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으로 >
“콜로라도 로키스 입단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뒤, 영도는 많은 언론과 팬들의 관심 속에 카메라 앞에 앉았다.
드디어 길었던 스토브리그를 끝내고 계약서에 사인하며 입단식을 치르게 된 것.
영도의 새로운 유니폼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블랙&화이트&퍼플 스트라이프 유니폼이었다.
연봉규모도 작지 않고, 연봉 이상의 경쟁이 붙었던 선수였기 때문에 입단식에 쏠린 관심이 대단했다.
특히, 좋은 선수를 데려왔다는 것, 양키스, 레드삭스, 특히 다저스 등의 메가 마켓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데려왔다는 것에 팬들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다.
팬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커리어를 시작한다는 것.
일단 이적생으로서 시작은 더없이 좋았다.
“LA다저스, 뉴욕 양키스를 비롯한 많은 빅마켓에서도 제안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로키스를 선택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진지함이겠죠. 날 얼마나 원하는가, 나를 원하는 그 마음이 계약 과정에서 얼마나 드러나는가. 당연히 마음을 꺼낼 순 없으니 증명은 계약서의 숫자로 나오겠지만, 단순히 높은 숫자를 선택한 건 아닙니다. 계약서를 내민 그 팀의 상황도 고려했죠.”
“그렇다면 콜로라도 로키스의 4년 최대 65M 계약은 필리스가 내밀었다고 알려진 3년 60M이나 레드삭스, 다저스의 3년 55M, 4년 70M보다 성의가 있었다? 규모가 알려지지 않은 천하의 양키스가 내민 계약서보다?”
“아무래도 그렇죠. 로키스의 현실이라는 게 있고, 그들에겐 그들의 마켓과 파워가 있으니까.”
내로라하는 메가 클럽들을 제치고 영입전에서 승리했다는 건 지역 언론인들에게도 큰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물론, KBO에서 성공한 선수에게 연간 1,700만 달러 이상 내준다는 것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 힘을 발휘하는 게 바로 영도의 과거 탑 프로스펙트 전력이었다.
재능은 더 증명할 게 없을 정도로 증명되었던 선수가 KBO에서 드디어 재능을 개화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많았기에 큰 논란은 없었다.
그런 선수가 우리 팀으로 와준 것에 기뻐할 뿐.
물론, 유명하면 유명할수록 헤이터들이 있기 마련이고, 심지어 유명하지 않아도 헤이터는 생기지만...
그런 사람들을 굳이 고려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과 관계없이 입단식에 참석한 언론인들의 기분은 좋았고, 입단식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에 합류하면서 세운 목표가 있다면 어떤 게 있습니까?”
“제가 항상 말하는 거지만, 내 몫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게 성의를 보여준 팀에게도 도움이 되겠죠.”
“좋은 성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한 수치가 있다면?”
“딱히 구체적으로 어떤 숫자를 정해두진 않았습니다. 매일매일 좋은 활약을 펼치고 싶을 뿐이죠.”
영도는 여전히 자신의 성적이 먼저였다.
팀 성적이 우선이고 그런 것에 욕심이 있었으면 아마 콜로라도 로키스를 선택하지 않았겠지.
한 타석, 한 타석 좋은 결과를 내서 좋은 시즌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팀 성적이 내가 없을 때보다 좋아진다면 결과적으로 내 가치가 올라가겠지.
손성호와 제츠, 23년 만의 우승 덕분에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성적인 목표는 여전히 같았다.
여유가 생기면서 조금 더 팀과 팬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은 감성적인 부분에 머물러 있었다.
“마지막으로 로키스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한 마디만 해주시죠.”
‘아... 마지막 한 마디...’
영도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사실, S-DO, 승도가 마지막으로 각오를 물어보면 한마디 하라고 시킨 게 있었다.
오글거리고 과한 걸 좋아하는 미국에선 통한다고 죽어도 하라고 시켰는데...
‘진짜 이런 말이 통한다고?’
야구 말고는 다 맡긴다고 했으니 말을 듣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역시 같은 배에서 난 형제인데 성격은 참 달랐다.
새삼스럽지만, 항상 느껴왔던 것처럼 참 달랐다.
“빅리그를 떠나서야 겨우 날았지만, 이젠 빅리그에서도 날아오르려 합니다. Y-DO의 비행을 함께 지켜봐 주시길.”
앞의 기자들은 받아적고 녹음하고 촬영하느라 못 봤지만, 입단식을 진행하던 로키스 담당자와 지켜보던 에이전시 관계자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각오를 이야기해달란 부탁에 사력을 다해 표정을 관리했던 영도처럼 피나는 노력이 들어갔다.
그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테이블에 가려진 영도의 손과 발 때문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영도의 손은 어찌할 바를 몰라 무릎을 쥐어뜯었고, 발가락이 오그라든 듯 두 발도 조금씩 몸 근처로 빨려 들어왔다.
사정을 아는 에이전시 관계자나 사정을 모르는 구단 관계자나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솔직한 반응이었다.
‘이런 게 진짜 통한다고?’
의외로 나는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구나.
영도는 제자리를 고수하는 이목구비와 달아오르지 않는 얼굴을 느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레X에 댓글이나 잘 달렸으면 좋겠네. 욕이나 안 달렸으면...’
승도도 생각보다 이런 재능은 없는 게 아닐까?
기자들이라 그런지 반응이 확 드러나진 않아서 통했는지, 안 통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
***
“크으... 거기서 2+2 카드를 딱 꺼내 들 줄이야... 그거 하나로 끝난 거지. 사실, 형이 처음에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양키스나 컵스 쪽 제안이 마음에 들었었거든. 우승 반지를 생각하면 양키스였고, 연봉을 생각하면 컵스였고. 언론에는 컵스 제안만 딱 빠져서 알려졌지만.”
“그렇지. 나도 로키스가 마지막에 2+2로 하자고 말하기 전까진 그 두 팀 중에 고르려고 했으니까.”
영도로 리빌딩을 마무리하려 했던 양키스와 유영도라는 선수를 가장 높게 평가했던 컵스.
에이전스와 승도, 영도 본인까지 이 두 팀으로 선택지를 좁혀가던 상황에서 로키스가 최후의 수를 던졌다.
3루수 외에도 급한 포지션이 많은 레드삭스와 비교적 열의가 덜 느껴졌던 다저스, 너무 팀 상태가 엉망인 필리스 등이 제외되고 슬슬 결정을 내리려던 타이밍에 역전 만루홈런을 때려낸 것.
“두 시즌 동안 쿠어스 필드빨로 성적 빠짝 올려서 몸값 같이 올린 다음에 옵트아웃으로 대박 한 번 노려보자고. 형도 제대로 된 FA 계약 한 번 따야지.”
“이번에도 FA 계약인데. 4년 65M이면 연봉 규모도 작은 건 아니고.”
“어쨌든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면 2년 뒤에 FA 선언 안 할 거야? 최소한 연장 계약이라도. 2년 뒤에는 1,700만 달러짜리 선수가 아니라 2,700만 달러짜리 선수 해야지.”
“2,700만 달러짜리 선수는 모르겠지만, 2년이나 지났으면 성장은 해야지. 돈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로키스가 준비한 최후의 한 방은 옵트아웃이었다.
4년 최대 65M이지만, 2+2년으로 2년 뒤 선수가 원할 경우 옵트아웃을 선언해 FA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준 것.
계약 규모, 평균 연봉, 계약 기간도 더 좋은 팀들이 있었지만, 2년 후 옵트아웃 조항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
로키스 입장에서도 당장 승부를 거는 팀이 아니기 때문에 2년으로는 분명 아쉬운 게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각이 보이지 않으면 트레이드라는 게 있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정 상황이 안 되면 1년 후, 아니면 두 번째 시즌 중반에라도 급한 팀들을 상대로 반 시즌 렌탈로라도 유망주들을 뜯어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영도만 잘하면 아마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로키스는 선수 보강에 한계가 있는 팀이고, 지금도 NL 서부 3, 4위권 전력이라 평가받았기 때문에 2년 안에 컨텐더가 될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같은 지구에 다저스라는 메가 마켓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라는 빅마켓이 있다는 것도 문제.
결국, 성적이 아쉽더라도 4년 65M이라는 보장 금액이 있으니 안정감도 있고, 2년 후 옵트아웃 조항으로 대박도 노려볼 수 있는.
로키스가 던진 신의 한 수가 영도의 마음을 돌렸다.
“마이너 거부권도 넣었고... 이러면 진짜 형만 잘하면 되는 거잖아? 트레이드 거부권은 안 넣었지만, 어차피 이 정도 계약 규모를 떠안으면서 트레이드로 데려갈 만한 팀들은 컨텐더급 강팀들이니까.”
“그래. 어차피 팀 성적 같은 건 신경 안 쓰긴 하지만, 강팀으로 가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없겠지.”
다저스는 끝까지 마이너 거부권을 안 내주려 했지만, 양키스, 컵스, 로키스는 처음부터 마이너 거부권에 긍정적이었고, 최종 오퍼에도 당연히 삽입했다.
로키스가 옵트아웃이란 강수를 꺼내 든 것도 생각보다 많은 팀들이 마이너 거부권 조항을 삽입했기 때문.
어쨌든 덕분에 영도는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다.
로키스도 전력은 약한 편이지만, 타선은 나쁘지 않고, 컨텐더급이 되면 최소한의 공격력은 갖추고 있을 테니 제츠 때와 달리 투수들의 견제를 혼자 다 받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KBO에서는 어떻게든 버텼고, 오히려 혼자서 그 많은 견제들을 뚫고 날았지만, 메이저리그에선 다른 타자들과 똑같이 견제를 피할 수 있는 만큼 피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너 입단식 기사 봤어? 네가 그렇게 우겨서 마지막에 하긴 했는데, 그거 진짜 통한 거야? 반응 어때?”
“... 그렇게 큰 반응은 없는데... 그래도 걱정했던 것만큼 밍숭맹숭하진 않다는 반응은 많더라. 솔직히 형이 생각해도 에이스 시절엔 너무 재미없었지.”
“다들 그러는데 어떡하냐. 내가 그렇게 생겨 먹은걸...”
“그래서 내가 그런 것도 시키고 그러는 거야. 형은 인터뷰든 뭐든 조금 더 재미있는 사람처럼 보일 필요가 있어. 미국에서는 차라리 건방진 게 낫지, 그렇게 모범생처럼, 아니지, 모범생도 아니야. 그냥 재미없고 색깔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최악이야.”
영도의 성격과 인터뷰는 한국에선 프로의식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물론, 야구를 너무 잘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있었지만, 항상 냉정하고 냉철하게 야구만 생각하고 말을 줄여도 성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팬들에게 긍정적으로 다가간 것.
말 많은 걸 별로 안 좋아하고, 자신감을 과하게 표출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한국 팬들에겐 영도의 담백함이 플러스면 플러스지, 마이너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달랐다.
에이스 시절에도 가진 바 재능이나 포텐셜을 워낙 높게 평가받았기에 인지도는 있었지만, 그에 비해 인기는 뭔가 아쉬운 느낌이었다.
워낙 담백하고 야구만 아는, 야구에만 집중하는 이미지라 캐릭터성이 약해진 것.
이런 성격으로 캐릭터성까지 얻으려면 야구를 정말 잘해야 했는데, 지명할당으로 쫓겨날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캐릭터가 만들어질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인터뷰도 좀 더 자신 있게 해보고,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말도 좀 과감하게 해보고 그러라고. 선수가 인기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그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은데... 어차피 성적만 좋으면 인기는 알아서 쌓이니까.”
“야구로 승부하겠단 그 마인드... 참 좋은 마인드인데... 회사에 수수료는 누가 줘.”
“그 수수료만큼 협상을 더 열심히 해서 뜯어내면 되지. 수수료는 구단에 받아. 왜 그걸 나한테 달래.”
처음으로 로키스 팬들에게 얼굴을 비치는 입단식인 만큼 승도의 코칭을 받아들였지만, 앞으로도 계속 캐릭터를 연기할 생각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쌓이면 과거의 통통 튀던 성격이 조금씩 드러날 수는 있지만...
억지로 연기하는 건 너무 귀찮고 쓸모없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영도의 생각은 그랬다.
“그래서... 네가 시킨 그 문장은 효과가 없었다는 거지? 나 혼자 쪽팔리고 끝났다는 거잖아, 지금.”
“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을까. 어쨌든 긍정적으로 예상외라는 반응이 있는데...”
“내가 성격에 안 맞게 그런 말까지 했는데 그 정도로 만족하라고? 기사 헤드라인에 좀 인용도 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네가 미국 팬들은 그런 거 좋아한다며.”
“... 나중에, 나중에 반응 올 거야. 좀만 기다려. 급하게 그러지 말고...”
승도의 뒷목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보이는 건 착각이었을까.
아마도 생각만큼의, 승도가 장담한 만큼의 효과는 없는 듯했다.
< 산으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