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수전에서의 역할 >
[유영도 선수는 LA 다저스에게 좋은 기억만 있을 겁니다. 이번 시즌 47개의 홈런 중 다저스에게 때려낸 홈런만 9개. 이 정도면 반갑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어휴... 메이저리그 구단이 30개 구단인데, 전체 홈런의 1/5을 한 팀에게 때리다니... 다저스는 반대로 유영도 선수가 참 보기 싫겠네요.]
[박희성 선수는 어떨까요? 조금 전 나왔던 프리뷰 영상에선 그래도 반갑게 대화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두 선수는 그래도 나름 친한 걸로 알고 있어요. 여전히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는 많지 않아서 KBO 진출 전부터 종종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외국에선 같은 한국인이 더 반갑다면서.]
영도가 KBO에서 미쳐버린 2040시즌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최고의 야구 스타였던 박희성.
머지않아 다가올 FA를 위해 노력한 그 역시 이번 시즌 커리어 하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몸값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잡고 눈이 빠지도록 골라냈다.
메이저리그 진출 세 시즌 만에 WAR 4.0을 넘길 듯한 좋은 페이스.
하지만 이 모든 건 영도의 활약 앞에 빛이 바랬다.
그도 그럴 만한 게, 4.0이라고 해봤자 메이저리그 전체 야수 중 5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수치였다.
어쨌거나 그의 홈그라운드는 한국이었고, ‘한국 선수치고’ 뛰어난 활약으로 한국에서 인기와 돈을 버는 게 그동안의 박희성이었다.
그러니 ‘한국 선수치고’가 아니라 메이저리그 현역 선수 중 NO.1에 도전하는, 메이저리그 138년 역사에서 63번째, 라이브볼 시대 이후 55번째로 두 자릿수 WAR에 도전하는 영도에게 밀리는 건 당연한 수순.
‘확실히... 희성 선배 말처럼 한국 기자들이 이쪽으로 많이 넘어왔네.’
하지만 박희성은 덕분에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며 좋아했다.
사실, 박희성 정도면 인기와 돈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NO.2로 밀렸다지만, 국적 등의 문제로 여전히 한국 내 인기도 많고, 영도는 또 너무 조용하고 재미없는 스타일이라 H-STAR를 원하는 팬들 역시 많았다.
또, 특유의 스타성 덕분에 훨씬, 훨씬 큰 시장인 미국에서도 나름의 인기가 있고, 한국인이 많은 LA까지 더해진다면...
마지막으로 박희성 수준이면 FA 대박 한 번으로 남은 인생 준비까지 한 번에 끝낼 수 있었다.
적어도 이번 시즌과 다음 시즌까지는 아무리 박희성이 관심 종자라 해도 언론에서 조금 떨어지려 했다.
‘... 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좋은 거겠지. 난 신경 안 쓰니까...’
영도는 항상 경기가 끝날 때마다 구름처럼 모여들던 취재진, 그 속에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하는 한국 취재진을 떠올렸다.
기본적으로 회귀 전 워낙 데인 것들이 많아 언론을 좋아하지 않는, 어떻게 보면 꺼리기까지 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니었다.
이런저런 일들에 말도 안 되는 일까지 겪으면서 누구보다 강한 심지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취재진을 전부 다 끌고 와줘서 누군가가 고마워한다면... 그것도 나름 뿌듯한 일이었다.
‘그래도 상대 팀인데 경기 끝날 때까지 뿌듯해 하는 꼴은 내가 또 못 보지.’
아니, 굳이 따지자면 내 덕분에 그쪽에서 덕을 본 것 아닌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기 마련.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집중력을 얻어갔으니 이쪽에서 승리를 가져가도 되지 않을까.
‘사람이 분위기 따라간다고, 주변에서 자꾸 으쌰으쌰 하니까 나도 포스트시즌이 보이는 것 같고 막 그러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이상하게 주변에서 자꾸 바람을 넣고, 바람이 들어간 동료들과 매일 함께 있으니까 영도 역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상하게 내부에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
어쨌거나 좌절부터 하는 것보다는 좋은 상황이라고 받아들이려 했다.
***
[커트 페니와 페드로 케인. 이번 시즌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를 대표하는 루키 선발투수끼리 만났습니다. 두아르테가 조금 더 관리받은 느낌이라 이닝이 적긴 합니다만, 성적도 거의 비슷하지 않습니까?]
[방어율 차이도 거의 안 나지만, 그보다 중요한 FIP에서 0.03 정도의 차이죠. 물론, 두아르테가 15이닝 정도 덜 던지고도 삼진 개수는 2개밖에 차이 안 나지만, 그만큼 페니는 볼넷이 적어요. 아마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서부지구에서 한동안 이 둘의 대결을 자주 볼 수 있을 거예요. 좋은 유망주들입니다.]
비교적 덜 급하고 선발 로테이션이 탄탄한 팀은 다저스이기에 페드로 케인은 커트 페니보다 3경기 적은 20경기에 선발로 나섰다.
117.1이닝 ERA 3.69, FIP 3.78, 133K.
또다시 나타난 포스트 ‘돈 라이스’답게 93마일대의 강속구와 80마일대 초중반의 날카로운 슬라이더, 카운트 잡는 용도의 커브, 세 가지 구종을 구사하는 페드로 케인.
케인의 피칭은 알면서도 당해야 하는 랜디 존슨-클레이튼 커쇼-돈 라이스 계보 좌완 투수의 그것과 분명 닮아 있었다.
[날카로운 슬라이더에 맥없이 돌아가는 해니건의 배트! 무서운 루키, 페드로 케인이 이번 시즌 내셔널리그 타율 4위에 빛나는 게일 해니건을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역시 차세대 닥터 K! 이번 시즌 유력한 ROY 후보 중 한 명인 프레드릭 더햄에게 “그건 내가 관리받는다고 규정 이닝을 넘기지 못해서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한, 마구에 가까운 슬라이더로 삼진 하나를 추가합니다.]
[아이고... 이번에는 완전히 당했네요. 아마도 결정구인 슬라이더를 기다렸던 것 같은데, 무릎 높이로 절묘하게 꽂힌 바깥쪽 포심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어요. 이걸로 5이닝 동안 삼진만 7개를 잡아냈습니다.]
[허를 찌르는 커브에 완전히 타이밍을 빼앗긴 타구. 뒤로 높이 떠서... 포수가 잡아냅니다. 6이닝 무실점 행진이 끝나지 않습니다.]
커트 페니 역시 당장 한시가 급한 콜로라도 로키스의 상황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관리를 받은 편이었다.
제러드 홉슨이 27번의 선발 등판 경기를 치르는 동안 23회 등판에 그쳤으니까.
성적은 131.2이닝 ERA 3.57, FIP 3.82, 135K.
성적 자체도 나쁘지 않았지만, 커트 페니의 경우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정을 받아 최소 이번 시즌 루키 중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간다고 평가받았다.
실제로 플라이볼 타구 대비 홈런 비율을 리그 평균으로 보정한 xFIP에선 실제 FIP보다 유의미하게 낮은 수치를 보이기도 했고.
삼진은 살짝 적은 편이었지만, 이는 최근 팀의 마운드 운용 기조에 맞춰 투심과 스플리터, 슬라이더를 섞어 맞춰 잡는 피칭을 선호하기 때문이었다.
평균 구속 95마일대, 최고 구속 100마일을 자랑하는 강속구 투수의 이미지에 속아버린 타자들.
이들은 페니의 유혹에 넘어가 쿠어스 필드에서 최악의 타구인 땅볼 타구를 연발했다.
[아,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겼네요. 엉덩이 쭉 빼면서 갖다 맞추기에 급급한 타구, 3루수 유영도 선수가 유격수 앞에서 잘라 주면서 1루 송구, 아웃입니다. 그나저나 유영도 선수의 수비는 정말 많이 발전했네요. 수비 지표로도 메이저리그 3루수 중 상위권에 꼽히는 이유를 간단한 수비 장면 하나로 증명했습니다.]
[또 한 번 빗맞은 타구! 오늘따라 유독 커트 페니의 투심이 춤을 춥니다. 다저스 타자들 배트의 스윗 스팟은 오늘 개점 휴업 상태! 유격수 가드너가 잡아 1루로 천천히 송구, 아웃입니다.]
[이번에는 옆이 아니라 아래로 떨어지는 볼이었죠? 오늘 투심이 유독 좋기는 한데, 페니에겐 스플리터도 있거든요? 헛스윙을 유도해 삼진을 뺏어내는 스플리터가 아니라 적당히 떨어뜨려 범타를 유도하는 스플리터가. 이번에도 역시 재미를 봤습니다.]
[그렇죠! 이거죠! 커트 페니의 맞춰 잡는 피칭이 통하는 건 95마일대의 포심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이번에는 작정하고 던졌네요. 100마일이 찍혔고, 천하의 제임스 프레스톤마저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두아르테의 호투에 7이닝 무실점으로 대답하는 커트 페니!]
“와... 오늘 커트 미쳤는데? 커트가 이번 시즌에 7이닝 이상 무실점이었던 적이 있나?”
“모르겠네. 남들 기록에 관심 없어.”
“냉정하긴... 그래도 우리 귀엽고 자랑스런 루키인데 신경 좀 써주지?”
“타석에서 점수나 만들어주면 되지, 뭘 그렇게까지.”
시즌 하이를 갱신할 듯한 루키들의 호투에 선배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7회 초가 끝난 시점에서 스코어는 여전히 0-0.
7회 말 로키스의 선두 타자는 5번 타자 로날드 매그니였다.
[다저스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경기입니다. 이제 곧 확장 로스터가 적용될 텐데, 다저스는 이번 기회에 콜업 직전의 유망주들을 대거 올려 시험해볼 것이 확실하다고 많이들 예상하고 있습니다.]
[어유, 승률이 너무 높아서... 포스트시즌 진출은 거의 150% 확정이고, 체력 안배를 어떻게, 언제부터 할 것인가만 정하면 되는 팀이잖아요. 아무래도 부담이 좀 덜하죠.]
[반대로 로키스는 한시가 급한 팀 아니겠습니까? 이번 시즌 전체적으로 상태가 안 좋은 서부지구 팀들과 남은 33경기 중 26경기를 치른다는 게 그나마 긍정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많이 어렵습니다.]
[아주 많이 어렵죠. 26경기 중 7경기가 다저스전이라는 것도 부담스럽고, 마지막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3연전도 아주 중요하고... 하여튼 웬만하면 지면 안 돼요.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로키스가 꽤 자주 지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로키스의 가을 야구는 이미 끝났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아요.]
“이런, 로날드까지...”
“오늘 두 선발투수처럼 제대로 긁히는 날이면... 빨리 내려가고 다음 투수가 올라오길 기다려야지.”
“하긴, 커트가 그런 것처럼 저 녀석도 이닝 관리받는 중일 테니까. 아마 8회에는 다른 투수가 올라오겠지?”
“대충 봐도 8회에는 우리 둘 다 나가겠는데.”
로날드 매그니는 쿠어스 필드 효과를 제대로 봤는지 후반기 들어 타율을 거의 2푼 가까이, OPS도 4푼 가까이 끌어올리면서 뜨거운 타격감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전반기 87경기 11홈런에서 후반기 42경기 8홈런으로 홈런 페이스 역시 좋았다.
하지만 그런 매그니도 오늘의 페드로 케인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어 칼튼 와그너와 개리 반스까지 우르르 무너졌고...
순식간에 8회 초 수비가 찾아왔다.
“젠장...”
“나까지 차례가 안 올 수도 있겠는데. 다음 공격 때 무조건 출루해. 나까지 넘기라고.”
[아! 바뀐 투수의 초구! 야구계의 격언을 그대로 따라서 좋은 타구를 만들어낸 박희성 선수! 중견수 해니건이 따라가는 동안 빠르게 3루까지 내달립니다!! 8회 초 선두 타자 박희성의 3루타! 오늘 경기 양 팀 통틀어 처음으로 3루를 밟았습니다.]
[크으... 정말 잘 쳤네요. 선발투수가 내려가자마자 3루타를 허용했지만, 티모시 피셔도 못 던진 게 아니에요. 이 선수 내셔널리그에서 손꼽히는 셋업맨이거든요?]
[맞습니다! 박희성 선수가 정말 잘 때렸습니다. 이거 보세요. 하체부터 상체, 뒤부터 앞으로 이어지는 중심 이동이... 정말 아름다울 정도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로키스는 일이 좀 커졌는데요? 무사 3루는 좀 많이 아프거든요?]
“안녕, 영도. 형 왔다!!”
“붙지 마시죠. 덥습니다. 안 그래도 여름인데.”
“와... 너무 냉정해! 나 상처받으려고 그러는데?!”
“예.”
[하하하, 박희성 선수가 언제나처럼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스킨십을 시도합니다. 유영도 선수는... 세상 귀찮다는 표정이네요.]
[유영도 선수에게서 저 정도의 표정을 끌어내다니... 역시 박희성, 참 대단합니다. 그냥 인간으로서 대단한 사람이에요.]
박희성이 옆에서 계속 장난을 걸어왔지만, 영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양 팀 선발투수의 눈부신 호투로 0-0이 유지되던 치열한 경기가 투수 교체 직후 균형이 무너진다면 그 균형을 다시 세우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무사 3루의 위기에서 실점을 막아내는 건 정말 어렵겠지만...
거기서 나의 역할이 있다면 모든 힘을 다해 해낼 생각이었다.
박희성의 장난 정도로는 영도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 없었다.
< 투수전에서의 역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