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교육 >
보스턴 원정 3연전에서 예상을 깨고 위닝 시리즈를 챙겨 온 로키스는 이어진 9경기에서도 4승 1무 4패로 5할 승률을 이어갔다.
강렬하진 않지만, 조용히 기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한 덕분에 어쨌거나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도토리 3인방 중에선 그래도 꼭대기 자리를 차지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로키스는 다시 한 번 LA 원정을 떠났다.
최근 30시즌 동안 17시즌을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챔피언으로 마무리 한 LA 다저스.
남은 13시즌 중 11시즌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것이었고, 2시즌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것이었다.
펫코파크의 파드리스와 쿠어스 필드의 로키스는 여기서도...
어쨌거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머지 4개 팀의 주적이자 타도 대상은 LA 다저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3개 팀 역시 무조건 다저스를 잡아야만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간절한 상황.
이들 네 팀은 다저스만 만나면 평소보다 더 강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어제 경기에서 살짝 충돌이 있었던 두 팀입니다. 로키스의 2루수 프레드 왓슨이 2루로 슬라이딩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다저스 유격수 오마르 킵니스의 무릎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왓슨의 얼굴을 가격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음... 로키스 입장에선 킵니스의 움직임에 의도가 있었다는 의심을 충분히 할 만했어요.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라는 공식 발표가 나왔고, 한두 경기만 쉰다고 하는데... 어쨌든 아직 불씨는 남아있거든요? 사소한 충돌이 한 번만 더 나오면 터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다저스도 다른 팀들의 이런 분위기를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경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몸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라는 게 있는데, 다저스를 상대하는 나머지 4개 팀들이 온몸으로 전의를 내뿜어대니...
그러다 보면 당연히 플레이부터 거칠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제 경기 역시 마찬가지.
점점 경기가 거칠어지더니 다저스의 트러블 메이커, 킵니스가 고의성 짙은 움직임으로 왓슨의 얼굴을 무릎으로 가격했고, 잠시 경기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벤치 클리어링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언제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고, 다들 시기의 문제일 뿐, 3연전 남은 두 경기 중 한 번은 충돌이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다저스타디움에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또 오늘 양 팀 선발 투수들이 루키들이에요. 콜로라도 로키스는 알폰소 길버트가 1회에 올라오긴 했지만, 오프너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선발투수는 루키, 레이 카레도라고 봐야 합니다.]
[선발 로테이션을 맞추기 위한 임시 선발이죠? 며칠 전 콜업되었습니다. 이번 시즌 팀 내 유망주 13위로 제대로 키우는 유망주까진 아니라고 봐야겠죠.]
[로키스가 제대로 키우는 선발투수는 커트 페니, 조셉 커닝햄, 잭 스미스 같은 선수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경기의 중압감에 살짝 흔들리고 있습니다.]
[투수 왕국 LA 다저스가 ‘포스트 돈 라이스’라는 별명까지 붙여가며 애지중지 키우는 페드로 케인도 흔들리는데요.]
오늘 경기는 경기 자체가 시작부터 불안했다.
휴식일 없이 15일째 경기를 치르는 로키스는 안 그래도 홈/원정을 오가는 게 힘든 팀이 휴식도 없이 내달렸으니 팀 전체가 예민해진 상태였다.
다저스는 항상 같은 지구 팀들을 만날 때 상대를 살짝 무시하는 마음과 함께 혼자만 미움받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운드를 지키는 양 팀의 루키 투수들.
아무래도 루키다 보니 제구가 흔들렸고, 양 팀 도합 두어 차례의 위험한 공들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공들이 나올 때마다 경기는 점점 더 위험해졌다.
그리고... 이번 시리즈를 이 사단으로 이끈 원흉, 다저스의 트러블 메이커 오마르 킵니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아! 공이 빠졌습니다. 그래도 지금 이거 커브잖아요!? 몸에 맞긴 했지만, 여기서 흥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필요한 행동... 아!!]
[아니, 이건 아니죠! 누가 굳이 변화구로 맞출까요!?]
사무국은 히트 바이 피치, 몸에 맞는 공을 리그에서 퇴출하려 최선을 다했다.
부상 위험도 있고, 150km가 넘는 엄청난 강속구로 사람을 맞춘다는 행위 자체의 야만성도 꽤나 많은 팬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투수의 마음을 읽어내 의도성을 100% 판단할 수 없는 이상 완전히 쫓아내는 건 당연히 불가능.
야구는 투수 혼자 능동적인 스포츠로, 야수들은 투수가 공을 던진 이후에야 반응할 수 있었다.
투수가 모든 키를 쥐고 있고, 히트 바이 피치를 금지한다는 게 말도 안 되니 자연스럽게 벤치 클리어링도 막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투수는 모든 주도권, 즉, 공을 쥐고 시작한다는 이점 하나 덕분에 언제나 타자를 위협할 기회가 생기는데, 타자들도 대항할 방법이 있어야 했다.
그 방법 중 가장 직관적이고 투수에게 위협이 되는 건 결국 벤치 클리어링이 될 수밖에...
그러나.
모든 투수가 자신이 손에 쥔 권력, 공을 쥐고 있다는 권력을 바람직하게만 활용하지 않는 것처럼 타자 중에서도 투수에게 대항할 권리를 바람직하게만 활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아니, 지금 뛰어드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손! 손!!]
[배트는 놓고 가야죠! 이게 뭐하는 짓인가요!?]
킵니스를 맞춘 카레도의 공은 71마일짜리 커브였다.
누가 봐도, 야구 문외한이 봐도 손에서 빠졌다는 게 확 티가 나는 공.
하지만 킵니스는 어제 왓슨의 얼굴을 가격한 원흉이자 트러블 메이커였고, 자신은 남들을 공격해도 되지만, 자신에게 들어오는 공격은 절대 참지 못하는 인성 갑이었다.
커브? 71마일? 실수?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제 경기에서 있었던 자신의 만행 때문에 경기 분위기가 이렇게 되었고, 자신이 맞았다는 게 중요할 뿐.
‘저 미친놈이!!’
영도는 야구계의 불문율, 관행 같은 것과 거리가 먼 선수였다.
그런 것 신경 쓸 시간에 배트라도 한 번 더 휘두르고 말지.
하지만 상식을 벗어난 일들에는 예외였다.
벤치 클리어링 시 배트를 들고 날뛰어서는 안 된다.
이건 불문율이 아니라 상식이었다.
야구 배트는 보기에도 흉악한 무기였고, 보는 것보다도 훨씬 강력한 무기였다.
‘어디 한 번 끝까지 와봐라.’
포수 칼튼 와그너가 킵니스를 제지하지 못한 순간, 투수를 보호하는 역할은 3루수 영도와 1루수 더햄에게 넘어왔다.
그러나 더햄도 루키여서 그런지 반응이 늦은 상황.
영도는 빠르게 반응했고, 카레도 역시 경력이나 파워, 전투력 등에서 영도가 훨씬 믿음직스러웠는지 조금씩 3루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배트!! 배트!! 위험... 아!]
[유영도 선수의 강력한 슬램! 달려오는 힘을 역이용해 크게 들어 메쳐버립니다!!]
카레도만 보고 달려들던 킵니스는 순식간에 달려온 영도를 체크하지 못했다.
영도는 킵니스가 들고 있는 배트를 의식해 허리를 굽힌 채 쇄도, 킵니스의 허벅지 양쪽을 잡고 번쩍 뽑아 올린 뒤, 달려오는 힘을 이겨내려 하지 않고 역이용, 180도 회전해 뒤쪽에다가 무게를 실어 함께 넘어지며 찍어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벌떡 일어서면서 포효.
킵니스를 말 그대로 담가버린 뒤 벌떡 일어나서 포효하는 영도와 그 앞에 등과 복부를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뒹구는 오마르 킵니스의 모습.
이 광경은 야구장에서 볼 수 없는, 굉장히 이질적인 장면이었고, 뇌리에 강하게 때려 박히는 장면이었다.
순간적으로 쏟아져나오던 양 팀 선수들의 발이 동시에 뿌리내린 듯 멈춰버린 순간.
마치 그라운드 전체를 영도가 지배해버린 듯한 순간.
덕분에 이번 벤치 클리어링과 함께 양 팀의 날선 분위기마저도 본격적으로 타오르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단 한 명의 선수가 그라운드를 지배하고 분위기마저 한 손에 넣고 좌지우지하는 상황.
이 순간, 그 누구도 영도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으아아!! X킹 크레이지!! 미친 새끼야!!”
“개쩌는 새끼, X나 개쩌는 새끼!!”
“네가 먹었어! 네가 다 먹었다고!!”
뿌리박힌 듯 멈춰 섰던 로키스 선수들은 일제히 영도에게 달려와 과격한 애정을 표시했다.
분위기에 민감한 프로 선수들이 지금의 분위기를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영도는 단 한 번의 슬램으로 경기 분위기를 완전히 빼앗아왔고, 로키스 선수들은 크게 소리 지르면서 영도가 가져온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
“씨발...”
신나서 날뛰는 로키스 선수들 바로 옆.
아직도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바닥에서 나뒹굴던 킵니스는 뛰쳐나오던 중 메두사라도 만난 듯 굳었다가 고개를 푹 숙인 동료들을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고...
“저 멍청한 개X끼...”
다저스의 간판타자이자 리더인 제임스 프레스톤 역시 킵니스를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명분부터 잃었고, 단 한 번의 슬램으로 나가떨어지며 본인뿐 아니라 다저스 자체에 개망신을 안겨준 멍청한 놈.
이 사건으로 얼마나 조롱을 받게 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X발... 다 들어가! 저 멍청한 개X끼는 챙길 필요도 없어!!”
격노한 프레스톤은 팀 동료가 그라운드 위에서 뒹굴고 있음에도 선수들을 이끌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버렸다.
킵니스 역시 나름의 베테랑이고, 친한 선수들과 팀 내 위상이 있는 선수임에도 프레스톤을, 그것도 격노한 프레스톤을 거역할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어제도 겨우겨우 커버해준 건데, 하루 만에 또 저딴 짓을 해? 빨리 유격수나 새로 구해달라고 말해야겠어.’
같은 팀 선수라고 편들어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프레스톤이 착해서, 정의로운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킵니스의 행동들이 하나하나 다 너무 지나쳤다.
대체 2루 포스 아웃 상황에서 무릎을 치켜들어 주자의 얼굴을 찍어버릴 이유가 무엇이며, 커브에 맞아놓고 벤치 클리어링을, 그것도 배트를 들고 달려들 이유는 또 뭔가.
수비 괜찮고 발이 빠른 OPS 7할대, 도루 30여 개의 유격수?
수비가 괜찮은 유격수는 언제나 귀한 몸이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 유격수를 구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실력이 있으니 그동안은 저 X같은 성질머리 참아주고 커버해주면서 함께 왔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제가 사실 프로레슬링 중계도 가끔 들어가지 않습니까? 어디서 많이 본 기술이다, 했는데 지금 생각났습니다. 저게 바로 스피닝 스파인버스터라는 기술인데, 흔히 파워하우스라고 말하는 파워형 프로레슬러들이 맛깔나게 잘 쓰는 기술입니다.]
[뭔가... 이미지가 찰떡처럼 달라붙네요. 파워형 프로레슬러라... 프로레슬러가 되었다면 왠지 당연히 챔피언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100%죠. 프로레슬링 중계를 하면서도 유영도 선수보다 힘이 강한 선수는 못 봤거든요. 그만큼 유영도 선수의 피지컬은... 반칙에 가깝죠.]
[야구 경기에서 슬램으로 흐름을 가져오다니... 이런 장면이 전에 한 번이라도 있었나 싶어요. 여러모로 상상을 초월하는 선수입니다.]
이제 겨우 3회 말이 진행 중이고, 스코어 역시 0-0이지만...
분위기는 이미 로키스의 승리로 경기가 끝난 분위기였다.
영도를 둘러싸고 칭송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로키스 선수단.
아직은 아니지만, 이 순간만큼은 영도가 로키스 선수단의 간판이자 핵심, 리더이자 왕이었다.
< 참교육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