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팀 플레이어 >
‘투수의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
과거 올드스쿨 중의 올드스쿨 야구관을 가진 사람들이 신봉하던 한 문장.
당연히 이제는 논파 되고도 오랜 시간이 지났고, 오히려 모든 인간의 관절은 소모품, 특히 투수의 어깨, 팔꿈치는 더더욱 소모품에 가깝다는 게 정설이었다.
다만, 다른 방면으로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말은 또 아니었다.
커리어 전반을 보면 무조건 틀린 말이지만, 한 경기만 놓고 보자면 7회, 8회까지 오래 던져 버릇한 선수들이 7회, 8회의 힘겨운 상황에도 마운드를 지키며 침착하고 능숙하게 넘기곤 했다.
물론, 예외도 많기에 정설이 될 수 없고,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주장이지만, 설득력이 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호르헤 바티스타가 이닝 소화력이 떨어지는 투수는 아닙니다만, 조기 강판 횟수가 적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쌓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 경기, 한 경기만 놓고 보면 7이닝 이상 끌고 가는 경우가 매 시즌 5회를 크게 벗어나지 않거든요?]
[아마 오늘도 길어야 7회까지일 텐데, 바티스타의 7회 기록은 나쁘지 않아요. 이유가 명확하지 않고,아직 이런저런 반론이 많은 주장이지만, 8회 등판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8회 기록은 지친 걸 감안해도 유독 나쁜 편이고요. 물론, 8회에 거의 등판하지 않아서 기록이 부족한 이유도 있겠죠.]
호르헤 바티스타는 에이스치고 굉장히 빡빡하게 관리받는 투수였다.
200이닝 투수가 양대 리그 통틀어 4-6명 정도 나오는 시대지만, 중요한 경기, 시소게임으로 펼쳐지는 경기라면 에이스가 오래 마운드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티스타는 180-190이닝 정도 던지는 투수였고, 8회만 되면 아무리 중요한 경기라 해도 대부분 마운드를 내려갔다.
184cm의 투수치고는 작은 신장, 90kg으로 타고난 체격 자체가 탄탄하지 않은 아쉬운 신체조건.
공 하나에 훨씬 더 많은 힘을 싣고 평균 구속 증가로 인해 투수들의 부상도 많아진 시대.
조금이라도 불안한 투수에겐 철저한 관리가 뒤따르는 게 현대 야구의 추세였다.
[바티스타가 내려간 이후에 승부를 걸어도 되겠지만, 내려가기 전에 1점이라도 따낸다면 훨씬 더 승리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8회부터 내려갈 게 분명한 에이스라도 에이스는 에이스거든요.]
[오늘도 이미 2루타를 뽑아낸 전적이 있거든요?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붓는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경기 초반과는 비교할 수 없죠. 로키스 입장에선 절호의 찬스일 수 있어요.]
‘한창 몸 상태가 절정일 때라 그런가... 7회인데도 생각보다 괜찮네.’
내구성이나 이닝 소화력이 부족해서 소화 이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더 오래 전성기의 에이스를 써먹기 위해 팀으로부터 철저히 관리받느라 소화 이닝이 부족해진 투수.
이렇다 보니 7회에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내면 경기 초반과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직접 상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래도 상식이라는 게 있으니 기록으로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직접 타석에 서서 상대해보면 또 달랐다.
‘그래도 제일 쌩쌩할 때 2루타도 쳤는데...’
하지만 어디 타자가 지친 투수에게만 안타를 뽑아내던가.
체력 쌩쌩한 경기 초반에도 2루타를 뽑아냈는데, 어쨌거나 아예 똑같을 순 없는 7회에 뽑아내지 못할 건 또 뭔가.
바티스타의 공이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건 의외일 순 있어도 당황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6회보다 1마일 정도 구속이 올라간 듯한 모습입니다. 언제나와 같은 호르헤 바티스타의 피칭이죠?]
[패스트볼 구속이 1마일 올라가면 타자들의 어려움은 두 배로 커지거든요? 바티스타는 현역 최고의 체인지업을 던지는 선수이기 때문에 모든 투수가 그렇긴 하지만, 특히나 패스트볼의 위력이 올라가면 동시에 결정구의 위력도 강해지는 투수예요.]
[역시... 바티스타.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로키스 타선을 강력하게 막아서는 모습! 2구는 89마일짜리 커터입니다. 하지만 절묘하게 골라내는 유영도 선수.]
[어지간한 유인구로는 유영도 선수의 배트가 안 나오죠? KBO 진출 이전과 이후가 정말 많이 다른 선수지만, 이런 선구안이 가장 큰 변화라고 볼 수 있어요.]
[KBO 이전의 선구안이... 참... 그랬죠? 하하하.]
[예, 예... 좀 많이 그랬기 때문에 가장 큰 변화죠.]
단순히 파워만 강하다고 29개 구단이 영도를 경계할 리 있을까.
파워는 예전부터 무시무시했고, 거기에 선구안이 더해지면서 어지간한 유인구로는 배트를 끌어낼 수 없어졌기에 경계가 강해진 것.
유력한 사이영상 후보, 호르헤 바티스타라 해도 다를 건 없었다.
바티스타의 정교한 공으로도 영도의 배트를 끌어내긴 쉽지 않았고, 그게 오늘 로키스의 유일한 안타가 영도의 배트에서 나온 이유 중 하나였다.
‘체인지업은 최대한 피해서 휘두르고 싶은데...’
안정규의 포크볼처럼 꼭 희귀한 구종이어야만 마구가 되는 건 아니었다.
바티스타의 결정구는 흔하디흔한 체인지업이지만, 바티스타의 체인지업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마구 중 하나로 꼽혔다.
에이스의 결정구를 공략하는 간판타자의 역할 따위와는 담을 쌓은 간판타자, 유영도.
당연히 오늘 역시 체인지업을 공략하겠단 생각 따윈 처음부터 피츠버그에 두고 왔고.
‘여기선 잡아당기면 어떻게든 되니까!!’
선수의 자신감이 성적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수치로 정리할 수도 없지만, 선수에게 자신감과 같은 멘탈적인 부분이 중요하다는 데 이견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프로 선수 레벨에서 기량은 거기서 거기고 멘탈과 자신감이 선수의 급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사실, 영도는 KBO 진출을 선언하기 전부터 펜웨이 파크에 강한 선수였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으로 아메리칸리그에서 활약하며 펜웨이 파크를 꽤나 자주 찾았고, 그때마다 좋은 기억이 있었다.
심지어 좌익수인 션 앨런의 수비도 좋은 편은 아니라서 대충 잡아당기기만 하면 어쨌든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
영도는 이런 자신감으로 가득했고, 결과로 이어졌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체인지업을 강하게 잡아당깁니다! 억지로 잡아당긴 타구가 생각보다 멀리 뻗습니다! 이제 유영도 선수의 상징이 되어버린 상상을 뛰어넘는 타구! 그린 몬스터를 때리고... 아! 펜스 플레이에 실패하는 션 앨런!]
[중견수 조조 코너스의 백업도 느리죠! 아, 이번 시즌 들어 지적받는 횟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레드삭스의 외야 수비가 또 한 번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은데요!?]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력은 여전히 강하지만, 2, 3시즌 전을 정점으로 완만하게 내려오는 추세였다.
다행히 팀의 척추인 센터라인이나 1, 2선발, 클로저 등에는 큰 문제가 없어서 크게 추락하진 않았지만, 2, 3시즌 전과 비교하면 전력 차가 꽤 많이 나는 상황.
그리고 이번 시즌, 중견수 조조 코너스의 급격한 노쇠화를 비롯한 외야진의 수비력 저하가 심각해지면서 잦은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이번 영도의 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갈 수 있으려나...’
영도는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개인주의 성향의 선수지만, 팬들의 인식에선 정반대였다.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경기 출전에 대한 갈망, 갈증 때문에 경기에만 나서면 눈이 돌아가서 온몸을 던졌고, 경기가 끝났을 때 유니폼이 깨끗한 적이 없었다.
영도는 개인 성적을 위해 온몸을 던졌지만, 보는 입장에선 항상 더러워진 유니폼과 과감하게 몸을 던지는 허슬 플레이로 보여 헌신적인 팀 플레이어로 인식하는 상황.
이게 바로 야구에서 말하는 ‘팀플레이’의 허상이었다.
팀배팅과 마찬가지였는데, 기본적으로 투수와 타자의 1대1 대결을 통해 모든 플레이가 이뤄지기에 뛰어난 개인 성적이 곧 팀플레이였고, 그런 의미에서 영도는 꽤 훌륭한 팀 플레이어였다.
항상 자신의 좋은 성적을 위해 몸을 던지고, 이를 통해 매 시즌 일정 수준 이상의 이득을 얻어내니까.
[3루! 3루에서!! 세이프!! 유영도 선수의 과감한 3루 질주가 무사 3루의 기회를 만들어냅니다!!]
[역시 유영도! 화려한 홈런 때문에 언급이 안 되지만, 유영도 선수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허슬 플레이어예요. 악바리, 독종에 가까운 선수죠. 개인적으로 유영도 선수의 유니폼이 깨끗한 걸 거의 못 본 것 같거든요?]
[어휴... 저런 거구의 근육질 선수가 황소처럼 달려와서 몸을 날리는데... 3루수 페페 에르난데즈도 무서웠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부딪히기라도 했다가는... 지난 시즌 KBO에서 있었던 몇 번의 벤치 클리어링을 통해 확인했죠? 유영도 선수의 무시무시한 전투력.]
“나이스 러닝, Y-DO.”
“감사합니다, 코치.”
3루에 도착한 영도는 3루 코치와 주먹을 부딪히며 자축했다.
생각보다 빠른 편이긴 해도 평균보다 살짝 못한 스피드라 3루타가 많지 않은 유영도.
영도의 흔치 않은 3루타에 로키스의 분위기는 다시 한 번 끓어올랐다.
[아... 키스 가드너, 호르헤 바티스타의 자랑, 체인지업에 배트가 헛돌면서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이렇게 되면 4번 타자 프레드릭 더햄의 어깨가 무거워지는데요. 이 선수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주고는 있다지만, 그래도 루키거든요? 더햄까지는 외야 플라이도 괜찮긴 한데,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평소 신나게 쳐대던 외야 플라이도 안 나오는 게 야구예요.]
문제는 로키스만 끓어올라야 하는데 같은 타자에게 똑같은 코스의 타구로 2루타 2개를 허용한 바티스타마저 같이 끓어올랐다는 것.
믿었던 키스 가드너가 무사 3루에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루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루키가 4번 타순에 배치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더햄의 기량과 재능을 확인할 순 있었다.
실제 성적 역시 2할 후반대 타율에 4할 중후반대 장타율로 나쁘지 않은 상황.
그러나... 투수 바티스타, 팀의 간판이 무기력하게 물러나 버린 1사 3루의 기회, 0-0, 원정 9연전 5할 승률의 마지막 기회...
루키에겐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높게 뜹니다! 그런데... 좀 얕은 것 같은데요?]
[아... 이거 불안합니다. 홈으로 들어올 수 있나요? 유영도 선수의 스피드로 가능한가요?]
‘코너스... 뭔가 이상한데?’
홈으로 파고들기 쉽지 않아 보이는 애매한 얕은 플라이.
하지만 영도가 자랑하는 집중력은 이 순간에도 자그마한 틈까지 놓치지 않고 확인했다.
그런 영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번 시즌 레드삭스의 가장 큰 구멍, 중견수 조조 코너스의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었다.
[어? 어어!?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잡았습니다! 이러면!!]
[이러면 유영도 선수는 당연히 출발하죠! 유영도 선수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과감한 선수거든요!? 몸을 아끼지 않는 선수예요!]
3루 주자가 홈으로 파고들 수 없는 얕은 플라이라고 생각했는지 코너스의 플레이 자체가 꼼꼼하지 못했다.
어깨가 좋은 편이 아닌데도 홈 송구가 어렵게 뒤로 물러나며 플라이를 처리했고, 영도는 그런 사소한 틈을 놓치지 않는, 매우 집중력이 뛰어난 선수였다.
당연히 코너스의 움직임을 보자마자 출발했고...
[홈에서!! 홈에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유영도의 과감한 홈 질주! 상대의 안일한 플레이를 틈타 1점을 강탈합니다!]
[이게 진짜 강탈이죠! 이건 억지로 빼앗은 점수, 훔쳐 온 점수예요!]
“이런 미친!! 이런 집요한 놈아!!”
“이걸 들어와!? 이걸 들어오냐고!!”
더햄의 짧은 외야 플라이에 땅을 치며 아쉬움을 표하던 로키스 선수들.
이후 영도가 홈으로 파고들 때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세이프 판정이 내려진 순간 덕아웃을 뛰쳐나왔다.
그만큼 중요한 순간이었고, 모두가 포기했을 때 나온 극적인 득점이었다.
“감사합니다, Y-DO. 덕분에 살았어요.”
“뭘... 원래 ‘이거 하나만 하면 돼’라고 생각하면 더 어려운 거니까. 이 정도면 잘했어. 어쨌든 인플레이 타구만 만들면 기회는 생기는 거니까.”
역적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죽다 살아난 더햄이 영도에게 다가와 감사를 전했다.
흔들리는 눈빛과 표정관리가 전혀 안 된 표정, 거친 호흡에서 그가 느낀 긴장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망의 눈빛...
영도는 뭔가 부담스러워졌다.
< 팀 플레이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