹친, 그야말로 다신 없을 기회였다.

몸이 조금 아픈 것? 체력적으로 조금 더 고생해야 하는 것?

로키스의 포스트시즌과 비교하면 그쯤이야...

***

[펫코 파크에 와서도 로키스의 연승 행진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1차전 7-0 승리에 이어 2차전에서도 5-2, 2연승을 달리며 18연승 행진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로 떠나기 전 마지막 경기인 오늘도 2점 차 리드하며 19연승에 도전하기까지... 참 무시무시한 기세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죠? 아무리 펫코 파크가 극단적인 투수친화구장이라지만, 1차전 제러드 홉슨의 7이닝 무실점, 2차전 브랜든 에레라의 7이닝 무실점, 3차전 커트 페니마저도 7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치고 내려갔어요!]

18연승 기간 치른 다른 경기와 다르게 답답한 공격이 이어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시리즈 3차전.

하지만 파드리스의 공격은 로키스보다 훨씬 답답했고, 이번 3연전은 물론 시즌 내내 비슷한 모습이었기에 2점 차의 근소한 리드도 그리 불안하지 않았다.

불안한 건 오히려 다른 부분이었다.

[사실, 계속 연승을 이어가기 때문에 다들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이번 3연전에서 로키스의 타선은 뭔가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이번 시리즈 전까지 보여줬던 무시무시한 폭발력과 응집력, 집중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예요. 1차전도 적지 않은 점수를 뽑아내며 7-0으로 승리하긴 했지만, Y-DO 혼자 그랜드 슬램 포함 6타점을 쓸어담았고, 2차전 5-2 승리 때도 Y-DO가 홈런 포함 3타점, 오늘 2점도 전부 Y-DO의 타점이에요. Y-DO를 빼면 다른 타자들의 절대적인 타격 지표들이 심상치 않고, 득점권 집중력도 뭔가 아쉬워요.]

[이게 연승을 이어가다 보면 자신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할 때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런 느낌 아니겠습니까?]

[그런 걸 수도 있고, 타격은 필연적으로 사이클이라는 게 있다 보니 사이클이 내려갈 때가 된 걸 수도 있죠.]

[20연승 가까이 달리다가 한 번 꺾이면 후유증이 심하게 올 수도 있는데... 연승을 이어가면서도 걱정이겠습니다. 아직 와일드카드가 확정된 것도, 유력한 것도 아니거든요? 앞서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후유증을 걱정해서 일부러 패배할 순 없는 노릇이죠. 로키스도 마지막까지 머리가 좀 아프겠어요.]

펫코 파크도 로키스의 연승을 가로막진 못했다.

그동안은 조금 소외된 듯했던 선발투수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7이닝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면서 오랜만에 마운드의 힘으로 승리를 가져다준 것.

하지만 펫코 파크의 악몽은 여지없이 로키스를 덮쳤다.

그동안 로키스의 연승을 이끌었던 타선이 펫코 파크의 벽에 가로막혀 타격감을 잃어버린 것.

1차전만 해도 잘 맞은 타구가 곧잘 나왔는데, 하필이면 잘 맞은 타구들이 전부 펜스 앞에서 잡히거나 상대 호수비에 걸려버렸다.

안 그래도 연승 행진을 이어가느라, 불리한 상황에서 포스트시즌에 도전하느라 주전들의 체력 소모가 심했고, 이를 연승 버프로 억지로 막아두던 상황.

여기서 억울한 범타가 잇따르자 로키스 타선의 타격감이 급격히 떨어졌고, 동시에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피로감까지 한 번에 몰려들었다.

‘다시 타격감을 되찾을 때까진 절대 패배해선 안 될텐데...’

그나마 멀쩡한 건 머나먼 펫코 파크의 펜스마저도 손쉽게 넘겨버릴 파워와 상상을 초월하는 체력을 가진 영도뿐.

영도는 8회 초 타석에 들어서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타격감 실종과 급격한 피로감이 겹친 지금, 타격감을 찾기 전에 연승마저 끊겨버린다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 있었다.

역사에 남을 연승행진으로 역사에 남을 역전극을 이뤄냈건만, 역사에 남을 재역전극의 패배자로 남을 순 없는 노릇.

무슨 일이 있어도 동료들이 감을 찾을 때까지 버텨줘야만 했다.

[GET-YA!! 역시 이렇게 어려운 순간 믿을 건 절대적인 타선의 핵심! 핵심 중의 핵심 Y-DO뿐입니다! 시즌 57호 홈런으로 세 경기 연속 홈런을 때려내며 알렉스 로드리게스, 루이스 곤잘레스와 함께 단일 시즌 홈런 순위 공동 14위로 올라섭니다!!]

[로키스는 진짜 Y-DO 영입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요? 만약 현재 메이저리그 승률 1위를 달리는 LA 다저스나 중부지구 1위 시카고 컵스, 아메리칸리그 동부에서 지구 우승과 와일드카드 1위를 나눠가질 게 분명한 양키스, 레드삭스로 갔으면... 어유... 그 팀이 바로 월드시리즈 우승팀이었겠는데요?]

버텨내야 한다, 지탱해야 한다.

아무리 팀에 관심이 없어도 이 정도 상황이 만들어지면 그 누구든 와일드카드 티켓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동료들의 모습과 간절함, 특히 손성호를 떠올리게 하는 앤서니 모리스의 간절함 때문에 가능하면 이들을 포스트시즌에 올려주고 싶어진 영도라면 더더욱.

펫코 파크에서의 3연전은 세 명의 선발투수와 영도가 다 한 시리즈였다.

어쨌거나 로키스의 연승 행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19연승을 달리며 세인트루이스 원정길을 떠났다.

< 19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