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팬 페이보릿의 조건 > (101/200)

< 팬 페이보릿의 조건 >

아무리 메이저리그에 좋은 선수가 많다지만, 그중에서도 등급은 또 나뉘기 마련.

메이저리그라 해도 MVP를 노릴 만한 선수는 몇 명 되지 않았고, 보통 시즌 전 예상에선 각 리그마다 5, 6명 정도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언급되었다.

언제나 후보군에서만 MVP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럴 확률이 훨씬 더 높은 게 사실.

‘경쟁자가 한 명 늘어난 건지, 아니면 시즌 초반 정보가 부족할 때 잠깐 치고 나가는 흔하디흔한 선수인 건지.’

시카고 컵스의 우익수, 진 브래들리는 내셔널리그 MVP 후보로 유의미하게 언급되는 수준의 선수였다.

내셔널리그에선 뉴욕 메츠의 중견수 로날드 비어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3루수 아놀드 그레고리가, 아메리칸리그에선 뉴욕 양키스의 좌익수 제리 페이지, 보스턴 레드삭스의 포수 칼 앤더슨이.

이 네 선수가 이 시대 NO.1 메이저리거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듯한 느낌이지만, 진 브래들리 역시 크게 밀리지 않고 호시탐탐 이들의 자리를 노리는 선수였다.

‘위만 보기에도 버거운데, 그만 좀 치고 올라와라.’

브래들리는 욕심이 많은 선수였다.

새로운 경쟁자를 원하지 않았고, 이번 시즌을 기점으로 30줄에 들어서면서 가능성 있는 20대 선수들에게 더욱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스타성은 부족해 보여서 다행이지... 배트플립 말고는 딱히 화려한 스타일도 아니고. 아니지, 홈런은 그 자체로 화려한 건가...’

‘이전 세대 최고의 스타’, 마이크 트라웃은 기량에 비해 너무나도 조용한 성격과 성실하기만 한 태도 때문에 메이저리그의 부흥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그 정도 절대적인 위치의 선수면 세계적으로 확 치고 나가 줘야 그보다 성적이 떨어지는 선수들도 함께 올라갈 수 있는데, 최고의 선수가 치고 나가질 못하니 성적은 그보다 못해도 스타성은 뛰어난 선수들마저 정체된다는 것.

당시에는 이런 의견에 대해 부정적인 분위기였지만, 메이저리그 자체가 올드스쿨함과 권위의식을 버리고 엔터테인먼트 노선을 강화하면서 “‘NO.1’에겐 스타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그러나...

[조지 카터의 어정쩡한 스윙! 3루 파울 라인 바깥으로 크게 휘어져 나가면서... Y-DO!! Y-DO가 몸을 던졌습니다! 공은... 잡아냅니다! 아웃! Y-DO의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

[이거죠! 시즌 초반 엄청난 페이스로 홈런을 양산하면서 잠깐 잊고 있었지만, Y-DO가 전혀 기대치를 채워주지 못하는 동안에도 팬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건 이런 모습 때문이거든요!]

[Y-DO가 뛰는 걸 보면 간절함이 느껴지죠. 역사적인 재능이라 칭송받을 때도 충분히 오만해질 만한데 그런 것 전혀 없이 그라운드에서 모든 걸 내던졌고, KBO MVP를 수상하고 돌아온 이번 시즌 역시 마찬가지. Y-DO가 가장 멋진 점은 파워도 파워지만, 저런 간절함이에요. 변하지 않는 성실함. 어쩌면 이게 Y-DO가 가진 가장 큰 힘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다른 팀 팬이어도 이런 선수를 어떻게 싫어하겠습니까. 비록 Y-DO는 굉장히 조용하고 성실한, 과묵한 선수지만, 성적도 기대만큼 뽑아내지 못한 선수였지만, 그래도 팬들은 Y-DO를 사랑했어요. 그런 Y-DO가 성적까지 뽑아주니... 시즌 초반 리그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게 없죠.]

스포츠가 점점 상업화되고, SNS, 광고 등을 통해 미디어 노출이 쉬워지면서 선수들 역시 자신을 마케팅하기 위해 혈안이 된 시대.

스포츠에 순수함과 로맨스가 남아있던 시대에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브랜드화하고 마케팅하는 선수들이 신선했고,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팬들도 피로감이라는 걸 느끼기 마련.

그게 과해져 프로 선수의 본질을 벗어난 듯한 선수들이 많아지면서 과거의 순수함과 로맨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영도는 본의 아니게 그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전문가, 분석가들의 생각보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최고 레벨의 성적을 찍으면서도 순수함과 로맨스를 간직한 선수의 등장을 원했다.

그리고 이번 시즌, 영도가 등장했고, 생각보다 훨씬 큰 반향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팬들은... ‘Absolute-Zero’, Y-DO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원정 경기인데도 박수 소리가 들립니다! 비록 아주 작은 소리지만, 여기까지 들린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거든요!?]

[그것도 메이저리그에서 강성하고 거친 팬덤으로 유명한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 필드에서 말이죠.]

[시즌 초반 Y-DO의 활약이 정말 대단하긴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파도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엄청난 성적을 찍으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데뷔 초반의 마음가짐을 지키면서 성실하고 묵묵히, 내 몸까지 다 내던져가며 야구에만 열중하는 선수. 이제 한 명 나올 때도 됐죠. 팬들의 이런 바람이 이 정도까지 컸는 줄은 몰랐지만.]

‘뭐지? 그냥 흔한 다이빙 캐치일 뿐이잖아?’

안타를 훔친 것도, 홈런을 훔친 것도 아닌, 파울 타구 하나를 잡아냈을 뿐인 수비.

이런 수비에 홈구장에서 박수가 나온다는 걸 진 브래들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원정 팬들의 무덤 중 하나라 불릴 만큼 강성한, 항상 브래들리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던 리글리 필드의 홈팬들.

그런 홈팬들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항상 대중들의 니즈는 당사자들의 생각보다 한 걸음씩 더 빠르기 마련.

본래 흐름을 바꾸는 인물은 계산 없이 본성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을 벤치마킹해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대세가 되는 법.

진 브래들리는 영도의 스타성을 무시했지만, 정작 스타를 만드는 팬들은 영도를 빠르게 스타의 자리까지 올려주고 있었다.

***

“어제 경기에서 4타수 무안타로 10경기 연속 홈런 기록이 멈췄습니다. 하지만 오늘 다시 멀티 히트, 2루타 2개로 후유증 같은 건 전혀 없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실제로도 기록 중단은 아무런 타격이 없었습니까?”

“연속 기록은 끊기는 게 당연한 거니까. 메이저리그 수백 년 역사에서 꼭대기를 차지한 기록인데 끊길 때도 된 거죠. 수백 년 동안 아무도 못 했는데 거기서 나 혼자 앞으로 쭈욱 나아간다는 게 더 희박한 확률이니까.”

연속 경기 홈런이 이어질 땐 연속 경기 홈런에, 기록이 끊긴 어제는 기록 중단에, 기록 중단에도 불구하고 멀티 히트 경기를 펼친 오늘은 후유증이 전혀 없는 듯한 모습에.

기자들은 연속 경기 홈런 하나에서 수많은 기사들을 뽑아냈다.

최근 6, 7경기 동안 로키스의 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라커룸에 기자들이 몰려들어 영도를 찾았다.

팬들의 관심사를 가장 먼저 인식하는 건 선수도, 프런트 홍보팀도, 야구 전문가를 자칭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팬들의 관심사로 돈을 버는 기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고, 이들의 반응이 현재 영도가 일으킨 돌풍의 크기를 말해주었다.

“비록 연속 경기 홈런 기록은 끊겼지만, 여전히 11경기 11홈런으로 무시무시한 홈런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시즌 전에는 그냥 남들이 봤을 때 훌륭한 성적을 남기는 게 목표라고 말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까?”

“예. 11경기 11홈런. 나도 예상하지 못한 기록이지만, 어떤 선수나 시즌을 치르다 보면 빠른 속도로 스탯을 쌓는 시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겐 시즌 초반이 그런 시기일 수 있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려 합니다. 그래야 괜히 들뜨지 않고 끝까지 내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Y-DO는 참... 데뷔 전부터 몇 번이나 인터뷰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거의 없네요.”

“하하하, 그런가요?”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 시즌엔 그래도 웃는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는 것 정도? 예전엔 항상 무표정이었는데 말이죠. KBO에서의 성공이 변화의 이유인가요?”

“글쎄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들 때문일 수도 있고, 한국 특유의 끈끈한 문화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당신이 말한 것처럼 성공을 경험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좋아 보이나요?”

“와우!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당연하죠. 이제야 Y-DO한테서 여유와 유머가 보이는데, 훨씬 좋아 보입니다. 사람이 항상 날카롭게 벼려져 있으면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기 더 어렵다고들 하잖아요? 이번 시즌 퍼포먼스의 원인을 드디어 알아낸 것 같습니다.”

10대 시절부터 그 엄청난 재능 때문에 기자들을 만날 일이 많았던 영도지만...

기자들 사이에는 인터뷰하기 어렵고 기사를 뽑아내기 어려운 선수로 유명했다.

적지 않은 수의 재능들처럼 오만하거나 까탈스러운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예의 바른 선수에 가까웠지만, 나오는 대답들이 기사로 쓸 만큼 재미있지도, 흥미롭지도 않았던 것.

그래서 차라리 건방지고 오만해도 좋으니 재미있는 기삿거리 좀 달라고 기도하며 인터뷰에 나섰을 정도.

지금도 딱히 재미있는 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유와 유머가 흘러나와 살짝 만지면 재미있어질 건수는 있었다.

기자들도 그 이상의 것을 영도에게 바라지 않았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오프 더 레코드로 할 테니... 이번 시즌 목표하는 홈런 개수 한 번만 살짝 말해봐요. 나 혼자 듣고 잊어버릴 테니까.”

“아니, 한 번이라도, 잠깐이라도 생각을 해봤다면 말할 수 있겠는데, 정말로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그냥 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치고 싶을 뿐이죠.”

“에이, 생각 안 해봤어도 한 번 질러보세요. 이런 워딩이 있어야 팬들도 기준을 갖고 본다니까? 팬들이 알기 쉬운 기준이 있어야 화제도 되고 하는 거죠.”

“그런 기준을 팬들이 자연스럽게 잡을 수 있을 만한 성적을 내면 되겠죠.”

“오! 그 워딩! 바로 그런 워딩입니다. 자연스럽게 잡을 수 있는 기준이면... 지난 5시즌 동안 나오지 않았던 50홈런 타자! 이거 어떻습니까?”

2035시즌, 당시 29세의 나이로 52홈런을 기록했던 뉴욕 양키스의 좌익수 제리 페이지 이후 2036시즌부터 지난 2040시즌까지 50홈런 타자가 등장하지 않았다.

팬들은 최근 메이저리그의 방향성에 만족했지만, 그래도 독보적인 홈런 페이스를 보여줄 ‘히어로’를 원했고, 50홈런은 팬들이 바라는 히어로가 되기 위한 가장 알기 쉬운 조건이었다.

“50홈런이라... 넘길 수 있다면 좋겠죠.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가 장타력이기도 하고.”

“그러면 이번 시즌 목표는 50홈런, 이렇게 쓰겠습니다. 써도 되겠습니까?”

“...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이번 시즌 목표가 50홈런이다, 정도면 딱히 자극적이지도 않고, 오만해보이지도 않고 딱 좋지 않나요? 11경기 11홈런 타자가 162경기 50홈런이 목표라고 하면 오히려 겸손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써도 되죠?”

“... 그래요, 쓰세요. 진짜로 목표가 없어서 그런 거지, 무슨 의도가 있어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게 아니니까.”

팬들 관심 끌기의 전문가인 기자가 하는 말이니까 최소한 작게라도 도움은 되겠지.

알아서 화젯거리를 만들어준다는데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무슨 의도가 있어서 마케팅이나 브랜드화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을 뿐이니까.

영도 역시 다른 선수들처럼 마케팅, 브랜드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있었고,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남이 해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기사는 그렇게 쓰기로 하고... 개인적으로도 Y-DO를 응원합니다. 나도 2010년대부터 야구를 봐왔던 사람이라 가끔은 당시의 홈런 위주 야구가 그립기도 하거든요. 누군가는 매 시즌 50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주는 게 보고 싶고, Y-DO의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말이라도 들으니 좋네요. 열심히 노력해서 부응하겠습니다.”

50홈런이라... 구체적인 숫자를 두고 목표를 정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50홈런 정도면 그래도 한 번 목표로 삼아볼 만한 것 같았다.

에드가 펜서 코치 역시 영도의 포텐셜을 3할 50홈런까지 잡아준 적이 있었고.

그렇다면 50홈런. 이 정도는 목표로 잡아둬도 괜찮지 않을까.

숫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좋습니다. 만약 50홈런 고지에 오르면 그 순간부터 열흘 동안 기사로 다뤄드리죠. 마케팅, 브랜딩은 나한테 맡기세요. 내가 알아서 멋지게 다뤄드리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해서. 야구만 잘해주면 나머진 알아서 다해주겠다는 사람이 참 많네요.”

야구에만 집중하는 영도의 성실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는지 혈육인 동생이나 파트너 관계인 에이전시는 그렇다 치더라도 서로의 이득으로 묶이지 않은 기자마저 앞장서서 영도를 포장해주겠다고 나섰다.

영도는 그저 돌아오기 전부터 그러했듯 목숨을 다해 열심히 야구할 뿐인데...

이상하게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그를 더 높은 곳까지 올려놓으려 했다.

< 팬 페이보릿의 조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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