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선배 > (70/200)

< 선배 >

[3루 강습! 또다시 김진형! 2루에서, 아웃! 다시 1루!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이경모 선수의 정말 잘 맞은 타구였는데 이게 또 3루에서 걸렸습니다.]

[이경모 선수... 안타 하나가 정말 절실한 선수거든요? 이번 타구는 무조건 안타다, 타점이다, 라고 봤는데 이게 잡히네요.]

[이전 이닝에도 김진형 선수가 실점을 막아주지 않았습니까? 2사 3루에서 하나 잡아주더니 바로 다음 이닝에도 1사 1, 2루에서 멋진 호수비로 실점을 막아냅니다.]

[김진형 선수 대단하네요. 안 그래도 시즌 막판 들어 과거를 속죄라도 하듯 팀의 상승세를 견인 중인데, 중요한 라이벌전에서는 그보다 한 발자국 더 나가서 마치 매지션즈전에 유영도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원맨 캐리를 시도하고 있어요.]

드래곤즈전 이후 완벽하게 살아난 제츠 타선.

사실, 실력보단 범용성과 활용성이 장점인 성기주로는 100% 컨디션이라 해도 불붙은 제츠 타선을 막아내기 쉽지 않았다.

그러니 갑자기 등판한 오늘의 성기주는 제츠 타선을 상대로 경기 내내 고전했다.

그나마 1회 말 터진 영도의 솔로 홈런 이후 이어진 2사 3루 위기와 2회 말 1사 1, 2루 위기를 김진형 덕분에 넘기면서 추가 실점은 없었다.

원래 투구 스타일까지 겹치며 2이닝 투구 수가 45개를 넘어섰지만, 이 정도면 이 상황에서 120점짜리 투구였다.

[아... 선두 타자 볼넷을 허용하는 윤한태 선수. 윤한태 선수가 선두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는 경우가 흔하진 않은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는 일인데... 아무래도 최근 윤한태 선수가 조금 힘 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순수 신인이라 시즌 막판엔 어쩔 수 없어요. 나름 팀에서 관리해주고 있지만, 팀 상황도 그렇게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고요.]

올해 딱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군에 데뷔해 작게나마 센세이션을 일으킨 제츠의 히트 상품 윤한태.

아무리 대단한 신인이라도 신인은 신인이었다.

선발 등판 경기가 20경기를 넘어서면서부터 급격히 지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

제츠도 오랜만에 등장한 대형 신인을 지키기 위해 등판도 몇 번 걸러주고 이닝도 관리해줬지만, 그 이상을 해줄 순 없었다.

시즌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경쟁하는 강팀에서 데뷔한 신인들은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게 지금 분위기가 묘해졌습니다. 제츠 입장에선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였고, 조지 스넬의 트러블과 성기주의 대체 등판, 큰 경기에 강한 윤한태까지 겹치면서 이길 수 있는 경기라고 생각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요. 근데 성기주 선수는 김진형 선수에게 두 번이나 구원받았지만, 어쨌든 1실점으로 잘 막아주고 있거든요? 윤한태 선수 역시 홈런 하나로 1실점이긴 하지만, 두 투수에겐 기대치가 다르잖아요?]

이제 막 3회에 접어든 경기 초반임에도 분위기가 웅성웅성했다.

사실, 제츠 팬들은 물론이거니와 타이탄스 팬들 역시 이 경기는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고 지켜봤다.

선발투수들이 얼마나 예민하고 정교하게 돌아가는데 경기 시작 몇 시간 전 갑자기 바뀌다니...

아무리 성기주가 그런 쪽으로는 리그 최고를 다투는 투수라 해도, 심지어 이제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 제츠가 상대인데...

그런데 제츠가 두 번의 득점 찬스를 연달아 놓치면서 3회로 접어들자 양 팀 팬들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3회 초 타이탄스의 선두타자 박봉균 선수가 볼넷으로 1루를 밟으면서 이번 이닝에 4번 김진형 선수까지 들어설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두 팀 모두 2회까지 타순이 한 바퀴 돌고 1번부터 시작하는데, 3회에 김진형, 유영도 두 선수 모두 두 번째 타석에 들어올 것 같습니다.]

[오늘 두 투수들의 상태를 봤을 때 이번 한 바퀴에서 승부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역시 김진형과 유영도, 두 선수에게 달렸겠죠.]

‘땀이 흐르는 게 보이는 것 같네.’

신인답지 않은 배짱으로 제츠의 마운드에 큰 힘이 되어주었던 대형 신인, 윤한태.

하지만 여름이 지나 시즌 막판으로 접어들자 드디어 신인다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베테랑들은 좋을 땐 좋은 대로, 안 좋을 땐 안 좋은 대로 풀어나가는 법을 알고 있지만, 신인들에게 그런 걸 기대할 순 없었다.

정확히 20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소화 이닝은 97.1이닝.

아마추어 시절과 비교해 수십, 수백 배 늘어난 중압감 속에서 던진 두 배 가까이 늘어난 투구 이닝.

더해서 윤한태는 항상 상대들을 한 수 위의 힘으로 찍어누르던 투수였다.

이제 데뷔한 신인에게 다른 무기를 기대할 순 없었고, 상대의 수준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 프로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마추어 시절보다도 훨씬 많은 힘을 써야 했다.

‘이 과정을 잘 버텨내고 이겨내서 성장하면 리그에 자리 잡는 거고, 실패하면 그냥 그렇게 사라진 한때의 유망주 되는 거지.’

분석이 부족한 데뷔 초 좋은 활약을 보여준 신인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아마추어의 한계로 좋을 때와 안 좋을 때의 격차가 크고 가진 무기가 적을 수밖에 없는 신인들은 결국 언젠가 분석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신인에겐 신인 시절의 활약보다 그 과정을 어떻게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얼마만큼 성장하느냐가 훨씬 중요했다.

윤한태는 이보다 훌륭하기도 어려운 신인 시즌을 보냈지만, 이제야 제대로 된 출발점에 설 수 있었다.

‘본인이 얼마만큼 하느냐에 달렸겠지만...’

그래도 선배로서 그 과정에 자그마한 도움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을까.

신인에겐 본인만큼이나 팀과 선배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팀이 신인에게 얼마나 기회를 줄 수 있는가, 신인의 뒤를 얼마나 받쳐줄 수 있는가...

그것도 결국 본인의 운인데,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제츠는 꽤 강팀이었고, 적잖은 득점을 지원해줄 공격력도, 뒤도 든든히 받쳐줄 만한 수비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투수 정면! 그라운드를 반으로 가르면서... 조규영! 순식간에 나타나 몸을 날려 잡아내고, 토스! 2루 아웃! 절묘하게 피하면서 1루!! 아, 1루에선 살았습니다. 그래도 엄청난 수비!]

[시즌 도루 38개의 박봉균 선수와 19개의 최형두 선수. 이 둘을 상대로 더블 플레이를 만들긴 쉽지 않죠. 특히 최형두 선수는 순수 주력에 비해 도루 능력이 아쉽다는 평가를 꾸준히 받을 정도로 빨라요. 이 정도 타이밍이 나온 것도 정말 대단한 겁니다.]

[역시... 역시 이 두 선수의 수비는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제츠의 센터 라인을 굳건히 지켜주는 두 선수!]

[그러니까요. 그래서 너무 놀라우면서도 안타깝죠. 수비력이 너무 대단해서 타석에서 최소한만 해줘도... 아이고... 참 대단하고 아까운 선수들이에요.]

OPS 6할대로 포스트시즌 단골 진출 팀의 주전 유격수 자리를 지키며 수억의 연봉을 받아가는 조규영.

이재준과 조규영, 2루와 유격수 백업을 전부 맡고, 3루와 코너 외야까지 종종 커버하는 수비 스페셜리스트 이경모.

수비 하나로 먹고사는 두 선수가 센터 라인을 지킨다는 것만으로도 신인 투수에겐 커다란 힘이 되었다.

[내야 팝업! 조규영 선수의 호수비에 응답하는 건가요? 윤한태 선수, 타이탄스 타선에서 정교함을 담당하는 이윤지 선수를 내야 플라이로 잡아냅니다!]

[야수가 저런 수비를 보여주면 투수는 힘이 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수비가 중요한 거예요. 옛날에야 야수를 평가할 때 수비가 뒤로 밀려났지, 이젠 아니거든요?]

[인간 상성도 무시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이윤지 선수가 유독 윤한태 선수 상대 전적이 안 좋아요. 제츠에서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한태 선수가 20경기에 등판했고, 제츠와 타이탄스의 시리즈는 이번이 여섯 번째인데 무려 다섯 번째 등판입니다.]

[오늘 경기 두 타석 포함해서 13번 상대해서 13타수 1안타 1볼넷이죠? 삼진이 5개고, 안타 하나 있는 것도 단타예요.]

인간 상성 이윤지를 잡아내며 한숨을 돌린 윤한태의 앞에 전 타석 홈런을 기록한 김진형이 등장했다.

사실, 윤한태가 차기 타이탄스 킬러 자리를 예약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타이탄스에 강했기에 이윤지뿐 아니라 김진형, 뉴컴, 홍인주 같은 선수들도 모두 상대 전적 상에선 앞섰다.

다만, 전 타석에서 홈런이, 그것도 제대로 맞은 홈런을 허용하면서 조금은 반전된 분위기.

특히 최근 김진형의 페이스까지 생각하면 그동안 윤한태가 김진형에게 강했던 게 아니라 김진형이 부진했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이제야 신인 티가 나네.’

첫 타석에서도 그랬지만, 윤한태도 신인 특유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김진형은 물론 모두가 눈치챈 상황이었다.

순수 신인에게 신나게 얻어맞으면서 자존심을 구겼던 타이탄스 타자들은 이를 갈았고.

아직 득점은 1점에 불과하지만, 중계진은 물론 팬들도 느낄 만큼 오늘의 윤한태는 꽤 불안했다.

[아... 또! 또 날아갑니다! 김진형, 날 잡았습니다! 솔로 홈런과 두 번에 걸친 호수비로 이미 날아다니던 김진형이 투런 홈런으로 팀에 리드를 안깁니다!]

[이렇게 되면 제츠 벤치가 너무 안일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거든요? 아무리 좋은 투수여도 한 번이 다르고 두 번이 다른데 무려 여섯 번을 한 팀 상대로 올렸으니... 본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까지 더해지니까 타이탄스 타선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어요.]

‘적당히 우습게 봤어야지. 순수 신인한테 언제까지 호구 잡힐 거라 생각한 건지...’

김진형은 제츠 덕아웃의 구승배 감독을 흘깃 쳐다봤다.

개성 강하고 개인 성향이 강한 제츠 선수단을 훌륭하게 이끌 만큼 인자한 덕장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뤄내는 능력 있는 감독이지만.

김근수 감독이 그런 것처럼 구승배 감독도 실수가 없는 감독은 아니었다.

일단, 나름대로 강팀인 제츠를 이끌면서 한국시리즈 진출 경험조차 없다는 것.

제츠 선수단에도 분명 문제가 있겠지만, 감독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이번에도 멀리 뻗어나가는 타구! 뉴컴까지 연속 장타 나오나요!? 또 한 번의 호수비!! 이번에는 중견수 어경준 선수 쪽에서 멋진 수비가 나왔습니다!!]

[와... 머리 위를 넘어간 타구인데, 저걸 따라가는 것도 정말 힘든 거거든요? 그런데 따라가서 몸까지 날려 잡아내다니... 믿을 수 없는 수비죠, 이건!]

그래도 다행인 건 제츠 야수들도 드디어 분위기에 올라탔다는 것.

한참 후배에게 진 빚이 많았던 야수들은 후배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윤한태는 덕아웃 앞에 서서 복귀하는 야수들 한 명 한 명에게 감사를 전했다.

야수들이 아니었다면 더 큰 문제가 생겼을 위기였기에 감사 인사가 말 그대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왔다.

“괜찮아, 괜찮아. 잘하고 있어.”

“수비 믿고 던져! 그리고 저 둘은 네가 안 맞으면 더 민망해진다? 수비 말고 할 줄 아는 거 없는 애들인데 삼진 뻥뻥 잡고 그러면 쟤넨 가치가 없지.”

“형! 가치가 없다뇨!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이 좀 심하시네!”

“... 근데 틀린 말은 아니잫아요... 한태야. 그런 거 몇 개만 더 보내줘. 나도 하이라이트 영상이 필요해서...”

하지만 선배들도 이미 한참 어린 후배한테 진 빚이 너무 많아 그 누구도 윤한태를 탓하지 않았다.

중요한 경기고, 그보다 더 중요한 라이벌전이지만, 윤한태는 지금까지 할 만큼 한,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걸 한 소중한 후배였고 이제부터는 선배들의 차례였다.

“자, 우리도 여기 괴물 하나 있잖아? 김진형 저 새끼가 하는 거? 우리 영도는 다 할 수 있다고?”

“그럼, 그럼! 대신 영도가 하는 건 김진형이 못하지!”

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지만, 이미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이 경기는 마치 삼국지 소설 속의 일기토, 장군전처럼 유영도와 김진형, 두 선수 간 맞대결의 승자가 팀의 승리까지 가리라는 것을.

그만큼 이 경기에선,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두 선수가 내뿜는 포스와 영향력이 너무나도 절대적이었다.

“수비에서 해줘야 할 선배들이 다 해줬지? 공격에서 해줄 선배들도 다 해줄 거야. 알지? 얘도 다음 이닝 공격에 나간다?”

1번부터 시작되는 제츠의 3회 말 공격.

3번 타순인 영도는 다른 선수들이 윤한태의 멘탈을 케어할 때도 묵묵히 헬멧과 보호구를 챙기며 다음 타석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묵묵한 모습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고,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 선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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