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여유의 중요성 > (124/200)

< 여유의 중요성 >

[케인 두아르테는 굉장히 견실한 2번 타자죠. 다저스는 강한 2번 타자가 아니라 올드스쿨한 2번 타자, 컨택 괜찮고, 견실하고, 발도 좀 빠르면 좋은 2번 타자를 기용하는데, 두아르테가 딱 그런 선수입니다.]

[아니죠. 둘의 중간에 있는 선수죠. 3할에 가까운 2할 후반의 타율, 3할 후반의 출루율, 장타율도 4할 중반으로 홈런 열댓 개는 쳐주고 도루도 20개씩 하는 선수가 어떻게 올드스쿨한 2번 타자겠어요.]

[그렇게 성적을 보면 또 그렇네요.]

[다저스가 워낙 강팀이기 때문에 좀 약해 보이는 거지, 이 정도면 어느 팀에서든 상위 타선에 배치될 좋은 타자...]

[아!! 3루 강습!]

‘희성 선배는 지금 어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분명 좋은 타자 반열에 들 케인 두아르테의 날카로운 타구.

완벽하게 밀어친 타구였기에 영도와 가드너 모두 어떻게든 잡아내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무사 3루에서의 실점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실점한다면 아웃 카운트와 바꾸기라도 해야 하니까.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상황인데 점수까지 쉽게 내준다면 이번 이닝이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그동안 이어온 팽팽한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넘어갈 수 있는 상황.

그래서 아무리 무사 3루의 위기여도 쉽게 점수를 내줄 순 없었다.

영도는 타구를 향해 날아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박희성의 위치를 확인했다.

3루 주자 박희성은 어차피 타구가 내야를 벗어난 뒤에 출발해도 여유 있게 홈을 밟을 수 있었기에 3루 베이스를 밟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눈이 마주쳤고, 전혀 조심할 이유가 없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무게 중심이 3루 방향으로 기울었다.

[유영도 날았습니다! 달았어요! 아웃! 아웃! 다이렉트 아웃! 당연히 박희성은 3루에 묶여 있습니다!]

[그렇죠! 이거죠! 투수가 삼진을 잡든, 내야 플라이나 짧은 플라이를 끌어내든, 아니면 내야수들이 미친 수비를 보여주면 실점 없이 넘길 수 있어요. 무사 3루? 100% 실점하는 건 아니거든요?]

[로키스 내야는 3루 주자 박희성 선수를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전진 수비 중이었습니다. 반응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걸 잡아낸 겁니다! 아직도 일부 팬들은 유영도 선수의 수비를 과소평가하시는데, 이걸 보고도 그러실 겁니까!?]

[하하하, 그렇죠. 맞아요. 이제 유영도 선수의 수비는 더 이상 단점이 아니에요.]

멋진 타구를 뽑아낸 두아르테였지만, 영도의 수비가 조금 더 멋있었다.

무사 3루에서 바로 다음 타자가 아웃으로 물러나며 전체적으로 상황이 애매해진 상황.

결정적인 득점 기회가 0아웃에 찾아왔을 때, 첫 타자가 해결해주지 못하면 득점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는 통계가 있었다.

그게 상대의 멋진 플레이로 말미암은 아웃이라면 더더욱.

따라서 다저스 덕아웃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여기선 무조건 득점이 나와주고 리드를 잡은 채 남은 1.5이닝을 소화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면 오히려 위기가 찾아올 수 있으니까.

[강하게 잡아당긴 타구! 아!! 다시 한 번 유영도!! 두 개 연속 잘 맞은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유영도 선수의 다이빙 캐치, 점프 캐치에 걸렸습니다!!]

[서전트 점프가 무려 82cm예요, 이 선수가! 유영도 선수의 피지컬은 분명 야구선수 중 최상위권입니다!]

[어마어마한 높이를 뛰어올라 건져낸 유영도 선수의 호수비! 두 개 연속 3루수 직선타로 무사 3루의 기회를 살려내지 못하고 2사 3루까지 몰리는 LA 다저스!]

[이러면 다저스가 훨씬 더 불안해지죠. 2사 3루도 따지고 보면 굉장히 좋은 득점 기회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또 다르거든요?]

다저스 타선의 핵심이자 매 시즌 내셔널리그 홈런 TOP 5에 이름을 올리는 제임스 프레스톤.

프레스톤은 최근 2, 3주 동안 좌완 투수 상대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프레스톤 정도의 커리어라면 분명 일시적인 현상이겠지만, 어차피 급할 것도 없겠다, 잠깐 3번에서 4번으로 타순을 조정해준 상황.

그래서인지 메이슨 콕스 감독은 등판 후 세 타자 연속 정타를 허용한 좌완투수, 프라이머리 셋업 티모시 피셔를 마운드에 남겨두었고...

[으아아아!! 역시 부진을 길게 끌고 가지 않는 제임스 프레스톤! MVP급 선수라면 길어도 2주 안에는 슬럼프에서 빠져나와야죠!]

[이번에는 콕스 감독이 좀 안일했어요. 어차피 불펜 자원도 넉넉한 팀인데 왜 바꿔주지 않았을까요? 메인 도나르를 마지막으로 세 타자를 상대했기 때문에 피셔를 내려도 되는 상황이었는데요.]

[세 타자 연속 정타를 허용했지만, 유영도 선수의 잇따른 호수비 덕분에 무실점으로 버텨냈던 티모시 피셔가 결국에는 무너졌습니다.]

[아아,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워요. 최근 좌투수에게 조금 약했다지만, 프레스톤은 원래 좌투수에게 특별히 약한 선수가 아니거든요? 오늘 피셔의 컨디션도 별로 좋지 않아보였는데... 글쎼요. 잘 모르겠습니다.]

‘... 이럴 거면 그냥 쉽게 1점 내주고 끝내는 게 나을 뻔했어.’

영도도 티를 내진 않았지만, 허탈한 감정을 숨길 순 없었다.

기껏 온몸을 던져 2아웃 잡아놨더니...

이럴 거면 그냥 모두의 예상대로 평범하게 1점 내주는 게 훨씬 나았다.

희망이 생겼던 만큼 좌절도 커지는 법이니까.

‘나한테 주어질 기회는 이제 다음 이닝, 한 번의 타석 정도인가...’

8회 초에 빼앗긴 2점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라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8회 말 공격이 8번 타자 앤서니 모리스부터 시작이고, 어찌 되었건 로키스가 자랑하는 상위 타순에게 한 번씩은 더 기회가 돌아올 테니까.

이제 예전 같은 자기 비하는 없었다.

영도는 본인의 위치와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 이제 로키스에선 자신이 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직 로키스의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제리 배니스터의 공을 때릴 수 있는가.’

제임스 프레스톤의 결정적인 홈런으로 점수 차가 2점까지 벌어진 8회 말.

선두타자 앤서니 모리스는 심호흡과 함께 루틴을 길게 진행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세월은 야속하게 흘러가 어느덧 모리스의 나이도 37세.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 커리어를 이어가고는 있지만, 동시에 더 이상 월드시리즈 우승권 팀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중이기도 했다.

‘고작 92, 93마일의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예전이었다면 전혀 문제되지 않았을 공인데...’

그래서 그는 매 시즌, 매 경기 마지막인 것처럼 온몸을 불살랐다.

커리어 통산 111홈런, 단일 시즌 커리어 하이 24홈런.

하지만 성장이 멈추면서 백업 겸 대타 요원으로 대부분의 커리어를 보낸 보잘것없는 베테랑.

영도가 KBO에서 성장하지 못했다면 어쩌면 비슷한 커리어를 보냈을지 모르는 메이저리그의 조단역.

앤서니 모리스가 팀의 승리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

[일단 선두 타자가 출루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 아! 맞았습니다! 95마일 패스트볼에 오히려 몸을 가져다 댄 앤서니 모리스!]

[앤서니 모리스가 굉장한 노장이잖아요? 한국 나이로 39세의 베테랑인데, 그렇다 보니 몸쪽 빠른 공에 대처가 잘 안 돼요. 그래서 배니스터도 계속 몸쪽 승부를 시도한 거죠. 그런데 몸쪽으로 깊게 들어와도 아예 피할 생각도 안 해서 뭔가 이상하다 했는데... 이거였네요.]

[변화구도 아니고 95마일이면 굉장히 빠른 공인데... 출루에 대한 무서운 집념을 보여줬습니다.]

[한국 나이 39세의 노장이면 95마일 포심 잘못 맞아서 부상이라도 당했다간 바로 커리어가 위험해지는 건데... 정말 대단하네요.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길 정도예요.]

37세의 앤서니 모리스에겐 모든 경기가 마지막을 준비하는 경기였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로키스에 합류했을 때, 모리스는 우승 반지에 대한 욕심을 접었다.

다음 시즌에도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사치였고, 어떻게든 유의미하게, 추하지 않게 남은 커리어를 보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시작한 2041시즌.

남들은 불가능이라 하지만, 포스트시즌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버텨내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었다.

팀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모리스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게 행여 가뜩이나 얼마 남지 않은 커리어를 깎아 먹는 미련한 행동일지라도.

“절대... 절대 더블 플레이는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Y-DO까지는 이어.”

결국, 모리스는 골반에 이상을 느껴 대주자 하이머 멘데스와 교체되었다.

골반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다음 타자 고든 애커슬리에게 마지막 조언을 남겼다.

절대로 더블 플레이는 안 된다는, 죽어도 혼자 죽고 영도에게 기회를 넘겨주라는 마지막 조언.

“하하, 앤서니. 유언 남기는 것도 아니고 너무 비장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들리나...”

모리스의 간절함은 로키스 선수들 모두가 알았다.

이젠 팀을 떠난 발데마르 피자로처럼 온몸으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가 아니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외치지 않아도 선수들은 느낄 수 있으니까.

모리스는 로키스 합류 이후 우승 반지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고, 어린 선수들보다도 열심히 훈련하면서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 현재 위상과 입지, 최근 몇 시즌 성적을 봤을 때, 선수라면 그가 우승 반지를 노린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요! 앤서니가 이 정도 해줬으면 우리도 다 알죠. 이제 뭘 해야 앤서니가 기뻐할 것인지는.”

해니건은 그의 투지로 잠시 심각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나선 것뿐이었다.

사실, 로키스에서 가장 올드스쿨한 선수 중 한 명이 해니건이었으니 모리스의 투지에 누구보다 크게 감명받은 것 역시 해니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장이기에, 리더이기에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지지는 않게, 모리스의 비장한 투지가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게 누군가는 적당히 끼어들어야만 했다.

“Y-DO. 이제 난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오래전에 받아들였지. 하지만... 너에게 짐을 넘기는 것 정도는 아직도 할 수 있거든. 기대해봐도 되겠나?”

모리스가 95마일 패스트볼에 몸을 갖다 댈 수 있었던 건 로키스가 자랑하는 상위 타선, 해니건-영도-가드너-더햄-매그니를 믿어서이기도 했지만...

결국, 삼자범퇴로 이닝이 끝나면 주자 없이 9회 말을 맞이해야 할 2번 타자 영도를 믿어서였다.

자신이 마지막까지, 이 나이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데는 영도의 지분이 가장 컸으니까.

이번 시즌의 유영도는 몸의 통증, 나아가 타박상까지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믿음직스러웠다.

주전도 아니고 대타 요원, 가끔가다 지명타자로 나오는 모리스 본인 입장에선 이렇게라도 팀에 1승을 안겨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몸을 내밀 수 있었다.

“얼마든지. 나만 믿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그래, 믿는다. 못하면 알아서 해. 37세 노인의 골반은 비싸니까.”

사실, 오늘 휴식을 취한 카이옌 모타도 벤치에 남아 있었지만, 콕스 감독은 애커슬리를 그대로 내보냈다.

그리고 번트를 지시해 1사 2루를 만들었다.

로키스의 최우선 목표는 영도까지 타석을 이어주는 것이었으니 아무리 2점 차라도 9번 타자에게 희생번트를 지시하는 건 어려운 결정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해니건만큼은 잡고 유영도 선수를 상대하려는 제리 배니스터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영도 선수에게 조금 더 편한 상황을 만들어주려는 해니건의 집중력 대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7구까지 이어지는 승부, 이제 8구를 준비합니다.]

[만약 여기서 해니건이 잡히면 다저스는 유영도 선수를 거를 수도 있어요. 가드너-더햄-매그니 타선은 물론 위협적이지만, 2사 2루에서 굳이 유영도 선수를 상대할 이유가 없죠.]

[해니건도 그걸 알고 최대한 스트라이크 존을 좁힌 채 커트, 커트로 이어갑니다. 9구!! 살짝 낮았다는 판정! 게일 해니건, 볼넷을 골라 출루합니다!!]

[이렇게 되면 유영도 선수가 나오죠! 1사 1, 2루, 타석에는 유영도! 드라마를 위한 완벽한 준비가 갖춰졌습니다!]

앤서니 모리스가 몸을 던져 열었고, 고든 애커슬리가 묵묵히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게일 해니건이 자존심을 버리고 수수한 역할을 맡아 만들어낸 절호의 기회.

팀 동료들이 힘을 모아 차려준 밥상이 영도의 앞에 차려졌다.

‘아저씨가 몸을 던지고 그 때리기 좋아하는 해니건이 답지 않게 커트 놀이까지 해가며 이어준 기회인데... 이건 야구선수로서 목표나 내 성공을 떠나 인간이라면 살려야지.’

커리어, 목표가 아닌, 다른 동료들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홈런을 바랐던 게 대체 얼마만인지...

20여 년 만에 느끼는 감정이 낯설고 간지러웠지만,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이것도 다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겠지.’

내가 잘 풀려서 시야가 넓어진 거라고,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도 세상에 만족하면 배려심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뭐 어쩌라고.

원래 대부분의 인간은 내가 먼저 부족함 없이 살아야 남들을 생각할 수 있는 법이었다.

성선설, 성악설, 본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인성 같은 건 다 필요 없고 지금은 그저 오랜만에 찾아온 간지럽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 기분을 조금 더 느껴보고 싶을 뿐.

영도는 자신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어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아마도 회귀 후 지은 미소 중 가장 따뜻하고 사람다웠을 미소를.

[으아아아!! 유영도 선수가 KBO에서도 항상 보여주던 바로 그 타구! 높고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면서 아름답게 넘어가는 몬스터 문 샷! 제임스 프레스톤의 투런 홈런에 쓰리런 홈런으로 대답합니다!!]

[양 팀 공격의 핵심들이고, 각각 35홈런, 47홈런을 기록한 거포들인데... 35홈런과 47홈런이 붙으면 당연히 47홈런이 이기죠!]

[팀 동료들이 몸을 던져 넘겨준 1사 1, 2루의 기회! ‘절대영도’, ‘괴물’ 유영도는 쓰리런 홈런으로 보답합니다! 3-2 역전! 정말 중요한 순간, 중요한 경기에 나온 결정적인 홈런입니다!]

< 여유의 중요성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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