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따뜻한 겨울 > (86/200)

< 따뜻한 겨울 >

“에드가! 에드가, 오랜만입니다?”

“음, 마이클? 웬일이지? 이제 독립한 거 아니었나?”

‘뉴욕의 연인’, ‘양키스의 캡틴’ 데릭 지터가 워낙 유명해서 다른 메이저리그 팀들과 달리 뉴욕 양키스만큼은 KBO 구단들처럼 주장이 있는 게 아닌가, 오해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뉴욕 양키스가 유독 주장을 많이 선임하는 팀이기는 했지만,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주장감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따로 주장, ‘캡틴’을 두진 않았다.

실제로 지터 역시 전임 주장 돈 매팅리가 95년 팀을 떠난 이후 2003년이 되어서야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애런 저지도 지터 은퇴 후 10년이 지난 2024년에야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저지 은퇴 7년 후 선임된 후임 주장이 바로 지금 에드가 펜서 아카데미를 찾아온 마이클 키니였다.

“요즘 좋은 선수 한 명 도와주고 있다기에 그 선수 좀 만나보러 왔지.”

“음. 그 잘나신 양키스의 캡틴께서 직접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정도로 좋은 선수라면 한 명이 생각나는군.”

“그래. 바로 그 선수야. 내가 오죽했으면 동부에서 서부까지 날아왔겠어?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동부로 좀 넘어오라고.”

“웃기는 소리라고 나도 몇 번 말했지. 나한테는 스토브리그 기간이 대목인데 겨울에 동부에서 뭘 하라고?”

3할 타율, 3할 후반 출루율, 5할 장타율, 20개 중반의 홈런, 40여 개의 도루를 기록할 수 있는 수비, 어깨 나쁘지 않은 중견수.

아니, ‘잘생긴 백인’ 중견수.

마이클 키니를 ‘최고의 선수’라고 부르는 건 틀린 말이었다.

하지만 ‘최고의 스타’라고 부른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22세 시즌인 2033시즌 데뷔, 33시즌 시작 전부터 에드가 펜서의 도움을 받기 시작해 35시즌 폭발했고, 37시즌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38시즌부터 캡틴 선임.

이제 곧 만 30세 시즌을 맞이할 그는 2, 3시즌 전부터 에드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팀의 요청에 의해 오랜만에 에드가 펜서를 찾았다.

“다른 말은 됐고 빨리 가서 Y-DO나 만나보고 가. 유망주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겠지만, Y-DO는 너와 달리 야구밖에 모르는 선수거든. 지금도 열심히 훈련 중인데 시간 너무 많이 빼앗지 말고.”

“Y-DO 성실한 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우리 아버지 시대에나 있었던 아시안은 성실하단 편견이 다시 생길 정도니까.”

“후.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만, 그 피지컬을 보고 아시안이 어쩌고 말했다간 65대 맞고 하늘에 계신 그분을 만나고 오겠지.”

“이런... 아시안 중에 그런 피지컬이 나오는 게 뭐가 이상한가? H-STAR나 JK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한국 선수들도 얼마나 많은데.”

“... 아시안 어쩌고 언급한 게 누군데... 하여튼 너랑 대화하면 정신이 나가는 것 같군. Y-DO 시간 말고 내 시간도 그만 좀 뺏고 빨리 끝내. 그리고 가버려.”

기쁠 희, 별 성을 쓴다며 HAPPY STAR, H-STAR라는 별명을 본인이 떠들고 다니는 LA 다저스의 떠벌이 중견수, 박희성.

피칭 스타일 자체는 피네스 피처에 가깝지만, 마운드에서의 액션이 굉장히 다이나믹한 ‘JK’, 안정규.

이 두 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한국 선수의 이미지를 새로 쓴 선수들이었다.

일본 선수들은 다르빗슈 유나 오타니 쇼헤이 같은 선수들 덕분에 조금 이미지를 벗었지만, 여전히 조용하고 얌전하고 비교적 순종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벗진 못한 상태.

덕분에 메이저리그에서 한국 선수와 일본 선수는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양키스로 와. H-STAR가 어떻게 그 성적으로 고작 두 시즌 만에 올스타급 스타플레이어가 된 건지 알아? 성적? 물론, 성적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빅마켓, 메가 시티, LA 다저스에서 뛰기 때문이야.”

KBO 통산 0.337/0.423/0.508, 평균 21홈런 52도루의 기록을 남기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희성은 2할 후반의 타율과 8할대의 OPS, 40여 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OPS형 타자이자 돌격대장이었다.

비록 홈런은 한 시즌 5개 이하로 KBO 시절에 비해 1/5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골드글러브급 수비와 4년 42M의 비교적 저렴한 몸값 덕분에 다저스 팬들의 사랑을 받는 게 당연한 좋은 선수였지만...

그의 인기는 실제 성적이나 가치보다 훨씬 높았다.

비교적 부족한 활약으로도 전국구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가까운 인기를 자랑하게 된 이유는 화려한 플레이와 스타성.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소속팀, LA 다저스라는 메가 클럽이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네 성적은 H-STAR보다 몇 단계는 더 위일 거다. 실제 수치로도 상대가 안 되겠지만, 홈런 타자의 임팩트는 똑딱이와 비교도 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뭐가 필요할까?”

“흠... 양키스 유니폼을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지! 정답이야. 다저스와 H-STAR? 양키스와 Y-DO가 뜨면 그대로 가라앉을 것들이지.”

"별로 욕심나는 부분은 아닌데. 난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는 게 목표지, 슈퍼스타가 되는 게 목표는 아니거든. 슈퍼스타가 되어서 나쁠 건 없지만, 내가 야구를 잘해서 자연스럽게 되면 모를까."

양키스 캡틴의 자신감에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부정은 할 수 없었다.

양키스는 다른 메가 클럽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메가 클럽이었고, 양키스의 스타가 곧 메이저리그의 스타였다.

영도처럼 인기에 담백한 스타일이 아니라면 누구나 욕심낼 수밖에 없는 유니폼이었다.

“그러니까 그거 하나 때문에 양키스에 갈 순 없지. 난 프로고, 프로는 내 가치를 인정해주는 팀에 내 재능을 맡기고 싶은 법이고. 난 아직 그런 약속이 있어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적당한 급의 선수이기도 하고.”

“물론, 물론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양키스지. 양키스가 섭섭하게 대우해주는 거 봤어? 양키스는 항상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고.”

“그렇지. 그들이 그렇게 대우해주고 싶어하는 선수들에겐. 항상 그렇다면 영입에 실패하는 선수가 나와선 안 되니까.”

양키스는 돈이 많고 연봉을 세게 준다.

뉴욕이라는 마켓과 리그를 대표하는 인기를 등에 업고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이는 만큼, 그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 스타 선수를 영입할 때 돈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양키스도 항상 영입에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빅마켓도 힘 좀 주면 양키스의 오퍼를 넘어설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중소 마켓도 정말 필요한 선수라고 판단해 무리하면 한두 선수 정도는 데려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천하의 양키스 캡틴, 마이클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감동은 받았어. 하지만 다음은 공식 제안이 들어온 다음에 다시 하자고. 할 이야기가 있다면 그때 해도 늦지 않을 테니.”

“이런... 알았어, 알았다고. 물론, 그게 순서이긴 하지. 다만 내가 이렇게 직접 올 정도로 우리 양키스가 널 높게 평가한다는 것만 알아달라고. 상식적으로 이렇게까지 하는데 계약서에 사인했다고 무시하진 않을 거 아냐?”

“하하하, 접수하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충분히 감동했다고. 가산점 더해놓을 테니 너도 가서 양키스에 힘 좀 더 쓰라고 말이나 해줘.”

“오케이. 내가 연봉으로 4,000만 달러씩 주라고 전해주지.”

“그건 역효과가 날 것 같은데...”

어차피 마이클 키니도 오늘 확답을 받겠다고 여기까지 날아온 건 아니었다.

그저 이 정도의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동부에서 서부까지 날아온 것.

한 팀의 주장이 된다는 것, 양키스의 캡틴이 된다는 것은 이렇듯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어! 마이클! 마이클이 여긴 웬일이야? 너도 우리 영도 만나러 온 거야?”

“아... PARK... 너도?”

그때, 조금 전 대화에 나왔던 다저스의 박희성이 에드가 펜서 아카데미를 찾아왔다.

첫 협상에서 불안함을 느낀 다저스 역시 영도에게 그나마 말이 좀 먹힐 듯한 박희성을 파견한 것.

“... 다들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면 나랑 이야기하는 게 맞지 싶은데. 둘이서 그렇게 째려보고 있지 말고.”

영도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리그도 다르고 위상 차이도 상당해서 서로 의식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서로 지그시 응시하는 박희성과 마이클 키니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다만, 어떤 사연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둘의 역사는 둘의 일이고, 영도는 훈련해야 했으니까.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으면 빨리 말만 하고 가야지, 자신을 빼놓고 둘이 시간을 낭비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

“대충 다시 반 정도로 윤곽이 잡히네요. 엄청 많은 팀들이 달려들었는데, 정리하고 정리하니 생각보다 많이 남진 않네요.”

“어떤 선수든 다 마찬가지지. 아무리 좋은 선수여도 결국 달려든 구단끼리의 온도 차이는 있는 법이니까.”

영도가 에드가 펜서 아카데미에서 마이클 키니, 박희성 등을 만나며 훈련에 집중하는 동안 승도와 에이전시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팀들과 협상을 진행했다.

컵스, 레드삭스, 양키스, 필리스를 제외하고도 비교적 적극적이지 않았던 팀들과도 전부 이야기를 나눠본 것.

하지만 결국 최종 후보는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던 팀들 중에서 나왔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던 것.

“조건만 놓고 보자면 양키스와 다저스, 정성과 입지를 놓고 보자면 로키스와 컵스. 이렇게 네 개 구단 중에서 정해야겠네요.”

“흠... 에이전트 입장에선 양키스, 다저스 중에 정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로키스와 컵스도 정성이 있으니 큰 차이는 안 나니까. 결국, Y-DO한테 달린 거지. 양키스, 다저스도 조건을 그 정도로 불렀으면 정성이 없다고는 못하니.”

10년째 3루수 때문에 고생하는 로키스와 20년째 고생하는 컵스, 그리고 3루수만 채우면 리빌딩이 끝나는 양키스와 그냥 돈 많고 한국 선수로 재미도 많이 본 다저스가 결국 마지막까지 남았다.

에이전시에서 확실히 거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같은 급에서 남겨놓았을 정도면 이제 개인 차이였다.

영도의 다음 시즌 유니폼은 결국 영도가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레드삭스가 생각보다 소극적으로 나온 게 좀 아쉽네요. 레드삭스가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으면 바로 양키스 자극해서 몸값 확 올릴 수 있었을 텐데.”

“그렇긴 하지. 그래도 처음 생각했던 최대치 연봉은 넘지 않았나? 그 정도면 만족하는 게 좋아. KBO 성적으로 시즌 평균 1,600만 달러 넘어섰으면 완전 대박인 거지.”

가장 적은 연봉을 제안한 건 당연히 콜로라도 로키스였다.

하지만 그런 로키스도 연 평균 1,600만 달러를 넘겼다.

평균 1,500만 달러만 넘겨도 다행이라고 생각했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냥 1,600만 달러가 아니죠. 1,600만 달러가 제일 적은 연봉인 만큼 좀 더 유리한 추가 옵션이 있으니까.”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연봉이 부족한 대신 그만큼 채워주려 노력하니까 우리 선에선 결정이 안 된다는 거지.”

시즌 종료 직후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을 때, 그때 이야기 나오던 구단 숫자를 비교하면 확실히 많이 줄었다.

하지만 숫자가 줄어든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남은 구단이 얼마든 이쪽에서 생각하는 최소 조건 이하의 오퍼만 있으면 그건 최악의 스토브리그였다.

한두 개 구단만 남고 다 빠져도 최소 조건 이상의 오퍼만 남았으면 성공적인 스토브리그였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도의 스토브리그는 대성공이었다.

“이 오퍼들을 Y-DO에게 전달하는 영광적인 역할은 너에게 맡기지. 가서 이 오퍼들 전달하고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드는지 나한테 다시 연락해줘.”

“알겠습니다. 바로 가서 바로 물어보고 바로 연락드리죠.”

이제 길었던 협상도 슬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양키스, 다저스, 로키스, 컵스.

다들 좋은 팀들이고, 영도에게 적지 않은 기회를 줄 수 있는 팀들이었다.

어떻게든 메이저리그에 남기 위해 푸대접을 참아가며 계약을 구걸하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구단이 영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 따뜻한 겨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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