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치명타 > (81/200)

< 치명타 >

“제츠 유영도--!! 제츠 유영도--!! 절!대!자! 유!영!도! 호--옴런!!”

구단도, 팬도 어쩌면 원정에서 한국시리즈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KBO가 MLB에 비해 많이 부족한 경기력에도 불구하고 본고장인 미국에서조차 나름의 영역을 차지한 건 경기력 이외의 부분에서 확실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트플립, 구장 내 먹거리, 치어리더 등등...

그중 가장 핵심은 결국 열광적인 팬 분위기였다.

그게 빠지면 아무리 명경기여도, 한국시리즈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이어도 제대로 된 KBO라 할 수 없는 법.

제츠는 타이탄스 원정 기간 동안 잠실 올림픽 파크를 개장, 팬들을 모아 대형 전광판으로 경기를 중계하기로 했다.

응원단장과 치어리더, 앰프를 활용한 응원 역시 홈경기와 똑같이 진행하기로 했고.

물론, 비용이 있는 만큼 무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팬 서비스 차원의 결정인 만큼 구단이 어느 정도 손해 보고 진행하는 일이었다.

고척돔 티케팅에 실패한 수만 제츠 팬들은 잠실 올림픽 파크 단체 응원 티케팅마저 수 분 만에 매진시켰다.

“유영도 호-옴런!! 유영도 호-옴런!!”

막대 풍선과 함께하는 열정적인 응원.

제츠 팬들은 원정 팬이 없음에도 잠실 올림픽 파크의 3만여 석을 전부 매진시켰다.

그만큼 제츠 팬들은 언제나 열정적이었고, 나아가 그만큼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내일도 예매하길 진짜 잘했다. 종인이가 저렇게 잘 던질 줄이야...”

“종인이도 뼛속부터 제츠라니까? 아마 혈관도 스트라이프 무늬일걸?”

타이탄스 에이스, 조지 스넬에 대항하는 제츠의 선발은 선발 로테이션대로 3선발 류종인이었다.

사실, 에디 렉스도 아니고 류종인이 조지 스넬과 붙었다면 패배한다 하더라도 이해해줄 수 있었다.

류종인이 스넬을 상대해준 만큼 타일러 선발 경기의 승률이 높아지니까.

“하긴... 누가 제츠 선수 아니랄까 봐 연승 중일 땐 무조건 연승 이어가고, 연패 중일 땐 무조건 연패도 이어가는 놈이지...”

“나중에 나이 들면서 전자는 그대로 유지하고 후자만 좀 고쳤으면... 그래야 진짜 에이스가 되는 거지.”

타이탄스도 분명 와일드카드전부터 파죽지세로 올라온 만큼 기세가 올라 있었다.

1차전에서 2-11로 처참하게 패배하기 전까지는.

기세가 오른 팀이 강한 것, 기세가 꺾인 팀이 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일이 팀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꼽히려면 그 간극이 보통 커서는 불가능했다.

기세가 오른 타이탄스도 대단하지만, 기세가 오른 제츠는 차원이 다르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류종인은 아마추어 시절 영도만큼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지만, 어쨌든 특급 유망주의 모습과 제츠에 대한 팬심을 보여줬던, 아마추어 시절부터 차세대 ‘미스터 제츠’ 후보로 꼽히던 선수.

팬들의 기대감만큼 제츠의 팀 컬러를 그대로 흡수한 그는 팀 분위기에 따라 투구 내용이 달라졌다.

“그렇지!! 좋아!! 이런 날의 종인이한테는 김진형도 우습지!!”

“으하하하, 저 새끼들 자포자기한 거 아냐!? 그래, 현명해! 이런 타이밍의 제츠한테는 이길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게 상처도 안 받고 현명한 거라니까?”

타이탄스는 엄청난 기세로 한국시리즈에 도달했지만, 아무리 매 시리즈를 짧게 마무리했다 해도 체력적인 부침이 없을 수 없었다.

정규시즌을 다 치른 뒤 이어지는 타이트한 단기전 일정만으로도 힘든데 결정적으로 수원 매지션즈와는 최종전까지 이어지는 혈투를 벌였고.

이길 때는 괜찮았다.

플레이오프에서 두 경기 꺾였어도 분위기는 괜찮았다.

1패 뒤 2연승 뒤 다시 1패, 그리고 최종전 승리였으니 기세가 꺾이는 타이밍이 없었고, 오히려 분위기가 더 끓어올랐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1차전부터 2-11의 대패.

이미 초반부터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채 끌려가면서 타올랐던 기세가 단번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2차전 역시 4-13의 대패.

분위기가 좋을 땐 느껴지지 않았던 체력적 부담이 기다렸다는 듯 타이탄스 선수단을 덮쳤다.

“이야... 이러다가 진짜... 읍! 으읍!! 퉤! 어딜 더럽게 손을!!”

“너... 뒤질래? 네 젤레발 때문에 일 잘못 되면... 책임질 자신 있어? 수백만 제츠 팬들 앞에서 인민재판 한번 해?”

“아... 미안... 잘못했다.”

이쯤 되니 안 그래도 강력한 제츠 팬덤의 행복 회로를 막을 수가 없었다.

행복 회로를 멈추지 않고 돌리는 바람에 과열이 일어나 타들어 갈 정도.

그러나 제츠 팬덤은 허벅지를 꼬집고 찔러가며 참았다.

그동안 젤레발의 과학을 온몸으로, 결과로 느껴왔으니까.

젤레발을 꾹 참다가 정말 현실이 되었을 때 실컷 기뻐하기로 했다.

이번 시즌은 굳이 미리 기뻐하지 않아도... 마지막에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

[6회 초 제츠의 공격은 3번 타자 유영도 선수부터 시작합니다. 유영도 선수가 선두타자로 나서는 건 제츠가 그리 반기는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그래도 오늘 유영도 선수가 조용하거든요? 이쯤 되면 하나 해줄 때가 됐어요. 유영도 선수가 안타 없이 경기를 마무리하는 그림이 이젠 그려지지가 않아요.]

1, 2차전에서 언제나처럼 강력한 모습으로 팀 공격을 이끌었던 영도는 오랜만에 조용한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앞선 두 타석에서도 좋은 타구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조지 스넬의 혼이 담긴 투구에 살짝 숨을 고른 것.

‘확실히 여름 지나면서 많이 편해졌어.’

하지만 지금의 제츠는 영도에게 한없이 의존하던 여름의 제츠가 아니었다.

여전히 영도에게 어느 정도 의존하긴 하지만, 핵심 타자에게 그 정도 기대는 건 어떤 팀이든 마찬가지.

오늘 제츠는 영도가 무안타로 침묵하는 중에도 타이탄스의 마지막 보루, 조지 스넬을 상대로 5이닝 동안 2점을 뽑아냈다.

그리고 제츠의 미래, 류종인은 타이탄스의 핵타선을 상대로 5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쳤고.

‘이러면 내가 또 마음이 편해지지.’

이 정도로 나머지 팀원들이 제 몫을 해준다면 영도도 마음 편히 타석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팀 같은 것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그래왔던, 가장 익숙하던 플레이, 자신의 성적만을 생각하는 타석을.

‘... 언젠 안 그랬던 것처럼. 혼자 생각하는 건데 왜 굳이 착한 척을 하려는 걸까.’

원래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것을 혼자 생각하는 중에도 굳이 부정하는 상황.

영도는 착한 척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영도도 천천히 변해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아주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타석에서는 자신의 좋은 결과만을 생각하더라도 팀 성적을 아예 무시하는 건 또 좋지 않은 게 아닐까.’

무의식중에 조금씩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그게 어쩌면 영도가 KBO에서 얻게 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일 수 있었다.

[조지 스넬도 여유가 없을 겁니다. 에이스로서 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등판해서 상대 3선발을 상대했는데, 타선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본인은 먼저 2점을 내줬으니 아무리 여유롭고 멘탈이 강한 선수여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여유를 찾아야죠. 여유 없이 조급하게 유영도 선수를 상대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따라올 수 있어요.]

5회 말이 끝나고 6회에 접어들면서 슬슬 경기 종반을 향해가는 시기.

2점은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점수 차이고, 3점도 아주 어려운 격차는 아니었지만...

최근의 제츠에게 3점을 뽑아낸다는 게 평소만큼 쉬워 보이진 않았다.

그토록 믿었던 조지 스넬이, 마지막 희망이 또 한 번 점수를 내줬을 때 그게 타이탄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신할 수도 없었고.

‘어떨 땐 6점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점수 차처럼 보이지만, 어떨 땐 1점도 버거운 법이니까.’

중요한 타이밍이었다.

시리즈 내내 해줘야 할 선수들도, 갑자기 미쳐버린 조규영도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오늘도 조규영이 적시타를 때려냈지만, 결국, 제츠 공격의 핵심은 영도였다.

제츠의 핵심이 타이탄스의 마지막 희망에게 장타를 뽑아낸다면?

만약 그게 점수로까지 이어진다면 그 순간 이 경기의 무게추는 한쪽으로 크게 기울 수밖에 없었다.

[아아!! 갔습니다! 이건 갔어요! 정말 중요한 타석에서 정말 중요한 타구를 때려내는 유영도 선수! 이건 경기를 끝낼지도 모르는 타구입니다!]

[경기가 아니라 시리즈를 끝내는 타구일지도 몰라요. 조지 스넬이 이렇게 무너지면... 아직 퀄리티 스타트의 가능성은 있다지만... 글쎄요. 그걸로 타이탄스의 마지막 희망을 지킬 수 있을까요?]

[아... 조지 스넬, 마운드에 주저앉았습니다. 언제나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마운드를 지키던 조지 스넬! 그런 조지 스넬마저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 홈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마운드에 선 투수, 특히 선발투수는 경기의 흐름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거든요? 이 홈런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겠죠. 그래서 주저앉게 되는 거고요.]

금방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조지 스넬이 잠깐이라도 마운드 위에서 주저앉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물론, 흔히 말하는 올드스쿨 에이스, 낭만적인 에이스론에 의하면 에이스는 언제나 강인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실제로 조지 스넬은 그런 에이스였다.

야구팬들의 에이스에 대한 낭만을 충족해주는 올드스쿨한, 전형적인 에이스.

마운드 위에서 단 한 번도 불안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고, 상황의 어려움을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타이탄스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이보다 더 답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한 하늘을 지고 못 사는 숙명의 라이벌과 다른 곳도 아니고 한국시리즈 무대에서 처음으로 만난 시리즈, 1, 2차전 모두 9점 차로 대차게 깨진 연속 대패, 내부적으로는 선수단을 위협하기 시작한 체력적인 리스크, 마운드와 타선 모두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희망 등등...

그런 상황에서 조지 스넬의 등판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타이탄스는 2040시즌 한국시리즈의 운명을 조지 스넬에게 걸었고, 모든 것을 맡겼다.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5회까지 0-2, 2점 차 리드를 빼앗긴 데다가 절대로 살려줘선 안 되는 영도에게 솔로 홈런까지 내주었으니...

제아무리 조지 스넬이라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몸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조지 스넬의 주저앉는 모습... 지난 4시즌 동안 처음 보는 모습인 것 같은데, 이게 이번 시리즈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한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타이탄스는 기본적으로 강팀, 그것도 최강팀이었죠. 조지 스넬이 분명 특별하긴 하지만, 조지 스넬이 아니었더라도 그런 팀의 에이스가 좌절하는 모습은 쉽게 보기 어려워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별한 조지 스넬이 주저앉았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타이탄스가 처한 상황을, 제츠가 보여주는 강력함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누군가가 2040시즌 한국시리즈를 말할 때, “실질적으로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결정된 순간이다”라고 말해도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중요하고, 매우 충격적이면서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타이탄스의 마지막 희망, 조지 스넬이 무너졌다.

< 치명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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