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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진 위상 > (85/200)

< 달라진 위상 >

“마이너 거부권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만... 차라리 연봉을 올리는 게 쉽지, 마이너 거부권은 쉽지 않을 겁니다.”

역시 돈 때문에 문제 되는 경우가 덜한 빅마켓 팀들만 남아서일까.

연봉이나 옵션 등 다른 것들보다 마이너 거부권에서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비용은 포기해도 고효율은 포기 못 한다.”

이건 연봉을 조금 더 주더라도 선수의 효율이 떨어질 경우 칼같이 마이너로 쫓아내거나 3년 차 이상의 선수가 마이너행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냥 FA로 내보내 잔여 연봉이라도 아끼겠다는 뜻이었다.

“글쎄요. 다음번에는 조금 더 생산적인 협상이 되길 기대하죠. 협상이란 건 우리끼리 나누는 대화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경매 비슷한 것이기도 하니까.”

“... 혹시 다른 구단에서는 마이너 거부권, 그거 준다고 한 겁니까?”

“하하하, 어땠을 것 같나요? 유영도 선수를 그 정도까지 원하는 팀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 같은데... 어땠을까요?”

“다음에 만날 땐 조금 더 준비해서 나오겠습니다.”

영도 측과 LA 다저스의 첫 번째 협상은 일단 서로의 입장만을 확인한 채 마무리되었다.

딱히 합의된 부분은 없었지만, 이 정도면 꽤 순조로운 첫 만남이었다.

선수와 구단 간의 협상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꽤 오랜 기간 시간을 두고 몇 차례씩 만나가면서 이뤄지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다만,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에 비해 다저스가 제시한 첫 제안은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클랜드 에이스의 동아시아 담당 스카우트 빈센트 리가 한국에서 다저스의 스카우트를 처음 만났을 때 안심했던 것처럼 다저스의 제안은 영도가 바라는 것과 거리가 있었다.

다저스가 영도에게 크게 베팅한 이유는 다른 팀의 전력 강화를 막기 위해서, 상업 수익으로 커버가 될 것이라 판단해서.

그리고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니 최악의 경우라도 최소한의 회수는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이야기해보니까 어때? 연봉 세게 부른다고 해서 언제나 우리가 우위는 아니라는 게 확 실감 나지?”

“그러네요. 기대 연봉보다 세게 줄 테니 조건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맞추자, 이런 식으로도 나오네요.”

“당연하지. 아무리 연봉 많이 받는 선수여도 결국 상대적인 거니까. 다른 팀보다 더 줄 테니 고집부리지 말라고 나오는 건 어떤 선수든 겪을 수 있는 일이지.”

영도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승도 역시 조금 더 중요한 자리에 동석하며 일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이번 다저스와의 협상 과정에서도 참여는 하지 못했지만, 옆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그럼 다음번에는 우리 쪽 의견을 조금 더 드러내면 되는 건가요? 연봉보다는 주전 출장과 마이너 거부권이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그게 정석이긴 하지. 초반에는 서로 우리 쪽 생각은 내보이지 않으면서 상대의 생각을 파악하려고 하니까. 나중에 조건을 맞춘다 해도 결국 차이는 있거든. 처음부터 우리 쪽 생각이랑 비슷한 구단과 계약하는 게 훨씬 좋아.”

일부 에이전시는 선수를 설득해서라도 많은 연봉을 주는 팀에 보내려고 했다.

그래야 에이전시에 떨어지는 수수료가 늘어나니까.

하지만 영도의 에이전시는 달랐다.

연봉을 올리는 건 자신들의 역할이고, 일단 영도의 요구를 관철하는 게 먼저였다.

“그래도 Y-DO한테 신경 써주시니 제가 다 고맙네요.”

“S-DO가 옆에 있어서 하는 말이야. Y-DO한테 가서 전해달라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진짜 가식적인 행동이었다면 승도 앞에서 하지도 않았을 말이었다.

회귀 전 경험 덕분에 알고 고르긴 했지만, 어쨌든 영도가 모든 걸 맡기고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건 바로 에이전시의 이런 모습 덕분이었다.

***

“역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이너 거부권은 어지간해선 안 주려고 하네요.”

“예상은 했지만... 아무래도 Y-DO가 마이너 거부권을 꼭 받아야겠다고 한다면 중소마켓 쪽으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처음부터 쿨하게 마이너 거부권을 내주는 팀 하나는 협상 대상에 있어야지.”

다저스와의 협상을 위해 서부에 도착한 김에 에인절스, 로키스와도 같은 날 약속을 잡았다.

다저스에 이어 도착한 곳은 에인절스.

에인절스는 다저스보다 마이너 거부권에 대한 완고함이 덜했지만, 연봉 역시 그보다 적었다.

“하긴, 처음부터 에인절스한테는 큰 기대가 없었죠. 이래저래 특별하게 끌리는 건 없고 다들 애매했으니까.”

“크게 계약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지. 그렇다고 꼭 계약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게 문제지만.”

“최선이 없을 때 차선 정도로 선택하면 되겠네요.”

“안타깝지만, 우리뿐 아니라 대부분의 선수한테 에인절스는 그 정도의 팀이지. 분명 좋은 팀이고, 마켓도 작지 않은 팀인데, 선수의 니즈를 만족하는 데도, 연봉에도 조금씩 아쉽거든.”

선수의 니즈를 파악하는 스카우트팀의 능력, 선수의 마음을 흔드는 프런트의 정성도, 선수의 이성을 흔드는 자본력도.

에인절스는 어느 하나 빠지지 않지만, 어느 하나가 특출나지도 않았다.

차라리 하나가 특출나면 거기서 마음이 흔들려 다른 게 좀 부족해도 계약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에인절스는 최근 영입을 타진하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첫 번째 구단과의 협상이 어그러졌을 때 두 번째 정도로 선택하는 정도의 팀이었다.

영도의 에이전시도 첫 번째 협상 이후 에인절스의 위치를 그 정도로 두었다.

“이젠 콜로라도로 가는 거죠? 워낙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달려든 팀이라 어느 정도까지 맞춰줄지 궁금하긴 한데...”

“사실, 우리도 기대하는 팀이지. 로키스, 컵스, 레드삭스처럼 급한 팀, 양키스처럼 남은 조각이 몇 개 없는 팀. 이런 팀들이 결국 조건도 제일 좋으니까.”

“필리스는요? 필리스가 가장 급한 팀 아닌가요?”

“... 너무 급해, 거긴. 다들 너무 급해서 프런트도, 코치들도 믿기 힘들지. 아무리 조건이 맞아도 팀에 미래가 보여야지, 좋다고 따라갔다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 그런 전형적인 안 되는 팀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들이 종종 나오는 게 안 되는 팀들이니까 선수라면 그런 팀은 피하는 게 좋았다.

본인의 성적과 상관없이 억울하게 주전에서 밀리기도 하고, 팀 전체의 침체가 성적 저하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여름 제츠’야 1, 2개월 정도였으니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지만, 그게 1년 내내 이어지면...

심지어 KBO도 아니고 MLB에서 그런 나날들이 이어지면 영도가 아니라 명예의 전당 타자들이 부활해 돌아와도 별수 없었다.

“잘 오셨습니다. 오는 동안 피곤하진 않으셨고요?”

“하하하, 괜찮습니다. 이렇게 반겨주시니 피곤하던 것도 사라지네요.”

“다저스랑 에인절스 돌고 오셨다고 했죠? 다저스는 오만해서 말도 제대로 안 통했을 거고, 에인절스는 그냥저냥 밍숭맹숭했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여기서 스트레스 딱 풀고 시원하게 가서 쉬시면 될 겁니다.”

“오... 그렇게 확언하시니 저도 기대가 됩니다. 그럼 우리 서로 간은 적당히만 보고 화끈하고 시원하게 툭 깔까요?”

모든 협상에선 서로 모든 걸 꺼내놓지 않고 간을 보는 시간이 상당히 길었다.

로키스와의 협상 초반 분위기는 꽤 좋았지만, 그렇다 해도 간도 안 보고 시작부터 속을 내비칠 순 없었다.

다만, 로키스 측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꽤나 긍정적이었고, 본격적인 협상 전부터 느낌이 좋았다.

“우리 로키스는 Y-DO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길 수 있는 팀입니다. 어떤 팀들은 KBO 성적을 못 믿는다면서 검증이 끝나야 중책을 맡길 거라고 하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KBO고 나발이고 한 리그의 역사를 아예 새로 써버린 성적인데 검증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하하,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살짝 격한 단어가 나왔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속이 다 시원하네요. 이쪽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꺼려지는 게 있는데, 대신 해주신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어쨌든 우리는 Y-DO에게 중책을 맡길 거고, 그만큼의 대우도 해드릴 겁니다. 특히 우리에겐 키스 가드너라는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유격수가 있기 때문에 Y-DO가 장점인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키스 가드너면 아주 완벽한 파트너죠. Y-DO는 수비 범위가 다소 평범한 것 하나만 빼면 충분히 훌륭한 3루 수비수니까요.”

로키스가 10년째 3루수를 찾지 못해 고생 중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격수 포지션만큼은 항상 탄탄한 팀이었다.

트로이 툴로위츠키가 등장한 2000년대 후반 이후 트레버 스토리, 칼 스노든, 그레이엄 마이어, 현재의 키스 가드너까지 모든 유격수가 최소 30개 구단 주전 유격수 중 TOP 10으로는 평가받았다.

서울 제츠 이적 당시에도 그랬지만, 에이전시는 최대한 수비 좋은 유격수가 있는 팀을 구해 주려 노력했다.

3루수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상관없겠지만, 영도는 3루수를 고집하며 리그 내 입지를 굳히겠단 뜻을 전해왔다.

선수의 뜻이 그렇다면, 그리고 1루, 코너 외야보다 비싼 3루수의 몸값을 생각한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줘야 하는 요구였고, 그 방법이 바로 수비 좋은 유격수를 이용하는 것.

제츠에서 한 시즌을 보내며 돌글러브라는 평가에서 수비 좋은 3루수까지 평가가 올라간 데는 조규영의 역할이 크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셔널리그 최고의 유격수 수비수 중 한 명인 키스 가드너라면...

어쩌면 KBO에서 그랬던 것처럼 MLB에서도 수비 좋은 3루수가 될 수 있게 도와주지 않을까?

“우리 쪽에서 원하는 건 마이너 거부 조항 정도입니다. 어려운 요구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연봉 측면에서 상식적인 수준에서만 협상이 가능하다면 마이너 거부 조항을 못 넣을 것도 없죠. 어차피 Y-DO는 두 시즌 뒤 자연스럽게 마이너 거부권을 손에 넣을 선수 아니겠습니까?”

에이전시에서는 마이너 거부권을 원한다 했을 뿐이고, 로키스 역시 연봉을 조금 양보해주면 마이너 거부 조항도 협상할 수 있을 거라 말한 것뿐이었다.

사실, 정작 중요한 건 연봉 협상이고, 어느 정도 양보하느냐, 어느 정도 뜯어내느냐, 그 ‘어느 정도’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당연한 말을 주고받았다 볼 수 있었다.

“호오, 그렇다면 마이너 거부권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Y-DO 측에서도 상식적인 수준의 연봉을 제시할 테고, 우리 쪽도 상식적인 수준의 양보를 바랄 테니까요. 우리 서로 그 정도 경우는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다만, 대화를 나눠본 다저스, 에인절스, 로키스 중 간을 보는 과정에서 마이너 거부권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팀은 로키스가 유일했다.

상대적으로 돈이 없는 팀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유가 어떻든 영도에겐 훨씬 구미가 당기는 반응이었다.

“다음에는 조금 더 건설적인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다 아는 사이에 굳이 오랫동안 찔끔찔끔 찔러볼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도 스토브리그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일찌감치 다음 시즌 준비하고 싶으니까.”

“하하하, 그럴까요? 역시 젊은 프런트라 그런지 화끈하네요. 그럼 다음에 만날 땐 섬세한 협상이 가능하도록 최대한 많이 준비해오겠습니다.”

이런 사소한 반응 하나 덕분에 협상 분위기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로키스와의 첫 만남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이러면 로키스랑 계약할 확률이 높아지는 건가요?”

“아니지. 이제야 겨우 다른 구단들이랑 같은 선상에 올라온 거지.”

“예? 분위기는 가장 좋았는데요?”

“로키스는 그 정도 차이가 있어야 겨우 동급으로 올라오는 팀이거든.”

화기애애한 분위기, 다음에 만나면 바로 도장 찍을 분위기였지만, 선임 에이전트는 표정이 편해진 승도의 말에 곧바로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요? 마이너 거부권만 받고 연봉도 크게 떨어지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했는데...”

“다른 중소마켓이었다면 그랬겠지. 전력이 약해도 필리스처럼 움직임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만 아니면 약한 팀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로키스는 아니야.”

“아... 부상 위험 같은 것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게 가장 크지. 선수한테는 몸이 재산이고, 부상이 가장 불운한 일인데, 로키스에서 5시즌 이상 뛴 선수 중에 토드 헬튼 같은 선수들 말고 유리몸 아니었던 선수가 있나? 이러면 구단이 문제인 거야.”

몇 차례 와일드카드를 통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ROCTOBER를 포함한 2000년대 후반 이후 로키스는 꾸준히 약팀이었다.

잘해봐야 다크호스.

월드시리즈 우승은커녕 내셔널리그 우승, 아니, 지구 우승마저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팀.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했던 ROCTOBER, 2007시즌에도 와일드카드로 올라갔으니 내셔널리그 우승 경험은 있지만, 지구우승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이상한 팀.

쿠어스 필드가 단순히 투수들의 무덤일 뿐이고, 타자들에겐 꿈의 구장이라 평가받았을 때도 그랬는데, 타자들에게까지 무덤이 된 지금은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다.

투수, 타자를 가릴 것 없이 선수 영입 자체가 힘들어졌고,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신구장 건설, 심지어 연고지 이전까지 검토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고.

“일단 시카고로 한 번 가보자고. 컵스, 양키스, 레드삭스 같은 좋은 팀들이 있는데 굳이 지금 결정할 이유는 없지.”

“크으... 이렇게 다수의 구단과 협상하는데 이 정도로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다니... 꿈만 같네요. Y-DO가 이렇게 좋은 선수가 될 줄이야...”

“음? 자네 형이지 않아? 물어볼 때마다 더 좋은 선수가 될 거라 확신한다고 대답했잖아?”

“동생으로선 그랬죠. 에이전트 지망생으로선...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연봉 협상, 계약 협상은 언제나 쉽지 않지만, 이런 협상이라면 수백 번도 더 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 대다수의 선수는 구단과의 협상에서 을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선수들의 협상과 비교하면 연봉 1,500만 달러가 넘어가는 선수들의 협상은 천국이었다.

특히 영도의 경우 구단에게 기회를 구걸하는 입장이었고, 첫 연봉 협상이 이뤄지기도 전에 지명할당으로 쫓겨난 선수였기에 더더욱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시대를 지배할 특급 유망주에서 애물단지로, 지명할당 후 방출로 KBO까지 건너간 소위 말하는 ‘폭망한 유망주’에서 다시 ‘A급 선수이자 특급 유망주’가 되어 돌아온 유영도.

그를 위해 구단을 돌며 협상하는 에이전트, 특히 동생인 승도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어쨌든 구름 위로 움직이는 건 같았다.

< 달라진 위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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