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영도의 그 날 >
선수가 시즌을 치르다 보면 그런 날이 몇 번씩은 꼭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내가 뭘 해도 다 될 것 같고, 뭘 해도 다 통할 것 같은 그런 날.
[한껏 끌어당긴 빠른 타구! 3-유간!]
‘이 좋은 타구가...’
영도에겐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유형근으로부터 홈런을 빼앗아낼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30-30에 도전하는 수원 매지션즈의 고든 레녹스.
타일러 로즈의 체인지업을 제대로 잡아당긴 레녹스의 타구가 3루 방향으로 무섭게 날아왔지만...
[엄청난 반응속도로 글러브를 가져다 댄 3루수 유영도!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잡아내고 1루 송구! 아웃입니다! 유영도의 멋진 수비! 타석에 이어 수비에서도 유영도가 제츠를 구해냅니다!]
[유형근 선수가 굉장한 호투를 펼쳐주고 있긴 하지만, 타일러 로즈도 언제나처럼 조용히 매지션즈 타선을 압도하고 있거든요? 나정준의 2루타가 나오면서 처음으로 득점 기회를 잡았는데, 이게 이렇게 무산되네요.]
“나이스, 브로!! 아주 좋아! 대체 수비는 언제 이렇게 는 거야? 공격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경험이 문제라고 매번 말하고 다녔는데 경험이 쌓이고도 그대로면 내가 민망하니까.”
유형근은 6회까지 2개의 안타만을 허용하며 삼진 10개, 무사사구로 1실점.
타일러 로즈는 6회까지 피안타 4개, 삼진 7개, 무사사구로 무실점.
두 선수 모두 엄청난 호투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유형근의 퍼포먼스가 실제 스탯도, 임팩트도 조금 더 나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제츠에겐 영도의 홈런으로 뽑아낸 1점이 있고, 매지션즈에겐 없다는 것.
6회 말이 끝나 경기 후반에 접어든 지금, 한 점 차 제츠의 리드가 유지되고 있었다.
[점점 여름이 끝나가지 않습니까? 제츠도 유영도 선수의 맹활약을 앞세워 생각보다 여름을 잘 버텨내고 있기 때문에 매지션즈도 마음이 편한 상황은 아닙니다.]
[보통 제츠는 8월 중순, 말까지 심하게 흔들리다가 9월부터 다시 살아나서 시즌 종료까지 이어나가는 흐름을 보여주죠. 근데 지금 벌써 8월 중순을 향하고 있거든요?]
[승차는 반게임, 남은 경기는 오늘 경기 포함 36경기. 당장의 부진이 불안한 제츠와 앞으로의 제츠가 불안한 매지션즈 모두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하고 특히 맞대결은 무조건 승리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만큼 에이스 등판 경기는 절대 놓칠 수 없죠. 제츠가 앞서고는 있지만 크게 의미는 없어요. 이대로 끝날 경기가 아니거든요?]
점수는커녕 안타도 거의 나오지 않는 극한의 투수전.
하지만 에이스들의 자존심 대결과 절대 패배해선 안 되고 서로에겐 더더욱 패배해선 안 되는 양 팀의 상황이 극한의 긴장감을 발생시켰다.
그 결과, 투수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라이트 팬들마저도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 한 번 타석에 들어서는 유영도 선수. 두 번째 타석에서 솔로 홈런을 터뜨리면서 오늘 경기 유일한 득점을 만들어냈습니다.]
[첫 타석에선 유형근 선수가 웃었고, 두 번째 타석에선 유영도 선수가 웃었죠.]
[타자가 홈런 한 방을 쳤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하하하, 그렇긴 하죠. 그렇긴 한데... 맞대결의 승패보단 팀의 승패가 중요한 상황 아니겠어요?]
어쨌거나 서로의 자존심 대결에선 어느 정도 승패가 갈렸다고 봐야 했다.
경기 분위기로 봤을 때 오늘 영도에게 주어진 기회는 4타석 정도일 텐데 4타수 1안타 1홈런이면 보통 타자의 판정승을 선언하는 성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개인의 자존심 싸움 만큼이나 팀의 우승 경쟁도 중요했다.
그리고 매지션즈 타자들은 그래도 타일러 로즈를 상대로 연속 안타를 터뜨리는 모습이 상상은 되지만, 제츠 타자들은 아니었다.
제츠가 득점하기 위해선 연속타보다는 장타를 노려야 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영도에겐 지금 안타도 실패였다.
최소 2루타는 때려줘야 산발적으로는 나올지도 모를 후속타자들의 추가타 때 홈을 노려볼 수 있었다.
‘아까는 내가 너무 나답지 않았어. 영도 선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유형근은 이전 승부에서의 패배 원인을 평소 같지 않았던 준비과정에서 찾았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잡지만, 세부적인 부분은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마운드에서 결정하는 게 원래 스타일인데, 아까는 결정구로 종슬라이더를 정해놓고 빌드업까지 세밀하게 이어간 끝에 홈런을 맞은 것.
소는 이미 잃었지만, 그렇다고 외양간을 그냥 둘 순 없었다.
[슬라이더가 바깥쪽으로 절묘하게 꽂히면서 이번에도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고 시작합니다.]
[유형근 선수의 슬라이더는 같은 손, 다른 손 타자를 가리지 않아요. 이 정도는 해줘야 슬라이더 장인이라고 불리는 거죠.]
‘자존심은 꽤 강해 보이던데 종슬라이더를 어떻게 하려나.’
나는 틀리지 않았다면서 이번에도 한두 개의 종슬라이더를 섞을지, 아니면 자신 있는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에 체인지업을 더해 정석으로 덤벼올지.
비록 첫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냈고, 이전에 만났을 때도 홈런을 뽑아내며 판정승을 거뒀다지만.
여전히 유형근은 꽤 까다로운 상대였다.
‘더 이상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지 않는 것뿐이지.’
이번 타석에선 슬라이더와 포심 패스트볼에 걸어볼까.
유형근의 자존심이라면 다시 한 번 종슬라이더를 던질 수도 있을 테고 반대 손 타자를 상대할 때 효과적인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체인지업도 신경 써야 하겠지만...
어차피 모든 걸 완벽하게 대비할 순 없었다.
대비하지 못한 공이 들어오면 그건 그때 가서 눈으로 보고 반응하는 수밖에.
‘이번엔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로 붙어준다.’
잔재주 없이 정면에서.
포심과 슬라이더는 알아도 못 때린다고 자신하기에.
유형근은 주 무기를 적극 활용해 정면승부를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본인은 잔재주 없이 정면에서 붙는 게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고 가장 위력적이라 판단해 냉정하게 내린 결론이라 생각했지만...
코너에 몰리면 자신 있는 무기에 의존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과 다르다고 할 게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모든 건 결과가 말해줄 것이었다.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만약 유영도 선수에게 다시 한 번 큰 걸 허용한다면 매지션즈도 어려워집니다.]
[한 점은 괜찮아요. 어쩌면 두 점까지도 괜찮을 순 있지만... 매지션즈도 공격력이 아주 대단한 팀은 아니거든요? 나정준 선수가 있긴 하지만, 누가 뭐래도 매지션즈의 장점은 투수진이지 타선이 아니에요.]
짜임새도 있고, 득점력도 훌륭하지만, 매지션즈의 타선은 꾸준히 점수를 뽑아내는 스타일이지, 순간적인 폭발력으로 빅 이닝을 만들어내는 타선은 아니었다.
타일러 로즈의 컨디션을 봤을 때 적어도 7회까지는 던져줄 것으로 보이기에 대량 득점은 어려워 보이는 상황.
지금 홈런을 맞아도 2점 차에 불과하지만, 타일러 로즈와 제츠의 필승조를 상대로 2점도 그리 쉬워 보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유형근 등판 경기에서 이런 식으로 끌려가는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았기에 심리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고.
‘너도 역시 인간은 인간인가 보다.’
그걸 유형근도 느끼고 있다는 게 구종 선택에서 드러났다.
아무리 좋은 팀에서 뛰어도, 강한 팀에서 뛰어도 에이스의 부담감과 책임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형근이 전형적인 대처를 선택한 배경에는 아마 그런 부분들이 있는 게 아닐까.
영도는 3구 연속으로 들어온 바깥쪽 패스트볼에 배트를 휘두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또 한 번의 호쾌한 스윙! 이거 또 장타가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중견수 방향! 하지만 이미 고든 레녹스의 발은 멈춰버렸습니다!! 일루션 스타디움에서 가장 먼 중앙 펜스를 훌쩍 넘겨버린 솔로 홈런! 유영도 선수, 49호 홈런을 또 다시 멀티 홈런으로 기록합니다!]
[벌써 4경기 연속 멀티 홈런이네요... KBO 신기록이고, 35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벌써 50홈런까지 단 한 개의 홈런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수이긴 하네. 이럴 때 보면.’
모르긴 몰라도 에이스로 자리 잡은 이후 지금과 같은 경험은 처음일 것이었다.
어떤 공을 던져도 얻어맞을 것 같고, 어떤 상황에서 만나도 압도당하는 그런 느낌.
자신감이 넘치던 천재형 투수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무력감에 당황한 게 아닐까?
‘뭐, 내가 본인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부분이지만.’
선수라면 나중에 아무리 대단한 레전드가 되는 선수여도 그 자리까지 가는 동안 수도 없는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좌절들을 이겨낸다면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레전드가 되는 거고, 이겨내지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무너지는 게 프로 스포츠의 냉정한 얼굴.
‘그래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2년 뒤 메이저리그에서 보자. 나 때문에 흔들리다가 메이저리그 못 가면 아무리 나라도 신경이 쓰이니까.’
전생의 유형근은 2년 뒤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 매 시즌 두 자릿수 승수를 거둬주는 견실한 3선발로 활약했다.
FA 계약도 한 번 체결하는 등 꽤 오랜 기간 활약했으니 메이저리그 커리어도 훌륭한 편이었고.
그 정도로 대단한 선수니까 어쩌면 이 정도 좌절은 성장하기 딱 좋을 정도의 자그마한 시련일 수도.
내 덕에 전생에서보다 더 좋은 선수가 될 지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괴물이지?”
“네 경기 연속 멀티 홈런이 대체 뭐야!? 이게 사람이야?”
“야, 너 솔직히 말해라. 유형근이랑 뭐 있냐? 그렇지 않고서야 천하의 유형근을 이렇게 두드릴 수 있는 거냐고!”
경기 내내 유형근에게 농락당하던 다른 선수들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영도의 온몸을 두들겼다.
답답함에 몸서리치던 동료들의 울분을 한 번에 씻어주는 한 방이었다.
[49호 홈런으로 어느새 50홈런 고지를, 56홈런 고지를, 60홈런 고지를 시야에 둔 유영도 선수! 여러분, 놀랄 시간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놀랄 시간에 유영도 선수는 또 다시 홈런을 추가할 테니까 말이죠!]
[정말 어마어마한 몰아치기 능력이네요... 아무리 메이저리그에서 왔다고 해도 그렇지, 이 정도로 압도적일 수 있을까요?]
[이건 메이저리그 출신이라고 해서 나올 수 있는 성적이 아닙니다! 유영도 선수이기 때문에! 유영도 선수가 대단한 선수이기 때문에 가능한 성적입니다!]
2040시즌의 KBO는 곧 유영도였다.
이성연이 56홈런 신기록을 세울 때처럼,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가 홈런왕 경쟁을 벌일 때처럼.
그리고 배리 본즈가 73홈런을 기록했을 때처럼...
한국 야구계의 모든 관심은 영도에게 향해 있었다.
***
[4경기 연속 멀티 홈런!! 후반기 시작과 동시에 불을 뿜기 시작한 유영도의 불꽃은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까]
[50홈런 고지가 코앞! 홈런 신기록 경신에 회의적인 시선 보냈던 전문가들도 입을 다물어...]
[‘여름 제츠’가 이 정도까지!? ‘여름 제츠’의 여름 승률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고승률... 단 한 선수를 영입했을 뿐인데...]
- 야!! 내일 티켓 가지고 있는 놈 있어!? 티켓은 있는데 못 가는 사람 있으면 제발 쪽지 좀 보내줘!!
- 13년 만의 50홈런 타자가 나오는 경기인데 누가 팔겠냐? 휴가를 내서라도 가야지...
- 마지막 50홈런 타자가 벌써 13년 전이냐? 로봇 판정 도입되고 스트라이크 존 커지면서 홈런이 많이 줄긴 했구나..
-- 홈런이 줄었다고 하는 거 보니 아재네. 플라이볼 혁명 때도 맥주 마시면서 야구 보던 아재...
- 제발, 제발 다음 시즌엔 메이저리그로 꺼져주세요... 어떻게 유형근을 이 따위로 두들겨? 유형근이 저렇게 구겨지는 거 처음 본다, 진짜로...
- 60홈런은커녕 56홈런도 어렵다고 지껄이던 ㅈ문가들 다 어디 갔냐? 60홈런은커녕 70홈런까지 치겠구만...
- 그래서 경기는 지금 어떻게 됐는데? 경기도 제츠가 이기고 있는 거?
-- ㅇㅇ. 유영도 멀티 홈런 + 타일러 로즈 무실점 호투로 2-0.
--- 유형근까지 내보냈는데 매지션즈도 타격이 좀 있겠네. 제츠도 1, 2선발은 여름에도 잘 버텨주는 중 아닌가?
< 유영도의 그 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