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부정리 >
“자, 자!! 다들 왜 이렇게 처져 있어? 한 경기 졌다고 끝난 거 아니잖아? 아직 두 게임 차인데 왜들 그래?”
경기 시작 수 시간 전, 손성호는 선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처진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너무나도 중요했던 매지션즈와의 시리즈 1차전을 0-2 패배로 내주었기에 그 여파가 너무나도 강력했던 것.
다들 수백 번씩 패배해 본, 어떻게 보면 패배 전문가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패배는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특히 어제 경기처럼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경기라면 더더욱.
그러나 한 경기를 내줬어도 제츠는 다음 날 또 다른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그것도 똑같은 매지션즈와의 시리즈 2차전을.
2차전이라도 잡고 1승 1패를 나눠 갖기 위해선 떨어진 분위기를 살릴 필요가 있었다.
“하하하, 형. 저희 괜찮아요. 그냥 시즌 막판이라 지쳐서 그렇지.”
“그러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 성호 형, 오히려 형이 문제 아냐? 나이도 있는데 시즌 막판까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은데...”
분위기는 분명 처져 있었지만, 그걸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손성호가 아무리 팀 분위기를 추스르려 해도 분위기라는 것 자체가 회식 자리 분위기 같은 게 아닌 이상 억지로 띄우고 억제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한계가 있었다.
이런 식의 분위기는 심리적인 부분이기에 의도한다고 해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차라리 부정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우리 분위기 괜찮은데? 나쁘지 않은데? 하면서 부정하다 보면 나까지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손성호는 손성호의 역할을 할 뿐이었고, 한영훈과 조규영 등의 베테랑들은 또 그들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자!! 계속 갑시다!! 오! 한위 방금 수비 좋아!!”
“뭐야? 경준이 진짜 뭐야? 요즘 경준이 왜 이렇게 빠따 좋은 건데? 진짜 나까지 쫓아내려고 그러는 거야?”
손성호의 의도에 따라 한영훈과 조규영 등 고참급과 중간급의 보컬 리더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훈련장에선 조용한 것보다 시끄러운 게 무조건 좋았다.
‘다들 열심히 노력하네.’
그리고 영도는 언제나와 같았다.
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걱정을 하든, 분위기가 어떻든 언제나처럼 몸을 풀고, 몸 상태를 유지하고, 타격감과 수비감 유지에 매달렸다.
‘아직 뭔가 어색하단 말이지. 여기서 운동을 끝내도 되는 건가, 싶고...’
이번 시즌 후반기 들어 백업이 없어지면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훈련량을 크게 줄인 영도는 아직도 부족한 훈련량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고민을 했고, 필요성도 잘 알고 있지만, 몸이 아직 어색함을 버리지 못한 것.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최대한 적응하려 하는 중이었다.
평균 훈련량이 많다고 볼 수 없는 제츠에서 전반기까지만 해도 압도적인 훈련량 1등이었는데, 후반기에는 거의 중간 정도에 불과한 수준.
너무 급격히 줄인 게 아닐까, 라는 걱정도 있었지만, 훈련이라는 게 결국 좋은 성적을 위한 것이고...
이보다 더 성적이 좋을 순 없었으니 꾸준히 유지하는 중이었다.
아마 다시 성적이 떨어져 마음이 급해지기 전까진 이 정도 훈련량을 유지할 듯했다.
“어우... 다들 열심히 하네? 오랜만에 마지막까지 1위 경쟁하니까 절실해진 거야!?”
“... 오셨습니까, 선배님.”
“명근 선배 오셨어요? 어유, 어제도 한 잔 하셨나 보네?”
그때, 느지막이 나타난 조명근이 웃으며 훈련장에 들어섰다.
KBO도 한국 엘리트 스포츠 특유의 군기가 많이 빠지고 개인주의, 자율 식의 훈련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제츠는 굉장히 자율적인 편이었지만...
당연히 공식적인 집합 시간에 늦는 건 문제였다.
앞으로도 스포츠라는 게 존재하는 한 당연히 문제일 것이었고.
“명근아. 원래도 자꾸 이러면 문제인데 이번 시즌까지 이러면 어떡하냐. 애들도 팬들한테 우승 한 번 안겨주겠다고, 커리어에 우승 반지 하나 더하겠다고 저렇게 노력하는데.”
조명근은 35세의 베테랑 포수였다.
프로 생활을 제츠에서만 보낸 프랜차이즈이기도 했다.
우희운의 등장으로 대략 2, 3년 전부터 백업으로 밀렸지만, 귀한 포수 포지션이라는 메리트로 아쉬운 성적에도 5, 6년은 제츠의 안방을 지켰던 선수.
당연히 팀 내에서 나름의 입지라는 게 있는 선수였고, 손성호를 제외하면 그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코칭스태프들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선수였으니...
“너나 나나 우승 반지 하나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 은퇴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도 마찬가지고... 우리 마지막에 우승 반지 하나는 얻고 은퇴해야지. 시즌도 거의 다 끝나가는데 조금만 더 고생하자.”
“에이, 내가 지금 팀에서 뭐 하는 게 있다고... 그냥 나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경기도 거의 안 나가는데 나는 좀 놀아도 되잖아?”
손성호가 그나마 조명근을 건드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라지만, 그런 손성호도 조명근의 영역은 최대한 지켜주려고 했다.
나이도 고작 한 살 차이고, 제츠라는 팀에서 16년을 함께 고생했으니 어느 정도 유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안 그래도 불성실하고 자기 관리가 안 되는 조명근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안하무인이 될 수밖에.
“야, 조명근. 지금 그게 할 말이야?”
“... 에이, 성호 형. 갑자기 왜 그래? 우리 문제없이 잘 살았잖아? 내가 뭐 특별히 이번 시즌 열심히 해서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닌데 왜 과민반응이실까?”
“네가 이런 식으로 나와서 더 올라갈 수 있는 걸 못 올라간 거지. 희운이가 이번 시즌 얼마나 고생했는지 바로 옆에서 보고도 그딴 말이 나와? 네가 몇 경기만 도와줬으면 또 알아? 우리가 지금 2위가 아니라 1위일지? 정신 좀 차려라.”
“와... 형 말 이상하게 한다? 내가 뭘 어쨌다고? 희운이가 나보다 나으니까 3년 전 여름부터 나 대신 주전으로 나가는 거 아냐. 내가 그거에 대해 뭐라고 한 적 있어? 물론, 잠깐 궁시렁대긴 했지만, 금방 인정하고 넘겼잖아. 그럼 말년은 좀 챙겨줘야지, 이게 뭐야? 애들 앞에서.”
조명근도 계속 이랬으면 백업으로 밀린 이후 2, 3년 동안 계속 1군 자리를 지키진 못했을 것이었다.
전반기까지만 해도 불성실하고 자기 관리 안 되는 선수지만, 그래도 봐줄 수 있는 선은 밟고 있었다.
하지만 윤무열의 음주운전 적발 이후 그 선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조명근도 나름 이 팀에서 힘이 있는 선수다 보니 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없진 않았다.
조명근과 비슷하게 처음부터 불성실했던, 적나라하게 말해 ‘양아치 기질’이 있었던 윤무열과 아마추어 시절 혹사, 프로 진출 후 계속된 잔부상과 투구폼만 계속 건드려댄 코치들의 코칭 실패 등으로 패배의식에 빠져 놀기 시작한 김동구 등이 조명근 파벌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불성실한 선수들의 모임이다 보니 1군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지키는 선수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이 두 명이 핵심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윤무열의 팀 내 입지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 윤무열이 날아간 순간, 나이도 있는데 백업으로 밀려난 지도 꽤 오래 지났고, 파벌의 중요 일원까지 날아간 조명근은 자포자기라도 한 듯했다.
“주전으로 못 나가면 팀을 위해 할 게 없나? 백업이 약한 팀은 우승 못 한다는 이유가 뭔지 몰라서 그래? 안 그래도 포수 보느라 힘든데 백업도 없으니 죽어가잖아, 애가! 다른 팀 30대 중후반 베테랑들은 주전으로 못 나가도 이런저런 노하우라도 알려주는데, 조언은 못 해줄망정...”
“아이고, 성호 선배. 전 괜찮...”
“희운아, 잠깐만. 이쯤에서 잡고 가야 해. 말리지 말아줘. 윤무열도 그래. 네가 그렇게 데리고 다니던 새끼였으면 네가 챙겼어야지. 이번에 걸린 거지, 전엔 안 했겠어? 못 챙길 거였으면 데리고 다니지도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형. 그 새끼가 술 처먹고 운전하다가 걸린 것도 이제 내 탓이야? 그 새끼 나이가 몇인데 그게 내 탓이야? 그럼 무열이 새끼랑 동구 놈 빼고 다른 애들이 사고 치면 그건 형 탓인가?”
손성호도 제츠에서는 나름대로 팀 기강을 신경 쓰고 리더로서 행동하는 선수였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제츠이기 때문이었다.
제츠에는 이보다 더 완벽한 리더가 있을 수 없는, 제츠에 완벽하게 특화된 리더지만, 타이탄스는 당연하고 다른 웬만한 팀에서는 리더보다 에이스 자리가 더 어울리는 성격.
팀보다 개인 성적을 더 우선시하고 싫은 말 해가며 팀 기강을 유지하기보다 내 성적을 올려 팀에 도움되려 하는 성격의 선수였다.
지금까지 조명근과 그 파벌을 컨트롤하지 못한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손성호가 이러니 다른 선수들도 조명근 파벌의 행동은 아무리 자유로운 팀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다 생각만 하면서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 23년 만의 우승을 위한 중요한 시기를 맞아 손성호도 그동안 안 했던 팀 기강이라는 걸 잡아보기로 했다.
못 했던 우승을 하려면 안 했던 무언가를 해야만 했으니까.
“그렇지. 나한테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지. 내가 왜 베테랑인데? 제츠의 상징 소리까지 듣는 최고참인데 당연히 내 책임이지. 네가 이러는 것도 어느 정도는 내 책임이겠지. 바로 위 선배였던 내가, 이젠 최고참인 내가 널 컨트롤하지 못했던 거니까. 그래서 이제 해보려고.”
“누가 보면 형은 평생 성실했는 줄 알겠어. 형도 젊었을 땐 사고 좀 치지 않았나?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적당히 하지? 지금처럼 난 소소하게, 조용히 있을 테니까 지금처럼 알아서들 이기고 순위 유지하면 되잖아?”
손성호가 평소와는 다르다.
이를 확인한 나머지 선수들은 최고참 두 선수의 충돌을 숨죽인 채 지켜봤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대부분 손성호를 응원했다.
그동안 조명근에게도 선배 대접해주면서 하하, 웃어줬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아무리 자유로운 게 좋고, 치열한 것보단 즐거운 걸 좋아해도 우승이 코앞인 시즌이었다.
선수라면 우승을 욕심내지 않을 수 없었고, 제츠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다른 경기도 아니고 매지션즈와의 경기 날, 전날 먹은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집합 시간을 한 시간도 넘겨 나타나다니...
“그딴 식으로 할 거면 관둬! 팀에 도움도 안 되고, 도움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없는데 왜 1군에 있냐? 어차피 경기 안 나가는데 훈련을 왜 하냐고? 그게 지금 16년 차 베테랑이라는 놈이 할 말이야!?”
“하, 진짜... 갑자기 지랄하니까 나도 당황스럽네?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지금까지 아무 말 없다가 팀 잘 나가니까 뭐라도 하는 척하지 말고. 난 경기 준비해야 하니까 들어간다. 머리나 좀 식히고 계셔.”
‘곧... 날아가겠는데?’
다른 선수들이 조명근을 굳이 건드리지 않았던 건 조명근도 나름 가지고 있는 입지라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팀 내 입지에서 선수가 가진 힘이라는 게 나오고, 나름 힘이 있는 선수와 충돌하면 충돌한 선수에게 무조건 크든 작든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손성호와의 충돌은 제츠 선수단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었다.
영도가 조명근의 향후 거취를 확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구승배 감독님이 덕장이라지만... 그렇다고 무른 감독은 또 아니거든.’
조명근이 주전 자리에 있을 때 찍었던 성적과 우희운의 현재 성적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2할 중반대 타율, 3할 초반 출루율, 4할 중반 장타율에 20개 근처의 홈런.
우희운은 성실한 선수다 보니 수비가 조금 더 낫고, 투수들이 훨씬 편하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게 아주 큰 차이까지는 아니었다.
포수의 환상 같은 것도 꽤나 사라진 시대였으니까.
하지만 우희운이 그 정도까지 성장한 순간, 구승배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조명근을 끌어내리고 우희운을 주전으로 올려버렸다.
조명근의 평소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참에 과감하게 저지른 것.
당시에는 나름 논란이 되었지만, 이제는 모든 팬들의 지지를 받는 신의 한 수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만큼 구승배 감독은 할 땐 하는 감독이었다.
“2군에 연락해서 형우 있지? 형우 올리라고 좀 전해주게.”
“... 예, 알겠습니다. 그럼 명근이를 내리는 걸로...”
“그래. 명분도 딱 좋게 생겼지 않나. 경기 날 집합에 술도 안 깨서 한 시간이나 늦게 나타났다. 징계성 강등이다. 이유는 그렇게 하고.”
“알겠습니다. 바로 전화하겠습니다.”
주전 자리를 빼앗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2군으로 아예 내려버리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고.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원클럽맨이라 기회만 노릴 뿐,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던 구승배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기다렸다는 듯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윤무열에 이어 조명근까지 날아가면서...
그동안 제츠 선수단을 크게 좀먹었던 선수 두 명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구승배 감독은 23년 만의 우승을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면서도 암덩어리들을 잘라내고 류종인, 어경준, 이창우, 윤한태 등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까지 발굴하면서 선수단 체질 개선 역시 이뤄가고 있었다.
< 내부정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