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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기 귀가 서비스 >

그 유명한 ‘필리건’들의 난동에도 불구하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는 힘이 부족했다.

‘일부’ 필리건들이 걸개까지 걸어가며 영도의 홈런 페이스를 늦춰달라 요구했지만, 이번 시즌 필리스의 승률은 4할 5푼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

쿠어스 필드만큼은 아니더라도 시티즌스 뱅크 파크 역시 상당한 타자친화구장이기에 투수 유망주들이 데뷔 초반 얻어맞다가 생각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로키스와는 다른 이유로 투수 유망주 육성에 어려움을 느끼는 게 필리스였다.

양키스급의 악의 제국도 아닌데 유망주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 당연히 전체적인 투수 전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필리스는 당대 최강이었던 로이 할라데이와 클리프 리, 로이 오스왈트, 콜 해멀스 등으로 판타스틱 4를 구성한 2000년대 후반 이후로 투수진이 팀의 강점이었던 적이 없었다.

[아이고... 불안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역시 경기 시작부터 게일 해니건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어느새 타율 3할 3푼을 넘어선 해니건의 또 한 번의 안타. 3-유간을 꿰뚫는 해니건 특유의 안타가 나왔습니다.]

[Y-DO 정도의 선수가 영입되면 어떤 타자든 당연히 긍정적인 효과를 받아요.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수혜를 본 선수는 해니건과 가드너죠. Y-DO의 앞뒤에 배치되는.]

[해니건은 일단 대부분의 투수가 해니건을 잡아내겠다고 달려들죠. 어렵게 들어올 때도 있지만, 내보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으니 결국 타격 기회가 늘어요. 타격 기회만 늘어나면 해니건의 컨택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가드너, 더햄 같은 선수들은 1, 2번이 나란히 출루율 3할 8푼이 넘어가는데 당연히 타격이 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들 걱정했던 거죠. 필리스의 마운드가 로키스의 상위타선을 넘어설 수 있을지. 1회 초 시작은... 좋지 않네요. 필리스 입장에선.]

마침 또 해니건이 안타를 치고 나가주면서 영도에게 복수의 기회, 참교육의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사실, 로키스 선수들 입장에선 영도의 활약뿐 아니라 건강, 기분, 심기까지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팀의 간판이자 자신들을 포스트시즌으로 보내줄 핵심 퍼즐, 영도의 활약 없인 이번 시즌도 얻는 것 하나 없이 끝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스토브 리그부터 영도의 적응과 융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해니건은 더더욱 그랬다.

영도의 맹활약에 자신의 지분도 있다고 믿었고, 영도가 써내려가는 역사에 한몫했다는 자부심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애먼 놈들이 와서 그 시즌을 망치려 한다?

해니건도 분노했고, 영도를 절대 피해갈 수 없도록 오늘은 매 타석 1루를 밟겠다고 다짐했다.

‘하여튼 왜 리더들은 남의 일에도 이렇게 최선을 다해 달려드는 건지...’

손성호나 해니건이나...

화가 나는 건 나고, 이를 갚아주는 것도 나의 일인데 꼭 이렇게 본인들 일처럼 나선다니까...

승부욕이 돌아오긴 했어도 아직 오지랖은 돌아오지 않아서 이해는 잘 안 되지만...

그래도 흐뭇하긴 했다. 누군가 신경 써주는 건 어쨌거나 흐뭇한 일이니까.

‘그럼 또 해니건의 기대에 부응해줘야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을 테니까.’

또 빚을 지고 살 순 없지.

해니건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면 이쪽에서도 빚을 갚아주는 게 인지상정.

어차피 이쪽도 화가 좀 나서 화풀이가 필요했는데, 화풀이에 보답까지, 일거양득의 기회였다.

[이번 시리즈는 양 팀 모두 하위 선발에서 로테이션이 돌아갑니다. 시티즌스 뱅크 파크가 타자친화구장이기도 해서 분명 타선에서 승패가 갈릴 텐데, 그렇다면 로키스가 유리할 것 같긴 합니다.]

[필리스도 마운드보다는 타선에 강점이 있는 팀이지만, 로키스가 더 강한 건 사실이죠. 로키스는 8월 이후 10경기에서 7승 3패를 달리는 중인데, 타선의 힘으로 만들어낸 상승세예요.]

[반대로 필리스는 8월 10경기 3승 7패입니다. 타선이 마운드에 비해 강하다는 거지, 마운드의 멱살을 잡고 승리를 따낼 정도는 아니라는 게 성적으로 드러납니다.]

[반면, 로키스 마운드는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평균 정도 수준에서 어떻게든 버텨주거든요? 쿠어스 필드에서 단련된 전사들인데 이 정도쯤이야!]

‘이 투수 FIP가 4점대 후반이었던가.’

로키스는 오프너 후 라미로 볼퀘즈, 오프너 후 버나드 케플러, 오프너 후 잭 스미스로 이번 3연전을 준비했다.

라미로 볼퀘즈와 버나드 케플러는 4이닝 정도만 맡아주면서 4점대 초반 FIP를 유지했고, 잊혀진 유망주 잭 스미스도 선발로는 실패했지만, 오프너 두 번째 투수로 변신해 4점대 중반을 찍으며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필리스는 3, 4, 5선발이 전부 4점대 후반 이상의 FIP를 찍으며 선발진이 궤멸한 상황.

그런 선발진으로 트레이드 이후 불타오른 로키스 타선을 상대해야 했다.

‘어쨌거나 필리건은 월드시리즈 우승 전력이 아닐 땐 언제나 마이너스. 전력이 강할 때도 마이너스인데, 지금은...’

성적이 안 좋고 싶어서 안 좋은 선수가 어디 있을까.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수들도 필리스에서 뛸 땐 100번 잘하다가 한 번 못하면 원색적인 욕을 들었는데, 4점대 후반 FIP의 선발투수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해니건 타석의 초구, 오늘 경기 초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투수가 완전히 기가 죽은 상태라는 걸.

자신이 던지는 공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투수는...

타자들에겐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완전히 받쳐놓고 돌렸습니다! 필리스 선발 마운드에게 로키스 타선은 너무 큰 짐이었던 겁니까!? GET-YA!! 시즌 44호 홈런! 남은 경기는 47경기, 로저 매리스까지는 17개!]

[Y-DO가 보여준 배트 플립 중에 가장 화끈한 배트 플립이 나왔는데요!? 타격 후 가만히 서서 타구를 지켜보다 한 손으로 멀리 날려버립니다!]

‘내가 짜증이 난 것도, 투수의 공이 점점 형편없어지는 것도... 전부 당신들 때문이야.’

영도의 배트 플립은 한 번 보면 굉장히 멋지고 인상적이었지만, 감정이 들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자주 보면 그냥 ‘배트를 던졌구나...’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타격 후 가만히 서서 턱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타구를 지켜보았고, 이후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듯 느긋하게, 오연하게 배트를 멀리 던져버렸다.

[Y-DO, 베이스를 돌면서 어딘가를 계속 가리킵니다. 특정한 위치를 가리키는 걸 보면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한데... 아, 아! 저거였군요.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 궁금했는데, Y-DO의 심기를 건드리는 걸개와 카드들이 관중석 곳곳에, 일부 관중들의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에이, 저건 아니죠. 시대가 어떤 시대고 메이저리그의 품격이 있는데 저런 식의 문구라니...]

[아시아 출신 선수가 메이저리그의 핵심 기록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게 진정한 메이저리그의 품격이고 가치입니다. 빅리그의 품격은 오히려 저런 문구들이 떨어뜨리는 것이고요!]

[동의! 완전히 동의할 수밖에 없네요. 저 분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차별은 참을 수 없었다.

영도가 아무리 30대 중후반 아저씨를 속에 품고 산다지만, 미국 생활은 이번 생이 처음이었다.

30대 중후반 아저씨를 속에 품은 10대 시절 영도에게도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인종차별은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도에게 야구는 오로지 실력으로 말하는, 실력만 있으면 통한다고 믿는 성역이었다.

그런 성역을 형편없고 한심한 차별로 더럽히려 하다니.

영도는 오랜만에 분노했다.

“좋아, Y-DO! 그렇게 갚아주는 거야!!”

“안타 좋았어.”

영도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한 게 좋아서였을까.

먼저 홈으로 들어온 해니건은 자신의 홈런보다 더 기뻐 날뛰며 영도를 맞이했다.

또 그런 모습을 보니까 영도도 자연스레 헛웃음이 나오면서 기분이 풀렸다.

처음부터 짜증이 좀 났을 뿐, 그렇게까지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형편없고 한심한 인간들에게 한 번 철퇴를 날려줬으니 이젠 짜증 낼 것도 없었다.

내가 이겼는데 패배자들이 떠드는 소리에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스트라이크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키스 가드너, 그냥 가만히 서서 공 네 개를 지켜봤을 뿐인데, 베이스 온 볼스로 출루합니다.]

[세 타자를 상대하면서 아웃 카운트 한 개를 못 잡았네요. 필리스는 오늘 경기도 힘들겠어요.]

“네가 불쌍한 선발투수 한 명 또 찢었나 보다. 아예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데?”

“내가 찢었나. 필리건이 찢었지.”

기량 부족, 팬들의 압박에 강력한 상대 타선까지.

결국, 필리스 선발투수는 1회 초부터 맞이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듯했다.

그리고 아마 가장 결정적인 건 팬들의 압박이었으리라.

프로란 팬들의 응원만 있으면 자신의 기량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공 하나만 잘못 던져도 홈팬들이 가장 먼저 등을 돌리는데 어떻게 제 실력을 보여줄까. 유망주는 저런 환경에서 성장이나 하겠어?”

“그건 그렇지. 어휴, 나라도 저런 환경에선 야구 못해. 차라리 다른 곳에서 구를 만큼 구른 베테랑이면 모를까...”

필라델피아 필리스 선수들에겐 유감이 없었다.

오히려 같은 프로로서 그들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홈팬들 외에는 전부 다 적일 수밖에 없는 게 프로 스포츠의 세계인데, 홈팬들부터 등을 돌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팬들의 모든 기대를 한몸에 안았던 만큼 망했을 때 팬들이 먼저 냉정하게 등을 돌렸던,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회귀 전과 후를 거쳐 두 번이나 비슷한 경험을 한 영도이기에 필리스 선수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이번 3연전은 생각보다 쉽겠는데.”

“그래. 냉정하지만, 이번엔 네 말이 맞지. 그러면 이번 시리즈에 홈런 한 3, 4개 또 치는 건가?”

“홈런 3, 4개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좋은 결과는 있겠지. 홈런은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고.”

“홈런 치려다가 자연스럽게 안타가 나오는 건... 아니겠구나. 스윙부터 홈런 스윙이랑은 거리가 머니까.”

언제나처럼 상대가 안쓰럽고 불쌍한 것과 내 성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

상대가 안쓰러워질 만큼 헤매준다면 감사히 받아먹을 뿐.

시작은 비록 좋지 않았지만, 이번 3연전의 느낌도 좋았다.

[다시 한 번 까마득히 날아갑니다. Y-DO, 네 번째 타석에서 까마득히 날아가는 쓰리런 홈런을 터뜨리며 멀티 홈런 경기를 완성합니다.]

[이걸로 45호 홈런인가요? 개막과 동시에 11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릴 때도 50홈런 가능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는데... 후반기 페이스가 정말 미쳤네요!!]

[음... 첫 타석에서 Y-DO의 심기를 건드렸던 걸개들은 어느새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습니다. 비슷한 문구의 카드를 들고 있던 팬들도 이젠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14-2예요. 아무리 열정적인 필리스 팬덤이라 해도 이 정도면 집에 갔겠죠. 특히 그 정도로 성격이 불같은 팬들이라면 이런 경기를 어떻게 끝까지 보겠어요. 이미 다 집에 가고도 남았죠.]

< 조기 귀가 서비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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