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제로섬 > (66/200)

< 제로섬 >

[5구! 5구도 볼입니다, 볼넷. 서울 드래곤스의 선발투수 마병현, 유영도 선수를 두 타석 연속 볼넷으로 내보냅니다.]

[음... 5구까지 가긴 했지만, 중간에 한 번 들어간 스트라이크도 유영도 선수가 볼을 파울로 만들면서 나온 거거든요? 5구 연속 볼이었어요. 첫 번째 타석에서도 스트레이트 볼넷이었고... 글쎄요.]

[정확한 건 마병현 선수만, 포수 장한철 선수나 이문재 감독 정도만이 알고 있겠지만, 이러면 보는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확신은 못 해도 심증은 생기죠. 투수들을 변호하는 의견도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지금은 그 수준보다도 좀 노골적인 것 같아요.]

‘기록이고 뭐고 다 떠나서 3할이 넘는 타율에 OPS 1.200을 넘어가는 타자한테 몸쪽 승부를 하려면 간땡이가 얼마나 부어야 하나?’

투수들도 정면 승부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못 하는 것뿐이다.

최근 영도의 홈런 페이스가 주춤하면서 상대 투수들을 비난하는 경우가 늘었지만, 반대급부로 변호 의견도 적진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OPS 1.200의 타자가 타석에 서는 것만으로도 재앙인데, 거기에 대고 팬들의 만족할 만한 정면 승부까지 펼치라니...

프로인 이상 성적만큼이나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었다.

“솔직히... 너무 노골적인데?”

“그러게. 이건 정말 대놓고 영도를 거르겠다는 거 아냐?”

영도에 이어 4번 타자 한영훈이 타석에 들어섰고, 5번 박윤형과 6번 우희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안 그래도 여름 이후 자신들이 부진에 빠지면서 손해를 많이 봤는데,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견제라니...

서울 드래곤즈에게도, 본인들에게도 화가 났다.

“아예 점수 차이가 확 벌어지면 아무리 양아치여도 대놓고 피하진 못하겠지.”

“그러니까. 아니, 다른 팀들은 안 그런 척이라도 하는데, 대체 무슨 똥배짱으로...”

“잃을 거 없다는 거겠지. 아마 이문재도 지금 제정신은 아닐 거다. 솔직히 드래곤즈에서 쫓겨나면 누가 데려가겠어? 영도 때문에 아마추어로 돌아가기도 쉽지 않을 텐데.”

“하긴... 이미 욕은 실컷 먹는데 더 먹을 것도 없겠네.”

사실, 영도의 홈런 기록 때문에 제츠 선수들 역시 꽤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영도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팬들에게 섭섭한 마음도 들고, 하여튼 복잡한 상황...

이문재 감독과 드래곤즈의 노골적인 방해는 공교롭게도 그동안 쌓인 제츠 선수들의 울분이 폭발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편해지라고 보내주자. 그동안 오래 고생했는데, 휴식이 필요할 때도 됐어.”

“하하하, 그런 것까지 생각해주는 거야? 형도 저 아저씨 싫어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챙긴다니까?”

“와, 이 새끼... 그런 끔찍한 소리는 제발 하지 말아줄래?”

“크크크... 솔직히 이문재 감독 좋아하는 사람 못 보긴 했어. 참 대단하지? 유중선한테 대체 뭘 해줬길래 저렇게 싸고돌까? 팀 성적도 저 모양이고 팬들한테 욕도 저렇게 얻어먹으면 자를 만도 한데 기를 쓰고 지키네.”

열두 번 잘리고 다시 열세 번째 잘려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데 여전히 드래곤스의 감독은 이문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지만, 드래곤스 팬들은 그야말로 몸에서 사리가 나오고 머리에선 열이 뻗치는 상황이었다.

시즌 전부터 불거진 영도와의 일화에서 시작해 아마추어 감독 시절의 만행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화룡점정으로 팀 성적까지 시궁창에 박아버렸으니...

드래곤즈 팬덤은 타 팀 팬들의 비아냥과 비난이 쏟아지다가 이젠 아예 동정이 쏟아지는 지금의 이 상황을 견디다 못해 해탈, 열반에 들며 성인이 되어갔다.

“그러니까 드래곤즈 팬들을 위해서라도 모가지 날려드려야지. 솔직히 팬들이 뭔 죄야? 드래곤즈에 정 붙인 거 말고 잘못한 게 뭐가 있어서...”

“그러게. 다들 들었지!? 우리 영도 마음 놓고 배트 좀 휘두르게 우리가 좀 돕자고!! 이왕이면 잠실에서 57호 홈런 때리는 게 우리 팬들한테 면도 서고 좋잖아!?”

제츠의 안방마님, 우희운이 선수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사실, 부진한 내내 자주 보인 장면이지만... 오늘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안 그래도 점점 폼이 회복되는 중이기도 했으니...

이문재와 드래곤즈가 건드린 제츠의 콧털.

잠에서는 깼지만, 아직 조금의 몽롱함은 남아있던 사자, 서울 제츠는 간지러움에 한 번 크게 재채기를 하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달릴 준비를 마쳤다.

[9구! 구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끈질긴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 나가는 톱타자 손성호! 다시 2사 주자 1, 2루의 찬스가 이어집니다.]

[제츠 타선이 갑자기 불을 뿜는데요? 4회까지 유영도 선수만 볼넷으로 두 번 출루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병살타만 하나 치고 노히트로 막혔는데, 5회 들어 박윤형, 우희운, 김원상의 연속 안타와 조규영의 희생 플라이 등을 묶어 벌써 2점을 뽑아냈어요.]

[그리고 여전히 2사 1, 2루의 찬스가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장타 하나 없이 2점을 뽑아낸 제츠, 팀의 해결사, 유영도 선수에게 기회를 넘겨주기 위해 어경준 선수가 들어섭니다.]

[아무래도 약간은 고전적인 역할의 2번 타자죠, 어경준 선수는. 발 빠르고 영리한 타자라서 한영훈 선수와는 또 달라요.]

여름 이전의 제츠는 손성호-한영훈-유영도라는 팀 내 1, 2, 3순위 타자를 1, 2, 3번에 모조리 배치해 경기 시작부터 쭉 내달리는 공격을 선호했다.

하지만 한영훈이 슬럼프에 빠진 여름 이후 살짝 스타일이 바뀌었다. 

장타력은 조금 떨어졌지만, 여전히 높은 타율과 출루율을 유지하는 손성호를 1번에 그대로 두고 엄청난 스피드와 영리함을 갖춘 어경준을 2번에 배치, 최대한 영도 앞에 주자를 쌓아 이어주는 전략.

한영훈의 부진도 부진이지만, 영도의 생산력이 급격하게 치솟으면서, 어경준이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순조롭게 1군에 적응하면서 상위 타선의 생산력은 거의 떨어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어경준 선수도 손성호 선수만큼이나 신중하게 접근하는 모습입니다. 스트라이크 존을 한껏 좁히고 걸어나가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타석에 임합니다.]

[사실, 여기서 어경준 선수가 쳐서 나가도 문제예요. 오늘 경기 이기는 것도 이기는 건데, 유영도 선수에게 홈런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우승 경쟁만 신경 써도 정신없을 텐데, 제츠는 하나를 더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스트레스가 꽤 심할 겁니다.]

[여기서 어경준 선수가 안타를 쳐서 베이스가 하나라도 비게 된다면 이전 타석을 봤을 때 유영도 선수와 굳이 무리해서 승부하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겠죠? 지금의 유영도 선수는 스코어링 포지션인 2루, 아니면 아예 3루까지 내주더라도 그냥 걸어내보내는 게 차라리 나을 수 있어요.]

영도를 그냥 피해버린 드래곤즈에 분노한 제츠 타자들은 5회 말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신나게 드래곤즈 마운드를 두들겼다.

최대한 점수 차이를 크게 벌려서 영도를 피할 명분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전략.

하지만 그러면서도 본래 목적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만루에서까지 그냥 내보내진 않겠지... 하는 마음에 어경준은 볼넷을 목표로 마병현과 마주했다.

[목표 달성! 어경준, 7구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냅니다. 기어이 유영도 선수 앞에 만루 기회를 만들어주는 제츠의 타선! 오늘의 제츠는 지난 한 달 동안의 제츠와는 근본부터 다릅니다! 끈끈한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제츠 타선은 끈끈하게 달라붙고, 마병현 선수는 유영도 선수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주자 있는 상황에서 제츠 상위 타순을 상대로 약간 불안한 모습이 있었어요.]

[그런 요소들이 맞물려서... 2-0, 주자 만루에서 유영도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야... 이번에 하나 나올까요? 최근 상대 투수들이 유영도 선수를 지나치게 견제하고 도망가다시피 하는 게 팬들 사이에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데... 아마 55호 홈런이 터져서 신기록 바로 직전까지 도달하면 투수들도 눈치 때문에 대놓고 피하진 못할 거거든요?]

이성연이 가지고 있는 KBO 한 시즌 홈런 신기록은 56개, 현재 영도의 홈런 개수는 54개.

최근 9경기 2홈런으로 홈런 개수가 급격히 줄어든 건 이전 홈런 페이스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던 이유도 있지만, 투수들이 영도를 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55호 홈런이 나오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질 것은 자명한 사실.

50홈런을 넘어선 이후에도 승부를 피하는 투수, 팀들에게 적지 않은 비난이 가해졌는데, 그 정도까지는 어떻게 무시하면서 버틸 수 있었지만...

55호 홈런이 나온 이후에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수준의 비난이 가해질 것이 안 봐도 뻔했다.

그때는 팀의 이미지나 인기에 상당한 타격이 가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당장의 1승이 시즌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팀들은 몰라도 그렇지 않은 팀들은 영도와 승부하는 게 피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득인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어!? 지금 뭐죠? 포수가 일어나서 고의사구 신호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예? 만루에서요? 프로 무대에서 그런 일이... 나오네요?]

하지만 55호 홈런은 왠지 조금 더 뒤로 미뤄둬야 할 듯했다.

***

“감독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만루에서 고의사구 사인이 나온 순간, 드래곤즈의 장승조 수석코치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이해는 가지만, 실제로도 이게 더 효과적일 수 있지만...

효율과 감정은 또 다른 법.

무엇보다 스포츠를 대할 때의 팬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만은 않았다.

“시끄러. 지금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도 아니고 가오 살릴 때도 아니라고.”

현재 이문재 감독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즌 전부터 영도와 언론, 여론에 실컷 얻어맞으며 시작했고, 영도의 맹활약이 이어지면서 시즌 중에도 비난이 끊이질 않았다.

시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예상보다도 훨씬 부진한 팀 성적으로 인한 비난이 추가되기까지.

제정신을 유지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감독님. 괜히 여기서 고의사구로 내보냈다가 다음 타자한테 타점이라도 내줬다간 진짜 난리 납니다.”

유중선도 아무 조치 없이 이문재를 그냥 둔 건 아니었다.

사사건건 이문재와 반목하던 1군 수석 코치 박한영을 2군 감독으로 내리고, 2군 감독 장승조를 1군 수석 코치로 올려준 것.

이문재와 동갑인 박한영과 달리 장승조는 2살 연하에 대학교 직속 후배였기 때문에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럼 안 맞으면 될 거 아냐! 한영훈이 안타 칠 확률보다, 아니, 볼넷이라도 골라서 나갈 확률보다 유영도 저 새끼가 홈런 칠 확률이 더 높은데 고의사구로 안 내보내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유중선의 의도는 방해만 하는 박한영 대신 후배 장승조를 올려줄 테니 함께 머리를 모아 꼴찌라도 벗어나라는 것이었다.

시즌 종반에 감독이 아닌 수석코치를 바꾼다는 건 꼴찌만 벗어나면 다음 시즌도 생각해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중선의 행동을 자신의 입지가 튼튼하다는 것으로 오해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시즌 내내 이어진 비난에 멘탈이 나간 것인지...

이문재는 박한영 대신 장승조가 올라온 이후 폭주하기 시작했다.

“가, 감독님!!”

“아... 씨발...”

그리고 그 결과는... 한영훈의 부활포라는 최악의 형태로 돌아오고 말았다.

5회 말, 2아웃... 제츠 7 : 0 드래곤즈

***

[드디어! 드디어 제대로 된 타격에 성공하는 유영도 선수! 연속 볼넷으로 허무하게 끝난 앞선 네 타석에서의 울분을 터뜨리며 잠실 돔에서도 가장 먼 가운데 펜스를 훌쩍 넘겨버립니다!! 시즌 55호 홈런!! 드디어 신기록에 한 개 차이로 다가섭니다!!]

[이렇게 되면... 드래곤즈 벤치의 선택도 재평가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볼넷으로 쭉 피하다가 한 번 승부했는데 그냥 얻어맞았네요?]

5회에만 한영훈의 그랜드 슬램 포함 8득점.

이후 이문재 감독은 자신의 미래를 직감하고 넋이 나간 것인지 덕아웃에 가만히 앉아 멍한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츠는 6회에도 2득점을 추가하며 12-0까지 앞서나갔고, 8회에는 영도에게 다섯 번째 타석까지 안겨주었다.

6회 네 번째 타석에선 이문재 감독의 지시가 없었음에도 투수가 겁을 먹어 다시 한 번 볼넷으로 출루했지만...

8회, 드디어 제대로 된 승부를 펼칠 수 있었고, 영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유영도 선수도 참 대단하네요. 지금 얼마나 부담스럽고 긴장되겠어요? 본인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조차 어려운데, 이 정도는 크게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기회가 오자마자 바로 넘겨버리네요.]

[후반기 홈런 페이스가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 55호 홈런을 친 지금도 앞으로 23경기나 남았거든요? 이 정도면 아시아 홈런 신기록까지 기대해봐도 되겠는데요?]

“크하하하, 우리가 뭐랬냐!! 오늘 무조건 기회 만들어준다고 했지!?”

“이 정도면 우리도 빚 꽤나 많이 갚지 않았냐? 그러니까 빨리 61호 홈런까지 후딱 해치워버리고 우승에 집중하자고!”

“이 미친놈들이!! 이 늙은이가 그렇게 힘들게 뭐 빠져라 고생할 땐 모른 척하더니, 이번 시즌 처음 본 영도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줘!? 나도 억울해, 이 자식들아!!”

영도의 55호 홈런과 드디어, 정말 오랜만에 폭발한 제츠의 타선, 후반기 맹활약을 이어가는 윤한태의 6이닝 무실점 호투까지.

드래곤즈와의 1차전에서 제츠는 정말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었고...

“감독님...”

“씨발... 빌어먹을...”

누군가가 많은 것을 얻어간 만큼 누군가는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도 아직 더 잃을 것이, 가장 큰 것이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 제로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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