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증명하기 위해 >
‘에이씨... 왜 하필이면 또 나야.’
타이탄스와 제츠의 시즌 15번째 맞대결.
마지막 2연전의 1차전 선발투수는 하필이면 또 성기주였다.
‘스넬 형은 왜 또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잠을 잘못 자 가지고...’
제츠와 타이탄스의 마지막 라이벌전인 만큼 타이탄스는 1차전 선발로 조지 스넬을 내보내려 했다.
제츠는 단 한 경기도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 타일러 로즈의 등판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지만, 대신 윤한태의 등판 일정을 맞췄다.
이미 이번 시즌 순위 경쟁에서 벗어나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유일한 팀, 창원 와이번스를 상대한 덕분이었다.
조지 스넬에 대항하기 위해 전체적인 성적도 신인치고 굉장히 훌륭한 편이지만, 특히나 중요한 경기마다 강한 임팩트를 남겨준 윤한태를 내보낸 것...
그러나 정작 조지 스넬의 목 근육이 갑자기 뭉치면서 롱릴리프 겸 땜빵 선발로 시즌을 치르던 성기주가 또다시 땜빵 선발로 마운드에 오르고 말았다.
‘아니, 심지어 영도, 저 자식한테는 내 스타일대로 던질 수도 없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성기주가 절대 어디 가서 무시당할 투수는 아니었다.
팀 사정에 따라 4선발과 5선발, 롱릴리프에 6선발, 필요할 땐 대체 선발과 추격조까지 오가는 마당쇠.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해내면서 평균 자책점과 FIP 모두 4점대 초반 근처에서 오가는 투수를 마다할 팀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버리는 카드가 필요할 때 팀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장렬히 산화해줄 수도 있었다.
영도가 KBO 홈런 신기록을 넘어 아시아 홈런 신기록에 도전하는 지금, 거의 KBO의 명예와 한국 야구의 자존심까지 영도의 배트에 걸려있는 분위기였다.
볼넷 한 번 잘못 내줬다가는 온라인에서 가루가 될 때까지 까일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분위기에서...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이닝을 길게 끌어주진 못해도 맡은 만큼은 충실히 해내는 게 장점인 투수, 성기주.
그런 만큼 투구 수가 많고 볼넷도 많은 성기주에게 지금 분위기에서 유영도를 상대하라는 건 몇 점을 내줘도 좋으니 홀로 장렬하게 산화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제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선발 가능한 투수 자체가 귀했고, 그런 귀한 몸, 성기주가 팀에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래. 네가 이 분위기에서도 스타일을 지킬 만큼 대가 세진 않지.’
초구가 바깥쪽이 아닌 몸쪽을 파고든 순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오늘 성기주는 평소와 달리 과감한 승부를 펼칠 것이라는 걸.
[성기주 선수가 공 두 개를 연속으로 몸쪽에 붙이는 건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흔히 말하는 똑딱이가 아니라 거포 중의 거포인 유영도 선수를 상대로 말이죠.]
[참... 분위기라는 게 무서워요. 이성적으로는 적어도 마운드와 타석에서만큼은 외부 영향 없이! 서로의 역량을 끝까지 쥐어짜서 붙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역시 쉽지는 않을 거예요.]
물론, 다른 투수들의 경우는 그 차이가 크지 않았다.
볼을 던질 때 스트라이크 존에서 두 개 정도 빼던 투수들이 한 개에서 한 개 반만 빼는 정도?
다만, 성기주는 워낙 스타일이 극단적인 투수다 보니 차이도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
[2-2 카운트에서 5구, 인터벌이 점점 길어집니다. 사인 교환을 마치고 5구 던졌습니다! 힘껏 올려치는 스윙! 맞는 순간 크게 뻗습니다! 멀리 뻗습니다!]
[계속 성기주 선수답지 않은 정면승부를 펼치다가 한 번 바깥쪽으로 낮게 확 뺐는데 오히려 그게 제대로 걸렸네요. 참... 야구가 그래요. 이래서 야구가 재미있는 거거든요.]
갑자기 선발투수가 교체되어 경기 직전까지 영상을 돌려보고 분석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탓이었을까?
딱히 의도한 것도 아니었는데, 장타를 만들기 쉬운 공들은 그냥 흘려보내다가 바깥쪽으로 한껏 빠진 공에 배트가 나갔다.
그냥 몸이 바깥쪽 공에 맞춰 준비된 그런 느낌.
그래도 과정이 어쨌거나 결과는 사람들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 이제 아홉수에 걸렸습니다. 2040시즌 59호 홈런을 터뜨린 유영도 선수! 아홉수만 넘어가면 바로 타이기록이거든요? 그리고 아직 시즌 종료까지는 오늘 경기 포함 무려 18경기가 남아있습니다!]
[음... 저런 선수는 대체 홈런을 칠 때마다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홈런을 무슨 외야 플라이처럼 뻥뻥 쳐대는데 감동이라는 걸 느끼긴 할까요?]
[하하하,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제 12년 커리어 중에 딱 한 번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시즌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느꼈던 감정이 생각나서 짧게 넋두리 좀 해봤습니다. 하여튼... 정말 대단한 선수예요.]
갑작스럽게 변경된 선발투수를 상대하게 되면서 예기치 않은 선물을 한 개 받아가는 느낌.
가볍게 홈런 한 개를 추가한 영도는 59호 홈런을 기록하면서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야쿠르트 스왈로즈 소속으로 2013년 기록한 아시아 홈런 신기록, 60홈런에 1개 차이로 다가섰다.
‘다행이네. 이런 분위기에서 60홈런 못 넘겼으면 홈런 신기록 세우고도 다신 한국 못 올 뻔했어.’
2040년에도 일본의 무언가를 빼앗아온다는 건 여전히 한국인들의 가슴을 미치도록 뛰게 했다.
2003년 이성연이 56홈런을 터뜨리면서 오 사다하루의 55홈런을 넘어서고 10년만인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다시 60홈런을 기록하며 KBO가 보유했던 아시아 신기록을 다시 NPB로 가져갔다.
사실, 외국인 타자였기 때문에 그나마 좀 나았지만, 그때도 한국 야구팬들은 상당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무려 27년이 지나 다시 한 번 NPB의 기록을 KBO로 가져오기 직전이었으니...
마의 구간을 빠르게 넘어가서 티가 나지 않았을 뿐, 당연히 영도는 상대 투수들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후반기 시즌을 치렀다.
워낙 외부 반응에 무덤덤한 성격이라 그런 부담감에 시달리지 않았을 뿐.
그래도 18경기를 남겨놓고 59홈런까지 때려낸 지금은 그런 부담감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동기부여가 되어 긍정적인 영향만을 미칠 뿐.
상대 투수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그대로였기에 이젠 그냥 좋기만 한 분위기였다.
[시즌 중반 너무 심각한 부진에 빠지면서 타이탄스 부진의 원흉으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지만, 결국 부활해 어느새 30홈런을 눈앞에 둔 김진형 선수, 김진형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김진형 선수도 지금 아홉수죠? 홈런 29개로 홈런 순위 4위, 3년 연속 30홈런까지도 딱 1개 남았어요.]
마음을 비운 채 경기에 나선 타이탄스의 핵심, 김진형.
에이스 대결에서 승리하겠다는 마음은 이미 버렸고, 단 한 번의 임팩트라도 안겨주겠다는 마음으로 제츠전에 임했다.
그렇게 욕심을 버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급격히 살아나 어느새 29홈런까지.
실제로 성적으로 나타나는 게 개막 후 5월 초까지 한 달여간 50홈런 페이스로 내달리다가 이후 두 달 동안 5홈런에 그쳤던 그는 다시 또 두 달 동안 13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특히 영도가 50홈런을 넘긴 이후 16경기에서 6홈런으로 완전히 뭔가를 떨쳐낸, 후련해진 모습을 보였다.
[유영도 선수가 맹활약을 펼치리라는 건 이제 상수로 두고 들어가야 합니다. 유영도의 맹활약 속에서 타이탄스가 승리를 거두려면 김진형 선수의 활약이 무조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시즌 초반까지만 해도 유영도 선수의 라이벌로 꼽히던 선수잖아요? 최근 성적이 너무 좋아서 시즌 전 평가도 이제 성에 안 차지만, 당시에도 유영도 선수의 평가는 높았어요. 풀타임 메이저리거잖아요? 제츠 팬이 아니라 그냥 한국 야구팬들의 기대가 엄청났죠.]
[기억납니다. 기대치도 엄청났지만, 그냥 열풍이었죠. 과거 아마추어 시절 이야기가 매일 기사로 나오고... 유영도 선수의 일생을 그 2주? 2주 사이에 다 알게 되어서 예전부터 친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선수랑 라이벌로 꼽혔다는 거예요. 그럴 능력과 자격이 되는 선수거든요? 최근의 부활과 어느새 30홈런을 눈앞에 둔 것?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
0.272/0.350/0.502, 29홈런 103타점
김진형은 두 달 전까지 OPS 7할대 후반에 머물던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최근 두 달 사이 급격히 성적을 끌어올렸다.
물론, MVP급으로 성장한 이후 최근 3시즌 중 눈에 띄게 최악인 성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체면을 세운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순수 신인으로 고교 졸업 후 첫 시즌을 맞이한 윤한태 선수도 김진형 선수 못지않게 놀라운 시즌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죠. 두 자릿수 승수까지 고작 1승만을 남겨두었고, 평균 자책점, FIP 모두 3점대예요. 나이 떼고 봐도 훌륭한 3, 4선발급 성적이죠.]
‘너무 대단한 재능이고, 기특한 후배라서 좀 봐주고는 싶은데... 나도 이번 시즌에는 누구 챙길 겨를이 없네. 미안하다.’
‘기특한 신인’ 윤한태는 오늘도 부활한 타이탄스 타선을 상대로 3이닝 동안 1피안타 3탈삼진의 호투를 펼쳤다.
윤한태가 본격적으로 신인왕 후보로 인정받은 건 유형근과의 맞대결을 버텨내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고, 어린이날 시리즈 전초전에서 타이탄스를 잡아낸 이후였다.
당시엔 부진에 빠지기 전, 한창 좋을 때였던 김진형도 윤한태의 패기에 밀려 무안타로 고전했지만...
[그렇죠, 바로 이겁니다! 타이탄스가 제츠를 잡으려면 김진형 선수가 무조건 해줘야죠!]
[30호 홈런! 이번에는 정말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김진형 선수는 김진형 선수네요. 이 선수는 이제 완전히 궤도에 올랐어요. 지난 두 시즌의 실력이 진짜 실력이고, 이번 시즌 부진이 이상한 거라는 게 바로 증명되잖아요?]
정신을 차리다 못해 제대로 기세에 올라탄 김진형은 아직 윤한태가 상대하기 버거운 선수였다.
평소처럼 씩씩하게 정면으로 덤벼오는 패스트볼을 기다리다가 받쳐놓고 때려버린 김진형의 타구는 까마득하게 날아가 관중석 2층으로 사라졌다.
[먼저 솔로 홈런으로 개전을 알린 유영도 선수의 59호 홈런에 대항하는 김진형 선수의 솔로 홈런! 시즌 30호 홈런으로 멍군을 외치며 1-1 동점을 만들어냅니다.]
[이제 겨우 3회지만, 벌써부터 이번 시리즈, 대박의 느낌이 나네요. 명경기가 펼쳐질 것 같아요.]
‘이번엔 전처럼 허무하게 안 끝낸다. 그래도 한때 라이벌로 꼽혔고,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냥 끝낼 순 없잖아. 소소하게 스쳐 지나간 한 명의 선수로 만족할 순 없지.’
유영도의 다음 시즌은 메이저리그에서.
이제 더 이상 이 문장을 부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시즌은 김진형이 영도와 경쟁할 수 있는 마지막 시즌이었다.
아니, 일이 잘 풀려서 그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게 된다면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건 장담도 할 수 없고, 언제가 될지도 알 수 없는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지난 맞대결들에서의 한심한 모습을 만회하고 응원하던 후배 앞에서 선배의 위엄을 조금이라도 다시 세우려는 김진형의 분전이 시작되었다.
< 나를 증명하기 위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