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막다른 길 > (76/200)

< 막다른 길 >

[어제 유형근 선수가 8이닝 무실점의 기염을 토하면서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반성훈 선수도 1이닝을 완벽하게 막아내면서 세이브를 기록했고, 덕분에 이번 시즌 유형근 선수의 제츠 상대 전적은 2승 3패가 되었습니다.]

[사실, 자존심을 좀 많이 구겼죠? 유형근 정도의 선수가 한 팀을 상대로 네 번이나 등판했는데 1승 3패. 1승 4패가 되는 건 진짜 절대로 피해야 하는 일이었고, 실제로도 피해냈죠. 유영도 선수를 계속 걸러준 게 큰 효과를 봤고요.]

제츠도 ‘여름 제츠’ 시기가 많이 아쉬웠겠지만, 매지션즈 역시 억울한 게 없지 않았다.

유형근을 한 팀을 상대로 네 번이나 내보냈는데 고작 1승 사냥에 그친다?

제츠전에 등판 일정을 맞추지 않고 다른 팀 상대로 내보냈다면 적어도 세 경기 중 두 경기는 잡아냈을 확률이 높았다.

괜히 맞대결에서 2승짜리 승리를 얻으려다가 오히려 6승을 빼앗긴 느낌.

그것만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제츠와의 승차를 더욱 벌릴 수 있었을 테니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나마 팀 완봉승을 달성한 어제 경기 덕분에 그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했지만...

[어제 1점도 뽑아내지 못했던 게 자존심이 많이 상한 걸까요? 제츠 타선, 하루 만에 완전히 다른 팀인 것처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이드 벤슨이 유형근 선수에게 밀려서 2선발이지만, 기록을 보면 타일러 로즈에게 크게 밀리지 않거든요? 물론, 주로 에이스를 상대한 타일러 로즈와 2선발을 상대한 벤슨 사이에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비슷한 성적인데... 오늘 제츠 타선이 벤슨을 너무 잘 공략하네요.]

아직 조명근의 2군 강등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지만, 제츠 선수들마저도 아직 확실히 전해들은 건 없었지만.

프로 무대에서 몇 년 이상 경력이 쌓인 선수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손성호와 조명근이 충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구승배 감독의 성향이면 어떤 일이 이어질지 다들 눈치챘다.

아무리 선수단 내부에서 인심을 잃었고, 이런저런 트러블을 일으킨 트러블 메이커라지만, 계속 말해왔던 것처럼 조명근은 나름의 입지가 있는 선수였다.

그 정도의 베테랑이, 제츠에서만 16년을 보낸 원클럽맨이 2군으로 날아갈 상황이었으니 선수들에게 영향이 없을 수 없었다.

손성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충격 요법이 되어버린 것.

물론, 구승배 감독의 의도 중 하나가 충격 요법이었던 건 맞았다.

손성호가 가진 힘 덕분에 구승배 감독의 결단이 알려지기도 전에 효과를 발휘한 건 예상외였지만.

[제이드 벤슨이 4회도 마치지 못하고 내려갑니다. 드디어 유형근 선수가 제츠 울렁증, 정확히는 유영도 울렁증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뒀지만, 이번엔 제이드 벤슨 쪽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직 경기 초반이라면 초반이지만... 글쎄요. 분명한 건 매지션즈, 어려워 보입니다.]

[벌써 점수 차이가 6점까지 벌어졌는데, 최근 제츠의 기세를 보면 6점은 꽤 안정적으로 보이죠. 두 팀은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다툴 운명인가 보네요.]

[마지막 2연전도 1승 1패로 나눠 가지면 당연히 마지막까지 경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경기가 끝나면 시즌 종료까지 겨우 네 경기 남는데 한 게임 차.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시선을 뗄 수 없는 경쟁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재밌네요. 정말 역대급 시즌인 게 우승 경쟁도 그렇지만, 포스트시즌 막차 티켓을 향한 레이더스, 세일러스, 울브즈의 경쟁도 세 팀이 한 게임 차로 이어가는 중이고, 최하위 경쟁, 드래곤즈와 크로우즈의 최하위 경쟁도 지금 승차 없이 경쟁 중이거든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정말 볼 거리가 많은 시즌이에요.]

그리고 중간에는 영도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 도전도 있었다.

이래저래 흥행 포인트가 넘쳐나는 시즌.

시즌 종료까지 고작 네 경기를 남겨두었음에도 리그는 여전히 긴장감이 넘쳤다.

[만약 오늘 경기가 제츠의 승리로 끝난다면 그래도 일단은 얻어가는 게 생깁니다. 무승부가 없어지면서 승차가 없으면 상대 전적, 상대 전적까지 같으면 상대 득실을 보고 거기까지 같으면 순위 결정전을 치르는데, 오늘 제츠가 승리하면 상대 전적이 같아집니다. 시즌이 끝났을 때 승차만 따라잡을 수 있다면 분명 유리한 부분입니다.]

[유영도 선수가 매지션즈를 상대로만 홈런 10개를 때려냈잖아요. 그 덕분인지 상대 득실에선 이미 제츠가 많이 앞서거든요? 그래서 매지션즈도 이 경기를 꼭 잡고 싶었을 텐데... 이 마지막 경기가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궁금해지네요.]

제이드 벤슨이 내려간 4회 초 2아웃 시점에서 점수는 이미 7-1.

비록 스윕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매지션즈 원정에서 1승 1패를 거두고 상대 전적 동률로 마무리한다면 상대 득실에서 앞서는 제츠 입장에선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어제의 아쉬움을 날리는 쓰리런 홈런으로 제이드 벤슨에게 치명타를 날린 유영도 선수를 잡아줍니다. 64호 홈런인데... 네 경기 동안에는 좀 힘들 수도 있지만, 잘하면 70홈런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물론, 쉽지 않겠죠. 쉽지 않지만,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긴 있어요. 제츠의 남은 일정이 와이번스와 세일러스인데, 세일러스는 마지막까지 목숨 걸고 달려들겠지만, 와이번스전은 그래도 좀 편하게 치를 수 있거든요?]

점수 차가 워낙 벌어졌고, 시즌 막판까지 이야깃거리가 워낙 많다 보니 중계진도 슬슬 제츠의 승리 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매지션즈의 남은 일정은 에이스와 레이더스, 제츠는 와이번스와 세일러스.

각각 이미 순위가 결정 나 확장 로스터로 올린 유망주 위주로 남은 시즌을 치르는 팀 한 팀, 여전히 치열하게 순위를 두고 경쟁하는 팀 한 팀과의 2연전씩을 남겨둔 상황.

조건도 비슷하고, 현재 승률도 비슷한 지금.

시즌 막판을 향해갈수록 리그 우승 경쟁의 열기도 마지막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

[매지션즈 vs 제츠, 세일러스 vs 레이더스, 드래곤즈 vs 크로우즈의 마지막 순위 경쟁. 울브즈는 6위 레이더스와 두 경기 차까지 벌어지며 막판 탈락]

[절묘하게 맞춰진, 일부러 맞춘 듯한 완벽한 시즌 마지막 맞대결들... 드래곤즈 vs 크로우즈의 탈꼴찌 시리즈, 제츠 vs 세일러스, 매지션즈 vs 레이더스의 우승, 포스트시즌 막차 티켓 시리즈]

KBO의 2040시즌은 아마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KBO 역사에 남을 만한 최고의 시즌으로 기억될 확률이 높았다.

두 개 팀의 우승 경쟁, 두 개 팀의 포스트시즌 막차 5위 경쟁과 절대로 피하고 싶은 최하위 경쟁이 마지막 경기까지 이어진 것만 해도 굉장히 인상적인데...

심지어 여기에 관련된 여섯 팀이 서로서로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 상황.

포스트시즌에 돌입하기도 전에 이미 집중도가 최고치를 찍고 넘쳐버렸다.

“형이 진짜 기어이 제츠를 여기까지 끌고 오는구나...”

“여기까지라... 근데 아직 2위인 게 아쉬워. 매지션즈전 끝내고 4연승, 매지션즈전 포함 5연승인데 어떻게 아직도 5위냐?”

“매지션즈도 4연승이니까. 간단하지.”

서울 제츠의 2위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미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영도의 합류 이후 제츠가 우승 경쟁의 다크호스가 될 수도 있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다크호스라는 단어처럼 말 그대로 예상외의 한 방을 때릴 수 있다는 정도였지, 진지한 평가까진 아니었다.

그런데 시즌 막판까지 한 게임 차 2위로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치고 있으니...

이미 성공이었다. 

사람이라는 게 아무리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뤄내도 욕심이 끝나지 않는 게 문제일 뿐.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는 건데? 형이 이기고 매지션즈가 져야 제츠가 우승인 건가?”

“그렇게 되면 우리가 2위에서 1위로 올라가고, 우리한테 진 세일러스가 6위, 레이더스가 5위로 올라가는 거지. 우승팀이랑 포스트시즌 막차 팀이랑 동시에 바뀌는 거더라고.”

“오, 막판 역전이 동시에 두 개? 최고인데? 스토리를 위해서도, 팬들의 재미를 위해서도 그게 최상의 시나리오네.”

“매지션즈랑 걔네 팬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 세일러스 팬들도 마찬가지고.”

우승 경쟁을 펼치는 매지션즈와 제츠는 시즌 막판 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마지막까지 1위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5위 경쟁을 펼치는 세일러스와 레이더스는 시즌 전부터 불안하다고 평가받던 팀들답게 ‘네가 가라, 포스트시즌’모드를 발동, 최근 5경기에서 2승 3패, 1승 4패의 아쉬운 성적에 그치면서 승률 동률로 마지막 경기를 기다렸고.

2위 제츠와 6위 레이더스, 불리한 두 팀이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서로의 도움이 필요했다.

두 팀 모두 일단 이겨놓고 나머지의 승리를 기다려야만 했다.

두 팀이 동시에 승리해야 동시에 각자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고, 한 팀이라도 패배하면 두 팀 모두 동시에 좌절하는 상황.

여러모로 치열한 순위 경쟁 외에도 언더독 두 팀의 운명 공동체가 되어버린 스토리까지.

야구를 좋아한다면 집중하기 싫어도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세일러스에선 성흠이 형 나오던데? 3일 휴식 아냐?”

“그렇지. 세일러스도 급하니까.”

“제츠는 한 경기도 놓칠 수 없는 상황이라 다 땡겨 써서... 김동구던데? 괜찮겠어?”

“어쩔 수 없지, 뭐. 류종인까지 나왔으니 남은 건 윤한태인데 윤한태는 시즌 끝냈으니까. 신인이니까 짐을 더 지우는 것도 미안하고.”

세일러스의 에이스이자 KBO를 대표하는 에이스 중 한 명인 안성흠.

제츠에서 확고한 선발 로테이션에 들지 못한, 본인과 코치들의 잘못에 아마추어 시절의 혹사로 인한 잦은 잔부상까지 겹치며 애매해진 1군 마지노선의 투수 김동구.

어쩌다 보니 이렇게 둘이 붙게 되었고, 당연히 불안감을 표하는 팬들이 많았다.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 김동구라니...

시즌 내내 보여준 모습, 그동안 커리어 내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불안한 게 당연했다.

***

‘나까지 보내려고 이 경기에 날 내보내는 건가.’

안 그래도 윤무열에 이어 조명근까지 날아가며 끈 떨어진 신세가 된 김동구. 

그래서 제츠 선수단 내부에서는 김동구가 이 경기를 망치면 이걸 구실로 삼아 조명근처럼 전력 외 통보를 받을 것이란 이야기까지 있었다.

김동구 본인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사실, 김동구는 조명근, 윤무열과 상황이 좀 달라서 원래 성실한 선수였으나 여러 불운과 코치들의 무책임한 코칭에 지나친 훈련이 더해져 무너진 선수에 가까웠다.

불성실한 태도와 무절제한 생활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에 좌절하고 자포자기한 것이었고.

‘어차피 꼭 이겨야 하는 경기고, 나 하나 보내버리겠다고 이 중요한 경기까지 버릴 리는 없지.’

냉정한 자기 평가.

조명근도 그 정도 가치는 없었고, 김동구라면 더더욱 그랬다.

구승배 감독은 선발 자원을 전부 당겨 쓴 현 상황에서 가장 승률 높은 선택을 내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난 길어야 3, 4이닝만... 2실점 이내로 막아내면 돼.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내가 아무리 망가졌어도 그래도 1차 지명 선수인데...’

사실, 김동구는 영도가 그렇게 한국을 떠난 뒤, 영도 대신 제츠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선수였다.

즉, 고교 시절 영도와 같이 서울권 고등학교에서 활약했고, 전국에선 지명도가 조금 밀려도 지역 내에선 영도의 대항마로 나름 꼽혀왔던 유망주.

‘좋게 생각하면 기회야. 팬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기에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강한 임팩트를 남길 기회. 이거 한 번이면 그동안의 부정적인 인식은 한 번에 날릴 수 있어.’

사람이 정신을 차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했지만, 계기만 있다면 순간이기도 했다..

김동구에겐 조명근과 윤무열이 날아간 게 계기가 되어줄 듯한 느낌이었다.

몇 년 동안 방황했지만, 해로운 선배 두 명이 동시에 날아간 데다가 오랜만에 정말 중요한 경기에서 선발 기회까지 잡으며 옛날, 항상 에이스로 중요한 경기를 맡았던 아마추어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열정이 끓어오르는 상황.

아직 한국 나이로 26세의 젊은 선수였다.

아슬아슬하게 유망주 타이틀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나이.

1차 지명 유망주인 만큼 아직 기대하는 팬들도 있었고, 팬들의 마음을 한 번에 돌려놓을 기회도 잡았다.

세상에 대한, 어른들에 대한 원망으로 무너져갔던 특급 유망주가 다시 한 번 부활을 꿈꾸기 시작했다.

< 막다른 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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