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전극 >
‘빌어먹을... 빌어먹을!!’
안성흠은 덕아웃에 앉아 그라운드를 노려보았다.
숙여지려는 고개를 억지로 치켜들고, 돌아가려는 고개를 억지로 고정하고,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치켜떴다.
그만큼 그라운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대체 내가 왜... 내가 왜 우리 세일러스를 구해내지 못한 거냐고.’
9회 초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스코어는 2-0.
8이닝 4피안타 2볼넷 11탈삼진 2실점.
3회 말 어경준에게 내준 내야 안타와 2루타, 그리고 선두타자로 등장한 영도에게 6회 말 내준 솔로 홈런.
이게 안성흠이 내준 실점의 전부였고, 24개의 아웃 카운트 중 삼진으로만 무려 11개를 잡아낸 굉장한 호투였다.
8이닝 2실점이면 KBO의 우완 에이스이자 세일러스의 절대적 에이스로서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에이스의 의무가 팀에 승리를 안겨주는 것이라지만, 8이닝 2실점을 해냈는데 승리하지 못하는 것까지 에이스의 탓으로 돌리는 건 너무 야박했다.
8이닝 2실점, 단언컨대 오늘 안성흠은 에이스다운 훌륭한 호투를 펼쳤다.
[뚝 떨어지는 포크볼로 삼진! 선두타자 최찬우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제츠의 클로저, 송하경! 압도적이진 않지만, 안정적인 클로저라고 평가받는 송하경 선수, 오늘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일러스로서는 오늘 경기가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 제츠가 6번 출루에 2점을 뽑아냈고, 세일러스는 4번 많은 10번이나 출루했는데 무득점. 안성흠 선수가 혼신의 역투를 보여주는 동안 기회가 꽤 많았거든요? 타자들도 많이 미안할 거예요. 안성흠 선수에게도, 팬들에게도...]
에이스가 팀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경기가 끝났을 때 투수가 감정을 표출해선 안 된다.
특히 잘 던진 투수가 감정을 표출하는 건 야수들에게 미안하라고 말하는 것밖에 안 된다.
안성흠이 고개를 숙이지도, 돌리지도, 눈을 감지도 못하는 이유였다.
프로 선수라면 다들 그렇겠지만, 특히 에이스는 신경 써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냥 가장 잘 던지는 투수가 에이스고, 요즘은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2040년에도 진정한 에이스에 대한 로망은 남아 있었다.
‘제기랄... 제기랄...’
그래서 안성흠은 안 그래도 가슴 속에서부터 천불이 올라오는데, 쉽게 눈을 감을 수조차 없어 눈이 뻑뻑해지다 못해 아플 정도였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불길과 계속된 공기 노출로 뻑뻑해진 눈을 쉽게 감을 수조차 없는 에이스의 숙명.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대체 어쩌다가...’
결국, 그렇게 기를 쓰고, 눈조차 감지 않으며 그라운드를 노려보던 안성흠의 눈이 감겼다.
더 이상 그라운드를 노려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
사실, 오늘 경기는 제츠와 레이더스, 세일러스와 매지션즈가 서로 운명 공동체로 묶인 경기였다.
특히 세일러스와 매지션즈는 두 팀이 동시에 패배하지만 않으면 각각 5위와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외국인 선수 세 명을 동시에 완벽하게 뽑으면서 말도 안 되는 돌풍을 일으켰지만, 시즌 막판으로 오면서 분명 과부하가 걸린 모습을 보여줬던 레이더스이기에 두 팀 모두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마지막 경기에 임했지만...
“... 씨발!!”
구석에서 홀로, 혹은 그라운드에 나선 선수들에겐 보이지 않은 곳에서 매지션즈vs레이더스전을 지켜보던 구단 직원이 격한 분노를 표출했다.
“... 역전된 거야?”
“예... 레이더스가 9회 초에...”
안성흠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고개까지 떨구었다.
***
‘여기선 내가 해야 해. 다른 애들은 몰라도 나는 해야 한다고...’
아직 반대편 경기 소식을 듣지 못한 세일러스의 상징, 박우용.
세일러스 역시 프런트의 본격적인 삽질과 정치질이 시작되기 전에는 ‘홈런 군단’을 앞세운 공격 야구로 나름 잘 나갔던 시절도 있었다.
그 당시 입단해 당시 시절을 겪어본 마지막 세대로서 암울해진 팀을 굳건히 지킨 세일러스의 상징이자 프랜차이즈 스타, 박우용.
제츠의 손성호와 세일러스의 박우용은 소속팀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입지, 의미가 비슷했다.
‘벌써 9년이야, 9년. 이번 시즌까지 실패하면 10년 채우는 거라고. X발...’
9년째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부산 세일러스.
그런 팀에서 지난 시즌 36홈런을 포함해 14년 동안 통산 319홈런을 터뜨린 KBO 대표 강타자 박우용.
박우용도 리그에서, 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있다 보니 안성흠과 마찬가지로 팀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보니 레이더스와 매지션즈전의 스코어를 전해 듣진 못했지만, 이 경기를 이겨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송하경의 포크볼! 공의 윗부분을 건드리고 만 박우용 선수의 타구!]
[아!! 박우용 선수가 내야 땅볼을 때리면!!]
‘아이, 씨X...’
홈런타자답게 187cm, 126kg의 거구인 박우용.
그에게 내야 땅볼이란 곧...
‘와... 저기까지밖에 못 갔다고?’
화려하진 않지만, 안정적인 스타일의 클로저, 송하경.
그의 결정구는 포크볼이었고, 투수와 타자의 수 싸움은 투수가 더 많이 승리하는 게 정상이었다.
우타자 박우용이 포크볼에 타이밍을 빼앗기면 히팅 타이밍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고, 그가 때려낸 내야 땅볼은 3루수, 영도의 글러브에 안착했다.
‘내가 그래도 박우용 선배보다는 빠르겠군.’
발이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거포 중에선 나쁘지 않은 편에 속하는 영도의 발.
도긴개긴이겠지만, 그래도 박우용을 보면서 나름대로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1루에서!! 아웃!! 아웃입니다! 서울 제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갈길 바쁜 부산 세일러스를 잡아내며 일단 본인들의 할 일을 마쳤습니다!]
[지금 반대편 경기도 심상치 않거든요? 이거 잘하면, 정말 어쩌면 역대급 시즌의 역대급 마무리가 나올 수도 있겠는데요!?]
박우용의 아웃으로 일단 경기는 끝났다.
오늘 경기에서 이기고 매지션즈와 레이더스전 결과를 기다려야 했던 서울 제츠.
일단, 리그 우승은 이미 제츠의 손을 떠났다.
이제 운명 공동체, 레이더스에게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
<9회 초 터진 양한일 선수의 결정적인 쓰리런 홈런으로 5-3 역전에 성공한 대구...>
“““우와아아아아아아!!!!!!!!!!!!!!!!!!!!!!!!”””
세일러스전에서 2-0의 짜릿한 승리를 거둔 서울 제츠.
짜릿한 승리였고, 중요한 승리였지만, 그 승리를 즐길 시간은 없었다.
이 승리가 정말 중요한 승리, 핵심적인 승리가 되기 위해선 일루션 스타디움에서 레이더스도 승리를 거둬줘야 했기 때문.
때문에 제츠는 경기 종료 후 상대 팀 세일러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바로 대형 전광판에 매지션즈와 레이더스 경기를 띄웠다.
사실, 세일러스 역시 그 경기에 포스트시즌 진출이 걸려 있었기에 대놓고 지켜보진 않았지만, 귀가 준비를 최대한 천천히 하면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중이었다.
제츠와 세일러스 모두 일루션 스타디움 경기 상황을 알고 있었다.
물론, 경기 승리 후 대형 전광판에 일루션 스타디움 경기를 띄우기로 공지가 되어 있어서 매지션즈가 이기고 있었다 하더라도 띄우긴 띄웠겠지만...
지금은 레이더스가 리드를 잡았고, 전광판에 경기 상황이 뜨는 순간 2만여 제츠 팬들은 어마어마한 함성을 터뜨렸다.
흔히 쓰는 수식어이기도 하지만, 이번엔 진짜로 잠실 올림픽 파크 전체가 지면에서 1m는 떠오른 듯했다.
“하아...”
“......”
경기 종료 후에야 겨우 사정을 듣게 된 박우용은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최선을 다해 마음을 정리하려 했지만, 그래도 한 조각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안성흠은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제츠와 매지션즈의 운명은 물론, 레이더스와 세일러스의 운명도 걸린 경기였기 때문에 영상이 뜬 순간 희비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매지션즈 입장에선 리카르도 카스티요의 호투로 리드를 잡은 채 9회를 맞이하면서 승리를 확신했을 겁니다. 반성훈이라는 리그 최고의 클로저가, 이번 시즌 0블론의 수호신이 버티고 있으니 당연히 그랬을 텐데...>
<그러게요. 이번 시즌 첫 블론이 하필이면...>
<그런 만큼 양한일 선수가 대단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36세의 나이고, 분명한 하락세가 기량으로, 성적으로 분명히 보였는데, 이렇게 중요할 때 결국 레이더스를 구원한 건 양한일 선수였습니다.>
<이번 시즌 OPS 0.817에 27홈런. 다들 나이가 들었고, 하락세가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그게 이 성적입니다. 이게 양한일이에요.>
세일러스를 넘어서는 최악의 프런트로 대략 6개월 정도 리그의 논란이란 논란은 다 몰고 다녔던 레이더스.
이후 프런트가 물갈이되긴 했지만, 대단한 선수들을 데리고 3년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그들이 전부 다 팀을 탈출한 이후에는 좋은 선수가 없어서 2년간 실패.
36세로 레이더스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둔 레이더스의 상징, 양한일은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마지막 사명이라 여겼고, 이뤄내기 직전이었다.
[아... 양한일 선수가 아주 엄청난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사실, 양한일, 손성호, 박우용, 이 세 선수가 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비슷하고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렇게 희비가 갈리는 것 같습니다.]
[박우용 선수는 오늘 2안타를 때려냈지만, 결정적인 무언가가 없었고, 양한일 선수는 역전 쓰리런을 때려냈죠. 손성호 선수는... 김동구 선수와 유영도 선수, 두 후배에게 큰 도움을 받은 느낌이고요. 물론! 물론, 오늘 한 경기에서 그렇다는 거지, 시즌 전체로 따지면 손성호 선수의 집념이 정말 빛났죠.]
경기는 끝났지만, 제츠 경기 중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몇 분만 더 중계하면 제츠의 정규시즌 우승이란 KBO 최고 화젯거리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상황.
KBO에서 이런 경기를 중계하는데 우승 장면을 놓친다?
바로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게 훨씬 나았다.
<심창규!! 심창규!! 마지막 타자 양용명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대구 레이더스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으아악!!!! 으아아아악!!!!! 우와아아아아아아!!!!!”””
“다 비켜!! 다 비키라고!! 감독님!! 감독님!!”
“영도야! 영도--------!!!”
“됐어! 됐다고!! 우승이야, 우승!!!!!”
“미친!! 미쳤어! 우리가 우승했어!! 제츠가!!”
대구 레이더스의 클로저, 심창규가 매지션즈의 마지막 타자 양용명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순간, 이번엔 잠실 올림픽 파크가 지면에서 2m 정도 뛰어올랐다.
이번엔 관중들은 물론, 제츠 선수들도 이에 일조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이 순간을 꿈꿔왔던 손성호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프랜차이즈는 아니지만, 제츠 생활이 꽤 길었던 한영훈도 손성호에게 공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들 외에도 눈물을 보인 선수는 꽤 많았다.
그만큼 제츠는 그동안 여유롭고 놀기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우승에 대한 갈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서울 제츠!! 서울 제츠가 21년 만의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하며 23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한 중요한 고지에 올라섭니다!!]
[아아, 손성호 선수를 비롯해서 여러 선수들이 눈물을 보이네요. 이게 제츠와 제츠 선수들이 가진 오랜 아픔이에요. 같은 입장에 있었던 선배로서... 저도 목이 메네요.]
‘후우... 이제 포스트시즌인가.’
영도도 사람인지라 동료들이 이렇게까지 기뻐하는데 감정적인 동요가 없을 순 없었다.
하지만 이를 애써 무시하면서 평소처럼 미래를 계산했다.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은 선수를 평가할 때 꽤나 중요하게 적용되는 부분.
다음 시즌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는 영도에게 이번 한국시리즈는 수십 년 동안 제츠를 응원하며 바라왔던 꿈의 무대임과 동시에 향후 커리어를 위해서도 중요한 무대였다.
2040시즌, 서울 제츠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이뤄진 역사에 남을 역전극으로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냈다.
< 역전극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