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비완료 >
“감독님... 이것까지 다 예상하고 올려보내신 겁니까?”
“... 맞다고 말하고 싶네만...”
부산 세일러스와의 2040시즌 마지막 경기.
잠실 올림픽 파크로 부산 세일러스를 불러들인 서울 제츠의 감독, 구승배는 기뻐하는 듯하면서도 뭔가 애매한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선수가 김동구가 맞아? 정말로?”
“내가 뭐랬어!! 우리 동구도 5, 6년 전에는 특급 유망주였다고! 언제까지 그렇게 쭈그리일 줄 알았어!? 난 믿었어! 동구 믿었다고!”
“... 얘가 어제 선발 발표 났을 때 제일 거품 물지 않았었냐? 정규리그 우승 할 생각 없는 것 같다고, 구승배 노망났으니 당장 잘라야 한다고?”
“그러니까 말이다. 저 속도 없는 새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규시즌 우승을 눈앞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잠실 올림픽 파크를 찾은 제츠 팬들 역시 복잡한 표정들이었다.
물론, 원래부터 김동구를 응원하던 극소수의 팬들이나 김동구의 나름 대단했던 아마추어 시절을 기억하는 하드코어 팬들은 그토록 고대하던 일이 벌어졌다는 기쁜 표정이긴 했다.
구승배 감독의 복잡한 표정 역시 같은 이유였다.
믿음직한 선발 자원이 전부 소모되면서 어쩔 수 없이 올려보낸, 위장 선발에 가까웠던 김동구의 등판.
대략 3, 4이닝 2실점 정도만 해주면 대성공이고, 그걸 못 해주면 마찬가지로 5선발 자원인 이선재, 최기영, 전상일 등을 연달아 올릴 계획이었지만...
[초구 노리고 들어온 박우용! 크게 날아갑니다! 좌익수! 좌익수 김원상이 따라가서... 잡아냅니다! 김원상의 호수비! 끝까지 따라가서 잡아내고 펜스에 몸을 날립니다! 잠실 올림픽 파크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호수비!! 또 한 번 야수가 김동구 선수의 어깨를 가볍게 해줬습니다.]
[김원상 선수도 발이 빠르고 수비 범위가 괜찮아서 중견수로 나오긴 했지만, 그땐 수비에서 평가가 별로 안 좋았잖아요? 그런데 어경준 선수가 주전으로 자리 잡으면서 좌익수로 가니까 리그 최고 수준의 좌익수 수비수가 되었어요.]
넓디넓은 잠실 올림픽 파크의 외야.
등장과 동시에 리그 탑급 수비력을 인정받은 중견수 어경준과 각각 코너 외야에서는 리그 정상급 수비력을 자랑하는 우익수 박윤형, 좌익수 김원상.
이번 시즌 제츠의 돌풍에는 영도의 대폭발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잠실 올림픽 파크에 최적화된 외야진의 완벽한 리빌딩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조규영을 중심으로 하면서 영도까지 기대를 훌쩍 뛰어넘은 내야 수비도 대단했고.
[그나저나 어느새 3회 초가 끝났습니다. 3회 초가 끝난 지금 스코어는 0-0. 김동구 선수가 예상 외의 좋은 피칭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김동구 선수 좋은데요? 물론, 지금처럼 불안한 타구들도 꽤 나오긴 하고, 야수들의 도움도 오늘따라 많이 나오긴 하지만, 김동구 선수의 피칭이 좋아요.]
[이번 시즌 평균 자책점이 거의 5점대 중반에서 놀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면 거의 3이닝마다 2점씩 내줬다는 건데, 이번 경기는 3이닝 무실점. 기록도 기록이지만, 제 기억에는 내용도 이번 시즌 최고인 것 같습니다.]
[만약 앞으로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다고 하면 과거 1차 지명 당시의 기대치까진 채우기 어렵겠지만, 잠실 올림픽 파크에서만큼은 분명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선발 로테이션에 의미 있는 도움을 줄 수 있는 투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동구 선수, 나름 화려하게 프로 생활을 시작한 선수고, 기대받았던 유망주인 만큼 팬 여러분의 기억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선수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26세로 유영도 선수랑 동갑이에요. 아직 유망주라고 충분히 불릴 수 있는 나이죠.]
김동구는 아마추어 시절 최고 구속 149km, 평균 구속 143km 정도를 기록했던 파워 피처 유망주였다.
주 무기는 체인지업, 커브와 투심도 던질 줄 알았다.
문제는 아마추어 시절 혹사로 인한 수술과 재활, 부진한 1차 지명 유망주를 부활시켜 업적으로 만들려 했던 투수코치들의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투구폼 변경 등.
이로 인해 자포자기와 패배의식을 갖게 된 후 급격하게 무너졌던 과거의 특급 유망주.
비록 그토록 자랑하던 강속구는 오랜 방황 끝에 5km 이상 줄어들었지만...
윤무열과 조명근의 이탈, 오랜만의 중요 경기 선발 등판으로 정신이 바짝 든 과거의 특급 유망주는 오랜만에 그 편린을 보여주었다.
“동구야. 어때? 얼마나 더 던질 수 있겠어?”
이렇게 예상외의 호투를 보여주다 보니 제츠 벤치도 계획을 싹 갈아엎고 새로 짤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김동구가 과연 언제까지 끌어줄 수 있을 것인가였다.
3이닝 무실점이고 볼넷이나 피안타도 많은 편은 아니지만, 야수들의 호수비가 꾸준히 나올 정도로 아주 압도적인 피칭은 또 아니었으니 투수 교체 타이밍이 중요했다.
기대하지 않은 투수의 호투에 너무 흥분했다가는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대하지 않은 이득을 실질적인 이득으로 보상받기 위해선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해야 했다.
“후우... 다음 이닝까지만 전력으로 던지면서 버텨보겠습니다.”
“...! 다음 이닝까지만? 그럼 5회부터는?”
“5회부터는 넘기겠습니다. 지금 제 컨디션으로 더 욕심내는 건 무리입니다. 그래서 1회부터 전력으로 던졌고, 다음 이닝이 한계일 것 같습니다.”
“너... 뭔가 달라졌구나.”
김동구처럼 상황이 어려운 투수가 오늘처럼 컨디션 좋은 날을, 우주의 기운을 받은 날을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
선수로서, 나아가 인간으로서 한층 더 성숙하지 않았다면 쉽게 내릴 수 없는 판단이었다.
김동구는 코칭스태프에게 큰 믿음을 주지 못했던 선수.
김동구의 의사를 물으면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크게 그 의사를 반영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자신의 날을 맞은 특급 유망주 출신 선수다 보니 본인이 섭섭할 일은 웬만하면 만들지 않으려 했는데...
본인이 이렇게 나와주면 마음이 편했다.
“정말인가? 정말로 다음 이닝까지만 던지겠다고 했다고?”
“예. 그렇다고 합니다. 1회부터 계속 전력으로 던져와서 4회가 마지막일 것 같답니다.”
“동구가 마지막으로 이 정도 던진 날이 기억도 안 나는데... 이런 날을 포기할 수 있다니.”
“아무래도 무열이랑 명근이가 그렇게 된 걸 보고 본인도 느낀 게 있지 않겠습니까?”
조명근과 윤무열, 그리고 김동구.
이외에도 몇몇 선수가 있긴 하지만, 제츠의 팀 분위기를 가장 크게 해치는, 나쁘게 말해 암적인 존재는 이 세 선수였다.
팀이 기세를 타고 우승까지 도전하는, 우주의 기운을 받은 시즌.
심지어 유영도라는 연습벌레가 팀 내 최고의 선수로 등극하고 손성호라는 최고참이자 팀의 상징인 선수가 그 선수를 전폭적으로 밀어주며 함께 하는 시즌.
제츠가 정말 오랜만에 진지하고 성실한 팀 분위기를 가진 시즌이었고, 감독은 내년 시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회에 팀의 암적인 존재들을 모조리 날려버리려 했던 구승배 감독.
“후후... 영도 덕분에 다음 시즌도 어느 정도 안정적일 수 있을 것 같군.”
“그럴 것 같습니다. 슈퍼스타 한 명이 이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칠 줄이야...”
“하하하, 좋아! 그럼 호재부터 올리지. 이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해냈는데, 우리도 영도한테 적어도 반지 하나는 끼워줘야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전해두겠습니다.”
2040시즌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
제츠는 김동구를 마지막으로 그동안 팀 분위기를 좀 먹고 해치던 3인을 전부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빛의 속도로 내부정리를 끝마친 제츠는 이제 외부를 정리하러 나섰다.
한 게임 차 밀린 2위에서 KBO를 대표하는 우완투수, 안성흠을 맞아 논개라 평가받았던 김동구가 3회까지 팽팽하게 이어준 상황.
김동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렇게까지 끌어줬으면 이젠 나머지 팀원들도 보답이라는 게 있어야 했다.
어쨌거나 야수로서 선발투수에게 보답하는 방법은 비록 그 선발투수가 승리 조건을 채우지 못했다 해도, 5회 전에 내려간다 해도 결국 하나였다.
승리, 그리고 이 경기의 궁극적 목표인 정규시즌 우승.
이젠 야수들이 해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세일러스 불펜이 리그 최약체 후보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도 대놓고 불펜 싸움으로 끌고 갈 상황은 아니지.’
불펜 싸움으로 가면 적어도 리그 중위권은 되는 제츠가 훨씬 유리한 게 사실이긴 했다.
다만, 어쨌든 세일러스는 안성흠이라는 절대적인 에이스가 마운드를 지키고, 제츠는 5회부터 불펜을 가동해야 한다는 게 변수였다.
아무리 불펜이 나쁘지 않아도 5이닝을 전부 필승조로 끌고 가는 건 불가능하고, 적어도 2이닝 정도는 필승조 외의 투수가 맡아줘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안성흠은 이런 중요한 경기에선 7회, 무리하면 8, 9회까지도 혼자 맡아주는 투수.
이에 대한 부담감은 공격과 수비 등 다양한 부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부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기에 마운드 싸움에서 한동안 열세를 안을 수밖에 없는 제츠가 선취점을 더욱 절실하게 원했다.
[행운의 안타로 1루 출루에 성공한 어경준 선수, 일단 주자 있는 상태에서 유영도 선수에게 타석을 넘겨줘야 한다는 미션은 달성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유영도 선수의 차례인데... 과연 유영도 선수가 여기서 한 방을 날려줄 수 있을까요? 최근 유영도 선수는 타격감이 좋은지 나쁜지도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대 투수들의 지독한 견제에 시달렸거든요?]
[물론, 성적 자체는 여전히 좋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유독 출루율이 눈에 확 띄긴 하죠. 과연 이렇게 중요한 타이밍에 타격감을 보여줄 수 있을지...]
[안성흠 선수라면 2사 1루에서 거르진 않을 거예요. 물론, 상대전적은 꽤 안 좋은 편이지만...]
처음 계획대로 김동구에게 2, 3점 정도 뽑아냈다면 세일러스도 여기서 조금 더 여유롭게 대처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0-0인 상황에서 영도가 무섭다고 스코어링 포지션을 내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길게 가봤자 나한테 좋을 거 없어. 첫 번째 스트라이크, 그것만 노린다.’
영도도 상대 투수들의 지나친 견제에 아예 영향을 안 받을 순 없었다.
스트라이크는 세 개, 볼은 네 개로 타석이 끝나는 만큼 한 번이라도 볼 카운트의 우세를 내주면 타자 쪽에선 생각할 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어차피 지금의 KBO처럼 어느 정도 수준 차가 느껴지는 리그라면...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게 차라리 마음도 편하고 성적 면에서도 나을 수 있었다.
‘너도 최대한 오래 던지고 싶겠지...’
그리고 세일러스의 절대적 에이스, 안성흠은 오늘 경기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승리를 이뤄내고 싶을 터.
불펜이 취약한 세일러스의 에이스이기 때문에 더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싶을 테고, 그러려면 스트라이크를 보다 적극적으로 던져야 했다.
유영도에게만큼은 안 그러고 싶겠지만...
관성의 법칙은 물리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관성이라는 게 있을 때가 많다는 이야기고...
[초구 타격!! 멀리! 멀리 뻗습니다! 너무 잘 맞아서 궤도가 조금 낮은데... 좌측 담장을 다이렉트로 때리는 장타 코스!]
[너무 잘 맞았어요! 안성흠 선수도 초구 스트라이크는 언제나 정답이긴 한데, 그래도 유영도 선수한테 너무 정직했던 것 아닐까요?]
[무엇보다 지금 1루 주자가 어경준 선수입니다!! 어느새 3루 밟고 홈으로! 유격수 최현수!! 던지지 못합니다! 선취점! 유영도 선수, 정말 중요한 순간, 필요한 순간에 1타점 적시 2루타를 때려냅니다!]
[역시 해결사! 해결사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꼭 해결을 해주는 선수죠! 그래서 유영도 선수가 해결사이자 제츠의 구세주인 거예요!]
역시 김동구의 인생 투에 보답해준 건 제츠의 절대적 해결사이자 핵심, 그리고 그의 동기인 영도였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본인의 미국행으로 인해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어른들의 욕심에 노출되어야만 했던 망가진 친구를 새로운 출발선에 세워준 적시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정규시즌 우승을 위해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하는 경기.
3회 말 시점에서 영도의 적시 2루타가 터지며 제츠가 1-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 준비완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