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속의 시리즈 >
“이야...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역시 아저씨도 오셨네요. 저희가 또 이런 자리에 빠질 수 없죠?”
서울 제츠와 서울 드래곤즈의 3연전이 펼쳐질 잠실 올림픽 파크.
드래곤즈가 잠실돔을 홈으로 쓰긴 하지만, 잠실돔은 서울시와 제츠의 힘으로 지은 구장이고, 드래곤즈는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해 끼어든 세입자에 불과했다.
라이벌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 한쪽의 급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관계.
당연히 제츠 팬들은 드래곤즈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아니, 안중에도 두지 않는 걸 넘어 얌체처럼 세들어 사는 주제에 구장 유지비도, 수리비도 내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걸 보면서 조롱하고 혐오하는 수준.
드래곤즈 팀 이미지도 바닥에 가까워서 인기의 격차도 심하고 제츠와 타이탄스라는 메가 클럽의 존재로 인해 끌어올 연고지 팬덤도 전무한 상황.
자연스레 같은 홈 구장을 쓰는 팀들의 대결임에도 이렇다 할 관심이 몰리지 않는 시리즈였지만...
이번 3연전만큼은 달랐다.
“그때 홍인주 300호 홈런 가져간 아저씨는 그거 팔아서 차 바꿨다던데요?”
“아오, 그러니까요. 원래 저도 그 근처에 자리 잡아놓고 있었는데, 투수들이 피할 것 같아 불안해져서 우익수 뒤쪽으로 자리 바꿨거든요.”
“와... 진짜 아까우셨겠어요. 딱 평소 홍인주 홈런 코스 그대로 날아갔는데.”
“제 차도 꽤 오래 된 차인데... 에휴...”
뭔가 역사적인 의미가 있고 그로 인해 가치가 생기는 홈런볼들.
보통 팬들이 그런 의미 있는 공을 잡으면 구단으로부터 적당한 선물을 받고 넘겨주지만, 홍인주의 300호 홈런처럼 개인을 넘어 리그 역사를 새로 쓴 공은 또 달랐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그렇고, KBO에서도 그렇고 보통 이런 공들은 수천만 원에서 최대 수억 원까지 가격이 치솟았다.
구단 입장에서도, 선수 입장에서도 비싸다고 역사를 포기할 순 없는 노릇.
따라서 구단도 암암리에 금전적인 대가를 치르며 받아올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금전을 노린 수집가들이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좌익수 뒤로 잡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잠실이고 54호 홈런까지 때렸는데 이전 경기들처럼 도망가진 않겠죠.”
“그러게요. 근데 그동안 잘한다는 선수들 많았지만, 유영도처럼 미쳐버린 선수는 처음 봐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에휴... 그것도 그렇죠? 역시 이런 건 하늘에 맡겨봐야죠, 뭐.”
“57호 홈런도 안 바라고 56호 홈런, 진짜 최악의 경우에는 55호 홈런이라도 잡고 싶네요. 이번 시즌 유영도는 거의 신드롬 수준이라 55호 홈런이라도 나름 가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홈런볼을 잡으러 온 모든 팬들이 돈을 노리고 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역사의 현장에서, 이왕이면 역사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느끼고 싶은 사람들도 꽤 많았다.
목표가 확실할 뿐, 홈런볼을 잡아보고 싶은 평범한 팬들처럼 글러브 하나 들고 찾아온 수집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어유... 저 사람들은 무슨 잠자리채도 아니고 뜰채를 가져왔네요?”
“에이, 저건 아니지! 잠자리채도 위험하다고 난리인데 무슨 뜰채를 가져와? 저런 경우 없는 인간들...”
최대한 리치를 늘리기 위한 잠자리채, 나아가 뜰채까지.
평범하게 야구를 관람하러 온 다른 팬들의 시야를 방해하고 나아가 안전까지 위협하는 사람들이 진짜 문제였다.
돈을 요구하는 건 도의적인 부분이라 차라리 낫지만, 잠자리채와 뜰채라니...
다른 팬들도 다른 팬들이지만, 본인의 안전까지 위협하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야... 제츠 일 잘하네요? 입구에서 칼같이 압수하네.”
“제츠가 팬 서비스도 좋고 일도 잘하는 편이죠. 팬들을 즐겁게 해주다 못해 본인들도 즐거우려고만 해서 문제가 자꾸 생기는 게 문제지.”
최근 영도의 홈런 관련 소식은 스포츠 뉴스가 아닌 메인 뉴스에서 다뤄질 정도로 이미 야구계의 손을 떠났다.
평소 야구를 알긴 알지만, 크게 관심은 없었던 사람들까지도 영도의 홈런 소식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
마치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홈런 경쟁으로 죽어가던 리그 인기를 되살렸던 시절이 생각날 정도였다.
그런 만큼 제츠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다.
안 그래도 팬들이 구름처럼 몰리는데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9시 메인 뉴스에 홈런 소식이 아니라 사고 소식이 보도될 판이었으니...
오랜만에 야구계 바깥까지 뒤흔드는 강력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올라타진 못할망정 정면으로 얻어맞고 쓰러지는 대참사는 피해야만 했다.
“그럼 아저씨! 행운을 빌어요!”
“아저씨도 득템하세요. 하하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번 시즌의 KBO는 영도 덕분에 최근 들어 가장 뜨거운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야구계도 좀 더 욕심을 부려 KBO 신기록은 물론 아시아 신기록까지 갱신되길 내심 바라는 중이었고.
어찌 되었건 오늘의 올림픽 파크 역시 구름처럼 몰려든 팬들과 함께했다.
***
“어깨는 좀 안 무겁냐? 어깨가 좀 무거울 때도 됐는데?”
“왜요? 홈런 신기록 때문에? 아니면 한 달 반째 부진한 동료들 때문에?”
“... 아니, 당연히 홈런 때문... 야! 지금 모든 관심이 다 네 홈런에 집중되어 있는데 당연히 홈런이지! 그런 식으로 불만 표출하는 거냐?”
“딱히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들으셨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근데 보통 개인적인 일 때문에 어깨가 무겁다고는 안 하죠.”
“... 기대감이 무겁다. 마음이 무겁다... 그럼 보통 뭐라고 하지?”
“글쎄요. 그냥 부담스럽다, 정도밖에 기억이 안 나네요. 진짜 뭐라고 하더라?”
홈런 신기록을 눈앞에 둔 영도야 당연히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같은 팀 동료들에게도 영향이 있었다.
항상 팬들의 시선 속에 있는 프로 선수고, 유명인이자 준공인이지만, 지금과 같은 관심은 이들 역시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
영도의 팀원이라는 이유로 매 경기 엄청난 관심에 노출되는데, 하필이면 ‘여름 제츠’와 겹치면서 필요 이상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도 네 덕분인 건지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어. 1, 2주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는데.”
“예? 뭐가 제 덕입니까?”
“얘네도 노는 걸 좋아해서 그렇지, 멘탈이 약한 애들은 아니거든. 아니지, 팬들 눈치가 보이는데도 그렇게 놀러 다니는 걸 보면 멘탈이 아주 강한 거라고 봐야지.”
“... 그러면 팬들한테 욕먹는 게 싫어서 노력했다는 겁니까?”
“응. 너 방해하지 말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애들도 충격 좀 받은 것 같더라고.”
의외로 쏟아지는 팬들의 비난을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제츠 선수들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달여의 부진을 끝내고 다시 달려나갈 채비를 마쳤다.
성적도 매지션즈와의 루징 시리즈 이후 9경기에서 6승 3패로 후반기 개막 직후 18경기와 비교해 영도의 홈런은 크게 줄었는데, 승률은 더 높았다.
덕분에 맞대결 이후 7승 2패로 질주하는 매지션즈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남은 경기는 24경기, 1위 매지션즈와의 승차는 1.5게임.
시즌 종반 제츠의 부진과 매지션즈의 질주가 겹치며 우승 경쟁이 끝나는 듯했지만...
시즌 막판 제츠가 다시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하면서 제츠 팬들에겐 희망을, 매지션즈 팬들에겐 불안을, 나머지 8개 구단과 중립 팬들에겐 꿀잼을 선사했다.
“그나저나 와서 처음으로 만난 KBO 팀도 드래곤즈였는데 신기록을 깨느냐 마느냐 할 때도 드래곤즈랑 붙네?”
“... 우연이죠. 아니, 52호 홈런 친 이후에 벌써 4번째 시리즈인데, 만나도 이상할 것 없는 타이밍이고.”
“그렇긴 해. 우리 빼고 9팀 중 4팀을 만났는데, 거의 50% 타이밍이긴 하지. 그래도 별 의미 없는 걸 의미 있게 만들면 되잖아?”
“의미 있게... 이번 시리즈에서 홈런 3개 치라는 뜻이죠?”
“그래, 인마!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니까? 네가 60홈런 못 넘기면 너뿐 아니라 우리 팀 전체가 후유증에 시달리게 생겼다.”
“참... 생각보다 전 괜찮은데 오히려 주변에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네요. 팬들보다 주변 사람들 때문에 부담스러울 정도입니다.”
단순한 팀 동료들마저도 영도의 기록에 깊게 감정 이입한 상황.
이제 영도의 기록은 영도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조금 과장해서 보면 제츠의 우승이 영도의 기록 경신 여부에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하고, 과장하지 않아도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마크 맥과이어나 배리 본즈, 성연 선배나 블라디미르 발렌틴까지... 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달성한 시즌에 우승한 선수는 한 명도 없네요.”
“그러네. 예전이었다면 이상했을 것 같은데, 겪어보니까 알겠다. 팀 전체가 우승, 딱 하나만 생각하고 다 같이 달려가도 하늘이 점지해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게 우승인데, 이렇게 어수선해서야...”
“... 전 선배님이 부탁하신 대로 최선을 다해서 야구를 잘한 것뿐입니다. 책임 없어요.”
“... 그래. 딱히 너한테 책임을 묻는 건 아니니까. 근데 언제부터 내 부탁을 그렇게 잘 들어줬다고... 그리고 부탁 두 번 했다가는 홈런 100개도 치겠다, 야.”
영도의 잘못은 아니지만, 영도로 인해 팀 분위기가 흔들리는 건 사실이었다.
현재 기록 보유자인 56홈런의 이성연 역시 팬들의 지나친 관심과 언론의 무절제한 보도 행태 때문에 팀 분위기가 흐트러져 동료들에게 미안했다고 인터뷰했을 정도.
영도 혼자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팀 동료들 입장에선 그로 인한 비난이 억울할 순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사연도 있고 하니 이번 시리즈에서 홈런 3개 때리고 깔끔하게 정리하자.”
“홈런 3개 치면 아시아 신기록 이야기 나올 텐데요. 그거 NPB 기록이라 지금보다 더 요란하면 요란했지, 조용하진 않을 것 같은데...”
“아오! 그럼 이번 시리즈에서 7개 치던가!”
24경기를 남겨두고 아시아 홈런 신기록까지 남은 홈런은 7개.
24경기 7홈런은 한 시즌으로 계산했을 때 35홈런이 넘어가는 빠른 페이스.
최악의 경우 시즌이 끝날 때까지 언론과 팬들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시즌 개막부터 지금까지 우승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손성호 입장에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을 정도.
아마 영도와의 첫 만남에서 우승할 수 있게 좀 도와달라 부탁했을 땐 너무 잘해서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래요.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솔직히 용서하지도 않았고, 잊어버렸다고 해도 거짓말이니... 남은 감정 싹싹 긁어모아서 최선을 다해보죠.”
“제발. 시즌 막판에는 제발 조용히 집중해서 포스트시즌 준비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누구보다도 그러길 원하는 건 영도였다.
언론을 대하는 게 능숙한 편도 아닌 데다가 애초에 이런 기록이라는 건 빨리 달성하고 치워버리는 게 최고였다.
기록이 아니더라도 홈런이라는 건 많이 때릴수록 좋은 거니까.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직업을 날려버릴 수 있다면...
뭐, 나쁠 건 없었다.
< 약속의 시리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