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선택, 다른 결과 (유료) >
[타일러 로즈는 항상 볼 때마다 안정감이 참 대단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유형근이나 카디스 맥처럼 리그를 지배한다는 느낌은 조금 약할 수도 있지만, 시즌 내내 꾸준히 잘 던져주는 느낌입니다.]
[야구라는 스포츠는 기록의 스포츠잖아요? 기록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을 보기 위해 또 다른 기록을 만들면서 이젠 거의 대부분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어요.]
[아마 타일러 로즈의 대단함을 말씀하시려고 기록을 언급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예. 바로 그거예요. 타일러 로즈가 압도적이지 않다, 지배적인 느낌이 부족하다고 많은 사람이 말하지만, 시즌이 끝났을 때 기록을 보면 이 선수가 리그를 지배하지 못했다? 압도적이지 않았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면 정말 야구 모르는 사람이죠.]
대구 레이더스와의 3연전에서 에디 렉스부터 류종인, 윤한태를 내세웠던 제츠는 월요일을 거치며 4일을 쉰 타일러 로즈를 1차전 선발로 내세웠다.
매지션즈 역시 땜빵 선발 활용으로 로테이션을 조정, 유형근을 내세워 맞불을 놓았고.
[1위 자리를 두고 반게임 차로 경쟁하는 두 팀답게 1차전부터 치열한 투수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양 팀 모두 로테이션까지 조정해가며 에이스를 내세운 보람을 느낄 것 같습니다.]
[경기 내용은 그렇겠지만, 에이스를 내세운 만큼 두 팀 모두 승리하지 못하면 보람 같은 건 느낄 정신도 없을 거예요. 그만큼 중요한 경기거든요?]
언제나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타일러 로즈.
여기서 안정적인 모습이라는 건 선발투수로서 안정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에이스로서 안정적이라는 뜻이었다.
시즌 내내 선발 등판 경기가 30경기 정도 된다면 그중 퀄리티 스타트에 실패하는 경기는 3, 4경기 정도.
경쟁자들에 비해 최고점은 낮지만, 최저점이 훨씬 높아 시즌 전체로 보면 기록은 훨씬 좋은 투수.
등판만 했다 하면 팀의 계산과 크게 다르지 않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에이스가 바로 타일러 로즈였다.
[오늘 경기 최고 구속 157km! 본인의 통산 최고 구속과 똑같은 구속을 오늘 몇 번이나 찍어내는 유형근! 손성호를 상대로 또 한 번 삼진을 잡아냅니다!]
[제츠는 전통적으로 좌타 라인이 강한 팀이라 좌투수들한테 약했거든요? 그런데 다른 투수도 아니고 유형근이니...]
타일러 로즈는 이만큼 대단한 투수였지만...
유형근은 타일러 로즈의 경쟁자 집단에 속하지 않은 선수였다.
적어도 반수 이상은 높은 급의 투수였고, 최저점이나 퀄리티 스타트 개수에서 타일러 로즈보다 조금 밀릴 수는 있지만, 평균 기록에선 차이가 꽤 있었다.
[뚝 떨어지는 볼로 다시 한 번 삼진! 어경준까지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최근의 활약을 바탕으로 2번 타순까지 올라온 어경준 선수지만, 유형근 선수에겐 역부족이었습니다.]
[신인의 패기도 안 통하네요. 하긴, 유형근 선수도 아직 패기가 남아있을 나이죠. 어경준 선수보다 고작 1년 선배거든요?]
[지난 시즌 유형근 선수의 활약을 설명할 때 꼭 나왔던 이야기 중 하나가 ‘신인의 패기’라는 단어였죠?]
[그런 걸 생각하면 유형근 선수도 참 대단해요. 스물다섯인데 벌써 패기라는 단어보다 품격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선수가 된 거잖아요?]
워낙 부진한 선수가 많다 보니, 또 믿을 만한 타자 중 좌타자의 비율이 매우 높다 보니 제츠가 좌완 투수들에게 고전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도 유형근 정도 급의 좌완 투수라면 뭐...
[자, 3.2이닝 동안 퍼펙트 행진을 이어가는 유형근 선수의 앞에 오늘 경기 가장 큰 고비가, 아마도 리그 전체에서 가장 큰 고비일 선수가 등장합니다.]
[첫 타석에선 유형근 선수가 판정승을 거두긴 했지만, 유영도 선수도 분명 말도 안 되는 파워를 보여줬거든요? 유형근 선수도 가볍게 상대할 순 없을 거예요.]
[어유, 아무리 유형근 선수라 해도 유영도 선수를 상대로 긴장을 안 할 순 없을 겁니다. 아니, 그 어떤 투수라 해도 그럴 순 없습니다. 설사 유형근 급의 성적을 메이저리그에서 기록하는 선수라 할지라도 긴장을 안 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3.2이닝 동안 퍼펙트 행진을 이어가며 삼진만 7개.
종슬라이더를 레퍼토리에 추가한 유형근은 한층 더 강력한 모습으로 제츠 타선을 잠재웠다.
안 그래도 제츠 킬러로 유명했던 유형근인데... 이젠 킬러를 넘어 그냥 저승사자였다.
[3.2이닝 퍼펙트를 막아서기 위해 등장한 유영도 선수. 첫 번째 타석에선 아쉽게 범타로 물러났지만, 최근 유영도 선수의 페이스를 보면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역시 대단한 재능이긴 한데...’
다른 타자들이 유형근을 상대하는 동안 꼼꼼히 분석한 결과, 유형근은 유형근이었다.
좋은 의미이기도 했고, 더 좋은 의미이기도 했다.
좋은 의미는 영도도 인정했던 유형근의 재능은 진짜라는 것.
더 좋은 의미는 종슬라이더가 추가된 걸 제외하면 경기 전 생각했던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석하는 동안 공략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은 없었으니까.’
아마 종슬라이더는 많아도 한 번 정도 구사하지 않을까?
두 번 던져주면 고맙겠지만, 노련한 박진영이나 투수 조련 전문가 김서준 감독-장문호 코치가 그런 안일한 판단을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던지지 않으면 생각할 게 조금이라도 많아질 테니까.
[초구부터 페이스를 바짝 끌어올린 유형근 선수. 또 한 번 157km를 기록합니다.]
[오늘 경기에서 157km가 이제 다섯 번째 찍혔는데, 세 개가 유영도 선수를 상대하면서 던진 공이에요. 손성호 선수에게 하나를 던졌고요.]
‘초구부터 마음이 다 보이네.’
이전의 맞대결에서 판정패한 이후 경기가 끝나자마자 찾아와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던 유형근.
그 정도로 패배가 익숙하지 않고 항상 이기고 싶어하는 마음이 강한 선수이다 보니 초구에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영도를 잡아내겠단 마음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이 두 선수의 맞대결이 사실상 양 팀의 대리전 아니겠습니까? 이 대결에서 승리하는 선수의 소속팀이 승리할 확률도 같이 높아지는 겁니다.]
[제츠는 유영도 선수에게 많은 걸 기대고 있고, 매지션즈는 전체적인 팀 분위기가 좋지만, 그래도 유형근 선발 경기에선 유형근 선수의 지분이 압도적이죠.]
팀의 승패까지 어깨에 짊어지고 나선 두 선수.
둘의 승부가 이어지는 동안 매지션즈 홈팬들조차도 숨죽인 채 집중하고 있었다.
[5구 타격! 이번에는 3루 쪽 파울라인을 넘어갑니다. 벌써 세 개째 파울 타구가 나왔습니다.]
[두 선수 모두 이 승부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어 보이죠? 정확히는 투수인 유형근 선수 쪽에서 계속 스트라이크를 던지니까 유영도 선수의 배트는 계속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만화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날아오는 공 주변에 이상한 아우라 같은 게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공에 유형근의 기백과 각오가 가득 차있었다.
‘천재형 선수라더니...’
아마 그동안 유형근의 승부욕을 건드릴, 위기감을 느끼게 할 선수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게 아닐까.
그저 공을 던지는 것만으로 이 정도의 기백을 발산하는 선수가 타고난 것만으로 야구하는 천재형 선수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었다.
‘여기서 종슬라이더를 한 번... 아니지, 투수가 만화 같은 짓을 한다고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긴 한데.’
순간, 영도의 뇌리를 스치는 한 단어가 있었다.
그 단어는 바로 던지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던 수직 무브먼트의 슬라이더였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구종 하나가 뇌리를 스친 상황...
사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팬, 서울 제츠 팬을 제외한 타 팀 팬 중 상당수는 영도가 본능과 타고난 피지컬로 야구하는 선수일 거라 생각하곤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워낙 피지컬이 대단하고 스윙이 콤팩트해졌다고는 해도 돌아가는 배트 스피드나 임팩트 자세가 호쾌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도는 머리와 분석, 공부로 야구하는 선수였고, 그런 선수들 중에서도 특히 심한 부류에 속했다.
상대 투수마다 철저하게 분석해서 확률로 공략하는 스타일.
영도는 항상 무의식, 본능 같은 단어들은 자신과 인연이 없을 거라 상상해왔다.
‘...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어떻게 한 번...’
무의식적으로 구종 하나가 떠오른 순간, 습관적으로 그 판단을 부정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의 자신은 그런 단어들을 믿고 모험을 걸어봐도 될 듯했다.
무의식, 본능이란 단어와 피지컬이라는 단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짝꿍과도 같은 것.
이번 생의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축복받은 피지컬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무의식이라고는 하지만, 무의식도 결국 의식의 영향을 받긴 받을 거라고. 내가 분석하고 공부한 자료들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이 타이밍엔 종슬라이더라는 판단이 나온 게 아닐까.’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타석으로 들어선 영도는 다시 한 번 배트를 꽉 쥐었다.
안 그래도 수많은 변화를 시도한 시즌.
앞으로 선수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변화라면 그게 뭐든 시도해보기로 하지 않았던가.
‘와라, 종슬라이더.’
좋다. 이미 결정은 내렸고, 뒤는 쳐다보지 않는다.
어차피 이래저래 변해보기로 한 것, 못할 것 같아서 미뤄둔 것들도 나를 믿고 한 번 다시 해보자.
배트를 꽉 쥐고 마운드 위 유형근을 노려보는 영도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뭐지? 만화인가? 왜 영도 선배한테서 기? 차크라? 하여튼 뭐 그런 게 날아오는 것 같지?’
영도가 유형근의 공에서 유형근의 기백을 느낀 것처럼 유형근 역시 타격 자세를 취한 영도에게서 마찬가지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왠지 마운드 근처가 따뜻해진 것 같기도 하고...’
1-2 카운트로 유리한 볼 카운트를 잡아낸 상황.
오늘의 이 대결을 위해 일회용으로, 하지만 한 번은 필승 카드로 써먹기 위해 준비했던 결정구를 던지기 직전이었기에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아냐. 궤적 차이, 속도 차이로 헷갈리게 하려고 원래 슬라이더랑 체인지업도 섞었잖아. 사람이면 속을 수밖에 없어.’
유형근은 천재형 선수가 맞았다.
승부욕도 있고 노력도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타고난 재능과 본능을 좀 더 활용하는 스타일의 선수였다.
그리고 지금, 유형근은 평소와 달리 철저히 분석하고 공부해서 준비한 레퍼토리를 꺼내 들었고, 영도는 부상 당하기 전, 자신감이 넘쳤던 그 시절처럼 준비한 것들을 전부 내던진 채 본능에 몸을 맡겼다.
[낮게 떨어지는 공을 퍼 올립니다! 멀리 멀리 뻗어 나가는 타구! 좌익수 고윤수가 끝까지 따라갑니다! 하지만 이 타구는!!! 일루션 스타디움의 좌측 담장을 넘어 관중석에 떨어지는 솔로 홈런!! 유영도 선수, 수원 매지션즈의 에이스, 대한민국의 에이스, 유형근 선수를 상대로 시즌 48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이건 뭐 종슬라이더를 노리고 있었네요. 유형근 선수도 한 번을 안 보여주다가 결정적일 때 활용해서 허를 찌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수 싸움에서 완전히 패배했어요.]
< 다른 선택, 다른 결과 (유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