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원맨 캐리 > (63/200)

< 원맨 캐리 >

[연속 안타! 2루수 옆으로 살짝 빠져나가는 고윤수의 안타로 무사 1, 2루 찬스가 만들어집니다!]

[자, 시작하나요? 수원 매지션즈도 역시 이렇게 물러날 팀이 아니죠!]

[바로 전 이닝에서 유영도 선수에게 연타석 홈런을 허용하면서 실점하지 않았습니까? 곧바로 따라갈 절호의 찬스를 잡았습니다.]

[이런 게 정말 중요해요. 강팀일수록 득점 직후의 실점을 잘 억제하고 실점 직후의 득점을 잘 만들어내죠. 이게 잘 되어야 강팀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곧바로 반격을 시작한 매지션즈.

나정준-고든 레녹스의 메인 공격대가 영도의 호수비 앞에 무기력하게 물러나긴 했지만, 매지션즈 타선의 장점은 탄탄한 짜임새였다.

슈퍼스타 한두 명에게 의존하지 않고 매 경기 다른 선수가 해내줄 수 있는 팀.

오늘의 시작은 4번 김정형과 5번 고윤수였다.

[타석에는 이번 시즌 영입되자마자 매지션즈의 정신적 지주 자리를 꿰찬 한국 야구의 레전드, 포수 박진영 선수가 들어섭니다.]

[비록 노쇠하긴 했지만, 포수로서 이 정도 나이에 이 정도 기량을 유지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박진영 선수는 정말 대단한 선수고, 오랫동안 기량을 유지하는 겁니다.]

[한 살 더 많은 손성호 선수가 제츠에 있긴 하지만, 손성호 선수의 기량이 유독 오래 유지되는 것도 있고, 포지션 차이까지 감안하면 박진영 선수의 대단함도 만만치 않죠.]

전성기에는 2할 후반대 타율에 30홈런을 기록하고 수비에서도 KBO 역대 최고를 노렸던 선수.

세일러스에서 늙었다고 푸대접당하며 매지션즈로 이적한 그는 여전히 상당한 기량을 자랑하며 매지션즈의 단점이었던 포수 포지션의 구멍을 완벽히 메워주었다.

결국, 박진영의 FA 이적은 세일러스 프런트가 저지른 또 한 번의 훌륭한 무브가 되어가는 분위기였다.

‘만약 타구가 제대로 걸린다면 이쪽으로 날아올 가능성이 높아.’

늙으면서 어쩔 수 없이 느려진 배트 스피드와 반응속도를 보완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당겨치는 타격폼으로 전환한 박진영이기에 잘 맞은 타구는 대부분 3-유간으로 향했다.

이번 시즌 0.781의 OPS, 14개의 홈런으로 펀치력만큼은 여전했으니 핫코너라는 이명에 어울리는 타구가 날아올 확률도 높았다.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매지션즈에겐 실점 직후 득점 찬스, 제츠에겐 득점 직후 실점 위기 아니겠습니까?]

[그냥 한 점이 아니에요. 여기서 한 점이라도 들어오면 경기 분위기가 확 바뀔 가능성도 있거든요?]

[물론, 무사 1, 2루인 만큼 매지션즈는 다득점을 노리고 있을 겁니다. 다만, 1점으로 막아내도 제츠가 만족할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제츠도 지금 클로저로 이어줘야 할 셋업, 이강우 선수가 좋지 않아서 1점이라도 내주면 불안하긴 할 거예요. 2점 차도 충분히 불안한 스코어긴 하지만, 1점 차, 그것도 2점 차에서 좁혀진 상황에서의 1점 차는 또 다르죠.]

7회 초 영도의 타석이 유영도라는 선수가 가진 힘 때문에 중요한 승부처 취급을 받았다면 지금은 두말할 것도 없는 전형적인 승부처였다.

2-0으로 뒤진 팀이 경기 종반인 7회 말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잡아낸 무사 1, 2루, 절호의 득점 기회.

흔들리는 에이스와 타석에 등장한 베테랑.

비교적 뒷문이 약한 앞서가는 팀과 뒷문이 강한 추격하는 팀.

[경기장을 가득 메운 긴장감에 일루션 스타디움에는 또 한 번 정적이 흐릅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요? 이 두 팀의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순간이 또 오늘 경기에 얼마나 중요한지 관중분들이 먼저 알려주시네요.]

[바깥쪽에 꽂히는 146km의 포심 패스트볼. 자, 일단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고 시작합니다.]

[비록 연속 안타가 나오긴 했지만, 타일러 로즈의 힘이 떨어졌다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운도 안 좋았고, 타자들이 잘 공략한 느낌이었지.]

경기장을 가득 메운 긴장감 속에 타일러 로즈의 피칭이 이어졌다.

항상 여유롭고 마이 페이스를 유지하는 타일러나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은 박진영이나 어떤 순간에도 긴장하거나 흔들리는 선수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두 선수마저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는 상황.

두 선수는 각팀의 에이스와 정신적 지주였고, 그들의 긴장감은 동료들에게, 그리고 선수들의 긴장감은 관중들에게 전염되었다.

[신중한 승부를 이어가는 양 선수. 타일러 로즈도 어려운 승부를 펼치고 박진영 선수도 스윙을 아끼는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확실한 승부가 필요한 시점이긴 하죠. 다만, 지나치게 신중하다가는 귀한 찬스도 놓칠 수 있거든요? 과감할 땐 과감할 필요도 있어요.]

‘제기랄... 늙으니 서럽군.’

박진영도 스윙을 아끼고 싶어서 아끼는 게 아니었다.

어느덧 서른다섯, 더불어 기나긴 포수 생활로 인해 여기저기 망가진 몸까지.

젊었을 때야 스트라이크 존이 다 내 구역이라고 붕붕 휘두르고 다녔지만, 지금 그랬다간 투수들한테 쉬어갈 타이밍이나 주고 물러날 뿐.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드는 대로 살아남는 방법을 깨우쳐야 했다.

[신중하게 이어지는 승부, 어느새 3-2 풀카운트까지 이어집니다.]

[양 선수 모두 이번 승부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거죠. 박진영 선수는 나이가 들면서 공을 오래 지켜보는 스타일로 바뀌었다지만, 타일러 로즈는 꽤나 빠른 승부를 즐기는 선수거든요? 하지만 이번엔 최대한 신중하게 공 하나하나 신경 써가면서 던져주고 있어요.]

신중한 승부가 이어지면서 어느새 볼 카운트 전광판의 불이 전부 들어왔다.

다음 공 하나에 많은 것들이 걸려있는 상황...

‘히트 앤 런이라...’

매지션즈 벤치에서는 박진영의 노련함을 믿고 작전을 걸었다.

박진영 이후 등장할 하위타선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보니 여기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가겠단 의도였다.

무사 1, 2루 풀 카운트면 작전이 걸려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스트라이크면 무슨 일이 있어도 치고, 볼이면 골라낸다...’

내야 땅볼도 괜찮다면 늙어서 서러울 것도 없었다.

내야를 뚫어내기 위해 많은 걸 포기하고 장타에 올인했을 뿐, 맞추기만 하는 거라면 여전히 자신 있었으니까.

[주자 뜁니다! 타구도 잘 맞으면서 빠르게 3루!!]

‘이거 잡으면 끝난다.’

몸쪽으로 절묘하게 꽂혀 들어가는 포심 패스트볼.

타일러 로즈도 중요한 순간에 어울리는 최고의 공을 던졌다.

박진영 역시 동료들과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절묘한 타구를 때려냈고.

‘됐어! 2, 3루는 무조건 가겠어!’

완벽하게 빠져나가는 안타성 타구까진 아니었고, 3루수가 수비를 아주 잘하면 내야 땅볼에 그치는 타구였다.

코스가 워낙 좋고 타구 스피드가 빨라 처리하기 아주 어렵지만, 보통은 안타가 되겠지만... 

뒤로 주저앉으면서 완벽한 타이밍에 글러브로 건져내면 내야 땅볼이 될 수도 있는 타구.

히트 앤 런이 걸렸고, 내야에서 잡아도 수비수의 자세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타구였기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작전 수행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타일러 로즈도, 박진영도 최고의 플레이를 해냈지만, 최고의 플레이를 넘어 오늘 ‘뭘 해도 되는 날’을 맞이한 영도가 3루에 있었다는 것.

[와!! 앞으로 몸을 날리면서 잡아냅니다! 다이렉트로 잡았다는 판정! 아, 이렇게 되면!]

[아... 주자들은 이미 다음 베이스에 거의 도착했거든요?]

[그렇습니다! 서두를 필요 없죠! 천천히 2루, 다시 1루! 삼중살! 트리플 플레이가 나왔습니다!]

[아니, 여기서 이런 게 나오나요? 제가 중계를 시작한지 이제 5년 정도 된 것 같은데 트리플 플레이를 중계한 건 처음인 것 같거든요? 정말 잘 안 나오는 건데...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서, 중요한 상황에서 나와버렸네요.]

“미친놈아!! 빠뜨렸으면 어쩌려고 거기서 앞으로 뛴 거야!!”

“그러게요... 그냥 순간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네요.”

바로 뒤에서 지켜봤던 조규영은 얼마나 놀랐는지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만큼 일반적이지 않은, 정석과는 거리가 먼 수비였다.

“아니, 결과가 좋으니까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해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석이나 교과서 같은 건 결국 참고 자료 같은 거니까.”

“그것도 그렇긴 한데... 이번엔 어차피 정석으로 해도 잡기 쉬운 건 아니었으니 한 번 시도해보는 게 나았을 것 같기도 하고...”

“대신 나중에 욕먹으면 또 감수해야죠. 욕먹을 각오만 하면 못할 게 없습니다.”

“그래, 너 오늘 컨디션 너무 좋아 보여서 사고 칠 줄 알았다. 대신 너무 자주 그러지는 마... 나 얼굴 하얗지, 지금?”

“예. 많이 놀라셨습니까?”

“응... 큰일 나는 줄 알았다고...”

[일단 매지션즈의 항의가 이어지고는 있습니다만, 타구의 바운드 판정은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몇 시즌 전부터 타구가 땅에 닿으면 센서를 통해 판정하고 심판들의 손목에 있는 팔찌 같은 게 진동하죠. 때문에 다이렉트 캐치와 원 바운드 캐치는 그 순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지션즈 벤치의 의도는 뭐라고 예상하십니까?]

[무사 1, 2루,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절호의 찬스가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렸잖아요? 다른 누구보다 선수들이 가장 허무할 텐데, 추스를 시간을 벌어주려고 하는 거겠죠. 이런 게 꽤 오래 가거든요?]

“후우... 잔소리는 됐고, 오늘 야구는 진짜 너 혼자 다 한다. 덕분에 한시름 놨어.”

“이런 날도 있는 거고, 저런 날도 있는 거죠.”

“이제 수비에서도 잔소리 못 하겠어? 너무 빠르게 느는 거 아니냐?”

“너무 잘된 일이죠. 경기 좀 나가니까 자연스럽게 느네요.”

초상집 분위기의 매지션즈와 달리 제츠 팀 분위기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은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오늘 경기 최대의 승부처였다.

그 승부처가 트리플 플레이로 마무리되어 버렸으니...

제츠 입장에선 이보다 더 깔끔하기도 불가능한 마무리였다.

반대로 매지션즈는 기세가 땅바닥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땅을 파고 지하까지 파고든 상황.

[항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김서준 감독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입니다.]

[감독으로서 이런 결과가 나오면 허탈하죠. 누굴 탓할 수도 없으니 더더욱 허탈할 테고.]

결국, 판정은 당연히 바뀌지 않았다.

트리플 플레이로 7회말이 마무리되면서 2-0 스코어도 그대로 이어졌고.

아직 경기는 8회와 9회, 2이닝이 남아 있었지만, 아마 이 순간 모두의 생각은 똑같았을 것이었다.

이번 트리플 플레이를 계기로 승부가 갈렸다고...

***

[유영도의 한판승! 유형근 상대로 연타석 홈런 터뜨리며 KO승 거두고 팀에 결정적인 승리 안겼다!]

[‘절대영도’의 원맨쇼. 타석에선 연타석 홈런으로 팀 득점, 타점 100% 관여, 수비에선 결정적인 트리플 플레이로 추격 의지 잠재워...]

[홀로 제츠를 이끄는 유영도의 절대적인 포스. 과연 제츠의 부활은 언제쯤?]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추격 의지가 꺾인 매지션즈는 8회와 9회 공격을 무기력하게 마무리했고, 제츠 역시 영도가 타석에 들어서지 않는 이닝에선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말 그대로 영도로 시작해 영도로 끝난 경기.

정규리그 우승을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맞대결에서 영도는 유영도라는 선수가 혼자서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가를 증명했다.

2040시즌 후반기의 KBO, 모든 곳에 유영도가 있었다.

< 원맨 캐리 > 끝

< 조력자들 >

‘비록 대부분이 도우를 보러 온 스카우트들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안 보일 리는 없어.’

제츠와 매지션즈의 시리즈 2차전, 선발투수는 양 팀의 2선발 제이드 벤슨과 에디 렉스였다.

제이드 벤슨은 유형근 때문에 2선발로 밀렸을 뿐, 다른 모든 팀의 에이스들과 비교해도 밀릴 게 없는 에이스급 외국인 투수였고, 에디 렉스는 훌륭한 2선발 정도.

객관적인 격차는 분명 있었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평가도 비슷했다.

하지만 단 하나, 메이저리그에 대한 갈망과 욕심만큼은 에디 렉스 쪽이 더 강렬했다.

‘제츠와 한국에 만족하고 좋은 기억만 남았지만... 그래도 난 메이저리그에 간다.’

아마 제이드 벤슨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에디 렉스 역시 에이전트로부터 구장에 모인 스카우트들의 정보를 건네받았다.

그 순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뛰고 있었다.

선수라면 종목과 관계없이 모두 똑같겠지만, 투수에게 마인드 컨트롤은 굉장히 중요했다.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각오가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더없이 훌륭한 마인트 컨트롤이겠지만...

[3구 타격! 잘 맞은 타구!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넘어갑니다! 나정준의 투런 홈런! 나정준이 시즌 27호 홈런을 쓰리런 홈런으로 장식합니다!]

[안 그래도 오늘 에디 렉스 선수의 제구가 전체적으로 높고 흩날리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유영도 선수의 활약이 지나치게 대단해서 전체적으로 다른 야수들은 가려진 느낌이 있지만, 나정준 선수가 이런 걸 놓칠 선수가 아니죠. 이번 시즌 활약도 유영도 선수를 제외하면 나정준 선수보다 나은 선수를 찾아보기 쉽지 않아요.]

[유영도 선수의 원맨쇼에 어제 경기를 내줬던 매지션즈가 나정준 선수를 앞세워 반격을 시도합니다. 4회 2아웃 이후 터진 쓰리런 홈런으로 점수는 4-0까지 벌어집니다.]

[유형근 선수에게 가려져 있지만, 제이드 벤슨의 이번 시즌 성적은 천하의 타일러 로즈와 비교해도 밀릴 게 없어요. 4점이면 벤슨에겐 충분한 점수죠.]

에디 렉스는 더없이 성실하고 얌전한 스타일의 선수였다.

문제는 가끔이긴 하지만, 얌전하다 못해 심약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하필이면 리그 우승의 분수령이 될지도 모를 오늘, 중요한 경기에서 그런 모습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하여튼... 타일러랑 에디는 뭐가 잘못된 건가, 싶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뱉는 손성호.

손성호의 말처럼 겉으로만 봐서는 탄탄한 근육질의 몸, 덥수룩한 수염, 날카로운 인상의 흑인 에디 렉스가 비교적 얇은 프레임의 꽃미남 스타일 백인 타일러 로즈보다 훨씬 강인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타일러 로즈는 ‘브로!’를 입에 달고 사는 날라리 스타일의 멘탈갑이었고, 에디 렉스는 야구밖에 모르는 얌전한 선수였다.

역시 사람의 겉모습과 성격은 크게 관련이 없다는 게 이렇게 또 증명되었다.

“4회 말에 4점이라... 괜찮을까?”

“괜찮아야죠. 이제 슬슬 페이스 찾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오늘 보니까 좀 괜찮아진 것 같지 않아? 점점 애들 타구 질이 올라오는 것 같은데?”

“하긴... 오늘은 좋은 타구도 꽤 나오네요.”

슬슬 8월 중순으로 향하는 타이밍도, 영도가 유형근을 상대로 원맨쇼를 펼치며 승리를 가져온 어제 경기의 여파도...

제츠가 좋아하고 기세에 올라탈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이었고, 실제로도 한창 부진할 때와 다르게 좋은 타구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좀 쉬어도 되겠습니까?”

“... 전에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안 하더니... 하, 하하! 이제 너도 제츠가 꽤 편해졌나 보다?”

물론, 제츠 선수들이 전부 다 부진에서 헤어나온다 해도, 그에 그치지 않고 제츠답게 기세에 올라탄다 해도...

제츠의 해결사는 영도였고, 영도가 활약해야 마무리가 될 수 있었다.

적어도 이번 시즌, 영도는 쉴 생각 따윈 하지 말고 신나게 일해야 할 운명이었다.

[153km의 강속구! 삼진으로 조규영 선수를 돌려보내면서 투 아웃을 잡아냅니다!]

[역시 안정감이 있죠? 확실히 매지션즈는 유형근과 제이드 벤슨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에요.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급 투수가 둘이나 있고, 리카르도 카스티요도 어지간한 팀의 2선발들보다 낫거든요?]

[그래서 매지션즈 팬들이 정규리그보다도 포스트시즌을 기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도 4인 로테이션을 돌리는 포스트시즌에서 세 명의 에이스급 투수라니... 거의 반칙입니다, 이건.]

좋은 타구가 나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8, 9번 타순은 예외였다.

8, 9번 타순의 주인공은 이재준과 조규영.

애초에 컨디션이 올라온다고 해도 공격력에 크게 도움되지 않는 선수들이긴 했다.

[5회 초 2아웃, 타석에는 흔들리는 제츠에서 레전드로서,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사력을 다해 팀을 지탱 중인 손성호 선수가 들어섭니다.]

[그렇죠. 아무리 유영도 선수가 거의 미쳐있다고는 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거든요? 손성호 선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미 1위 자리는 넘어갔을 거예요. 뒤에 나올 어경준 선수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손성호야.’

손성호가 가진 책임감의 무게에 공감할 수 있는 선수는 현역 중에서가 아니라 역대 모든 선수를 통틀어서 생각해도 많지 않을 것이었다.

그만큼 손성호가 제츠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 또, 제츠에게 가진 애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항상 선수생활 마지막 목표는 제츠의 우승이라고, 듣는 사람의 귀가 아플 때까지 말하고 다니는 선수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이런 기회를 놓치지 싫을 겁니다.]

[선발진도 탄탄하게 구성되었고, 무엇보다 유영도 선수라는 걸출한 선수가 합류한 시즌이잖아요. 지금 손성호 선수의 심정은... 아마 그 누구도 예상조차 하기 힘들 거예요.]

손성호가 제츠에 가진 애정은 FA 계약 당시 일화가 너무 유명해져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등장하자마자 “어디에 사인하면 됩니까?”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바로 계약서에 사인, 그리고 사진 촬영까지 순식간에 끝난 전설의 FA 계약.

이후 남긴 “내가 제츠 팬을 떠날 유일한 방법이 있다. 내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으면 된다”는 말은 손성호의 다소 오그라드는 비장함과 함께 제츠에 대한 애정을 설명하는 명언이 되었다.

손성호가 제츠의 우승에 목매는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만,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다시 한 번 파울! 여름 이후 평균 투구 수가 많이 늘었습니다. 손성호 선수의 커리어 평균 상대 투구 수는 3.3개 정도로 리그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선수 중 한 명인데, 이번 시즌 7월 이후로만 통계를 내면 무려 4.1개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늘고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만큼 출루가 절박하다는 거겠죠. 7월 이전과 이후의 제츠 팀 출루율이 거의 2푼 가까이 떨어지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영도의 맹활약도 그렇지만, 손성호의 절박함 역시 조금씩 제츠 선수들을 깨우는 요소 중 하나였다.

이번 시즌에도 0.312의 타율과 0.811의 OPS로 노익장을 과시 중인 손성호.

손성호는 누가 뭐라 해도 제츠, 그 자체였고, 여전히 팀의 핵심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바깥쪽으로 툭 밀어친 타구, 3루수도, 유격수도... 잡지 못하면서 외야로 넘어갑니다! 손성호의 좌전 안타! 2아웃 상황에서 희망을 이어가는 손성호.]

[손성호 선수는 참... 나이를 안 먹어요. 36세가 아주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타율 3할, OPS 0.800이 쉬운 건 아니거든요?]

[유영도 선수가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고, 실제로도 엄청난 활약을 해주고 있지만, 손성호 선수의 역할도 조용하지만, 중요하죠.]

오늘도 부진한 후배들 사이에서 고군분투 중인 손성호가 또 한 번 2아웃 상황에서 안타를 쳐내며 출루했다.

다만, 부진한 선수들이 많아 상위타순에 컨디션 좋은 선수들을 몰아놓았기 때문에 이대로 이번 이닝이 끝나면 영도가 또 한 번 주자 없는 상황에 등장하는 아쉬운 시나리오가 나올 수도 있었다.

[또 한 명의 조용한 조력자, 어경준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지난 시즌, 혹은 지지난 시즌부터 호시탐탐 주전 자리를 노리던 대형 유망주죠? 이번 여름을 기점으로 박태원 선수를 밀어내고 슬슬 주전 자리를 차지하는 느낌이에요.]

[서울 제츠, 하면 또 외야수 명가로 유명한 팀 아니겠습니까? 손성호, 한영훈 선수가 슬슬 1루와 지명타자로 전향하는 타이밍에 또 한 명의 유망주가 등장했습니다.]

박태원의 부진을 틈타 주전 자리를 차지하면서 김원상을 우익수로, 박윤형을 좌익수로 밀어내며 연쇄 이동을 일으킨 24세의 유망주.

한영훈을 비롯한 선배들이 ‘여름 제츠’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동안 안정적인 성적을 유지하며 어느새 2번 타순까지 치고 올라온 무서운 신예.

손성호에 이어 등장한 선수는 윤한태와 함께 이번 시즌 서울 제츠의 히트 상품으로 등장한 어경준이었다.

‘아직 벤슨과 비교하면 내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24세의 젊은 선수지만, 어경준은 꽤 냉정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스타일. 괜히 영도가 챙겨주는 게 아니었다.

이런 선수들에겐 조금 역부족이라 느껴질 때도 최선을 다해 돌파구를 찾아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 기습 번트! 2아웃에서 기습 번트를 시도하는 어경준! 매지션즈 내야진이 완전히 허를 찔렸습니다!]

[와... 정말 배짱이 두둑하네요, 이 선수! 이 선수가 정말 스물네 살이 맞나요?]

[김원상 선수와 비교해도 오히려 더 빠르다는 이야기까지 들리는 선수입니다. KBO 전체를 봐도 최고를 다투는 준족의 선수거든요? 아무리 2아웃이지만, 이 정도는 대비해야 했던 것 아닙니까?]

[대비했다면 좋았겠죠. 좋았겠지만... 글쎄요. 최근 어경준 선수의 타격 페이스도 나쁘지 않았고, 선수들도 사람인지라 그 모든 걸 대비할 순 없겠죠. 지금은 어경준 선수를 칭찬하는 게 맞을 것 같네요.]

과감한 기습 번트를 성공시키며 2사 1, 2루의 찬스를 이어간 어경준.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하지만, 기습 번트를 거의 시도하지 않는 성향이다 보니 중요한 순간에 말 그대로 기습적으로 써먹을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었고, 이번에도 성공적이었다.

[손성호와 어경준, 역시 이 두 선수는 지금의 어려운 상황에서 유영도 선수가 믿고 기대할 수 있는 선수들입니다. 2아웃 이후 등장했음에도 연속 안타로 기회를 넘겨줬습니다.]

[이야... 이러면 벤슨과 매지션즈도 긴장할 수밖에 없죠. 1, 2루에서 유영도 선수가 등장한다? 네 경기 연속 멀티 홈런, 다섯 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 중인 유영도 선수가? 이러면 또 몰라요. 4점 차 리드? 생각도 안 날 걸요?]

저니맨으로 이 팀, 저 팀 돌아다니면서도 통산 108승을 기록한 ‘풍운아’, 정윤성.

이젠 해설위원이 된 그는 과거 비슷한 경험이라도 떠올린 것인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역시 간절한 뭔가가 있으면 실력 이상이 나오는 것 같단 말이지. 사람이란 참 신기해.’

손성호와 어경준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힘들지 않았을까.

지금도 심각한 견제를 당하고 있지만, 둘이 먼저 나와서 베이스를 채워주지 못했다면 아예 타격 기회 자체가 확 줄어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럼 나도 간절한가?’

간절한 선수들이 잘하는데 그렇다면 누구보다 잘하는 지금의 자신은 간절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성적에서 보이듯 수준이 달라서 잘하는 건가.

아마 둘 다 정답일 것이었다.

이제 필요 이상으로 겸손해 자기비하까지 넘어가지 않기로 했으니 기량도 한 수, 아니, 두세 수는 위라는 걸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십 년 묵은 갈증이야. 한 시즌 잠깐 잘했다고 풀릴 게 아니라고. 이제 메이저리그도 가야 하고.’

[초구 공략! 와우! 유영도 선수, 대체 이 선수는 어떻게 된 선수입니까! 대체 어떻게 이뤄진 선수이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엄청난 페이스를 오랫동안 이어가는 겁니까!!]

[50호 홈런이죠? 오늘이 이번 시즌 110번째 경기 아닌가요? 110경기 50홈런이라니... 이제 감탄하다 못해 KBO의 투수들이 불쌍해지려고 하네요.]

전생에서의 15년, 돌아온 이후의 9년.

남들에게 말할 수 없어 속으로 홀로 삭여온 갈증과 갈망을 이제 막 해소하기 시작한 영도는 여전히 그 누구보다 간절하고 목마른 선수였다.

간절한 사람이 야구든 뭐든 잘할 수밖에 없다면...

영도의 이번 시즌 활약은 예정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 몇 시즌이 왜 그 모양이었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오류 때문에 이론으로 인정받을 순 없겠지만.

< 조력자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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