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 기록, 기록 >
‘여기서 홈런으로 끝내면 단순한 1승 이상일 텐데.’
선공과 후공이 명확히 나뉘는 야구의 특성상 무승부 바로 직전 이닝에는 선공 팀이 살짝 김이 빠졌다.
무실점으로 막아내도 없는 경기 취급인 무승부로 끝나게 되니까 뭔가 맥이 빠진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대충 치르다가 실점이라도 하면 패배가 기록된다는 게 문제.
아무리 없는 경기 취급이라도 패배보다는 백번 나았다.
‘후우... 홈런이든 안타든, 승리든 무승부든 일단 뭐라도.’
오늘 로키스는 홉슨이 5.2이닝을 소화했고, 이후 커닝햄을 포함한 세 명의 투수가 4.1이닝을 나눠서 맡아주었다.
커닝햄을 제외한 투수 두 명은 필승조와 추격조 사이에서 경쟁하는 선수들로, 프라미어리 셋업 티모시 피셔와 스윙맨 중 한 명인 빈센트 베일리는 내일 경기를 준비했다.
커닝햄 역시 어쨌든 깔끔하게 승부치기를 막아냈기에 연투가 가능한 상황.
반대로 내셔널스는 에이스 코트니 매든이 8이닝을 소화했지만, 클로저의 부상과 3실점이나 내주며 30여 개의 공을 던진 프라이머리 셋업에 이어 3옵션 스윙맨까지 승부치기를 막으러 올라왔다.
다행히 스윙맨은 해니건을 더블 플레이로 잡아낸 덕분에 내일 연투가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내일까지는 클로저와 프라이머리 셋업, 불펜 원투 펀치 없이 경기를 치러야 했다.
무조건 이겼다고 생각한 경기에서 믿었던 프라이머리 셋업이 무너지고 내일까지 전력 이탈.
그런데 이런 경기에서 패배하기까지 한다?
내일은 물론, 그다음 경기, 나아가 향후 1, 2주까지 여파가 이어질 수 있었고...
이는 곧 로키스의 기회로 이어질 것이었다.
‘무엇보다 기껏 다 쫓아왔는데 여기서 멈추면 좀 아쉽지. 분위기가 꺾인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오늘의 콜로라도 로키스는 말 그대로 ‘되는 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선수 한 명 한 명이 모두 자기 몫을 다해 결국 거의 90% 이상 패배한 경기를 원점으로 돌린 경기.
다만, 이런 경기를 이겨야 의미가 있고, 다시 한 번 힘을 받아 나아가는 거지, 승리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말했잖아. 나도 이제 웬만하면 이기고 싶다고!!’
이기려면 여기서 무조건 홈런을 쳐야만 하는 상황.
하지만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만들어진 습관이 어디 갈까.
홈런이 무조건 필요한 상황임에도 영도의 스윙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욕심이 없었다.
그저 평소대로, 117경기에서 45개의 홈런을 터뜨린 그대로의 스윙이었다.
[아아아악!! 설마!! 설마!! 설마!! GONE!! GET-YA!! Y-DO의 믿을 수 없는 홈런! 정말 중요한 Walk-Off 홈런이 Y-DO의 배트에서 나옵니다!]
[역시... 마무리는 Y-DO였네요. 시작이 있었고, 전개와 위기가 있었고, 절정이 있었지만... 결말은 결국 Y-DO! 결국, 로키스에서 마지막 한 방을 날려줄 선수는 Y-DO거든요!]
[Y-DO의 어마어마한 승리 본능! 클러치 본능! 대체 팀에 승리를 가져다주는 홈런이 몇 개인지... 118경기 46홈런만 해도 대단한 기록인데, Y-DO의 홈런들은 거의 다 기억에 남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순간에 나온 홈런이 대부분이라는 뜻이겠죠.]
[홈런도 임팩트가 있어야 기억하지, 그냥 홈런이라고 다 기억하는 건 아니니까요.]
“““Y-DO!! Y-DO!! Y-DO!! Y-DO!! Y-DO!!”””
이미 쿠어스 필드의 홈팬들은 영도의 이름을 연호하고 응원가를 열창, 승리의 기쁨을 만끽함과 동시에 영도를 찬양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로키스 팬들에게 영도는 거의 신이었고, 종교였다.
“Y-DOOOOOOO!!!!!!!”
“믿었어!! 믿었다고!! 나는 믿었다니까!?!?”
“와... 게일,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니예요? 무슨 세상 끝난 것처럼 좌절하고 있었으면서...”
타이 브레이커 시작과 동시에 더블 플레이로 물러나며 역적이 될 뻔했던 해니건을 필두로 로키스 선수들 역시 일제히 쏟아져나왔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환희를 최선을 다해 참아내며 홈 플레이트에서 영도를 기다렸고...
영도가 홈을 밟자마자 일제히 달려들어 기쁨을 만끽했다.
셀러브레이션 중 부상 당하는 사례들이 이어지며 워크오프 셀러브레이션도 많이 간소화되었지만.
그 간소해진 셀러브레이션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후반기의 로키스는 확실히 무섭습니다. 아주 무서워요. 비록 지금은 격차가 좀 있지만, 끝날 때까지 로키스를 지켜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요. 아직 몰라요. 기세 한 번 제대로 타면 순간이죠. 30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로키스는 경험도 있고요.]
흐름을 타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쉽게 패배하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오늘 로키스가 보여준 모습이 바로 쉽게 패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쉽게 패배하지 않는 팀은...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법.
로키스는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전진했는데, 조금씩 속도까지 붙는 모양새였다.
***
[콜로라도 로키스... 설마?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홈 3연전에서 믿을 수 없는 뒷심 보여주며 위닝 시리즈 챙겨. 2승 모두 7회 이후 역전승]
[‘우리의 앞길을 막지 마라’,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라도, 손이 없으면 물어뜯어서라도 상대를 부여잡는 로키스의 집념. 시카고 컵스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8점 차 극복하고 무승부 따내...]
[밀워키 원정마저 위닝 시리즈! 시즌 막판, 갑작스런 질주를 시작한 콜로라도 로키스. 너무 늦었다]
[질 것 같은 경기는 무승부로, 팽팽하다 싶은 경기는 승리로, 이겨야 하는 경기는 당연히 승리로... 로키스 상승세는 얼마나 계속될까?]
[상승세가 조금만 더 빨랐으면, 아니, 역대급 승률 인플레이션만 아니었어도... 로키스의 후반기 상승세가 오히려 슬픈 이유]
후반기 들어 훌륭한 페이스로 내달리던 로키스의 마지막 희망이 끊기는 시기가 될 거라 예상되던 운명의 15연전 중 12연전이 마무리된 지금.
상황은 그들의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로키스는 악으로 깡으로, 또 집념으로 버텨냈고, 그냥 강팀이 아니라 6할 승률에 가까운 강팀들만 연달아 만난 12연전에서 6승 2무 4패로 6할 승률을 유지한 것.
신시내티 레즈, 워싱턴 내셔널스, 밀워키 브루어스 등 와일드카드 경쟁에서 앞서나가는 팀들도 같은 기간 좋은 성적을 보였다는 건 아쉬운 부분.
레즈, 내셔널스와는 여전히 6경기 차, 브루어스와는 5.5경기 차이가 유지되었다.
남은 경기는 절대 많다고 볼 수 없는 33경기.
33경기에서 6경기 차를 극복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경쟁자들이 5할 승률만 유지한다 해도 로키스가 역전하려면 7할 승률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로키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운명의 15연전마저도 버텨낸 덕분에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살려놨으니 포기할 수 없었다.
“33경기에 6경기 차. 당연히 쉽지 않은 격차지만, 마지막 변수 정도는 있지 않나. 이제부턴 다시 각자의 소속지구로 돌아가 남은 경기 대부분을 치른다는 것.”
“크으... 그렇지, 그거! 그게 바로 로키스의 마지막 희망 아니겠어요? 이번 시즌의 승률 인플레이션이 서부지구의 붕괴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데, 그런 만큼 로키스도 서부지구 팀들을 상대로 승률을 끌어올리고 싶을 테니까.”
메이저리그 통산 155승의 길버트 조던, 통산 427홈런의 칼 오르테가.
ESPN 중계진에 소속된 해설위원이자 트렌드를 따라 둘이 함께 컨텐츠를 만들어 업로드하는 동업자이기도 한 두 사람이 와일드카드 경쟁에 대해 입을 열었다.
뉴미디어 시대에는 차별화가 곧 조회 수, 수익으로 연결되는 법.
이들이 메인으로 삼은 주제는 다들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레즈, 내셔널스, 브루어스, 메츠의 4파전이 아닌 다크호스, 로키스였다.
“이번 12연전에서 보여줬잖아? 로키스도 충분히 포스트시즌 진출 자격이 있다는 걸. 사실, 이미 승률 0.533, 후반기 분위기를 보면 0.550도 넘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정도로도 와일드카드 5위라니. 로키스, 너희는 잘못이 없어! 이번 시즌이 잘못한 거라고.”
“0.550이면 보통 아슬아슬하게 와일드카드 티켓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지금처럼 5위까지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게 사실이긴 하지.”
“하지만 역시 분위기 좋은 팀답게 강팀들을 연달아 만나고도 반짝반짝 빛나던데? 12연전의 첫 경기였던 내셔널스전에서의 9회 말 2아웃부터 3점 차를 극복한 끝내기도 그렇고, 컵스전 8점 차를 극복한 무승부도 그렇고...”
“로키스는 확실히 어지간하면 패배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건 정말 중요한 거지.”
로키스의 와일드카드 진출을 불가능이라 규정한 사람도, 그래도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사람도.
최근의 로키스가 굉장히 매력적인 팀이고, 재미있는 야구를 한다는 부분에선 의견이 일치했다.
분명 약점이 작지 않은 팀이고, 쿠어스 필드로 인한 고질적인 마운드 불안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력과 집념, 끈질김을 앞세운 로키스의 야구는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역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선수는... 뭐, 다른 의견이 있겠어!? 당연히 Y-DO지!!”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야구 그만 봐야지. 순수하고 솔직한 의견인지 의심해봐야 하고, 그러다 의심이 사실로 드러나면 법정에 서야 할 거다.”
“Y-DO는 정말... 미쳤어! 그냥 미쳤다고! 내셔널스전 월크오프 홈런의 주인공이 누구지? Y-DO!! 컵스전에서 동점을 만든 쓰리런 홈런의 주인공은? Y-DO!! 그냥 Y-DO는 미쳐버렸다고! 이 미쳐버린 멋진 놈!”
“12경기 2홈런. 절대적인 홈런 페이스는 살짝 늦어진 감이 있지만, 그게 뭐 중요할까. 그 홈런 2개가 전부 1,000만 달러짜리인데.”
와일드카드 5위에 불과한 콜로라도 로키스가 꾸준히 관심 속에 있을 수 있는 이유.
로키스의 후반기 기세와 재미있는 최근 경기들이 주로 언급되지만, 사실, 이것들은 두 번째였다.
로키스를 향하는 관심, 그 시작은 영도였다.
영도의 무시무시한 활약에 반해 찾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들이 최근 로키스를 보며 생각보다 야구 잘한다, 매력적이다, 라고 느끼게 된 것.
지금까지 영도의 활약에 묻혔던 로키스가 최근 기세를 바탕으로 슬슬 드러난 것뿐이지, 영도의 활약이 로키스에 묻힌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미 Y-DO의 홈런 개수가 칼, 당신의 커리어 하이 기록과 같아졌군.”
“하하하, 나야 반갑지! 내가 언제나 말해왔지만, 나를 감탄하게 하는 압도적인 재능이라면 내가 싸커맘처럼 모든 걸 다 챙겨줘서라도 내 기록을 넘어서게 해주고 싶다니까? Y-DO는 알아서 잘했지만. 예쁜 자식...”
“47홈런은 54홈런의 A-로드, 49홈런의 에우제니오 수아레스, 48홈런의 마이크 슈미트, 아드리안 벨트레, 또 A-로드에 이어 에디 매튜스, 트로이 글로스, 그리고 당신. 칼 오르테가와 함께 3루수 역대 공동 6위의 엄청난 기록이고.”
“엄청난 기록이라고 인정해주다니! 길, 당신도 드디어 나를 인정해주는 건가!?”
“... 날 애칭으로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어, 오르테가.”
“이런. 괜히 한마디 했다가 칼에서 다시 오르테가로 떨어져 버렸잖아!?”
A-로드의 기록은 34년 전인 2007년에 작성된 기록이었고, 무엇보다 약물 이슈가 가장 강하게 걸린 선수 중 한 명의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팬들이 인정하는 3루수 최다 홈런은 2019년에 작성된 에우제니우 수아레스의 49홈런.
현역 최고의 3루수, 아놀드 그레고리의 경우 커리어 하이가 45홈런이었고, 영도는 이미 그의 기록을 넘어선 상태였다.
427홈런으로 전성기가 짧다고 평가받는 게 조금 억울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전성기 기량만 따졌을 때 최근 15년 동안 최고의 3루수로 꼽히는 칼 오르테가와도 어깨를 나란히 한 상황.
5시즌 만의 50홈런 돌파에 도전하는 영도의 앞에 내셔널리그 3루수 역대 단일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과 오점으로 얼룩지지 않은 양대 리그 통합 신기록, 40년 만의 60홈런 기록까지 줄줄이 대기 중이었다.
“어쨌거나 Y-DO 덕분에 이번 시즌 메이저리그가 재미있어졌어. 역시 야구는 3루수지! 으하하하!!”
“Y-DO가 대단한 거고, 대단한 Y-DO가 3루수인 건데 왜 당신이 기뻐 날뛰지?”
“몰라! 모르겠지만, 그냥 난 3루수가 맹활약하면 돌아버릴 것 같아. 취한 것 같다고!! 으하하하!!”
“이런... 아무래도 오늘 영상은 여기서 끝내야겠군.”
오르테가의 상태가 조금 심한 편이긴 하지만, 사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야구팬들, 야구인들 역시 영도의 역대급 페이스를 지켜보며 야구의 즐거움에 다시 한 번 매료되어 있었다.
역시 야구의 꽃은... 홈런이었다.
그리고 영도는 어느새 메이저리그 복귀 첫 시즌부터 메이저리그 현역 홈런 타자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 기록, 기록, 기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