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베테랑과 루키 > (107/200)

< 베테랑과 루키 >

첫 경기에서 프레드 왓슨의 억울한 부상과 함께 패배까지 안으면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콜로라도 로키스.

하지만 어제 경기에서 영도의 참교육과 함께 승리를 가져오면서 두 배 이상, 거의 열 배 가까이 갚아주는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빠른 땅볼 타구! 2루수 개리 반스가 끝까지 따라가서 잡아내고 글러브 토스로 2루에! 2루에서 아웃, 다시 1루!!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로키스의 분위기가 확 올라왔다는 게 플레이에서 느껴집니다!]

[어유, 흐름이 올라올 수밖에 없죠. 어제 유영도 선수의 화려한 스파인버스터와 참교육은 충분히 그 정도의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프레드 왓슨의 부상으로 선발 출장 기회를 잡은 개리 반스. 이 선수도 루키인데 어제 오늘 활약이 아주 좋습니다.]

[이 선수가 이제 스물한 살인데, 이번 시즌 로키스 팀 내 유망주 1위였거든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20위 안에 드는 재능인데, 포지션이 유격수라 애매했단 말이에요. 키스 가드너가 있으니까.]

[그러면 프레드 왓슨의 부상이... 이 선수에겐 정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렇죠. 2루수 전향을 준비 중이었던 걸로 아는데, 수비력도 보여주면서 원래 높게 평가받았던 타격 재능까지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죠. 반대로 프레드 왓슨에겐 안 그래도 불안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위기가 찾아온 상황이고요.]

프로 선수들에게 부상이란 공포, 그 자체였다.

부상으로 운동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좋은 흐름이 끊기는 것도, 경기 감각을 상실하는 것, 어느 한 군데 영구적인 문제가 생겨서 향후 아예 다른 야구를 하게 되는 것도 전부 공포였다.

그리고 부상 이후 돌아왔을 때 내 자리가 없어질 수 있다는 것 역시 심각한 공포였다.

프레드 왓슨은 안 그래도 불안에 떨던 선수였다.

팀 내 1위이자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20위 안에 드는 특급 유망주가 유격수인데, 유격수 자리에 리그 유격수 TOP 5를 다투는 선수가 버티고 있으니... 

심지어 3루에도 이제 막 영입한, 10경기 연속 홈런 신기록을 달성한 영도가 있으니 그를 위해 만들어줄 자리는 본인의 포지션, 2루밖에 없었다.

심지어 유망주 개리 반스가 2루 컨버전이 아쉬울 정도로 수비가 뛰어난 선수도 아니었고, 안 그래도 수비보다 타격 재능을 살리는 쪽으로 컨버전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였다.

반면, 본인이 반스보다 앞서는 건 수비 하나고, 타격은 30개 구단 전체 2루수 중에서도 하위권인데, 수비가 골드글러브급으로 압도적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자리를 빼앗길 것, 주전 자리를 지키고 싶으면 빼앗기기 전까지 최대한 가치를 올려서 트레이드라도 노려야 했는데 부상이라니.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그의 표정이 어두운 것도 당연했다.

“이런... 프레드의 상태가 참...”

“그런 것까지 신경 쓰나?”

“당연하지. 내가 이 팀의 리더라고.”

해니건은 팀의 리더로서 프레드의 어두운 표정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래도 개인적인 성향이 더 강한 메이저리그에서는 해니건이 특이한 유형의 리더였지만, 어쨌거나 해니건은 그렇게 생겨 먹은 선수였다.

“반스가 잘하면 트레이드되겠지. 왓슨도 이제 서른이라 트레이드되는 게 본인한테도 더 좋은 일일 테고.”

“당연히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로키스에 있는 동안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행복? 프로선수에게 그것보다 더 안 어울리는 단어가 있나.”

행복을 언급한다는 것.

행복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영도와 해니건은 완전히 달랐다.

영도는 프로의 세계에 들어온 이후 십수 년 동안 매일매일이 전쟁이었고, 매일매일 자신을 갈아가며, 들들 볶아가며 버텨온 만큼 행복이란 걸 포기한 지, 뒤로 최대한 밀어둔 지 오래인 선수였다.

반대로 해니건은 자신의 타고난 재능으로 일찌감치 성공해 승승장구하며 먹이사슬 최상위에서 버텨온 선수.

물론, 메이저리그에서 최정상을 유지한다는 게 재능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고, 해니건도 자신을 갈고닦아 여기까지 왔겠지만...

아무래도 사는 세계가 다르고, 이에 따른 가치관 역시 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반스가 왓슨을 밀어내고, 왓슨으로 지명타자나 코너 외야수를 데려오는 게 우리한테도, 왓슨한테도 좋은 일 아닌가.”

“... 냉정하게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면 그게 맞지. 그게 맞는데...”

“책임감 강한 건 좋지만, 뭐가 진짜 당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인지 다시 생각해. 나야 상관없지만, 당신한테는 팀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시즌 시작하고 두 달 만에 겨우 흐름이 왔는데... 그런 쓸데없는 걱정에 낭비할 시간이 있어?”

잔인하지만, 프로의 세계가 다 그런 것.

압도적인 실력이 없다면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아야 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도전자와 경쟁해야 하는 세계.

그러다가 도전자를 제압하지 못하면 자리를 내주고, 다시 자리를 찾아 떠나거나 밀려난 위치를 받아들이거나.

기량이 부족한 선수에게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이, 특히 기본적인 위상 자체가 훨씬 높은 사람이 위로할 순 없었다.

영도 역시 겪어봐서 알았다.

한순간에 정상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그를 위로해준 사람들도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진정으로 가슴에 와 닿지 않았으니까.

‘너무 익숙한 모습이라서 짜증 나네.’

굳이 전생까지 가지 않아도 KBO 진출 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시절의 영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

영도는 프레드 왓슨을 보며 자신의 과거가 떠올라 씁쓸해졌다.

말로는 트레이드가 그에게 이득이라 말했지만...

글쎄. 30세의 수비 좋은, 그러나 타격이 하위권인 밑천 다 드러난 2루수를 주전으로 써줄 팀이 있을까?

안 그래도 운동신경 좋은 유망주들이 일단 도전하다 보니 팀마다 유망주 몇 명씩은 보유한 유격수 포지션에서 수비 좀 안 되면 바로 전향하는 게 2루인데.

그나마 3루수와 유격수 수비도 가능하다는 걸 위안 삼아야겠지.

멀티 포지션 내야수는 언제나 수요가 있으니까.

“Y-DO. 개리 타석에 대타로 나갈 거야, 준비해.”

징계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휴식도 부족했고, 어제 경기에서 충돌도 있었던 만큼 영도는 오늘 선발명단에서 빠져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9회 초, 로키스는 한 점 차로 앞선 상황에서 2사 1루의 찬스를 맞이했고, 9번 타자 개리 반스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영도를 거를 수도 없고, 맞춰서 내보낼 수도 없는 상황.

콕스 감독은 걱정 없이, 고민 없이 영도에게 오늘 경기 마지막 기회를 맡겼다.

“Y-DO, 부탁합니다.”

영도에게 타석을 내어준 개리 반스가 찾아와 주먹을 내밀며 응원했다.

마운드에는 이틀 동안 휴업한 리그 최강의 클로저 중 한 명, 베니 슈스터가 컨디션 점검 차, 무실점으로 마지막 기회를 이어주고자 올라온 상황.

반스의 표정에선 어느 정도의 분함과 어느 정도의 안도감이 느껴졌고...

안 그래도 왓슨을 보며 심기가 불편해졌던 영도는 그로선 드물게도 다른 선수의 태도를 지적했다.

“표정이 왜 그러지?”

“... 예?”

“명심해. 이런 순간 조금이라도 안도감을 느꼈다면... 넌 거기까진 거다.”

누군가는 한 타석을 위해 온몸을 갈아가며, 선수 수명을 깎아가며 배트를 휘두르는데...

특급 유망주? 팀 내 1위 유망주?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유망주고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그 알량한 칭찬과 위치에 만족한다면 그곳이 마지막.

정말로 더욱 높은 곳을 원한다면 단 한 타석이라도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맡겨지는 것에 대해 분함과 억울함을 느껴야 했다.

적어도 영도만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죠! 이럴 때 유영도 선수가 벤치에 있다는 건 감독에게 어떤 느낌일까요?]

[어유... 유영도 선수 없이 1점 차 리드로 9회를 맞이하고, 9회에 주자가 나가자마자 유영도 선수를 대타로 내보낸다... 감독을 아무리 오래 해도 이보다 더 든든하고 마음 편한 상황은 없을 것 같은데요?]

어쨌거나 영도는 언제나처럼 소중한 한 타석을 맞이했다.

다저스가 내일 원정 경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낮 경기로 치러진 경기.

아직 해가 지지 않았고, 비거리도 평소보다 더 나오는 비교적 편안한 상황.

아무리 감정 기복이 적다지만, 그래도 어제 경기의 흥분과 분노가 남아있었고, 왓슨과 반스를 보며 불편해진 심기를 시원하게 풀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상황 자체가 무조건 아웃을 잡아내야 하는 상황이지만, 특히나 유영도 선수에게는 안타를 내주기 싫을 겁니다. 절대로 내주지 않으려 할 거예요.]

[당연하죠. 경기 지는 것도 지는 건데, 다른 선수도 아니고 어제 다저스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준 유영도 선수에게 여기서 또 안타까지 내준다? 어휴... 제가 만약 현역이었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한 일주일 정도는 잠적하고 인터넷 다 끊고 살았을 거예요.]

안 그래도 이틀 쉬어서 쌩쌩한 슈스터는 초구부터 100마일의 강력한 패스트볼을 던져댔다.

어차피 맞출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영도의 가장 큰 장점인 힘으로 맞붙어 찍어눌러 버리겠다는 것.

슈스터 역시 어디 가서 힘으로 밀리는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어차피 포심 아니면 커터. 가끔 커브를 던지긴 하지만...’

베니 슈스터는 한두 개의 구종을 극한까지 갈고 닦은 전형적인 불펜 에이스 스타일의 투수였다.

포심이 평균 구속 100마일에 육박하고, 커터 역시 97마일을 찍어 힘으로 윽박지르지만, 가끔 70마일대의 커브를 던져 타자들의 타이밍을 한 번에 흐트러뜨리는 투수.

가장 원초적인 피칭, 힘으로 찍어누르는 피칭을 하기 때문에 타자가 아무리 노리고 들어와도 이겨내는 게 쉽지 않았지만...

‘힘으로는 또 내가 안 밀리지.’

커브 구사 빈도가 높지 않기에 슈스터의 피칭은 타자가 구종을 읽어도 힘으로 이겨내는 피칭이었다.

그리고 그거 하나로 리그 최고의 클로저 중 한 명이 되었을 만큼 일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도는 빗맞은 타구도 2층 관중석까지 날려버리는 압도적인 장타자.

포심은 말할 것도 없고 커터 역시 컨택 자체를 막는 구종이 아니라 빗맞게 해서 범타를 끌어내는 구종인데 빗맞아도 넘겨버리는 타자가 등장했다면...

그것도 상승 기류를 동반한 낮 경기에서 만나게 되었다면.

[102마일 포심 패스트볼인데, 타이밍이 맞았습니다! 완벽하게 타이밍이 맞아버린 타구! 102마일 강속구의 반발력과 유영도 선수의 압도적인 장타력까지! 이게 넘어가지 않으면 이상한 겁니다! 의심해야 하는 겁니다! 유영도 선수의 시즌 22호 홈런!]

[시즌 초반만큼 압도적인 페이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충분히 빠른 페이스로 홈런을 적립하고 있어요. 59경기 22홈런인데, 이 정도면 시즌이 끝날 즈음 충분히 50홈런을 노려볼 수 있는 페이스거든요?]

[그리고 6-3으로 달아내는 홈런을 때려내며 로키스를 승리 눈앞까지 데려다 놓았습니다. 베니 슈스터도 굉장히 좋은 클로저지만, 로키스의 조던 파인스틴도 절대 밀리지 않아요. 3점 정도는 파인스틴에겐 껌입니다!]

‘이제 심기가 좀 풀리네.’

역시 영도에겐 타석에서의 좋은 결과, 좋은 플레이가 가장 좋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오마르 킵니스의 무식한 행동들, 프레드 왓슨과 개리 반스에 얽힌 복잡한 이야기들이 겹쳐 불편해진 심기가 홈런 한 방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위기의 베테랑? 아직 멘탈이 완성되지 않은 루키? 인간이 덜 된 라이벌팀 선수?

어쩌라고. 내가 홈런을 쳤는데.

< 베테랑과 루키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