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대결, 다른 느낌 (무료) >
“요즘 컨디션 좋아 보인다? 이번 올스타 브레이크 때 야구 시작하고 거의 처음으로 대놓고 쉬었던 게 효과가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은 하는 중이지. 처음으로 쉬어봤는데 후반기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그러니까... 나는 물론이고 대체 몇 명이나 똑같은 말을 했는지 내가 20명까지 세다가 헷갈려서 그만뒀다니까? 그렇게 좀 쉬어라, 선수한테는 휴식도 훈련이다, 지금 몸 좋다고 나대다가 고생하는 선수 여럿 봤다... 고집부리지 말고 해보면 되잖아? 해보니까 얼마나 좋아?"
"... 좋은 이야기하려고 했던 거 아니었냐? 왜 또 잔소리로 가?"
"아, 맞다. 오늘은 좋은 이야기하려고 했었지?"
윤무열이 음주운전으로 날아가면서 후반기 체력소모가 심해질 것을 예상했던 영도는 쉬는 게 익숙하지 않음에도 후반기 개막 전까지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보충했다.
전생까지 더하면 거의 15년 만에 취한 제대로 된 휴식이었다.
“좋은 이야기, 좋은 이야기... 그러고 보면 형은 원래도 여름하고 시즌 후반에 강했잖아. 무식하게 체력만 좋아서 남들 다 지칠 때도 안 지치니까.”
“그래, 내 장점. 내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지.”
“근데 이번엔 푹 쉬기까지 했으니... 역시 운동선수한테, 아니, 사람한테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야 깨닫는 거지.”
“알고는 있었지. 불안해서 내가 그걸 실행하질 못했던 거고. 근데 이렇게 성적으로 체감이 되니까 그동안 내가 왜 안 쉬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은 든다.”
영도의 괴물 같은 체력은 메이저리그 시절에도 유명했다.
선수의 여름은 겨울을 말해준다고 할 만큼 본격적으로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는데, 영도 혼자 멀쩡하니 상대적으로 급이 올라갈 수밖에.
남들이 다 지쳐도 멀쩡한 체력 괴물.
덕분에 영도는 여름이 시작되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보통 시즌 후반기에 훨씬 강력한 선수였다.
“이제 후반기 시작이니까 앞으로 적어도 한 9월 말까지는 지금처럼 해줄 수 있지? 9월 말까지 페이스 유지하면 내가 형 연봉 1,500만 달러짜리 선수 만들어준다.”
“네가 하냐? 네가 하는 것도 아니면서 쪼잔하게... 그냥 대놓고 2,000만 달러 부르지, 왜.”
2013시즌을 앞두고 포스팅 비용 포함 6년 6,200만 달러를 받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류형준이 여전히 KBO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선수 중 가장 좋은 계약을 체결한 선수였다.
류형준을 포함해 KBO에서 직행한 선수들의 성적을 고려했을 때 연간 1,000만 달러 정도가 최대치라고 볼 수 있었다.
영도의 경우 류형준과 달리 메이저리그에서 총 5시즌, 서비스 타임으로도 3년을 채운 선수였기에 어느 정도 유리한 부분도 있었지만, 오히려 불리한 부분도 있었다.
다만...
“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1,500만 달러까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름 현실적으로 말한 거라고.”
“1,500만 달러라... 그게 가능하겠냐. 150만 달러도 아깝다고 지명할당으로 쫓겨난 처지였던 게 고작 1년 전인데.”
“형. 내가 다른 거 공부하라고 안 하잖아? 적어도 야구계에 대해서만큼은 좀 알고 살아라...”
“뭔데? 진짜로 1,500만 달러가 가능하다고? 1,000만 달러도 아니고?”
승도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2020년,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렸던 최악의 바이러스 대유행 이후 KBO의 인지도와 위상이 올라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1,500만 달러라니...
사실, 저 정도 성적을 기록하면 2020년 당시에도 1,000만 달러 이상은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생각보다 20년 동안 선수 몸값이 크게 오르진 않았다는 걸 감안해야 했다.
2020년 즈음에도 대체 불가능한 아주 극소수의 몇몇 선수들을 제외하면 FA 한파가 몰아치던 중이었고, 여기에 결정타를 먹인 게 바로 그 바이러스였던 것.
당시 모든 리그가 그대로 올스톱되면서 리그도, 구단도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고, 스폰서, 중계권 등 계약 규모까지 축소되면서 세계 스포츠계가 유례없는 한파를 보내야만 했다.
리그, 종목을 막론하고 선수 몸값 거품이 확 꺼졌다가 이제야 겨우 당시 시장규모를 넘어서는 타이밍이 되었다지만...
이미 메이저리그는 당시부터 시장 확장의 한계를 맞이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많았고, 실제로도 선수 몸값 등이 아주 많이 오르진 않은 상태였다.
“이미 KBO고 NPB고 메이저리그고 하는 수준을 넘은 거야. 내가 이 페이스만 유지하면 그렇게 해준다고 했지? 만약 아시아 홈런 신기록 세우잖아? 1,000만 달러는 기본일걸. 리그 60홈런은 50홈런이랑 완전히 달라. 알잖아.”
“뭐, 그렇기는 한데...”
“그리고 형이 누구야. 같은 세대 유망주 중 압도적인 1위로 누구나 다 인정해주던 특급 유망주 아냐.”
“뭐...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
“생각보다 성장을 못 했다, 앞으로도 못할 것 같다. 그러니까 지명할당. 근데 이번 시즌을 보고도 그렇게 생각할까? 조금 늦게 터졌구나, 드디어 잠재력이 터졌구나, 하고 생각하겠지. 그것도 다 몸값이야. 형은 KBO에서 직행하는 다른 선수들이랑 기댓값 자체가 다르다고.”
유망주 시절의 평가는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이후에도 선수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영도는 유망주 시절 평가가 선수생활에 도움이 되는 전형적인 케이스이면서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케이스였다.
유망주 시절엔 그냥 특급 유망주를 넘어 같은 세대 최고의 재능이라 불리던 선수였으니까.
“여기까지가 1,500만 달러. 그런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70홈런까지 간다?”
“70홈런까지 간다면?”
“그땐 뭐 그 옛날 오타니 쇼헤이처럼 구단들 한국으로 불러서 프레젠테이션 시키고 연평균 2,000만 달러 수준에서 장기계약하는 거지, 뭐.”
“70홈런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기나 긴 메이저리그의 역사에서 한 시즌 70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고작 두 명.
73홈런의 배리 본즈와 70홈런의 마크 맥과이어뿐이었다.
그리고 두 선수 모두 대표적인 약쟁이였고.
162경기를 치르는, 그리고 괴물들이 즐비한 데다가 그 괴물들이 스테로이드까지 신나게 꽂아댄 메이저리그가 이런데 다른 리그에선 꿈도 꿀 수 없는 기록이 바로 70홈런이었다.
그런 70홈런을 만약 기록하게 된다면?
그것도 유망주 시절부터 50홈런 포텐셜이라 평가받던 영도가 70홈런을 기록하게 된다면?
그 순간 영도는 지명할당으로 쫓겨났다가 겨우 돌아온 선수가 아닌...
드디어 포텐셜을 터뜨린 초특급 유망주가 되어, 그것도 이적료도, 트레이드 카드도 필요 없는 자유계약선수가 되어 스토브리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하루하루 다음 경기 생각하기도 바빠서 그런 건 신경도 못 썼네...”
“그래, 그래. 형한테 뭘 바라겠냐. 그리고 어차피 그런 건 나나 우리 회사에서 하는 거지. 형은 지금처럼 야구만 해. 성적만 잘 내면 나머진 우리 몫이니까.”
단순히 야구를 잘하고 싶었고, 좋은 성적을 내고 싶었고, 메이저리그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가 이렇게 훌륭할 것이라고는, 메이저리그를 뒤흔드는 수준까지 굴러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 알았다. 오랜만에 협상 테이블에서 우리 에이전시 사람들 목에 힘 좀 주게 해줘야지.”
“제발. 그동안 다들 많이 힘들었다? 알지?”
하지만... 이렇게 듣게 된 이상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70홈런은 하늘에 달린 일이겠지만, 60홈런은 인간의 힘으로, 영도 본인의 힘으로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영도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굉장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승부... 유형근과 유영도, 긴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대결이야말로 KBO가 세계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맞대결이죠.]
[6월 초에 한 번 붙었었는데, 당시엔 유영도 선수가 승리를 거뒀습니다. 유형근 선수가 경기 전 인터뷰에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엔 꼭 되갚아주고 싶다고.]
[이 두 선수가 대단한 게 6월 초 맞대결을 계기로 한 계단씩 성장했어요. 맞대결을 통해 서로 성장하는 모습... 이게 무슨 만화도 아닌데 실제로 대결 전후가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만큼 두 선수의 재능이 만화에나 나올 법한 수준이라는 뜻이죠.]
영도와의 대결을 계기로 조금 더 영리해지고 수직 무브먼트의 슬라이더를 레퍼토리에 추가해 이전보다 더 위력적인 투수로 거듭난 유형근.
유형근과의 맞대결을 통해 본인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서 자신의 성장을 자각, 정신적으로 한 계단 더 성장한 유영도.
안성흠과 카디스 맥이 변명의 여지 없이 패배한 지금, 영도를 상대할 만한 유일한 선발 에이스이기도 했다.
‘아... 살짝 빗맞았나.’
첫 맞대결 당시, 영도는 분명 유형근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니, 경계라는 말은 조금 얌전했다.
그때의 영도는 분명 어느 정도 유형근을 상대로 긴장하고 있었다.
자신감도 부족했고.
[3루 방향 빠른 타구! 한 번 더듬는 양용명! 하지만 다시 잡아서 1루! 아웃! 한 번 더듬긴 했습니다만, 침착하게 처리하는 양용명!]
[이번에는 완전히 빗맞았거든요? 유영도 선수의 파워가 대단하다는 게, 그리고 꼭 장타를 앞세우는 타자가 아니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파워는 갖춰야 한다는 게 이 장면에서 드러나죠. 타석에서 보여주는 파워의 수준이 다르다 보니까 완전히 빗맞은 타구인데도 타구 스피드가 만만치 않아요. 이러니까 수비 좋다는 양용명 3루수 쪽에서 실책이 나올 뻔 했던 거고요.]
[아시아 출신 야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고전하는 이유가 바로 타자들의 파워 차이로 인한 타구 스피드 아니겠습니까? 보통 이런 타구는 스피드가 빠를 수 없는데 유영도 선수의 타구는 다릅니다.]
[아무래도 유형근 선수의 종슬라이더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죠? 수 싸움에서 패배하고도 압도적인 파워로 나름 한 방을 보여줬습니다만, 어쨌든 정타는 아니었어요.]
‘뭐... 나쁘진 않네. 허를 찔린 것도 있고...’
하지만 지금의 영도는 달랐다.
유형근은 대단한 투수고, 대단한 재능을 가진 선수라는 것, 언젠가 메이저리그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나에 대한 확신,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더 대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이번엔 생각을 못 했어. 그래도 생각만 하고 있으면 못 칠 공은 아냐. 아직 완성된 공도 아니고.’
투수의 구종이 하나 더해지면 타자가 생각할 경우의 수는 다섯 개, 열 개씩 늘어났다.
그래서 투 피치 투수는 랜디 존슨급 투 피치가 아니면 선발로 살아남기 힘들고, 그 클레이튼 커쇼마저 커리어 초창기 이후 레퍼토리를 추가한 이후에야 리그를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그 내 평범한 타자들과 리그를 지배하는 타자는 또 상황이 달랐다.
아무리 대단한 투수여도 어지간하면 써드 피치, 못해도 포 피치는 리그 평균에 못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럴 경우 투수 쪽에서도 써드, 포 피치를 던지는 데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에 레퍼토리가 다소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투수와 타자의 수 싸움은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영도는 슬라이더를 제외한 유형근의 모든 구종을 공략할 자신이 있었다.
‘나만 몰랐지, 남들은 다 알고 있더라고. 내가 꽤 수준이 높다는 걸.’
자신의 기량에 자신이 있다는 것.
그저 생각이 달라진 것뿐이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도 ‘각성’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변화였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야구 역시 멘탈 싸움, 마음가짐으로 많은 게 달라지는 종목이었다.
그리고 영도의 변화는 마음가짐만이 아니었다.
부족했던 경험과 성공에 대한 이미지를 엄청난 속도로 채워낸 지금, 선수로서의 급 자체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었다.
‘다음 타석에선 또 다를 거다.’
자신의 위치, 능력을 자각하고 더 이상 한 번, 한 번의 실패에 흔들리지 않게 된 유영도.
영도는 조금씩 S급 선수에 어울리는 품격을 갖춰가고 있었다.
지금의 영도는 과거와 달리 한 타석의 실패를 그리 오래 담아두지 않았다.
시즌 내내 계속된 성공 경험 덕분에 이번 타석에선 실패했지만, 다음 타석에서 홈런을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냈으니까.
'메이저리그 4선발이 정말로 이 정도인 거라면 ... 난 대체 어디까지 와 있는 걸까.'
유형근과의 맞대결을 기대하던 많은 팬들에겐 미안하지만.
첫 타석 패배는 오히려 영도의 자신감을 키워주고 말았다.
< 같은 대결, 다른 느낌 (무료) > 끝