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심상치 않은 분위기 > (109/200)

< 심상치 않은 분위기 >

동부에서 날아온 팀, 누구나 체력적인 부침을 겪는 쿠어스 필드, 그리고 7월의 시작을 이틀 앞둔 한여름 돌입 직전의 더운 날씨.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선수의 체력이 많이 떨어진 시기.

이런 상황들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드디어 영도의 시간이 찾아왔다는 것.

[아아! 유영도!! 첫 타석부터 멋진 타구를 뽑아냅니다! 뒤로 물러나는 좌익수의 발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정된 홈런! 좌측 펜스를 훌쩍 넘어가는 대형 홈런이 터집니다!]

[투표 마지막 날이니만큼 그동안 함께 고생한 팬들 앞에서 보답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자마자 첫 타석부터 홈런이네요. 역시 유영도 선수가 알아서 잘하는데 괜한 참견을 했나 봐요.]

[이제 이틀만 지나면 7월입니다. 그리고 유영도 선수는... 지난 시즌에도 그랬고, 그전 시즌에도 그랬고, 전전 시즌에도 그랬듯 여름만 되면 날아다니는 선수입니다.]

[어떤 지표로 봐도 이미 야수 전체에서 양대리그 통합 TOP 10에 드는 성적인데 아직 여름이 시작도 되지 않았다? 대체 이 선수가 이번 시즌 어디까지 갈지 기대되어 잠이 안 올 지경이에요. 진짜 어디까지 갈까요?]

‘확실히 쿠어스 필드도 어려워하는 것 같고, 비행의 피로든 여름의 피로든 피로도 쌓인 것 같고.’

어차피 이 무대에 서는 모두가 전문가였다.

공이 날아가는 것, 스윙이 나오는 것만 봐도 자신과 상대의 컨디션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선수들.

경험이나 준비에 따라 정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고, 영도는 누구보다 철저히 준비하는 선수인 만큼 눈썰미의 정확도가 매우 높았다.

‘우리 선수들도 많이 지쳐서 무조건 공략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쿠어스 필드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르는 게 콜로라도 로키스인 만큼 로키스는 홈구장에서 손해를 보는 거의 유일한 팀이었다.

똑같은 고지대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지만, 덴버의 다른 프로 스포츠 팀들은 한 경기에서의 체력 소모가 중요한 종목이라 이득을 보는 것과는 정반대.

야구는 시즌을 길게 끌고 가는 체력이 중요한데, 시즌 전 만들어놓은 체력이 예금, 한 경기 치를 때마다 소모되는 체력이 식비면 로키스 선수들만 훨씬 비싼 밥을 사 먹는 상황이었다.

상대 선발이 지친 게 보이는데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지금, 아득바득 5할 승률에 도전 중이라는 게 오히려 대단했다.

‘30홈런까지 3개가 남았던가...’

팀 상태, 팀의 승리를 생각하는 건 여기까지.

어차피 중요한 건 언제나 자신의 성적이니까 팀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행히 돌아오면서 이것저것 받은 게 많다 보니 영도만큼은 이 계절에도, 이 시기에도, 이 팀에서도 여전히 멀쩡했다.

투수 상태를 보니까... 이 홈런 하나로 끝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툭 가져다 대면서 중견수 앞에 떨어뜨립니다. 지난 시즌부터 이렇게 배트 컨트롤로 쉽게 뽑아내는 안타들이 늘어난 모습입니다.]

[쉽게 맞추기 힘든 공이 쉽게 골라내기 힘든 상황에 들어왔을 때, 예전에는 평소처럼 붕붕 휘두르다가 물러났죠. 지난 시즌부터 가벼운 스윙으로 툭 쳐서 살아나가는 방법을 깨달은 것 같아요.]

1회의 홈런 이후 3회에 다시 단타로 멀티 히트 경기를 완성한 영도는...

[바깥쪽 공을 결대로 밀어버린 유영도 선수! 그리고 언제나처럼 결대로 밀어친 공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 뻗어 나갑니다. 유영도 선수의 장타력과 쿠어스 필드의 희박한 공기! 우중간을 가르기 직전에 걷어내지만, 유영도 선수는 가뿐히 2루를 밟았습니다.]

[어? 이렇게 되면 홈런, 단타, 2루타... 3루타 하나면... 뭔가 또 하나의 기록을 세우게 되는데요? 혹시... 가능할까요?]

5회, 다시 한 번 2루타를 뽑아내며 3타수 3안타, 완벽한 경기를 이어가는 영도의 맹활약.

하지만 지금 3타수 3안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첫 타석에서 홈런, 두 번째 타석에서 단타, 세 번째 타석에서 2루타...

어떤 것 하나만 빠진 무언가를 완성한 지금, 남은 3이닝 동안 모두의 관심사를 하나로 집중시킬 소재가 등장했다.

[(6회 초) 로키스 생중계 달리기 vs TOR]

COL 6 : 2 TOR

유영도 : 3타수 3안타(솔로 홈런, 단타, 2루타)

- 미쳤다, 미쳤다... 이거 완전 ‘그거’ 각 아니냐?

- 각도 날카롭게 잡혔다. 다들 주둥이 괜히 나불대지 말고 닥치고 있어라

- 이럴 때 주둥아리 잘못 놀리다간 어떻게 되는지... 다들 잘 알고 있지?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 그거다, 그거!! 그거 나온다, 그거!!

- 설레발 금지. 유영도도 어쨌든 제츠 출신이고 심지어 제츠 골수팬 출신이라 설레발 떠는 순간 젤레발 된다... 젤레발의 최후는... 다들 알지?

- 근데 진짜 미친 거 아니냐? 메이저리그에서 저걸 한다고?

- ... 유영도 통산 3루타 개수가 몇 개냐? 내가 볼 땐 어차피 가능성 없을 것 같은데

- 그래도 이번 시즌 3루타 한 개인가 두 개 있음. 발바닥에 불나도록 열심히 뛰니까 가끔 3루까지 가기도 함

- 만약 오늘 3루타 나오면 이번 시즌 3루타 할당량은 끝일 것 같지만... 이왕 나올 거면 오늘 나왔으면 좋겠네. 어차피 3루타를 따로 세는 것도 아닌데 이왕이면...

- 쿠어스 필드 외야가 태평양이라 그나마 확률이 좀 있기는 한데... 글쎄?

시즌 내내 4안타 경기 한 번 못하는 선수들도 있는데, 5회까지 3번 타석에 들어서서 3루타를 제외한 히트 포 더 사이클을 완성하고 대략 2번의 타석을 남겨놓은 상황.

시즌 3루타 커리어 하이가 3개, 메이저리그 커리어 하이는 2개지만, 그래도 기대를 안 할 순 없었다.

3루타만 남겨두고 두 타석이 남았는데 ‘혹시나...’하는 기대라도 없으면 팬이 아니니까.

특히 한국에서는 한국인 메이저리거 자체가 많지 않다 보니 활약하는 한국 선수에 따라 응원하는 팀이 휙휙 바뀌었다.

지금도 콜로라도 로키스 경기를 매일 수만, 수십만 명씩 시청하고 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로키스의 승패보다는 영도의 활약이었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답답한 플레이가 나오면 분노하고 욕하고 신경질을 내지만, 오늘은 로키스의 경기력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팬들의 시선은 영도의 세 번째 타석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타석으로 향했다.

스코어도 승리가 확정된 것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점수 차였고...

[자, 6회 말에 다시 유영도 선수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전 이닝에 2루타를 뽑아냈던 유영도 선수가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타석에 들어섭니다.]

[쿠어스 필드의 저 광활한, 태평양과 같은 외야에 크게 도움받는 타구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외야의 넓이에 크게 도움받는 타구라면... 그걸 말씀하시는 거겠죠.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진짜 한 번만, 딱 한 번만 해줬으면 좋겠어요. 메이저리그에서 생각보다 히트 포 더 사이클의 위상이 높지 않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임팩트 있는 기록이거든요?]

6회 말 2아웃 1, 3루에서 영도가 타석에 들어서자 곧바로 긴장하는 투수의 모습이 카메라 렌즈를 뚫고 전해졌다.

다른 구장도 아니고 쿠어스 필드에서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는 것 정도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기고 지는 정도에서 끝나야지...

히트 포 더 사이클의 위상이고 나발이고 일단 기록을 내주는 것만큼은 좋아할 투수가 없는 게 당연했다.

‘내가 긴장을 안 하니까 남들이 다 대신해주네.’

영도는 히트 포 더 사이클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평소와 100% 똑같은 태도로 타석에 들어섰다.

지켜보는 사람들과 상대 선수들이 영도가 해야 할 긴장까지 다 대신해준 것인지...

‘히트 포 더 사이클이 뭐라고. 4타수 4안타 히트 포 더 사이클보다 4타수 2안타 2홈런이 낫지.’

조금 과장한 거고, 출루율이든 장타율이든 전자가 더 낫긴 하지만...

과장해서 이 정도까지 생각할 만큼 히트 포 더 사이클에 대해선 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장타력이 부족한 아시아권에서 조금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도 있고, 일본에서 80여 차례, 한국에서 30여 차례 나온 것에 비해 메이저리그에선 350여 차례 나온 만큼 비교적 희소성이 덜한 것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런 배경에 안 그래도 이런 식의 이벤트성 기록을 전혀 챙기지 않는 성격까지 겹쳐서 영도에게 히트 포 더 사이클 정도는 굳이 애써서 이뤄야만 하는 기록까진 아니었다.

[1루 방향으로 강하게 밀어친 타구가 1루수 옆을 빠져나갑니다!! 장타 코스!! 가나요!? 가나요!!]

[무조건 뛰어야죠! 일단 뛰고 봐야 해요! 어차피 2점은 들어오거든요? 8-2 정도면 무리해서 3루까지 뛰어봐도 됩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장타가 나오면 또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언제나 그래 왔듯 적극적인 허슬을 보여주면 되는 거고.

그러면 또 누가 알까. 행운이 찾아와 한 시즌에 두어 번 오는 3루타란 행운이 찾아올 수도.

‘이거 애매한데. 홈에서 잡아도 7-2면 기록이라도 안 내주겠다고 3루에 던질 수도 있는 거잖아.’

3루로 송구되면 명백한 아웃 타이밍일 것 같은데...

하지만 7, 8, 9회 동안 역전을 노릴 거라면 1점이라도 실점을 막아내려 할 테고, 그래서 홈 송구가 이뤄진다면 3루로 무혈입성할 수 있겠지.

다만, 전자의 경우 아웃 확률이 높지만, 부정확한 송구 등의 요행이 일어나면 3루타가 되고, 후자의 경우 순조롭게 3루까지 들어갈 확률이 높지만, 아마 2루타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았다.

[우익수의 강렬한 홈 송구!! 1루 주자 개리 반스가 홈으로 빠르게 파고듭니다!]

[자, 홈도 홈이지만, 3루도 중요하거든요? 유영도 선수는 일단 3루까지 달리고, 3루에선 살 것 같아요!]

[홈에서는 세이프! 8-2로 점수 차를 벌리는 2타점 적시타! 그리고 3루를 밟았는데... 과연!?]

[이건 정말 기록원의 재량에 달린 건데, 우익수가 홈에 던지지 않고 3루로 던졌을 때, 일반적인 관점에서 아웃 타이밍인지, 세이프 타이밍인지를 판단해 3루타가 될 수도 있고 2루타가 될 수도 있어요.]

“Y-DO!! 됐어!! 깔끔하게 해냈는데!?”

“글쎄요. 2루타 같은데.”

3루를 밟긴 했지만, 욕심이 없었던 만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엄격한 판단일 수도 있고.

어쨌든 확실한 건 지금 영도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음... 이렇게 보면 확실히 아웃 타이밍이다, 세이프 타이밍이다,를 판단하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유영도 선수가 생각보단 빠르고 절대적으론 평균보다 느린 편이잖아요?]

[그렇긴 하죠. 딱 그 표현이 맞아요. 빠르고 느린 두 분류로 나누면 느린 쪽이지만, 생각보단 빨라요. 다만, 유망주 시절부터 압도적인 파워로 유명했고, 이번 시즌 역시 개막 직후부터 홈런 1위를 놓치지 않은 거포 이미지라 기록원이 어떻게 생각할지...]

[원래는 애매하면 주자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기록원도 사람이라 주자의 평소 이미지에서 자유롭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게 좀 걱정되긴 하는데... 아... 결국, 2루타로 기록되었네요. 아... 정말 아쉬운데요... 아이, 참...]

실제로 타이밍 역시 3루타라 강력히 우기기엔 애매하기도 했다.

일단 영도의 사기와 팀원들의 사기를 생각해 콕스 감독이 뛰쳐나와 살짝 어필을 해봤지만, 기록원의 판단은 어필로 바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글쎄요. 2루타 같은데.>

[아... 역시 유영도 선수. 이런 순간에도 냉철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선수가 저럴 수 있죠? 아무리 냉철한 선수여도 이런 순간엔 아쉽기도 할 테고 흥분되기도 할 테고 그럴 텐데...]

[저런 것 역시 유영도 선수의 큰 장점이죠. 이런 순간에도 냉정한 모습을 보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그래서 이 선수는 걱정이 안 돼요. 이렇게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때,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3루수, 오토 클락의 인 게임 마이크에 들어간 영도의 음성이 중계화면을 통해 흘러나왔다.

미국에서 중계 화면을 그대로 넘겨받아 해설만 따로 씌워 내보내는 형식이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똑같은 장면과 영도의 목소리가 중계되고 있었다.

“진짜 괜찮아? 코치한테 들으니까 기록원 판단이 나오기도 전부터 2루타라고 했다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 같은 것도 없었어?”

“없었는데. 2타점 2루타면 됐지, 3루타가 필요한 상황이었나?”

“히트 포 더 사이클이잖아!! 그래도 나름 인지도 있는 기록인데 신경 안 쓴다고?”

“전혀. 장타율은 좀 떨어졌겠네. 3루타가 아니라서... 그건 좀 아쉬우려나.”

그리고 이제 고작 6회고, 한 번 정도의 기회가 남아있었다.

여전히 욕심은 없었지만,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건 사실.

자꾸 약간씩 모자라지만, 그래도 점점 3루타에 가까워지는 타구들이 연이어 나오는 걸 보면...

영도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다.

그냥... 하늘이 도와주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 심상치 않은 분위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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