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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력시위 > (89/200)

< 무력시위 >

“와... 원래부터 컨택이랑 브레이킹볼 대처가 문제였지, 파워 하나는 옛날부터 엄청났다고 듣긴 했는데... 진짜 엄청나네. 무슨 괴물인가?”

“... ...”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장면이었다.

영도는 배팅머신 앞에서 가볍게 배트를 휘두르며 타격 감각과 타이밍을 조정했고, 동료들은 영도의 프리배팅을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츠에 합류한 지난 시즌 이맘때도 본 듯한 장면이었다.

메이저리그를 떠나기 전에도 영도의 프리배팅은 유명했다.

수많은 홈런 타자들을 전부 제치고 가장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프리배팅으로 유명했을 정도.

로키스 선수들은 말로만 전해듣던 최고의 프리배팅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공이 어디까지 날아가는 거지? 펜스가 아니라 구장을 넘겨야 홈런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멀리 날아가긴 하네요. 확실히 파워는...”

게일 해니건은 키스 가드너 옆에 붙어서 영도의 프리 배팅 타구 하나하나마다 성실한 감탄사를 덧붙였다.

기본적으로 키스 가드너는 오해를 많이 받긴 하지만, 인성에 문제가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키스 가드너의 가장 큰 특징은 극단적인 성과주의, 능력주의자라는 것.

아까 영도를 무시했던 것도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아직 가드너 본인이 인정할 만한 실적이 없는 선수여서 인사만 받고 대충 지나간 것뿐.

“아무리 그래도 저런 파워를 아무한테나 볼 순 없지. 그리고 KBO에서라지만, 3할 2푼을 때린 친구잖아. OPS도 거의 1.3까지 나왔던 친구고. 저 파워에 그 정도 컨택, 선구안이면 아무리 메이저리그라도 A+급 정도는 해주겠지. 메이저리그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누가 뭐래요? 가진 게 대단한 선수죠. 나도 압니다.”

“그러면 너도 좀 살갑게 해봐. 우리가 6,500만 달러를 투자해서 데려온 선수인데, 우리한테 6,500만 달러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잖아? 그럼 너나 나처럼 위상이 좀 있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도와줘도 부족한 마당에...”

“이게 내 성격인 걸 어쩝니까. 좋은 선수인 건 알겠고, 기대도 해요. 그런데 뭔가 뛰는 모습을 보고 내 가슴을 팍 치는 게 있어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나온다고요.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래서 나도 몇 번이나 말했잖아. 연기로라도 좀 친절해지라고. 우리 팀은 진짜 우리끼리 똘똘 뭉쳐야 뭐를 해도 하는 팀인데, 간판 중 한 명인 네가 이렇게 비협조적이면 내가 참 힘들다?”

“아이고... 그냥 생긴 대로 살게요. 대신 간판인 내가 100% 지지해줄 테니 복잡한 건 게일이 해줘요.”

잘 나가는 사람한테만 잘하고, 못 나가는 사람한테는 막 대하는 그런 성격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가드너는 이미 메이저리그 탑클래스의 선수였는데, 그라운드 위에서 강한 인상을 남겨준 선수라면 무슨 행동을 해도 너그럽게 대하고, 그렇지 못한 선수에겐 무관심할 뿐이었다.

실제로 전자의 선수라 해도 살가운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 전 영도의 인사를 무시했을 때도 옆의 게일에게 역시 목을 살짝 까딱거린 게 인사의 전부였으니까.

이렇듯 오해를 사기 딱 좋은, 아니,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사회성이 부족한 인간이었고...

매 시즌 해니건을 힘들게 하는 후배였다.

안 그래도 쿠어스 필드 때문에 힘들고, 쿠어스 필드의 외야 때문에 두 배로 힘든 주전 중견수인데 스토브리그부터 시즌 초반, 가끔은 시즌 중반까지도 가드너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한 시간을 마련해야만 했다.

“하아... 이 자식은 대체 언제 바람직한 베테랑이 될까. 그냥 평생 야구만 잘하고 믿음은 안 가는 베테랑으로 끝날 것 같은데.”

“평생 클럽하우스 리더가 있는 팀에서 활약하면 되죠. 꼭 모든 에이스가 리더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은... 내 앞에서 말하는 거 반만큼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해봐. 그럼 바로 리더다, 이 망할 놈아.”

“말도 잘하는 건 너무 비인간적이니까. 그럼 볼 만큼 본 것 같으니 내 훈련하러 가볼게요. 정 내 평가가 필요하면 Y-DO한테 인상 깊게 봤다고, 이번 시즌 기대하겠다고 한 마디 해주던가.”

“진짜지!? 그래도 되는 거지!? 나중에 다른 말 하지 마라!!”

이게 이렇게 반가워할 일인지...

해니건은 속으로 이런 반응이 자연스레 나오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꼈지만, 자연스러운 반응을 감출 순 없었다.

나도 한때는 나 혼자 잘났다며 당당하게 살아온 엘리트 선수였는데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한때는 간지나는 스트라이프 유니폼의 뉴요커를 꿈꿨는데, 내가 어쩌다 이 안타까운 팀에 지명되어서...

이 안타까운 팀은 또 왜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는 거야. 괜히 짜증만 더 나게...

화려했던 과거, 무서울 게 없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애써 한숨을 삼킨 게일 해니건.

해니건은 다시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리며 프리 배팅을 마친 영도에게 다가갔다.

어쩌겠는가. 이 안타까운 팀을 사랑하게 된 게 잘못이지...

***

‘아니, 유영도가 어떤 선수이고,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데... 전담 기자랑 팀을 미리 준비해두고 팀 정해지면 근거지만 딱 정해서 최대한 빨리 내보냈어야지...’

MBS 스포츠의 LA 다저스 전담이라 쓰고 박희성 전담이라 읽는 최성호 기자.

아직 콜로라도 로키스, 아니, 유영도 전담팀을 꾸리지 못한 본사의 지시로 덴버까지 날아와야 했다.

같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라지만, LA는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였고, 덴버는 중부와 서부의 경계에 있는 도시.

도로 상의 거리로 1,700여km에 달하고, 차로는 15시간, 비행기로도 2시간 이상 걸리는 절대 짧지 않은 거리.

본사의 늦장 대응 때문에 안 그래도 바쁜 스토브리그 기간 불필요한 출장을 맞이한 최성호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LA랑 덴버가 얼마나 떨어져있는지 모를 리도 없는 인간들이 모르는 척하면서 지시하는 게 더욱 열받는 부분이었다.

‘이번 시즌은 희성이한테도 중요한 시즌인데...’

LA 다저스와 4년 42M의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로 넘어와 어느덧 3년 차.

박희성도 슬슬 연장 계약과 트레이드, FA 시장 진출을 진지하게 고민할 시기였다.

사실, 박희성이 비용 대비 고효율의 선수라는 건 모두가 인정했다.

하지만 2010년생으로 30대를 넘어섰고, FA 자격을 얻게 되는 2시즌 뒤에는 33세 시즌을 맞이하는 아주 젊지만은 않은 선수이기도 했다.

수비와 선구안을 주 무기로 하는 선수라 기량을 오래 유지할 확률이 높다지만, 중견수의 수명을 생각하면 다음 FA 계약 기간 중반 정도 되었을 때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

심지어 4할 초반대의 장타율도 빠른 발을 이용해 올리는 타입이라 2, 3년만 지나도 장타율 4할이 어려울 거라는 평가까지 있었다.

사실상 FA 대박의 마지막 기회였고, 몸값 높은 중견수로 시장에 나설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기에 이번 시즌을 앞두고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했고, 자연스럽게 기삿거리도 많았다.

‘빨리 취재하고 대충 팬들, 로키스 선수들, 코칭스태프나 프런트 직원들 인터뷰 몇 개 딴 다음에 LA로 돌아가야지.’

반대로 영도는 지난 시즌 그냥 KBO를 뒤집어엎고 박살 내고 깨부수고 씹어먹었기 때문에 여전히 엄청난 관심 속에 있었다.

그래서 언론과 친하지 않은 선수임에도 일거수일투족과 과거, 현재 행보까지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기자에게 이만큼 재미없는 인터뷰 대상이 또 있을까.

물론, 박희성이 아무리 기존 한국 야구계 최고의 슈퍼스타였다지만, 지금 분위기에선 유영도 관련 기사의 조회 수가 더 높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성호는 이런 식의 겉만 핥는 기사로 조회 수를 올리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박희성은 본인은 물론 주변인들과도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넘치는 소스를 바탕으로 깊고 심층적인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최성호가 쓰고 싶은 기사는 그런 기사였다.

[우와아아아아아!!!!!]

“뭐야!? 저게 대체 뭔데? 아무리 프리 배팅이라지만, 저런 타구가 말이 돼?”

“평소에는 저렇게 안 휘두르는데, 이번 스윙은 팬 서비스 같은 건가 봐. 대놓고 무지막지하게 휘둘렀는데?”

“에이스 시절 생각나네. 작년 한국에선 타격폼이 많이 작아졌었는데.”

“타격폼 바꾸고 폭발했지. 그래도 옛날의 그 호쾌한 폼이 가끔 그리울 땐 있었는데, 오랜만에 보니까 역시 호쾌하네.”

그런데 로키스의 스프링 트레이닝 전용 구장에 들어서자마자 이 기간에는 좀처럼 듣기 힘든 팬들의 함성이 최성호의 고막을 때렸다.

그리고 감탄을 감추지 못한 팬들의 흥분한 대화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뭐지? 대체 뭔데? 혹시 뭐 본 거 있어?”

“아뇨. 저도 아무것도 못 봤는데...”

최성호는 놀라서 함께 온 촬영기자한테 물었지만, 당연히 그도 아는 게 없었다.

캑터스 리그가 펼쳐지는 애리조나가 아무리 덴버에서 가까운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비행기 타고 1시간 30분 이상 날아와야 하는 곳이었다.

차로도 대충 800마일, 1,300km 가까이 달려와야 했고.

이 정도 거리를 날려오든 달려왔든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로키스의 훈련을 지켜보는 팬들은 정말로 하드코어한 팬들이었다.

그런 팬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환호를 끌어낸다고?

“일단 뭔가 일이 나긴 난 것 같네. 서두르자고.”

“예. 잘하면 기사 하나 건지겠는데요?”

비행기에서 계속 투덜대던 걸 하늘에서 들었나?

하긴,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계속 투덜댔으니 어쩌면 들었을 수도 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도착하자마자 일이 터져?

흔하고 뻔하고 조회 수만 노리는 영양가 없는 기사가 아니라 정말로 팬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고, 유영도의 의미 있는 활약이 담겨있는 그런 기사.

그런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최성호의 걸음이 빨라졌다.

***

[유영도, 팀 훈련 중 521피트(약 159m)짜리 대형 홈런 터뜨려!! 코칭스태프, 동료, 팬들까지 모두 경악하는 모습 포착]

(영상) - 출처 : 콜로라도 로키스 스카우트 팀

메이저리그 콜로라도 로키스와 계약한 ‘절대영도’ 유영도가 미국 애리조나에 위치한 콜로라도 로키스 전용 훈련장에서 진행된 시즌 대비 훈련에서 무려 521피트의 대형 홈런을 터뜨렸다.

521피트는 스탯캐스트 도입 후 측정된 홈런 비거리 중 비공식 1위를 차지하는 대기록.

공식적인 최장거리 기록은 두 선수가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508피트, 약 155m.

... ...

- 와... 영상 봐라... 진짜 까마득하게 날아가네.

- 발사각도 40도 이상의 타구를 잠실 구장 펜스 바깥으로 넘겨버리는 파워인데, 뭐... 타격폼도 원래 타격폼이랑 다르게 뚜렷한 어퍼스윙인 거 보니까 노리고 돌린 것 같은데, 유영도 파워에 저런 스윙이면 159m도 너무 짧다.

- 팬들도 팬들이지만, 가드너가 저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 역시 절대영도... 홈런 제대로 칠 때 보면 완전 절대자 느낌 물씬 난다.

- 대체 시즌 개막은 언제 하는 건데!? 왜 이렇게 비시즌이 긴 것 같냐? 유영도가 메이저리그에서 얼마나 해줄지 빨리 좀 보고 싶은데.

< 무력시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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