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첫인상 > (88/200)

< 첫인상 >

“아무래도 팀 사정상 3루수로‘만’ 뛰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야수보다 투수들을 로스터에 채울 수밖에 없고, 없는 돈을 야수보다 투수 쪽에 탈탈 털어 넣었기 때문에 사정에 따라 가끔은 1루나 외야를 맡아줘야 할 수도 있어. 이해하지?”

최근 야수 쪽도 로키스의 고민 중 하나로 빠르게 치고 올라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로키스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타선이 아닌 마운드였다.

게다가 쿠어스 필드의 고도로 인한 피로 누적과 부상 위험으로 선발투수가 이닝을 먹어주는 데 한계가 있었고, 어지간한 선발투수는 로키스에 와주질 않았다.

결국, 로키스의 선발 마운드는 2, 3선발급 투수가 1.5선발급 연봉을 받으며 에이스 역할을 맡고, 적당히 준수한 투수들이 2선발급 연봉으로 2, 3선발을 맡는 빈약한 마운드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자리는 기를 쓰고 끌어모은 유망주들의 몫이지만... 아무래도 유망주는 불안함이 있었다.

그런 사정으로 인해 로키스는 ‘오프너’ 전략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2018년 템파베이 레이스로부터 시작된 ‘오프너’ 전략은 한계도 이미 드러났고, 대세가 되진 못했지만, 스몰마켓들의 플랜 B로는 완전히 자리 잡았다.

“이해합니다. 27인 로스터에서 14-15자리를 투수한테 할애하는데 멀티 포지션이 되는 야수를 그냥 놀려둘 순 없죠.”

“이해해준다니 고맙네. 다만, 우리가 3루 포지션이 강한 것도 아니라서 다른 포지션은 아주 가끔만 맡아주면 될 거야.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

‘오프너’ 전략을 위해 B급 정도만 되면 닥치는 대로 불펜투수들을 끌어모았고, 서비스 타임 5년 이하 불펜투수들의 콜업과 강등을 반복하며 로스터를 운용했다.

그러나 홈런을 방지하기 위해 꾸준히 넓혀온 광활한 외야는 높은 고도로 인한 피로 누적과 더불어 외야수들의 건강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리 풍족하지도 않은 돈을 마운드 쪽에, 그것도 오버페이까지 해가며 쏟아붓다 보니 타선에는 많은 돈을 쓰기가 어려웠다.

제프리 에녹 단장은 이를 멀티 포지션으로 극복하려 했고, 현재 로키스에는 3개 포지션 이상을 소화하는 선수가 무려 4, 5명 정도 포진해 있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만약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의 성적만 올려준다면 널 2번에 배치할 생각이야. 한국에서는 3번으로 거의 나왔던데, 혹시 타순에 따라 성적이나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지는 스타일인가?”

“아뇨. 그런 거 신경 전혀 안 쓰는 스타일입니다. 주전이 아니라 대수비나 대타로 나가면 모멘텀 유지가 안 되는 스타일이지만.”

“하하하, 그럼 주전으로 나가면 9번도 괜찮아?”

“괜찮죠. 제가 납득만 할 수 있다면.”

로키스 부동의 1번 타자는 중견수 게일 해니건이었고, 키스 가드너, 프레드릭 더햄, 카일 루이스 등이 상위 타순에 배치되었다.

이 중에서도 해니건과 가드너가 팀 내 최고 타자였는데, 에녹 감독은 유격수 가드너를 한 타순이라도 늦게 배치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결정된 영도의 임시 타순이 바로 2번.

어차피 주루보다 장타로 먹고사는 로키스이기에 2번 타자가 느려도 크게 지장은 없었다.

“오케이. 알았어. 일단 첫 인사는 이쯤 해두자고. 특급 유망주 출신이라기에 조금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깔끔하게 떨어지네.”

“난 나를 납득만 시켜주면 뭐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경기에 나가는 것, 성적이 잘 나오는 것. 내 목표는 이거 두 개가 전부고, 이거 두 개만 할 수 있으면 나머지는 크게 신경 안 씁니다.”

“호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주목받았는데 생각보다 성실한데? 좋아. 그런 식으로만 나와주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 수 있지. 주전? 성적? 어느 정도만 해주면 다 밀어줄 수 있지. 리그에 적응할 때까지도 최대한 기다려줄 수 있다니까?”

“좋네요. 첫 느낌은 좋습니다.”

제프리 에녹 단장과 이외 프런트가 정말 성의를 다해, 있는 힘을 다해 영도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한 만큼, 감독 메이슨 콕스 역시 편의를 최대한 봐주려 했다.

KBO를 거쳐 돌아온 유영도는 더 이상 파리 목숨의 어정쩡한 선수가 아니었다.

이젠 프런트도, 감독도 눈치를 보는 준 거물급 선수였다. 

“'Mile High City'에 온 걸 환영해, 친구.”

평균해발고도가 설악산 정상 높이인 1.6km를 넘나드는 산악 지대의 콜로라도 주 주도, 덴버.

이 도시에 연고를 둔 팀 중 유일하게 홈 경기에서 손해를 보는 팀, 불쌍한 콜로라도 로키스.

날씨도 춥고 일교차도 크면서 고도도 높아 호흡마저 힘든 삼중고, 이로 인한 선수들의 외면까지 겹치며 로키스 선수단은 외부의 압박에 맞서 끈끈하게 뭉쳐 있었다.

공식 주장은 아니지만, 거의 공식 주장이나 다름없는 주전 중견수, 게일 해니건은 이런 선수단을 이끄는 믿음직한 베테랑이었다.

스프링캠프에 합류하자마자 이제 막 팀에 합류한 이적생들부터 챙겨주는 모습에서 그의 리더십이 엿보였다.

“저 친구가 일단 우리의 에이스인데...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는 게 좋긴 해. 다른 팀에선 몰라도 우리 팀에선 일단 에이스 대우받으면서 왔는데, 하도 털리니까 엄청 날카로워졌거든. 처음엔 안 그랬는데, 이젠 너무 시니컬해져서 거의 혼자 사는 상태지. 피해는 안 주지만, 자기한테 피해가 온다 싶으면 폭발해.”

“게일, 당신도 제러드와는 대화가 안 되나?”

“나는 그래도 선수단 대표에 가까운 위치라 대화를 하긴 하지. 그래도 제러드와 대화하고 싶으면 키스나 프레드, 고든한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도 수비 잘하는 선수는 좋아하니까.”

확실히 야수진에 비해 마운드의 분위기가 안 좋긴 안 좋은가보다.

제러드 홉슨이라는 투수는 로키스에 합류하기 전부터 평범한 2선발, 훌륭한 3선발급으로 평가받던 투수였다.

에이스 영입에 실패한 로키스는 그런 홉슨을 중하위권 구단 에이스급 대우로 영입했고, 홉슨은 매 시즌 3점대 후반에서 4점대 초반의 FIP로 고전했다.

“그러니까 투수들 성적이 혹시나 안 좋다고 해도 너무 화는 내지 말라고. 어쨌든 이 팀은 야수들이 투수들의 희생 위에서 우뚝 설 수밖에 없는 팀이니까.”

“난 어차피 다른 선수들이 못해도, 잘해도 크게 신경 안 써. 투수가 못하는 게 직접적으로 나한테 영향을 주는 건 아니니까 아마 계속 신경 안 쓸 거고.”

“아... 그래. 그럼 특히 불펜투수들한테는 신경 좀 써주고. 잘 던지면 잘 던졌다고 한마디라도 해줘.”

“불펜투수가... 고생을 많이 하긴 하지. 어쩔 수 없이 희생되는 포지션이기도 하고.”

압도적인 인재 풀을 자랑하는 메이저리그.

메이저리그도 선발투수가 80%의 힘으로 100구를 던지는 것보다 100%의 힘으로 80구를 던지는 시대가 되었다.

당연히 선발투수들의 소화 이닝도 크게 줄었고, 이전엔 그래도 시즌당 20여 명씩 나왔던 200이닝 선발투수가 많아도 10명을 넘지 않는 시대.

그러나 여전히 불펜 투수들은 선발 투수 경쟁에서 탈락한 투수들이 맡았고, 소화 이닝이 많아졌어도 대우는 특별히 좋아지지 않았다.

로스터가 확대되어 일자리는 많아졌지만, 클로저를 제외하면 여전히 다들 비정규직이었고...

특히 로키스처럼 오프너 전략을 쓰는 팀은 투수들이 한 시즌에도 몇 번씩 마이너를 오가다 보니 서비스 타임은 물론, 연봉부터 내려갈 때마다 깎였다.

비정규직인데, 경쟁자는 많다 보니 일자리를 준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확실히 로키스에서 가장 고생하는 건 투수, 그중에서도 불펜투수였다.

“음... 그런데 내가 불펜투수들까지 챙겨야 하나? 신입생이 너무 나대는 거지, 그건.”

“뭐, 그렇긴 하지. 당연히 공식적으로 좀 챙겨달라고 하는 건 아니고. 말 한마디라도 좀 좋게 해주고, 잘했을 땐 잘했다, 한마디라도 해주라는 거지. 루키급 애들은 가끔 밥도 좀 사주기도 하고. 뭐 그런 고액 연봉자, 베테랑 역할을 해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고액 연봉자는 모르겠지만, 베테랑이라... 글쎄. 일단 내가 팀 안에서 좀 나대도 될 정도로 성적이 나오면 고려해보지.”

“그래. 일단 그 정도면 충분해. 생각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이후에도 해니건은 영도를 계속 데리고 다니면서 로키스 선수로서 알아야 할 일, 쿠어스 필드에서의 노하우 등을 최선을 다해 가르쳐주었다.

쿠어스 필드라는 구장이 워낙 특이한 구장이다 보니 로키스 선수들은 다른 팀 선수들에 비해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아마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내내 타석보다 이 기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산소 포화도를 억지로 내리는 기계라고 했나?”

“그래. 쿠어스 필드에서 경기할 때 떨어지는 산소 포화도를 포지션 별로 평균 낸 다음, 여기서 그만큼 떨어질 때까지 운동하면 돼. 그리고 나와서 그 상태에 적응하는 거지.”

“쿠어스 필드의 명물, 산소 호흡기도 바로 옆에 붙어있네. 요즘은 다른 구장에도 무조건 비치되어 있지만.”

“오래전부터 쿠어스 필드의 상징이었지. 지금도 모든 구장에 있다지만, 쿠어스 필드엔 다른 구장의 2, 3배 정도 비치되어있지.”

피로 회복을 위해 사용하는 산소 호흡기.

피로 누적은 곧 부상 위험도의 급증을 의미하기에 이젠 모든 구장뿐 아니라 클럽하우스, 훈련장에도 모두 산소 호흡기가 비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쿠어스 필드에서는 이 산소 호흡기에 말 그대로 목숨이 걸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설악산 정상 높이의 구장에서 연간 80경기 이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쌓이는 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산소 호흡기마저 없었다면... 시즌이 끝날 때쯤 로키스의 27인 로스터는 개막전과 비교해 절반 이상 바뀌어있을 확률이 높았다.

“여기서 그걸 해본다고 달라지는 건 사실 없어. 다만, 산소가 부족한 몸 상태에 익숙해지는 정도지. 익숙해지지 않으면 시즌 초반 한두 달 동안 꽤 힘들 테니까. 메이저리거의 한두 달은 어쩌면 커리어를 끝장낼 수 있는 긴 시간이고.”

“당연하지. 어떤 특수한 상황을 겪어야 한다면 최대한 빠르게 적응하는 게 중요한 거니까.”

“그래. 그리고 어차피 타격은 감각만 유지해도 되잖아? 너나 나 정도 수준이 된다면 말이지.”

“... 아마 여기에 할애하는 시간 만큼 전체적인 훈련량을 더 늘리겠지만... 아무래도 줄어들긴 하겠지만.”

“아... 내가 또 메이저리그의 유명한 짐 랫, Y-DO가 어떤 선수인지 잠깐 잊고 있었네. 그렇지만,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쿠어스 필드에서 체력 관리하는 건 꽤 어려울 테니.”

“자꾸 겁을 주니까 훈련을 늘리지 말까, 싶기도 하고. 고민이 좀 필요하겠어.”

1년 만에 메이저리그로 돌아왔지만, 이건 뭐 에이스에서의 경험이 전혀 쓸모가 없는 그림이었다.

같은 메이저리그인데 연고지가 덴버라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다르다니...

나름대로 많이 성장해서 돌아온 것 같은데, 역시 야구란 끝이 없었다.

“오! 저기 시즌 내내 가장 자주 부딪힐 친구가 도착했네. 엄밀히 말하면... 네가 도움 좀 받아야 할 친구지만.”

“그런가? 본인이 할 수 있는 걸 해서 몸값이 올라가는 거니까 날 도와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저 친구가 내 옆에서 타구를 걷어낸다고 해서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된다고.”

“... 그렇지. 부각되는 건 결국 키스의 수비이긴 해... 그렇게 콕 짚으니 또 할 말이 없네.”

“무안을 준 거라면 사과하지. 내가 다른 걸 다 포기하고 야구만 하다 보니 대화에 좀 미숙해졌어.”

“아니, 또 뭘 사과까지... 물론, 에이스에서 뛰던 선수들한테 악명을 좀 듣긴 했지만... KBO에서 야구만 배워온 건 아닌가 보네. 아무래도 문화가 좀 사람 만드는 문화이긴 하지?”

“아무래도 그렇긴 해. 학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들이 많기도 했고.”

콜로라도 로키스의 대형 유격수 계보를 잇는 선수이자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만능 유격수, 키스 가드너.

선수의 급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영도에게는 제츠의 조규영과 비슷한 역할을 해줄 선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너무 당황하지 마. 아마 꽤 당황스러울 수 있을 거니까.”

“음? 무슨 뜻이지?”

그런데 뭔가 해니건의 표정이 오묘했다.

순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마침 가드너가 가까이 다가와서 일단 궁금증은 뒤로 미뤄뒀는데...

“아, 반가워. 이번에 영입된 유영도, Y-DO라고... 음?”

“그러니까 너무 당황하지 말라고 했잖아...”

가드너는 인사를 건네는 영도를 슬쩍 쳐다보더니 고개를 까딱하고는 스쳐 지나갔다.

그 고개를 짧게 숙인 것도 영도에게 한 건지, 옆의 해니건에게 한 건지 애매한 모습이었고.

“아... 저래서?”

“화난 거 아니지?”

“별로. 저 정도는 그동안 겪어왔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위협을 느낀 것도 아니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간 것쯤이야...

메이저리그에 재능 믿고 오만한, 인성이 바닥인 놈들이 한두 명 있는 것도 아니고, 한두 명 겪어본 것도 아니니까.

“야구만 잘하면 돼. 나한테 도움만 된다면 저 정도 싸가지 없는 것쯤이야.”

옆에서 수비만 좀 잘해주면 저 정도야 뭐.

영도 역시 어디 가서 성격 좋다는 소린 거의 듣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 첫인상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