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찬물 > (74/200)

< 찬물 >

[아, 나정준! 나정준이 솔로 홈런을 터뜨리면서 1-0으로 앞서나가는 선취 타점을 기록합니다!]

[유형근과 타일러 로즈의 맞대결은 항상 이런 식이죠? 6회 말이 되어서야 첫 득점이 나왔습니다. 34호 홈런을 때려내면서 고든 레녹스에 이어 김진형 선수와 함께 홈런 공동 3위로 올라서네요.]

[김진형 선수가 벌써 거기까지 올라온 겁니까? 이야... 그렇게 부진하다, 부진하다, 했는데 후반기에 대체 얼마나 폭발적인 페이스를 이어갔으면...]

[그러니까 이제 김진형 선수도 급이 확 올라간 거죠. 아무리 걱정해도 그 정도 성적을 꾸준히 뽑아준다는 거예요.]

고든 레녹스와 함께 둘이 합쳐 70개의 홈런을 때려낸 매지션즈의 주포.

홈런도 홈런이지만, 타율, 출루율, 장타율 모두 TOP 5에 이름을 올린 KBO의 대표 타자 나정준이 경기의 균형을 먼저 깨뜨렸다.

[매지션즈는 1점이라도 리드를 잡으면 마음이 확 편해지는 팀 아니겠습니까? 불펜진이 괜찮은 데다가 무엇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반성훈 선수가 버팁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1점은 좀 부족하죠. 특히 유영도 선수가 버티는 제츠가 상대라면 더더욱 불안해요.]

[하하하, 그건 그렇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만 하는 경기니까 1점이면 불안하긴 합니다.]

[쟁점은 그건 것 같아요. 유영도 선수에게 제대로 된 타격 기회가 주어질 것이냐, 아니면 지난 두 타석처럼 또 한 번 무기력하게 걸어나가게 될 것이냐. 1점 차라 더욱 상황이 어려워진 것 같긴 하네요.]

- 제발... 이렇게 되면 유영도보다는 다른 선수들이 더 중요한 거 아닌가?

- 유영도 앞에서 판이 깔려야 하는데... 근데 요즘은 1, 2루에서 볼넷으로 거르고 만루에서도 거르니 방법이 있나...

- 1점 차니까 1, 2루에서 거르긴 힘들 것 같고, 1루에만 있어도 힘들 것 같긴 함. 주자 1루에서 거르면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나가니까.

- 그것도 그렇고 투수가 유형근이면 만루에서 거른다거나 하진 않겠지. 아이러니하게도 유형근을 믿어야 하는 상황이...

- 믿는다, 유형근! 한국의 자랑! KBO의 자랑! 영도한테 정면에서 한 번만 붙어줘!!

갑자기 제츠 팬들이 유형근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유형근의 품격을 응원하고 자존심을 치켜세워주기 시작하면서 영도와의 정면 승부를 희망한 것.

그만큼 제츠 팬들은 영도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분명 최근 제츠 타선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고, 영도가 투수들의 견제에 시달리는 동안 상당한 득점력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이미 팬들의 머리에는 유영도라는 선수가 ‘뭐든 해줄 수 있는 해결사’로 강하게 박혀 있었다.

[7회 초, 유영도 선수가 선두타자로 타석에 들어섭니다. 과연 유영도 선수가 선두타자로 들어서도 거르고 시작할지...]

[지금 유영도 선수의 타율이 0.323인데, 출루율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치솟아서 0.465까지 치솟았어요. 그만큼 어떤 상황이든, 주자가 얼마나 채워져 있든 그냥 걸러버리거든요?]

[그래도 유형근이라면, 그래도 유형근 정도의 특급 에이스라면 한 번 제대로 된 승부를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다들 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노 아웃에 주자를 내보낸다는 건... 물론, 효율만 생각하고 확률만 생각하면 내보내는 게 차라리 안전할 수도 있긴 할 거예요. 스읍, 근데 아무리 그래도...]

‘... 오. 여기선 분명 붙어주겠는데.’

누구보다 상대 투수의 분위기를 가장 먼저, 가장 확실하게 읽을 수 있는 건 타자였다.

타석에 들어선 순간, 영도는 드디어 기회가 왔음을 확신했다.

유형근에게서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그냥 거를 때 풍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 잠시만요. 2루심 반대편으로 이동해주세요.”

“2루심! 2루심!! 1, 2루 쪽으로!!”

상황이 워낙 중요하다 보니 모든 게 다 거슬렸다.

영도는 잡아당기는 타구가 대부분인 풀히터였고, 때문에 2-3루간이 깔끔하게 비어있어야 마음이 편안했다.

안 그래도 유별나게 예민한 편인데, 상황도 급박하다 보니 2루심의 위치가 영도의 심기를 건드렸다.

[과연 유영도 선수가 다시 한 번 홈런을 터뜨리면서 승부의 균형을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 아니면 유형근 선수가 이번에야말로 유영도 선수를 잡아내며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 중요한 승부입니다.]

‘이러면 더 까다로운데...’

유형근의 공에서는 이전과 같은 기백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잡고 내 자존심을 세우겠다, 라는...

하지만 레퍼토리는 많이 달랐다.

영도가 자신보다 한 수 위임을 인정하고 보다 조심스럽게, 보다 까다롭게...

한마디로 한 수 아래 투수가 한 수 위 타자를 상대하는 레퍼토리를 꺼내 들었다.

[어렵게 승부하는 유형근 선수, 다소 낯선 바깥쪽 위주의 피칭으로 2-2 카운트를 만들어냅니다.]

[유영도 선수도 파울 두 개를 만들어냈지만, 아무래도 바깥쪽 공을 공략할 땐 장타가 나오기 어렵죠. 특히 유형근 선수 정도의 구위와 구속을 자랑하는 투수가 바깥쪽을 마음먹고 던지면... 글쎼요. 유영도 선수라면 또 모르지만, 일반적으로는 쉽지 않아요.]

다른 투수들이 던지는 바깥쪽 공은 얼마든지 담장 밖으로, 담장 밖을 넘어 아예 경기장 밖으로 넘겨버릴 수 있는 파워의 소유자가 바로 영도였다.

물론, 유형근의 공이라고 해서 담장 밖으로 넘길 수 없는 것까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쉽진 않았다.

구위도 구위고, 볼 끝의 움직임이나 변화구의 각도 등...

다른 투수의 바깥쪽 공과는 분명하게 달랐다.

‘이것도 안 먹히면 내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

유형근도 필사적이었다.

KBO 최고라는 자존심, 메이저리그 도전도 가능할 것이라는 자신감.

영도를 상대하면서 그 모든 게 무너졌다.

물론, 영도가 유독 유형근에게 강한 건 있었다.

타율 0.323, OPS 1.246의 기록은 무시무시한 기록이지만, 투수들의 수준 차를 감안했을 때 유형근이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영도의 유형근 상대 전적이 무슨 5선발급, 추격조급 투수들이랑 다를 게 없었으니까.

‘아무리 인간 상성이라는 게 있다지만... 너무한 거지.’

유형근도 인간 상성을 부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인간 상성을 인정해도 극복을 위한 노력은 멈출 수 없었다.

승부를 포기하고 내보냈던 경우를 제외하면 정말 모든 자존심을 내다 버리고 아웃 하나만을 바라보는 피칭.

유형근은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다고 판단했다.

‘살짝 늦었나...’

자존심을 버린 유형근의 피칭은 분명 위협적이었다.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체인지업의 조합은 제아무리 영도라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타이밍을 잃을 수밖에 없을 만큼 위력적이었고.

2-2 카운트, 바깥쪽으로 아슬아슬하게, 공 한 개 차이로 들어왔거나, 빠졌거나. 

판단하기 어려운 헷갈리는 코스.

타이밍을 살짝 놓쳤지만, 영도는 언제나처럼 자신 있게, 강렬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살짝 타이밍이 늦었지만, 유영도 선수의 타구입니다! 비거리가 짧을 리 없죠!]

[바깥쪽으로 멈추지 않고 흘러나가는데요? 좌익수 고윤수가 잡을 수 있나요?]

[잡는 것도 잡는 건데, 페어로 들어올지도 끝까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넘어가긴 좀 힘들 것 같은데...’

아무래도 넘어갈 정도의 타구는 아닌 듯싶었다.

원래도 성격상 확실한 홈런 판정이 내려지기 전까진 비교적 빠르게 베이스를 도는 편이었지만, 이럴 땐 더더욱 전력으로 질주했다.

생각보다 멀리 가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넘어가지 않았다고 실망했지?’

순간,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형근 정도의 투수를 상대로 수 싸움에서 밀리고도 이 정도 타구를 날리고도 홈런이 아니라며 실망하다니...

아웃이 될 수도, 파울이 될 수도, 장타가 될 수도 있겠지만, 타구의 질이나 비거리를 봤을 때 충분히 대단한 타구인데, 이런 타구를 보고 실망하다니...

영도는 최선을 다해 질주하는 와중에도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을 반성했다.

자신감이 생긴 자신의 모습은 만족스럽지만, 이번엔 조금 지나친 느낌이었다.

[펜스 직격! 그리고 페어! 페어가 선언됩니다! 역시나 언제나 견실한 고윤수 선수, 안정적인 펜스 플레이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유영도 선수는 2루까지 서서 도착, 2루타입니다.]

[아니, 이걸... 이게 펜스를 직격으로 때리네요? 유형근 선수도 이러면 방법이 없죠. 역시 웃고 있네요.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타자가 이런 공을 쳐서 펜스를 때리는데 뭘 어떻게 더 반응하겠어요?]

‘2루타... 훌륭해. 훌륭한 결과야. 조금 더 초심을 찾고 냉정하게 반응해야 해.’

더없이 훌륭한 결과였다.

비록 홈런이 아니었고, 이후 타자들에게 적시타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2루타는 훌륭한 결과였다.

‘내가 언제부터 팀 승리 때문에 고민했다고... 내 타석에서, 그 흐름에서 2루타면 더없이 완벽하지.’

팀을 위해서라면 홈런을 때리는 게 가장 이상적인 결과이긴 했다.

워낙 홈런을 자주 때리다 보니 2루타에 대한 느낌도 많이 달라져 버린 듯했다.

초심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저리그로 복귀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으니까.

팀 성적이고 뭐고 내 타석에서 내게 좋은 결과만 나오면 그만이었다.

아니, 애초에 선두타자로 나와 2루타를 때려냈으면 팀을 위해서도 해줄 만큼 해준 거지, 뭘...

[역시 박윤형 선수는 처음부터 번트 자세를 취합니다. 유영도 선수가 발이 빠른 편은 아니라서 2루에서 3루로 보내는 번트는 꽤 정교하게 대줘야 합니다.]

[박윤형 선수라면 뭐... 믿을 수 있죠.]

‘내야 땅볼보다 번트가 더 싫어...’

영도는 분명 주루 플레이가 나쁜 선수는 아니었다.

발은 느리지만, 영리하고 판단력이 괜찮은 편이었으니까.

그래서 내야 땅볼이 차라리 편했다.

1, 2루 쪽으로만 보내준다면 얼마든지 3루를 밟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번트는... 내야수들의 대비 자체가 다르니 긴장해야만 했다.

[1루 쪽으로 절묘하게 굴려주는 박윤형 선수의 희생번트! 3루는 포기하고 1루로 던집니다. 1사 3루 찬스로 이어가는 서울 제츠!]

[아주 정석적인 플레이죠? 아주 적은 점수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경기에서, 특히 오늘 경기처럼 상대 투수가 너무 위력적이고 컨디션이 좋은 경기에서는 더더욱 1점이 중요하죠.]

박윤형의 희생 번트로 이어진 1사 3루의 찬스.

타석에는 장타력이 있는 포수 우희운이 들어섰다.

‘희운 선배도 지금 상태가 좋진 않은데.’

제츠의 백업 포수인 35세 조명근은 불성실하고 자기관리 안 하기로 유명한 선수이다 보니 안 그래도 프로선수로서는 오늘, 내일 하는 나이인데 아예 1군에서 써먹기 어려운 수준까지 추락해버렸다.

덕분에 우희운은 안 그래도 체력 부담이 큰 포수 포지션에서 거의 모든 경기를 소화해야만 했다.

아무리 한국 나이 27세, 한창 피지컬적으로 전성기인 나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

당연히 시즌 막판으로 가면서 페이스가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안 그래도 컨택보다 장타 툴 하나로 먹고사는 선배인데.’

타/출/장 0.255/0.322/0.461, 19홈런.

지난 시즌 제츠에서 유일한 20홈런을 달성한 타자답게 장타력만큼은 이번 시즌에도 여전했다.

타율과 출루율도 약간 떨어지긴 했지만, 그냥 예년과 비슷한 수준.

지쳐가는 것도 있지만, 그냥 선수 자체가 이런 시소게임에서 안정적인 선수는 아니었고...

[바깥쪽! 들어왔습니다! 루킹 삼진! 우희운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한숨 돌리는 유형근!]

[아... 이거 좀 큰데요? 플라이나 조금 깊은 내야 땅볼이면 동점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제 무조건 안타가 나와야 합니다.]

[그것도 있고, 지금 유영도 선수의 네 번째 타석이 돌아올지, 그것부터 확실하지 않습니다. 유영도 선수의 네 번째 타석이 돌아오지 않으면 제츠에겐 이 1점도 꽤 크게 느껴질 겁니다.]

[그렇죠. 제츠 타선 분위기가 나쁘진 않지만, 유형근 선수가 이 추세면 8이닝도 던져줄 수 있고, 이후 반성훈 선수까지 등판하면... 흐음... 글쎄요?]

우희운이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안타만 맞지 않으면 실점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면서.

유형근이 영도의 2루타로 끌어올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유격수 쪽 땅볼! 비교적 깊은 타구, 1루로!! 아웃! 아웃입니다! 역시 손경우! 조규영 선수와 더불어 KBO를 대표하는 수비형 유격수다운 호수비를 보여줍니다!]

[어경준 선수도 정말 필사적으로 달렸는데... 안타깝네요. 신인 선수가 저렇게 필사적으로 뭔가를 하는데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으면 항상 좀 안타까워요. 아무래도 한때 같은 입장이었던 선수 출신이라 어쩔 수 없네요.]

유형근을 상대로 찬물이 끼얹어진 분위기를 되살리기엔 아직 어경준의 힘이 미약했다.

심지어 어경준은 좌타자이기에 좌완 투수인 유형근이 안 그래도 어려운데 훨씬 더 어려웠고.

‘... 이건 좀 심각하겠네.’

무사 2루 찬스를 살리지 못한 제츠와 막아낸 매지션즈.

심지어 경기 종반인 7회 초.

경기의 승패에 분위기가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하면...

제츠 입장에서 이번 실패는 너무나도 뼈아팠다.

< 찬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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