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츠니까 >
‘하아... 내려가고 싶다...’
이젠 성기주를 떠올리면 마운드 위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이나 내쉬는 모습이 떠오를 것 같았다.
[성기주 선수는 진짜 트라우마 생기겠어요. 이미 유영도 선수와 여섯 번 붙어서 홈런 3개를 허용하고 있었는데, 일곱 번째 대결에서 네 개째 홈런을 얻어맞았습니다.]
[얻어맞았다... 는 표현이 괜찮은 건가요? 물론, 굉장히 찰떡처럼 어울리긴 하지만...]
[아... 그런가요? 아니, 그게 저도 모르게...]
‘아무리 대단한 타자여도, 수준 차이 나는 타자여도 만날 때마다 홈런 뻥뻥 날려대는 게 정상인 거야? 나정준, 박병헌 같은 타자들한테도 이렇게까지 쳐맞진 않았다고.’
과한 자부심과 근거 없는 자신감 등으로 똘똘 뭉쳐 밑도 끝도 없이 영도를 무시했던 성기주지만, 당연히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메이저리거 출신이어도 그 정도 성적으로는 KBO에서 기대만큼 활약할 수 없다고 생각해 무시했던 건데, 이미 결과가 나왔으니...
끔찍할 만큼 KBO를 사랑하는 성기주에게 그 KBO의 모든 역사를 갈아치우는 지금의 영도는 그 누구보다 대단한 타자였다.
어쩌면 베이브 루스나 마이크 트라웃 같은 전설들보다도 더.
[이번 홈런으로 60호 홈런 고지에 오른 유영도 선수! 아시아 한 시즌 홈런 신기록과 타이를 이룹니다!]
[원래 이런 게 정상인가요? 원래 이런 신기록 경신에 가까워지면 그 근처에서 주춤주춤하면서 보는 사람들도 좀 쫄리고... 이런 느낌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어요. 와! 54호 홈런! 이러고 기대하는데 다음 날 55호 홈런, 막 이러고...]
[확실히 듣고 보니 그런 소위 말하는 ‘쪼는’ 맛은 좀 부족한 느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괜히 그렇게 쪼는 것보다는 화끈하게 확 넘겨주는 게 좋긴 하죠. 걱정 안 하고 즐겁게만 지켜볼 수 있잖아요?]
“너 후반기에만 홈런 23개 때린 거 알아? 34경기 동안?”
“생각은 안 해봤는데, 계산이 어렵진 않네요.”
“전반기부터 이렇게 때렸으면 거의 시즌 100홈런이야. 이게 대체 무슨...”
“빨리 61홈런 넘겨서 선배랑 약속한 거 지켜야죠. 우승하러 가야 하는데...”
“... 갑자기 안 어울리게 자꾸 이러니까 진심인 건지, 날 놀리는 건지 헷갈린단 말이지...”
“진심입니다. 우승 자체보다는 이렇게까지 간절한 사람이 꿈을 이루면 어떤 반응일지가 궁금해서.”
“... 진심입니다, 까지만 말했어도 괜찮아, 이 자식아.”
“그런가요? 하나 더 배웠네요.”
[홍인주의 안타로 시작한 4회 초, 타이탄스가 무려 5점을 뽑아내면서 계속 리드를 잡아나가고 있습니다. 3회 초 나온 김진형의 투런 홈런으로 3-1 리드를 잡은 이후 9회까지 계속 리드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김진형 선수가 정말 이를 갈고 나온 것 같죠? 경기 초반 연타석 홈런으로 3타점을 올리더니 4회에는 2사 만루 기회에서 싹쓸이 2루타, 6회에도 적시타를 터뜨리면서 오늘 하루에만 7타점! 이게 해결사죠!]
9회 초 타이탄스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까지 끝난 지금, 12-9 타이탄스의 3점 차 리드가 이어지고 있었다.
4회 초 정확히 타순이 한 바퀴 돌면서 5점을 뽑아낸 타이탄스가 경기 내내 주도권을 잡았다.
물론, 제츠 타선도 최근의 상승세를 증명하며 9점을 뽑아냈지만, 대체 선발 성기주를 상대로 3.2이닝 동안 4득점에 그친 게 많이 아팠다.
“한태가 충격이 큰가 본데...”
“음...”
신인인 윤한태가 시즌 내내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다.
가장 보기 편한 방어율을 기준으로 3점대 후반이면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실패가 없었을 만한 성적도 아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다만, 3.2이닝 7실점 정도로 확 망한 적은 없었고, 애초에 벤치에서 그렇게 방치한 적도 없었다.
시기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경기였고, 자신 있는 타이탄스전, 무엇보다 본인의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 경험은 아마 처음이 아니었을까?
그런 여러 부분에서 충격을 꽤 크게 받은 듯했다.
“가서 한 마디 좀 해줘 봐. 지금 우리 팀에서 제일 대단한 선수가 너니까 네가 한 마디 하는 게 제일 와 닿을 것 같은데. 신인 때 고생했던 것도 비슷하고.”
“어유... 제가 무슨 말을 합니까. 그런 것 못합니다. 안 그래도 말 잘 못 하는데...”
“그래도... 나이도 비슷하고...”
“그냥 어려서 그래요. 본인이 팀을 위해 꼭 해줘야 하는 타이밍인데 못했다고 생각하니까 더 저러는 거지. 저건 나중에 나이 먹으면 좋아질 겁니다.”
“... 넌 지금도 어린데 그 모양이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러냐? 조금이라도 팀을 좀 생각해줘야 할 텐데...”
“문제없지 않습니까? 팀을 위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누구보다 팀에 도움되는 것 같은데.”
그리고 어린 선수들일수록 과한 책임감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게 아닐까?
영도는 일단 그렇게 생각했다.
타이탄스전이라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경기인데, 매지션즈와 여전히 치열하게 우승을 두고 경쟁하는 시즌 막판, 심지어 타이탄스는 경기 몇 시간 전 갑작스레 선발투수까지 바뀐 상황.
어릴 때부터 제츠의 팬이었고, 제츠의 우승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성장해 프로가 된, 실제로도 지금까지 좋은 활약을 이어왔던 투수에겐 충격일 수 있었다.
워낙 잘해줘서 다들 잊고 있었지만, 윤한태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어린 선수였다.
흔들리는 게 정상이고, 흔들려야 성장하는 신인.
“그러지 말고 가서 위로나 좀 해줘 봐. 지금 너 정도면 그런 거 해줘야 한다고.”
“됐습니다.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효과도 좋은 게 있는데 뭐하러...”
“음? 그런 방법이 있다고?”
“당연하죠. 이겨주면 됩니다. 가서 준비하세요. 기회만 만들어주시면 제가 알아서 다 합니다.”
이제 자신감을 숨기지 않고 내비치는 영도의 모습.
손성호의 부탁을 들어줄 만큼 바뀌진 않았지만, 이런 것만 봐도 영도는 분명 변했다.
훨씬 더 긍정적이고 믿음직스럽게, 해결사로서 충분히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아... 벌써?”
“벌써는 무슨 벌써... 이미 박태원 선배님이 안타 치고 나가셨고, 규영 선배 대신 한위가 대타로 나갔어요.”
“아, 그래? 나도 늙어서 한참 후배가 저러고 있는 거 보니까 정신이 팔렸네.”
“좋은 거죠. 17년 후배가 저렇게 해주면 예쁠 수밖에 없기도 하고.”
“그래도 경기에 집중해야지. 네 말대로 이겨주는 게 제일 큰 위로일 테니.”
“예. 그 부분은 저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탄탄한 필승조를 갖추고 있지만, 그 선수들 전부 9회에만 올라오면 불안해지는 불치병에 걸려버린 서울 타이탄스.
기세를 타는 게 어렵지, 한 번 기세를 타면 9회 말에 몇 점을 뒤지고 있어도 마지막까지 상대를 긴장케 하는 제츠의 기분파 타선.
두 팀의 경기가 라이벌전답게 매번 재미있는 이유는 두 팀의 장점과 단점이 절묘하게 맞물리기 때문이었다.
서로 가진 장단점이 너무나도 다른 두 팀이기에 경기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볼넷! 윤하운 선수, 두 번째 주자를 내보내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제 큰 거 한 방이면 바로 동점이거든요? 그리고 제츠의 상위 타순으로 연결돼요. 지금 제츠 분위기가 좋잖아요. 그리고 분위기 탄 제츠는... 모두 다 알죠. 정말 무서운 팀이라는 걸.]
타이탄스 타선이 무려 12점을 뽑아냈지만, 여전히 빅 이닝 한 번이면 역전할 수 있는 점수 차였다.
제츠 타선은 경기 내내 꾸준히 마운드를 도왔고, 9회 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선두타자 김원상이 내야 땅볼로 물러나긴 했지만, 이경모 타석에 대타로 들어선 박태원이 단타로, 조규영 타석에 대타로 출전한 양한위도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1사 1, 2루 찬스를 만들어냈다.
[이번 시즌만큼은 여름에도 슬럼프 없이 시즌 내내 꾸준한 모습을 보여준 손성호 선수. 인터뷰에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우승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온몸을 다 던지겠다... 말뿐 아니라 실력으로 자신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3할을 훌쩍 넘어선 타율과 손성호답지 않은 4할 근처의 출루율까지. 무엇보다도 해줘야 할 때 해주는 모습을 보여줬거든요? 이번 시즌의 손성호는 조심해야 합니다.]
1사 1, 2루, 타석에는 시즌 내내 영도와 함께 제츠 타선을 이끌어 온, 나아가 제츠 선수단 전체를 끌고 온 1번 타자 손성호.
안 그래도 9회에 약한 양한위의 쫓기는 듯한 표정에서 손성호의 위압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손성호 선수를 잡아내지 못하면 아웃 카운트 두 개가 그대로 남지 않습니까? 그러면 유영도 선수가 타석에 또 한 번 들어섭니다.]
[손성호 선수를 상대하는 투수들이 느끼는 부담감에 아주 큰 지분을 차지하죠. 강타자의 아주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고, 그동안 제츠가 가장 아쉬워했던 요소 중 하나였고요.]
누가 봐도 초조한 모습의 타이탄스 클로저, 윤하운.
‘미스터 제츠’답게 타이탄스전 성적이 나쁘지 않은 손성호.
[깔끔하게 밀어친 타구! 3루 파울 라인... 페어! 페어입니다! 2루 주자 박태원은 3루 돌아서 가볍게 홈으로! 1루 주자는 3루, 타자 주자 2루까지! 손성호의 2루타! 스코어는 12-10! 원 아웃에 주자는 2, 3루! 안타 하나면 동점입니다!]
[타이탄스도 참... 클로저 문제가 몇 시즌 째 발목을 잡네요. 윤하운 선수도 셋업일 땐 정말 믿음직스러운데...]
경기장 분위기가 완전히 제츠 쪽으로 넘어온 지금, 손성호는 팬들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하며 적시타를 때려냈다.
손성호의 안타로 영도에게까지 기회가 돌아오게 된 골치 아픈 상황.
클로저 윤하운과 포수 이성호, 김근수 감독의 고개가 동시에 푹 숙여졌다.
유영도의 타석이 한 번 더 돌아온다니... 그것도 동점 주자가 출루한 상황에서 돌아온다니...
제츠의 분위기도 두렵고, 클로저도 불안한데 후반기 들어 그냥 미쳐 날뛰는 영도에게,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거르는 것도 어려운 영도에게 한 번의 타석이 더 돌아온다?
말 그대로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이게 정상적인 상황이면 한영훈 선수를 거르고 만루에서 다음 타자를 상대하는 게 맞는데... 다음 타자가 유영도 선수입니다.]
[거르고, 또 거르고 다음 타자를 상대한다고 해도 그러면 희생 플라이 하나로도 동점이에요. 그 다음 타자 쪽에서 또 위기가 찾아오고요.]
만루 작전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고, 타이탄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1사 2, 3루에서 한영훈과 승부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한영훈을 잡고 유영도를 거른 뒤 2사 만루에서 박윤형을 상대하겠다는 작전.
[안 그래도 기존 클로저 안한영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셋업으로 돌아가고 셋업이었던 윤하운이 다시 클로저로 옮겨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과정이 매 시즌 한두 번은 반복이란 말이죠. 두 선수 다 마찬가지고, 이제 나올 투수도 없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윤하운 선수가 마무리해줘야 해요. 오늘 10점을 내주면서 여섯 명의 투수가 이미 나왔고, 윤하운 선수가 일곱 번째거든요? 선발투수 빼면 투수도 거의 없죠.]
승리를 앞둔 9회 말이기에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는 타이탄스.
오늘 경기에서 만약 패배하면 우승 경쟁이 더욱 어려워지기에 이길 수 있으면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제츠.
투수 윤하운도, 타자 한영훈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 일단 투 스트라이크는 잡아놨습니다. 2-2 카운트,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공... 헛스윙! 아아!! 공 빠졌습니다! 공 빠졌습니다!!]
[한영훈, 전력질주!! 포수도 전력질주!! 사람이 먼저인가요!? 아니면 공이 먼저 가나요!?]
이걸로 게임이 끝나진 않지만, 영도를 거를 수 있느냐, 거를 수 없느냐가 정해지는 결정적인 순간.
움직이지 못한 주자들도, 다음 타석의 영도도, 수만 관중들도, 수백만 시청자들도...
경기를 지켜보던 모두의 눈이 1루로 향했다.
< 제츠니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