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종의 미를 위해 >
[영도야, 지금 경기 보고 있지? 근데 뭔가 이상하다?]
“... 저희 헤어지고 한 3, 4시간 지났나요? 내일도 우리 볼 것 같은데...”
몇 주 뒤, 영도는 손성호의 전화를 받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 제츠는 2040시즌 감동의 정규시즌 우승을 달성했지만,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직행을 일궈낸 덕분에 약간의 휴식이 주어졌지만, 와일드카드 시리즈와 준플레이오프 시리즈가 순식간에 마무리되고 플레이오프 시리즈마저 생각보다 원사이드한 흐름이 이어지면서 예상보다 빠르게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타이밍이었다.
[아니, 생각보다 너무 쉽게 올라오는 것 같으니까 그렇지. 올라오는 팀이 우리 예상과 다를 것 같아서 그렇기도 하고.]
“뭐 예상외일 것까지야... 타이탄스 정도면 얼마든지 업셋 가능하죠. 애초에 리그 순위가 예상보다 너무 낮았던 거고, 후반기 막판에는 완전히 부활한 것도 있었고...”
제츠의 한국시리즈 상대는 타이탄스가 될 확률이 점점 높아졌다.
타이탄스의 시즌 순위는 4위였지만, 시즌 중후반까지 극심한 부진에 빠졌던 김진형과 뉴컴이 원인이었다.
시즌 후반 들어 뉴컴이 지난 시즌만큼은 아니어도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는 올라왔는데, 핵심은 김진형이었다.
후반기 들어 예년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온 김진형은 영도의 56호 홈런을 계기로 불필요한 경쟁심과 패배 의식을 버리며 한층 성장했고, 61호 홈런을 직접 눈앞에서 목격하며 또 한 번 성장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 여파를 정면에서 감당하는 건 와일드카드전 상대였던 대구 레이더스와 준플레이오프 상대인 대전 에이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젠 플레이오프 상대인 수원 매지션즈마저 김진형을 앞세운 타이탄스의 파도 앞에 휩쓸리기 직전.
[에휴... 알았다. 다음 상대 걱정하는 건 주장인 내 역할이지...]
“준비 안 한 것도 아니면서 엄살은... 매지션즈일 확률이 높다고는 생각했지만, 타이탄스 분석을 안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뭐 그렇긴 한데...]
“그리고 타이탄스가 올라오는 게 나은 것 아닙니까? 3위 팀이라면 모를까, 와일드카드전부터 최소 10경기는 치르고 올라온 팀인데.”
[... 그건 그렇지... 시즌 다 끝나고 치르는 단기전인 데다가 4위 팀은 휴식도 거의 취하지 못하니까...]
“우리 팀은 선발진보단 타선, 불펜 위주라 선발이 강한 매지션즈보다 타이탄스가 차라리 편하긴 하죠. 단기전에서 선발진 위주 팀보다 타선 위주 팀이 편한 것도 있고.”
[그건 그래도 다르지. 타선 위주 팀도 타선 위주 팀 나름이지, 지금 타이탄스는 상위타순부터 하위타순까지 거를 타순이 없고 김진형이라는 괴물도 있... 아... 우리가 할 말은 아닌가?]
“아니죠. 우리가 할 말은.”
타이탄스의 장점이 탄탄한 타선과 무시무시한 페이스의 해결사라면...
제츠가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탄탄한 타선 부분에선 비슷하거나 약간 밀린다고 해도 할말이 없지만, 적어도 가장 중요한 무시무시한 페이스의 해결사.
이 부분에선 어디 가서 꿀릴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중요한 선수라니까? 갑자기 4위 팀이 승승장구해서 올라오는데 가장 중요한 너도 와서...]
“자, 우선 한마디 하고 싶은데... 그거 결국 감독님이랑 코치님, 전력분석팀이 하는 거 아닙니까? 선배님도 딱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진 않은데요.”
[... 그렇긴 한데... 나도 이번 시즌 같은 기회가 또 올지 모르니까 좀 더 많이 노력을 해볼까, 하는 거지.]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경기에 나가서 안타를 치고 홈런을 치는 거죠. 이외의 다른 일들? 그건 그걸 하기 위해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두는 게 맞습니다. 선배님도 마음이 급하고 절박한 건 알겠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쉴 땐 확실하게 쉬면서 안타 하나 더 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아... 나도 그게 고민이긴 했지. 확실히 그게 나을까?]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선배님이 말한 대로 내가 그렇게 중요한 선수라면 오히려 더 100% 경기에만 집중해서 준비하는 게 맞죠.”
손성호는 리그 최고의 베테랑 중 한 명이고, 그 누구보다 경험 많은 선수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승 경험은 물론, 한국시리즈 경험도 이번이 처음이자 첫 번째 기회.
제아무리 천하의 손성호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께는 상담해보셨습니까? 선배도 지금 좀 흔들리는 것 같은데.”
[흘러가는 말로 잠깐 상담해본 적은 있지만... 아무래도 감독님도 나한테 어느 정도 기대고 있을 텐데 내가 약한 모습 보이는 것도 좀 별로인 것 같고 해서.]
베테랑에게도 베테랑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특히 손성호처럼 팬들, 동료들은 물론, 감독과 코칭스태프, 나아가 구단 상층부의 신뢰까지 한몸에 받는 베테랑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고충을 드러내는 게 어려웠다.
“... 하아... 그렇다면 저한테라도 말씀해보시죠. 저는 어차피 다음 시즌에도 없을 거고, 딱히 어디에 말 전할 사람도 없으니.”
[...? 고민거리가 갑자기 싹 사라지는데? 다음 시즌에 너 없는 거 확정된 거야?]
“이미 알고 계셨으면서 뭘. 선배님도 제가 다음 시즌에 메이저리그를 노릴 거라는 건 이미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알고는 있었지. 아마 못 갈 일은 없겠지? 골라가면 골라갔지...]
“예. 아마 그렇게 되겠죠. 그러니까 편하게 말씀해보세요.”
[그냥 별거 없어. 내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려면, 마지막 소원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고민인 거지.]
손성호의 고민에는 딱히 해결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정답도 없고,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결과가 좋으면 다행이지만, 나쁘면 선택하지 않은 방식을 후회할 수밖에.
영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들으면서 본인이 알아서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영도가 할 수 있는 전부.
[그래, 알았다. 덕분에 생각이 좀 정리되긴 하네.]
“말하니까 좀 후련하죠? 그럼 준비 잘해주세요. 나도 웬만하면 메이저리그 가기 전에 우승 반지 하나 끼고 싶으니까.”
[오냐. 네가 아무리 간절해도 나보다 간절할까. 어차피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할 테니 어떤 결론을 내리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겠지.]
“정답이네요. 그럴 거면 지금까지 내 시간 써가면서 무슨 소릴 들은 거지 허탈하기도 하고...”
[으하하하, 내 덕분에 네가 지금 이런 농담까지 할 수 있게 된 거잖아? 사회생활 가능한 인간 만들어줬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한숨은 쉬지만, 뭐 틀린 말은 또 아니었다.
성공적인 시즌과 커리어를 보낸 영향도 있지만, 합류한 그 순간부터 끔찍이 챙겨줬던 손성호의 몫도 분명 있었다.
누군가의 고민과 한탄을 자기 시간 써가면서 들어준다?
물론, 손성호도 좋은 사람인 만큼 시간을 많이 빼앗지 않았지만, 어쨌든 영도에겐 짧은 시간이나마 남에게 할애한 건 일대 사건이었다.
***
[6경기 23타수 11안타 3홈런 20타점. 포스트시즌 시작과 동시에 정규시즌의 아쉬움을 전부 털어낸 ‘티탄’ 김진형]
[와일드카드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포스트시즌 시작 후 7승 2패. 타이탄스의 파도는 제츠까지 덮칠 수 있을까]
[타이탄스의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은 요한 도밍게즈 될 확률 높아... 한국시리즈의 큰 변수 될 듯]
[5전 3선승에서 홀로 2승 담당한 슈퍼 에이스, 유형근. 비록 매지션즈의 시즌은 끝나지만, 유형근의 야구는 이제부터]
[이미 슈퍼 에이스였는데... 기량은 슈퍼 에이스, 나이는 유망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유형근의 성장세]
[‘절대영도’ vs ‘티탄’. 부활한 거인, 리그 절대자 상대로 이번에는 승리할 수 있을까]
수원 매지션즈의 자랑이자 단기전에서 유리하단 평가를 받게 한 장본인 유형근은 팀이 업셋당하는 와중에도 제 몫을 완벽하게 해냈다.
1차전에 등판해 중요한 승리를 따냈고, 2연패 후 탈락 위기에 처했을 때도 3일 휴식 후 올라와 4차전 승리를 가져왔다.
결국, 5차전에서 제이드 벤슨이 5전 3선승 시리즈에서 2패를 기록하며 무너졌지만, 유형근이라는 선수의 위력을 확실하게 보여준 시리즈였다.
“드디어 김진형 선수가 자기 모습 보여주네. 시즌 막판부터 난리였지만.”
“그러게. 시즌 전 분석했을 때 생각했던 수준이지. 원래 저 정도는 해주는 선수니까.”
“아닐걸?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니었지. 이번 시즌 후반기 성적이 진짜 자기 기량인지, 흐름을 탄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음 시즌에도 이 정도 실력을 보여주면... 다음 시즌 끝나고 메이저리그행이야. 오! 말 나온 김에 계약해야 한다고 건의해볼까?”
“... 나쁘지 않지. 지금처럼만 꾸준히 해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평균적인 3루수 정도는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유형근이 그렇게 뛰어난 활약을 펼쳤어도 시리즈의 주인공은 김진형이었다.
그만큼 김진형의 활약이 대단했고, 포스트시즌뿐 아니라 시즌 막판부터 이어진 활약이었기에 한국시리즈에서도 충분히 지금과 같은 활약을 보여줄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김진형은 영도 때문에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지만, 반대로 유형근, 에디 렉스 등과 더불어 영도 덕을 가장 크게 본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영도를 지켜보기 위해 KBO를 챙겨보다 못해 직접 한국까지 날아온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에게 눈도장을 받았다는 것.
영도를 제외하면 1순위는 단연 유형근이었지만, 김진형 역시 꽤나 고평가를 받았다.
스카우터들이 한국을 찾은 시점에선 이미 예년의 활약 정도를 보여주었고, 이후에는 전보다 더 발전한 모습,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며 슬슬 메이저리그에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형한테는 안 되지. 김진형이 타이탄스의 핵심이면 제츠가 질 일은 없겠네? 4연승으로 가볍게 끝내고 빨리 다음 시즌 준비해야지. 내가 협상하는 동안 형은 좀 쉬기도 해야 하고. 후반기에 좀 힘들었잖아?”
“쉽진 않았지. 그럼 한국시리즈 빨리 끝내고 너 일하는 꼴 좀 봐야겠다. 너 일하는 동안 쉬면서 좀 놀려줘야지.”
“오... 우리 형, 진짜 많이 변했네? 그런 자신감 넘치는 대사를 얼마 만에 듣는 거야?”
김진형과의 맞대결 구도에서 긴장하기엔 이제 영도가 너무 거물이 되어버렸다.
타이탄스의 다른 누군가가 미치지 못하고 플레이오프까지 그랬던 것처럼 김진형에게 기댄다면...
“오늘부터 딱 5일. 4경기로 끝내고 미국가서 다음 시즌 준비하자고. 집을 어디에 구해야 하나... 계약하기 전까진 호텔에서 지내야 하나.”
“그게 낫겠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은 5일 동안 야구만 생각하라고. 아니, 이 형은 왜 중간이 없어? 너무 야구만 생각하지 말라니까 이제 야구해야 할 때 다른 생각을 하네.”
한국시리즈.
생각보다 쉽게 마무리될 수도 있었다.
***
[서울 제츠의 선발은 부동의 에이스 타일러 로즈, 플레이오프에서 이미 조지 스넬을 소모한 서울 타이탄스는 2선발 요한 도밍게즈를 1차전 선발로 예고했습니다.]
[조지 스넬은 아마 3차전은 되어야 선발로 나올 수 있을 것 같고, 무리해서 3일 휴식 후 등판한다 해도 2차전 선발이 고작]
[타일러 로즈에게 2선발을 붙인 건 과연 옳은 선택이 될까? 땜빵 선발을 붙이고 2차전 도밍게즈, 3차전 조지 스넬이었어야 된다는 의견도]
김근수 감독 사전에 전략적으로 버리는 경기 따위는 없었다.
물론, 한국시리즈 1차전을 전략적으로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제츠가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땜빵 선발 두세 명을 묶어 2, 3이닝씩 맡길 수도 있었지만, 김근수의 선택은 조지 스넬 다음으로 믿음직한 투수, 요한 도밍게즈의 출격이었다.
타일러 로즈의 무게감을 감안하면 차라리 여기서 땜빵을 붙이고 2차전에서 2선발끼리 붙인 뒤, 3차전 류종인 선발 경기에 조지 스넬을 붙이는 게 나을 수도 있긴 했다.
일각에서 그런 의견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결국 모든 건 결과가 말해주는 일.
정답은 없었고, 김근수의 선택은 이쪽일 뿐이었다.
“자, 나도 한국시리즈가 처음인데, 너희들 대부분이 그렇겠지.”
“저... 형. 나는 다른 팀에서 우승도 해봤는데...”
“나도...”
크로우즈의 전성기 당시 막내급으로 우승을 경험했던 한영훈과 송하경 등 일부 선수들은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이 있긴 했다.
한국시리즈 로스터 26인 중 5명 정도였고, 그중 세 명은 거의 출전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제츠에선 극히 희귀한 존재였다.
“다들 너무 신경 쓰지 마. 당연히 나도 알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정규시즌처럼 해라? 누군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한다면 난 개소리하지 말라고 말해줄 거야.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거든.”
한영훈과 조규영 등 장난기 넘치는 선수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그들도 분위기라는 걸 파악할 줄 알았다.
지금은 손성호에게 무게감을 더해줄 때라는 걸.
“실컷 긴장하고 실컷 부담가져.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안 들릴 테니까. 우리 자연스럽게 풀리길 기대하자고.”
손성호다운 말이었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도 위트를 잃지 않은, 권위의식 따위 버리고 솔직하게 다가가는 출사표.
“누군가 홈런 하나 쳐준다면... 훨씬 쉽겠지.”
그 말에, 선수단 전원의 시선이 영도에게로 향했다.
“참나... 그거 퍽 최고참다운 말이네요. 아주 믿음직스러웠어요.”
“으하하하, 부탁한다, 영도야! 내가 너 합류한 순간부터 왜 이런저런 시중 다 들어주면서 비위 맞춰줬는데? 그게 다 이 순간 너한테 업혀가려고 그런 거라니까? 크하하하.”
“에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제츠 유니폼을 입어서... 어쩔 수 없죠. 내 업보니까 내가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유쾌하고 익살맞게 반응하는 영도의 모습을 보며 놀랐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영도는 그저 전보다 여유가 생겼고, 그 덕에 손성호의 유머에 피식이라도 웃었을 뿐이었다.
‘올... 웬일? 이런 식으로 분위기도 풀어줄 줄 알아?’
손성호는 그걸 보고 영도가 의도적으로 팀 분위기를 풀어주려 한다고 오해했을 뿐이고.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영도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갔다.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준다고 했던가.
프로 스포츠에선 아마 이렇게 바뀌겠지.
운동만 잘하면 뭘 하든 의미를 붙여준다고...
< 유종의 미를 위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